호사란 지청구를 들을 만했다. 잠자리에 예민하고 소리에 민감하기에 우리 부부는 애초에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를 피했으면 했다. 해서 출발 전에 일주일 정도 숙소를 미리 예약하면서도 둘만 자고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구비된 객실을 예약했다. 그리고 나중에 형편을 봐 사흘은 이렇게, 어쩌다 주 1~2회는 무니시팔 알베르게의 도미토리(기숙사형) 침소를 빌려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초반 두 차례 경험을 하고선 무니시팔 알베르게에서는 도저히 못 자겠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이 많아 시끄러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두 곳에서 그렇게 자봤는데 너무 주위 분들이 조용하고 조심해서 정말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해서 우리 부부는 나머지는 모두 둘만 자고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구비된 객실을 구했다. 순례길 내내 가장 적은 숙소 비용이 지불된 곳은 32유로, 가장 비싼 곳이 62유로였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가장 흡족했던 곳은 32유로짜리였다. 나중에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를 모두 소개하며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했던 이유, 가격, 유의점 등을 정리하겠다.
우리가 선택한 시기는 성수기가 막을 내리고 비수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11월 1일부터 문을 닫는 알베르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물론 문을 연 곳이 없지 않아 약간의 어려움을 겪으며 예약했지만 순례길을 가려면 10월 말에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10월 7일쯤 여정을 시작해 그달 말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게 일정을 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다 싶었다. 물론 대서양 기후 특성 상 여정을 충분히 이어갈 정도로 날씨는 무난했지만, 문을 닫는 알베르게들이 늘어나고 순례객들이 줄어들자 순례길에만 있는 짐 운반 시스템인 동키 서비스 수요가 줄어 비용이 치솟았다. 생장부터 3주 정도는 하루 7유로를 받다가 어느 순간 10유로로 오르더니 평원이 끝나고 산악 구간이 시작되자 20유로를 달라고 해 깎아 15유로에 합의했다. 그랬던 것이 사리아 이후 100km 구간(닷새)은 동키 값이 거짓말처럼 다시 8유로로 떨어지긴 했다. 우리 부부는 이 동키 서비스가 없었더라면 여정이 훨씬 힘들고 지겨웠을 것이란 점에 완전히 공감했다.
동키 서비스는 예약한 다음 숙소까지 짐을 옮겨주는 것이다. 우리가 꾸린 여장은 오스프리 배낭이었다. 첫날 생장에 도착한 열차에서 내려 순례길 사무소로 향하는 행렬 가운데 오스프리 배낭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 눈길을 붙들었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오스프리 배낭을 많이 메고 있었다. 난 남성용 캐스트럴 48, 아내는 여성용 시러스 34를 구입했다. 옷가지나 부피가 큰 짐을 내 배낭에 몰아 넣고 아내 배낭을 내가, 아내는 가벼운 룩색만 멨다. 20km라 해도 5~6시간 어깨에 메고 지니 상당히 힘들었다. 20대 때야 이보다 훨씬 무거운 배낭을 들고 설악산과 지리산을 탔지만 이제는 세월을 먹어 힘겨웠다. 순례길 본연의 취지와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대의 순례객이라면 약간의 출혈을 감수하며 지역경제를 돕기 위해서도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비수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약간의 아쉬움이 따르긴 했다. 밀밭길의 풍요로운 감성을 놓친 것이 그 중 하나요, 북적이며 흥에 넘치는 순례길이 아니라 약간은 적적한 느낌마저 있었지만 씁쓸하고 호젓한 순례길을 느릿느릿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리가 만난 '여행 부부'는 9개월째 해외여행 중이었는데 2019년 초봄에 찾았던 순례길을 다시 가을에 걷고 있었다. 그들의 말인즉, 붐비지 않아 너무 좋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포도알 따먹고 알밤 줍는 재미에 푹 빠진 듯했다.
장비 얘기를 조금 더할까 싶다. 우리가 챙겨간 장비 가운데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것은 보온담요였다. 유난히 추위를 심하게 타는 아내는 부득부득 보온담요를 챙겨가겠다고 했다. 부피가 상당해 난 적잖이 반대하며 갈등했는데 그것을 챙기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뻔했다. 전기를 꽂아 등과 허리, 엉덩이를 따듯하게 하며 잤는데 하루도 쓰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숙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난방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는 내내 난방을 넣어주는 곳, 적어도 우리가 난방 장치를 켰다 컸다 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은 아주 예외적으로만 있었다. 그 외는 아예 없거나 제한된 시간 켰다가 꺼주고 나중에 기온이 확 떨어진 새벽에 뒤늦게 넣어주곤 했다. 그러니 내년 가을에 순례길을 가려 한다면 준비 목록에 보온담요를 챙겼으면 한다.
우리는 침낭도 가져가 애용했다. 베드버그 공포 때문이었다. '여행 부부' 역시 침낭을 이용한다면서 뜨거운 물을 넣은 병을 안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고 했다. 숙소에서는 열을 내는 전기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반길 리 없어 연박하는 동안 아침에 보온담요를 개켰다가 저녁에 다시 펴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다.
다음으로 우의다. 순례길은 비를 자주 만난다. 우리는 첫날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넘어가는 피레네 산맥 구간에서부터 비를 거의 종일 맞았다. 빗줄기도 거셌고 바람도 세찼다. 아내는 데카트론 우의를 구입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이만한 우의가 아니었더라면 고생길이 상당히 가중됐을 것이다. 대체로 따듯한 날씨였지만 돌개바람이 일면 저체온증을 걱정할 정도였는데 데카트론 우의는 보온과 방풍 효과도 있었다.
신발 건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비에 완전히 젖어 물범벅이 된 신발의 물을 어느 정도 빼낸 뒤 전기콘센트에 연결해 건조기를 연결했더니 각국 순례객들이 너나 없이 눈이 휘둥그레 뜨곤 했다. 이내 엄지를 치켜 세우곤 했다.
여장 가운데 가장 후회되는 것이 너무 많은 옷을 챙겨간 것이었다. 아내보다 내가 더 그랬다. 사계절 옷을 준비하다 그랬다. 숙소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속옷이나 양말은 빨아서 빨리 말릴 수 있었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해 갔다. 물론 갈아 입을 수 있어서 좋았고, 하루에 여러 계절이 공존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했지만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짐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