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의 의류 쇼핑몰인 밀리오레의 소형 점포(10㎡)를 빌려 10여 년간 여성 의류를 판매해 온 김모(여·38)씨. 정부가 상가권리금을 보호하는 법을 만든다고 해 기대에 부풀었다. 김씨는 10년 전 권리금으로 5000만원을 줬고 인테리어 비용으로 600만원을 썼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용을 물어보니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대규모점포인 밀리오레는 권리금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설명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씨는 “소형 점포일 뿐인데 쇼핑몰 안에 있다는 이유로 권리금은 보호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당동 동문부동산 김동수 공인중개사는 “현재 밀리오레의 권리금은 2000만~5000만원 정도”라고 전했다.
서울 남대문시장 C동 1층 점포(5㎡)에서 7년째 여성복을 파는 김영순(여·59)씨도 분통을 터뜨렸다. 권리금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김씨는 “권리금 2000만원에 인테리어비로 500만원을 쓰느라 빚을 냈다. 우리 같은 상인을 보호한다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반문했다.
"백화점은 권리금 관행 없다더라" 법사위소위서 대규모 점포 제외
영세상인의 권리금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 개정안’이 13일부터 시행됐지만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본지 5월 18일자 B1면> 이 법에 따르면 동대문 밀리오레에 세 들어 영업을 하는 2500여 개 점포의 세입자는 권리금을 보호받지 못한다. 새 법에서 매장면적이 3000㎡ 이상인 대규모점포에 속한 곳은 권리금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전국의 대규모점포는 1816곳이다. 이중엔 백화점(98곳)이나 할인점(409곳) 등이 아닌 ‘그 밖의 대규모점포’가 1090곳으로 가장 많다. 대형 전통시장이나 대형 상가가 대부분이다.
본지가 서울 중구청·종로구청·부산 중구청이 공개한 대규모점포 현황을 확인한 결과, 서울 남대문·동대문종합·광장시장·밀리오레, 부산 국제·자갈치시장 등이 권리금을 보호받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꽃분이네’도 대규모점포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임차 상인의 권리금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내용은 지난해 9월 발표한 정부 대책엔 없었다. 그러나 지난 4월 24일 법제사업위원회 법안심사1소위에서 이 문제가 논의된다. 이유는 백화점 때문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법사위 전문위원은 의원들에게 “백화점은 권리금 자체를 수수하는 관행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예외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있다”고 보고했다. 백화점은 매장의 통일성이 유지돼야 하고 임대차 계약보다는 판매금액에서 일정한 수수료를 떼는 형태로 계약을 체결한다. 의원들도 백화점을 제외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다.
그런데 백화점을 예외로 두려다 엉뚱하게 권리금을 보호하지 않은 대상을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른 대규모점포로 넓혔다. 유통산업발전법에선 대규모점포를 백화점과 대형할인점, 쇼핑센터, 복합쇼핑몰 등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상거래 질서유지와 소비자의 안전을 유지하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규모가 큰 전통시장이나 상가도 매장면적이 3000㎡를 넘으면 그 밖의 대규모점포로 분류된다.
밀리오레·국제시장 등 1090곳 빠져
법안심사소위에서도 현재 대규모점포에서 권리금을 주고 받는지 실태 조사부터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일정에 쫓긴 의원들은 “일단 권리금을 보호하는 대상을 좁혀 놓고 문제가 되면 법을 고치자”는 쪽으로 덜컥 합의했다. 전국의 백화점 98곳 등을 권리금 보호 대상에서 빼려다 1090곳의 대형상가나 전통시장이 덩달아 제외된 셈이다.
명지대 부동산학과 김준형 교수는 “상가 권리금 문제에 성격이 다른 유통법 기준을 적용하니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다”며 “실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주먹구구식 졸속 시행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양재모 한양사이버대 부동산도시미래학부 교수는 “결과적으로 상인들끼리도 차별이 생겼다. 게다가 대형점포나 이곳에 속한 상가를 가진 건물주는 권리금 회수에 협력해야 의무가 없는 반면, 중소형상가 건물주는 책임이 더 큰 기형적인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자료원:중앙일보 2015.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