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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mmapariyāya
♦ 1. samādhisuttaṃ (SN 36.1) 삼매 경(S36:1) Samādh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249. “tisso imā, bhikkhave, vedanā. katamā tisso?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kho, bhikkhave, tisso vedanāti.
3.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느낌이다.”
♦ “samāhito sampajāno, sato buddhassa sāvako.
♦ vedanā ca pajānāti, vedanānañca sambhavaṃ.
♦ “yattha cetā nirujjhanti, maggañca khayagāminaṃ.
♦ vedanānaṃ khayā bhikkhu, nicchāto parinibbuto”ti.
4. “삼매에 들어344) 분명히 알고345)
마음챙기는 부처님의 제자는
느낌들을 알고 느낌들의 일어남을 알며
어디서 이들이 소멸하는지를 알며
그리고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느니라. 346)
느낌의 멸진에 도달했을 때 비구는
갈증이 풀려 완전한 평화를 얻도다.” 347)
344) “'삼매에 들어(samāhita)'라는 것은 근접삼매(upacāra)나 본삼매(appanā)로 삼매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본경은 명상의 실천을 통한 느낌(sammasana-cāra-vedanā)을 설하셨다.”(SA.ii.74)
345) “'삼매에 들어'와 '분명히 알며(sampajāna)'라는 이 두 구절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설하셨다.”(SA.iii.74)
346) 본 게송은 이처럼 괴로움 대신에 느낌을 언급하면서 사성제를 언급하고 있다.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yaṃ kiñci vedayitaṃ taṃ dukkhasmiṃ).”(본서 「한적한 곳에 감 경」(S36:11) §3)라고 하셨기 때문에 느낌은 고성제에 포함되고 느낌은 오온의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347) “'갈증이 풀려(nicchāta)'라는 것은 갈애가 없어진 것(nittaṇha)을, '완전한 평화를 얻는다(parinibbuta).'는 것은 오염원으로부터의 완전한 열반(kilesa-parinibbāna)을 뜻한다.
본 게송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네 가지 경지(삼계와 열반)에 속하는 법들을 다 구분하여(catubhūmaka-dhamma-pariccheda) 설하셨다.”(SA.ii.74)
한편 보디 스님은 본 「느낌 상윳따」(S36)에 포함되어 나타나는 모든 게송은 세존께서 말씀하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예를 들면, 초기불전 도처에서 게송이 나타나기 전에 언급되는 정형구인 본서 제1권 「깃발 경」 (S11:3) §9등에 나타나는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라는 표현 등)이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물론 이 게송들 중의 몇몇은 다른 경들에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읊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런 게송도 경을 암송하여 결깁자들이 여기에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보디 스님, 1432쪽 227번 주해 참조)
paṭhamaṃ.
♦ 2. sukhasuttaṃ (SN 36.2) 행복 경(S36:2) Sukha-sutta
♦ 250. “tisso imā, bhikkhave, vedanā. katamā tisso?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kho, bhikkhave, tisso vedanāti.
3.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이 있다.” [205]
♦ “sukhaṃ vā yadi vā dukkhaṃ, adukkhamasukhaṃ saha.
♦ ajjhattañca bahiddhā ca, yaṃ kiñci atthi veditaṃ.
♦ “etaṃ dukkhanti ñatvāna, mosadhammaṃ palokinaṃ.
♦ phussa phussa vayaṃ passaṃ, evaṃ tattha virajjatī”ti.
4.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마저도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348)
그 어떤 느낌에 접하든 간에
그 모두를 괴로움으로 아나니
거짓되고349)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
그것들이 부딪치고 또 부딪쳐왔다가
사라져 가는 양상을 지켜봄으로써350)
거기서 탐욕이 빛바래도다.”351)
348)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으로 옮긴 원문은 ajjhattañ ca bahiddhā ca(안과 밖에 있는)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안의 것은 내가 경험하는 느낌이고, 밖의 것은 남이 경험하는 느낌이다.(attano ca parassa ca SA.iii.74)
349) '거짓되고'는 mosa-dhamm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소멸하는 고유성질(nassana-sabhāva)”(SA.iii.74)로 설명하고 있고, 복주서는 “한 순간에만 존재하기(ittara-khaṇatā) 때문에 부서지고 난 뒤에는 볼 수 없는 고유성질(apassitabba-sabhāva)(SAȚ.iii.68)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mosa는 musā(거짓)와 같은 어원(√mṛṣ, to be heedless)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맛지마 니까야』「요소 분석 경」(M140/iii.245) §26과 『숫따니빠따』 (Sn) {757}d는 이러한 뜻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역자는 이 뜻으로 해석하였다.
350) 주석서는 '지켜봄으로써(passaṃ)'를 지혜(ñāṇa)로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74)
351) “'탐욕이 빛바랜다(virajjati)'는 것은 도를 통한 탐욕의 빛바램(magga-virāga)으로 탐욕이 빛바랜다는 뜻이다.”(SAȚ.iii.68)
dutiyaṃ.
♦ 3. pahānasuttaṃ (SN 36.3) 버림 경(S36:3) Pahāna-sutta
♦ 251. “tisso imā, bhikkhave, vedanā. katamā tisso?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3.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이 있다.”
sukhāya, bhikkhave, vedanāya rāgānusayo pahātabbo,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pahātabb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ātabbo.
4.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352)
352) '탐욕의 잠재성향'과 '적의의 잠재성향'과 '무명의 잠재성향'은 각각 rāga-anusaya, paṭigha-anusaya, avijjānusaya를 옮긴 것이다.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적의(敵意)의 잠재성향, 자만의 잠재성향, 사견(邪見)의 잠재성향, 의심의 잠재성향,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 무명의 잠재성향의 일곱 가지 잠재성향( 본서 제5권 「잠재성향 경」(S45:175) 참조) 가운데서 이 셋은 특히 느낌(vedanā)과 관계가 있다. 『맛지마 니까야』 「짧은 방등경」(M44/i.303) §§25~28도 참조할 것.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pahīno hoti,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pahīno ho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īno ho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리면,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niranusayo sammaddaso acchecchi taṇhaṃ,
vivattayi saṃyojanaṃ, sammā 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이를 두고 '비구의 잠재성향은 제거되었다. 353) 그는 올바로 보는 사람이다.
그는 갈애를 잘라버렸다. 족쇄를 풀어버렸다. 자만을 관통하여354)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어버렸다.'라고 한다.”
353) '잠재성향은 제거되었다.'는 Ee, Se: pahīna-rāga-anusaya(탐욕의 잠재성향을 제거함) 대신에 Be: niranusaya(잠재성향이 없음)로 읽었다. 문맥상 pahīna-anusaya(잠재성향을 제거함)로 읽는 것이 좋다.
354) “'자만을 관통함(māna-abhisamaya)'이란, 봄[見]을 통해서 [자만을] 관통함(dassana-abhisamayā)과 제거함을 통해서 관통함(pahāna-abhisamayā)을 말한다. ① 아라한도는 [미혹하지 않고 꿰뚫음이라 불리는 - SAȚ.iii.75] 자신의 역할(kicca)을 통해서 자만을 바로 보는데(sampassati) 이것을 두고 봄을 통해서 관통함이라 한다. ② 이렇게 보게 되면 그것은 제거된다. 독을 보게 되면(diṭṭha-visa) 중생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본 것과 같다. 이것을 두고 제거함을 통해서 관통함이라 한다.”(SA.iii.75)
“'봄을 통해서 [자만을] 관통함'이란 미혹하지 않고 꿰뚫는 것(asammoha-paṭivedhā)이다. 아라한도가 일어나면 [밝음을 가리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sabhāva-paṭicchādaka) 어리석음(moha)을 부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자만을 보게 되면 이를 일러 봄을 통해서 [자만을] 관통함이라 한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부수어지고 제거 되는 것처럼 아라한도가 일어나면 자만은 모든 곳에서 제거되어 [한 존재의] 흐름(santāna) 안에서 더 이상 자리 잡지 못한다. 이것을 제거함을 통해서 관통함이라 한다.” (SAȚ.iii.68)
'관통(abhisamay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사꺄무니 고따마 경」(S12:10)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 “sukhaṃ vedayamānassa , vedanaṃ appajānato.
♦ so rāgānusayo hoti, anissaraṇadassino.
5.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 {1}
♦ “dukkhaṃ vedayamānassa, vedanaṃ appajānato.
♦ paṭighānusayo hoti, anissaraṇadassino.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적의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 {2}
♦ “adukkhamasukhaṃ santaṃ, bhūripaññena desitaṃ.
♦ tañcāpi abhinandati, neva dukkhā pamuccati.
그리고 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광대한 통찰지를 가진 자 그것을 평화롭다 가르치지만
그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결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 {3} [206]
♦ “yato ca bhikkhu ātāpī, sampajaññaṃ na riñcati.
♦ tato so vedanā sabbā, parijānāti paṇḍito.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공부 소홀히 하지 않으면
그 현자는 모든 느낌을 철저하게 알리로다. {4}
♦ “so vedanā pariññāya, diṭṭhe dhamme anāsavo.
♦ kāyassa bhedā dhammaṭṭho, saṅkhyaṃ nopeti vedagū”ti.
그 지혜의 달인은 느낌을 철저하게 알아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멸진할 것이며
몸이 무너질 때에 법의 길에 확고하리니
어떤 헤아림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이 없으리.” {5}
293) “법에 굳게 서서(dhammaṭṭho)'라는 것은 무학의 법들에 혹은
열반의 법에(asekkhadhammesu nibbānadhamme eva vā) 섰다는 뜻이다.” (ItA.i.156)
tatiyaṃ.
♦ 6. sallasuttaṃ (SN 36.6) 화살 경(S36:6) Salla-sutta
♦ 254. “assutavā, bhikkhave, puthujjano sukhampi vedanaṃ vedayati ,
dukkhampi vedanaṃ vedayati, adukkhamasukhampi vedanaṃ vedayati.
sutavā, bhikkhave, ariyasāvako sukhampi vedanaṃ vedayati,
dukkhampi vedanaṃ vedayati, adukkhamasukhampi vedanaṃ vedayati.
tatra, bhikkhave, ko viseso ko adhippayāso kiṃ nānākaraṇaṃ
sutavato ariyasāvakassa assutavatā puthujjanenā”ti?
3.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을 느끼며,
괴로운 느낌을 느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 [208]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그러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으며 어떤 다른 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bhagavaṃmūlakā no, bhante, dhammā ... pe ... assutavā.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잘 호지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이제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bhikkhave, puthujjan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so dve vedanā vedayati — kāyikañca, cetasikañca.
4.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aṃ sallena vijjheyya .
tamenaṃ dutiyena sallena anuvedhaṃ vijjheyya .
evañhi so, bhikkhave, puriso dvisallena vedanaṃ vedaya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357)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357) '또다시 꿰찔리는 것'은 Be: vujjheyyuṃ 대신에 Se: anuvedhaṃ vijjheyyuṃ(복수)과 Be: anuvedhaṃ vijjheyya(단수)로 읽은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또다시 꿰찔리는 것(anuvedhaṃ vijjheyyuṃ)'이란 첫 번째 상처의 구멍(vaṇa-mukha)으로부터 손가락(aṅgula) 한 마디나 두 마디 정도 근처에 꿰찔린 것을 말한다. 이렇게 꿰찔리면 그 느낌은 첫 번째 느낌보다 더 혹독하기(balavatarā) 때문에 뒤에 일어난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domanassa-vedanā)도 첫 번째보다 더 혹독하다.”(SA.iii.76~77)
evameva kho,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so dve vedanā vedayati — kāyikañca, cetasikañca.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tassāyeva kho pana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paṭighavā hoti.
tamenaṃ dukkhāya vedanāya paṭighavantaṃ, yo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so anuseti.
5.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 되면, 그는 그것에 적의를 품는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적의를 품는 그에게는 그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된다.
s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kāmasukhaṃ abhinandati. taṃ kissa hetu?
na hi so, bhikkhave, pajānāti assutavā puthujjano aññatra kāmasukhā
dukkhāya vedanāya nissaraṇaṃ,
그가 괴로운 느낌에 닿으면 이제 그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는
그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출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58)
358) “삼매와 도와 과(samādhi-magga-phala)가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출구(dukkhāya vedanāya nissaraṇa)'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르고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kāma-sukha)'을 벗어나는 출구라고 알고 있다는 말이다.”(SA.ii.77)
여기서 '벗어나는 출구'는 nissaraṇa를 옮긴 것인데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벗어남'으로 옮겼다.
tassa kāmasukhañca abhinandato, yo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so anuseti.
다시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된다.
so tāsaṃ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tassa tāsaṃ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appajānato, y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so anuseti.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된다.
so sukhañce vedanaṃ vedayati, saññutto naṃ vedayati.
dukkhañce vedanaṃ vedayati, saññutto naṃ vedaya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ṃ vedayati, saññutto naṃ veday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saññutto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saññutto dukkhasmā’ti vadāmi.
그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인 채로 그것을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인 채로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209] 경험할 때도 매인 채로 그것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러 배우지 못한 범부라고 하나니,
그는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에 매여 있으며
그는 괴로움에 매여 있다고 나는 말한다.”
♦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so ekaṃ vedanaṃ vedayati — kāyikaṃ, na cetasikaṃ.
6. “비구들이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359)
그는 오직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며 결코 정신적인 느낌은 겪지 않는다.
359) 주석서는 여기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sutavā ariya-sāvaka)'는 번뇌 다한 아라한(khīṇāsava)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고, 불환자(anāgāmi)도 포함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래 게송에서 순(順), 역(逆)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표현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은 번뇌 다한 아라한을 뜻하고, 불환자는 적의(paṭigha)나 성냄(dosa)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domanassa)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SA.iii.77; SAȚ.iii.70)
육신을 가진 존재는 부처님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두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본경에서는 kāyikā dukkhā vedanā)을 겪기 마련이다.
♦ “seyyathāpi, bhikkhave, purisaṃ sallena vijjheyya.
tamenaṃ dutiyena sallena anuvedhaṃ na vijjheyya.
evañhi so, bhikkhave, puriso ekasallena vedanaṃ vedaya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의 화살로 인한 괴로움만을 겪을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so ekaṃ vedanaṃ vedayati — kāyikaṃ, na cetasikaṃ.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결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다.”
tassāyeva kho pana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paṭighavā na hoti.
tamenaṃ dukkhāya vedanāya appaṭighavantaṃ, yo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so nānuseti.
s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kāmasukhaṃ nābhinandati. taṃ kissa hetu?
pajānāti hi s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aññatra kāmasukhā dukkhāya vedanāya nissaraṇaṃ.
7.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그는 그것에 적의를 품지 않는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적의를 품지 않으면
그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가 괴로운 느낌에 닿더라도 그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
그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tassa kāmasukhaṃ nābhinandato yo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so nānuseti.
so tāsaṃ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ṃ 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tāsaṃ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ato, y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so nānuseti.
이처럼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사람에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so su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duk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ayaṃ vuccati,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visaññutto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visaññutto dukkhasmā’ti vadāmi.
그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210]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고 하나니,
그는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에 매어 있지 않으며
그는 괴로움에 매어 있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ayaṃ kho, bhikkhave, viseso, ayaṃ adhippayāso,
idaṃ nānākaraṇaṃ sutavato ariyasāvakassa assutavatā puthujjanenā”ti.
8. “비구들이여, 이것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간의
차이점이고, 특별한 점이고, 다른 점이다.”
♦ “na vedanaṃ vedayati sapañño,
♦ sukhampi dukkhampi bahussutopi.
♦ ayañca dhīrassa puthujjanena,
♦ mahā viseso kusalassa hoti.
9. “지혜 있는 이, 많이 배운 이[多聞],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이나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겪지 않나니,
현자와 범부간에 능숙함의 차이가 이렇듯 크도다. {1}
♦ “saṅkhātadhammassa bahussutassa,
♦ vipassato lokamimaṃ parañca.
♦ iṭṭhassa dhammā na mathenti cittaṃ,
♦ aniṭṭhato no paṭighātameti.
법을 터득한 이, 많이들은 이,
이 세상과 피안의 세계를 올바로 보는 이,
기꺼운 법에 그 마음 설레지 않고
원하지 않은 것에 적의 가지지 않도다. {2}
♦ “tassānurodhā athavā virodhā,
♦ vidhūpitā atthagatā na santi.
♦ padañca ñatvā virajaṃ asokaṃ,
♦ sammā pajānāti bhavassa pāragū”ti.
순(順) 역(逆)이 모두 흩어지고 꺼져서
이미 존재하지 않나니
때 없고 근심 없는 길을 알아 올바로 꿰뚫어 아는 자
존재의 피안에 도달했다고 이르나니.” {3}
chaṭṭhaṃ.
♦ 7. paṭhamagelaññasuttaṃ (SN 36.7)
간병실 경1(S36:7) 360) Gelañña-sutta
360) 본경과 다음 경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본경은 느낌(vedanā)을 조건지우는 요소로 '몸(kāya)'을 들고 있는데 반해, 다음 경은 '감각접촉[觸, phassa]'을 들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연기의 가르침에 따라 촉(觸, 감각접족)이 수(受, 느낌)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은 당연하나 본경에서 몸을 들어 수의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점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255. ekaṃ samayaṃ bhagavā vesāliyaṃ viharati mahāvane kūṭāgārasālāy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大林]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atha kho bhagavā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a gilānasāl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paññatte āsane nisīdi. nisajj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2. 그때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서 간병실로 가셨다.361)
가셔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비구들을 [211] 불러서 말씀하셨다.
361) 주석서는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세존께서는 간병실로 가셨다고 적고 있다. 첫째는 신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서 으뜸가는 분(agga-puggala)이신 세존께서 병자들을 간병하는 것을 보고 비구들도 그런 마음을 내게 하시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그들에게 명상주제를 설하기 위해서이다.(SA.iii.77)
♦ “sat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kālaṃ āgameyya.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
3.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t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 pe ...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to ho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마음챙기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챙긴다.”
♦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abhikkante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ālokite vilokite sampajānakārī hoti,
samiñjite pasārite sampajānakārī hoti, saṅghāṭipattacīvaradhāraṇe sampajānakārī hoti,
asite pīte khāyite sāyite sampajānakārī hoti,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
gate ṭhite nisinne sutte jāgarite bhāsite tuṇhībhāve sampajānakārī ho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mpajānakārī hoti.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분명히 알아차리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 · 발우 · 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을 때도 설 때도 앉을 때도 잠들 때도 잠에서 깰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sat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kālaṃ āgameyya.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evaṃ satassa sampajānassa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sukhā vedanā, so evaṃ pajānāti —
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기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ā kho myāyaṃ sukhā vedanā.
sā ca kho paṭicca, no appaṭicca. kiṃ paṭicca? imameva kāyaṃ paṭicca.
ayaṃ kho pana kāyo anicco saṅkhato paṭiccasamuppanno.
aniccaṃ kho pana saṅkhataṃ paṭiccasamuppannaṃ kāyaṃ paṭicca
uppannā sukhā vedanā kuto niccā bhavissatī’ti!
'지금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而生]362)이며,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而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몸에 조건 지워진 이 즐거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362)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而生, paṭicca-samuppann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조건 경」 (S12:20)과 주해들을 참조할 것.
so kāye ca sukhāya ca vedanāya aniccānupassī viharati, vayānupassī viharati,
virāgānupassī viharati, nirodhānupassī viharati,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363)
363) “이 시점에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이 비구들의 [예비단계의 도닦음(pubbabhāga-paṭipadā)인 - SAȚ.iii.70] 도달하는 도닦음(āgamanīya-paṭipad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음챙김의 확립(sati-paṭṭhāna)'도 예비단계[예비단계는 아직 출세간도가 아니다 - Ibid]이다. '알아차림(sampajañña)'도 예비단계이고, '무상의 관찰(anicca-anupassanā)', '사그라짐의 관찰(vaya-anupassanā)', '탐욕의 빛바램의 관찰(virāga-anupassanā)'의 세 가지 관찰도 예비단계이다. '소멸의 관찰(nirodha-anupassanā)'과 '놓아버림의 관찰(paṭinissagga-anupassanā)'이라는 이 둘은 혼합된 것(missakā) [즉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이 혼합된 것(lokiya-lokuttara-missakā) - Ibid]이다. 이렇게 하여 이 시점에서는 비구의 수행할 시기(bhāvanā-kāla)를 말씀하신 것이다.”(SA.iii.77~78)
tassa kāye ca sukhāya ca vedanāya aniccānupassino viharato, vayānupassino viharato,
virāgānupassino viharato, nirodhānupassino viharato, paṭinissaggānupassino viharato,
yo kāye ca sukhāya ca vedanāya rāgānusayo, so pahīyati.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212]
몸에 대한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evaṃ satassa sampajānassa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dukkhā vedanā. so evaṃ pajānāti —
‘uppannā kho myāyaṃ dukkhā vedanā. sā ca kho paṭicca, no appaṭicca.
kiṃ paṭicca? imameva kāyaṃ paṭicca.
ayaṃ kho pana kāyo anicco saṅkhato paṭiccasamuppanno.
aniccaṃ kho pana saṅkhataṃ paṭiccasamuppannaṃ kāyaṃ paṭicca
uppannā dukkhā vedanā kuto niccā bhavissatī’ti!
so kāye ca dukkhāya vedanāya aniccānupassī viharati, vayānupassī viharati, virāgānupassī viharati,
nirodhānupassī viharati,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
tassa kāye ca dukkhāya ca vedanāya aniccānupassino viharato ... pe ...
paṭinissaggānupassino viharato, yo kāye ca dukkhāya ca vedanāya paṭighānusayo, so pahīyati.
7.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evaṃ satassa sampajānassa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adukkhamasukhā vedanā, so evaṃ pajānāti —
‘uppannā kho myāyaṃ adukkhamasukhā vedanā. sā ca kho paṭicca, no appaṭicca.
kiṃ paṭicca? imameva kāyaṃ paṭicca.
ayaṃ kho pana kāyo anicco saṅkhato paṭiccasamuppanno.
aniccaṃ kho pana saṅkhataṃ paṭiccasamuppannaṃ kāyaṃ paṭicca
uppannā adukkhamasukhā vedanā kuto niccā bhavissatī’ti!
so kāye ca adukkhamasukhāya ca vedanāya aniccānupassī viharati, vayānupassī viharati,
virāgānupassī viharati, nirodhānupassī viharati,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
tassa kāye ca adukkhamasukhāya ca vedanāya aniccānupassino viharato ... pe ...
paṭinissaggānupassino viharato,
yo kāye ca adukkhamasukhāya ca vedanāya avijjānusayo, so pahīyati.
8.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 “so sukhañ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dukkhañ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9. “만일 [213]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줄 꿰뚫어 안다.364)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꿰뚫어 안다.”
364) 여기서부터 본경의 마지막까지는 본서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2(§12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와 제3권 「앗사지 경」(S22:88) §§11~13(§13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과 제6권「등불 비유 경」(S54:8) §§9~11(§11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에도 나타나고 있다. 경문에 대한 설명은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3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so su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duk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ṃ vedayati, visaññutto naṃ vedayati.
10.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만일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s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ī’ti pajānāti.
11.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 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seyyathāpi, bhikkhave, telañca paṭicca vaṭṭiñca paṭicca telappadīpo jhāyeyya,
tasseva telassa ca vaṭṭiyā ca pariyādānā anāhāro nibbāy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기름을 반연하고 심지를 반연하여 기름 등불이 타는데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불꽃은 받쳐주는 것이 없어져 꺼지고 마는 것과 같다.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ī’ti pajānātī”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지금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sattamaṃ.
♦ 8. dutiyagelaññasuttaṃ (SN 36.8) 간병실 경2(S36:8)365)
365) 본경은 바로 앞의 「간병실 경」1 (S36:7) 가운데서 느낌의 조건으로 언급되고 있는 '몸(kāya)' 대신에 '감각접촉[觸, phassa]'이 언급되고 있는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꼭 같다.
♦ 9. pañcakaṅgasuttaṃ (SN 36.19) 빤짜깡가 경(S36:19)377) Pañcakaṅga-sutta
377) 본경은 『맛지마 니까야』「많은 느낌 경」(Bahuvedanīya Sutta, M59)과 동일함.
♦ 267. atha kho pañcakaṅgo thapati yenāyasmā udāyī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ntaṃ udāyi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pañcakaṅgo thapati āyasmantaṃ udāyiṃ etadavoca —
2.그때 빤짜깡가 목수378)가 우다이 존자379)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78) 빤짜깡가 목수(Pañcakaṅga thapati)는 사왓티의 도목수(vaḍḍaki-jeṭṭhaka)였다고 한다.(SA.iii.79)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까뀌(vāsīpharasu)와 끌(nikhādana)과 자(daṇḍa)와 망치(muggara)와 먹줄(kāḷa-sutta)의 다섯 가지 연장을 사용하는데 능했기 때문에 빤짜까(pañcaka, 다섯) 연장(aṅga)을 가진 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Ibid)
379) “우다이(Udāyī)라 이름하는 세 분의 장로가 있는데 랄루다이(Lāḷudāyī), 깔루다이(Kāḷudāyī), 마하우다이(Mahāudāyī)이다. 여기서는 마하우다이 존자를 두고 한 말이다.”(DA.iii.903)
이 마하우다이 존자는 빤디따 우다이(Paṇḍita-udāyī) 존자라고도 주석서에 나타나는데 그만큼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분(paṇḍita)이었다고 한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본경의 우다이 존자는 빤디따 우다이 장로(Paṇḍita-udāyi-tthera)라고 밝히고 있으며(SA.iii.79; MA.iii.114), 복주서는 랄루다이 존자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부처님 고향인 까벨라왓투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며 부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그분 부처님의 덕성을 흠모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뒤에 아라한이 되었다.(ThigA.iii.7)
“kati nu kho, bhante udāyi, vedanā vuttā bhagavatā”ti?
“tisso kho, thapati, vedanā vuttā bhagavat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kho, thapati,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ti.
3.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evaṃ vutte, pañcakaṅgo thapati āyasmantaṃ udāyiṃ etadavoca —
“na kho, bhante udāyi,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
dve vedanā vuttā bhagavatā —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yāyaṃ, bhante, adukkhamasukhā vedanā, santasmiṃ esā paṇīte sukhe vuttā bhagavatā”ti.
4.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dutiyampi kho āyasmā udāyī pañcakaṅgaṃ thapatiṃ etadavoca —
“na kho, thapati, dve vedanā vuttā bhagavatā.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ti.
dutiyampi kho pañcakaṅgo thapati āyasmantaṃ udāyiṃ etadavoca —
“na kho, bhante udāyi,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
dve vedanā vuttā bhagavatā —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yāyaṃ, bhante, adukkhamasukhā vedanā, santasmiṃ esā paṇīte sukhe vuttā bhagavatā”ti.
5. 두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224] …
tatiyampi kho āyasmā udāyī pañcakaṅgaṃ thapatiṃ etadavoca —
“na kho, thapati, dve vedanā vuttā bhagavatā.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ti.
tatiyampi kho pañcakaṅgo thapati āyasmantaṃ udāyiṃ etadavoca —
“na kho, bhante udāyi, tisso vedanā vuttā bhagavatā.
dve vedanā vuttā bhagavatā —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yāyaṃ, bhante, adukkhamasukhā vedanā, santasmiṃ esā paṇīte sukhe vuttā bhagavatā”ti.
6. 세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7. 이렇게 말하자 빤짜짱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neva sakkhi āyasmā udāyī pañcakaṅgaṃ thapatiṃ saññāpetuṃ,
na panāsakkhi pañcakaṅgo thapati āyasmantaṃ udāyiṃ saññāpetuṃ.
8. 그러나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우다이 존자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assosi kho āyasmā ānando āyasmato udāyissa pañcakaṅgena thapatinā
saddhiṃ imaṃ kathāsallāpaṃ.
9.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얘기를 듣게 되었다.
♦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yāvatako āyasmato udāyissa pañcakaṅgena thapatinā
saddhiṃ ahosi kathāsallāpo taṃ sabbaṃ bhagavato ārocesi.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10.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 “santameva, ānanda, pariyāyaṃ pañcakaṅgo thapati udāyissa bhikkhuno nābbhanumodi;
santañca panānanda, pariyāyaṃ udāyī bhikkhu pañcakaṅgassa thapatino nābbhanumodi.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빠짜깡가 목수의 주장 또한 옳았다.
dvepi mayā, ānanda, vedanā vuttā pariyāyena. tisso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pañca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cha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aṭṭhārasā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chattiṃsā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aṭṭhasatampmp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evaṃ pariyāyadesito kho, ānanda, mayā dhammo.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225]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380)
380) 본서 「백팔 방편 경」 (S36:22)을 참조할 것.
pariyāyadesito dhammo : 흔히들 법문(法門) 혹은 方便으로 번역하는 이 표현은 담마를 분류하는 방법 - 어떤 기준이나 순서나 방법에 따라 담는 형태 - 어떤 분류 /담는 방법 |
evaṃ pariyāya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na samanumaññissanti, na samanujānissanti, na samanumodissanti,
tesaṃ etaṃ pāṭikaṅkhaṃ —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issantīti .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언쟁하면서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다.
evaṃ pariyāyadesito kho, ānanda, mayā dhammo.
evaṃ pariyāya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samanumaññissanti samanujānissanti samanumodissanti,
tesaṃ etaṃ pāṭikaṅkhaṃ — samaggā sammodamānā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
aññamaññaṃ piyacakkhūhi sampassantā viharissantī”ti.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화합하고 정중하며 논쟁하지 않고 물과 우유가 섞인 것 같고
우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머물 것이다.”
♦ “pañcime, ānanda,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pe ...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ānanda, pañca kāmaguṇā .
11. “아난다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들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yaṃ kho, ānanda, ime pañca kāmaguṇe paṭicca uppajjati sukhaṃ somanassaṃ —
idaṃ vuccati kāmasukhaṃ.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의지하여 일어나는[緣而生]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이라 부른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2.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3. “아난다여, [226]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4.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5.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에 들어 머문다. 381)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382)
381) 이상 §§12~17에 나타나는 네 가지 禪의 구성요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본서 제6권 「동쪽으로 흐름 경」 (S53:1~12)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382) “여기서 제4선부터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요하다는 뜻(sant-aṭṭha)과 수승하다는 뜻(paṇīt-aṭṭha)에서 즐거움(sukha, 행복)이라 불린다.”(SA.iii.80)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6.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227]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7.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8.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19.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228]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ye kho, ānanda, evaṃ vadeyyuṃ — ‘etaṃparamaṃ santaṃ sukhaṃ somanassaṃ paṭisaṃvedentī’ti
— idaṃ nesāhaṃ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tth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20.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요 정신적 즐거움이라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katamañc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idhānanda, bhikkhu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ṃ sukhaṃ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 “ṭhānaṃ kho panetaṃ, āna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21. 그런데 아난다여,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aṇo gotamo āha, tañca sukhasmiṃ paññapeti.
tayidaṃ kiṃsu, tayidaṃ kathaṃsū’ti?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383)
383) “'소멸(nirodha)'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avedayita-sukha)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된다.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pañca-kāma-guṇa)과 여덟 가지증득(aṭṭha-samāpatti)을 통해서 생긴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vedayita-sukha)이지만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niddukkha-bhāva)라 불리는 즐거움이라는 뜻에서 전적인 즐거움(ekanta-sukha)이 되는 것이다.”(SA.iii.80)
sukha는 즐거움으로도 옮길 수 있지만 행복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역자는 본서 전체에서 sukha를 즐거움으로도 옮기고 행복으로도 옮긴다. 본경에서의 소멸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행복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상수멸이나 열반이나 아라한과와 같은 이러한 행복은 전적인 행복(ekanta-sukha)이고 지극한 행복(adhika-sukha, SA.ii,381)이고 열반의 행복(nibbāna-sukha, SA.i.328)이며, 본서 제1권 「믿음 경」(S1:36) {120}에서는 궁극적인 행복[至福, parama-sukha]이라 부르고 있다.
evaṃvādino, āna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na kho, āvuso, bhagavā sukhaññeva vedanaṃ sandhāya sukhasmiṃ paññapeti.
yattha yattha, āvuso, sukhaṃ upalabbhati,
yahiṃ yahiṃ , taṃ taṃ tathāgato sukhasmiṃ paññapetī’”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384)
384)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간에 그것이 괴로움이 없는 상태(niddukkha-bhāva)이면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두 즐거움(행복)에 포함시켜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멸진정(nirodha-samāpatti)을 으뜸(sīsa)으로 삼으셔서 아라한됨을 정점으로 하여 제도되어야할 사람(neyya-puggala)에게 [법을] 설하셨다.”(SA.iii.80)
navamaṃ.
♦ 2. aṭṭhasatasuttaṃ (SN 36.22) 백팔 방편 경(S36:22) Aṭṭhasatapariyāya-sutta
♦ 270. “aṭṭhasatapariyāyaṃ vo, bhikkhave, dhammapariyāyaṃ desessāmi. taṃ suṇātha.
2. “비구들이여, [느낌에 대한] 백팔 방편 법문을 설하리라. … <S35:23 §3> …
katamo ca, bhikkhave, aṭṭhasatapariyāyo, dhammapariyāyo?
dvepi mayā, bhikkhave, vedanā vuttā pariyāyena; tisso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pañca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cha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aṭṭhārasā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chattiṃsā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aṭṭhasatampi mayā vedanā vuttā pariyāyena.
3. “비구들이여, 무엇이 백팔 방편 법문인가?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도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katamā ca, bhikkhave, dve vedanā?
kāyikā ca cetasikā ca — imā vuccanti, bhikkhave, dve vedanā.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두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두 가지 느낌이라 한다.”
katamā ca, bhikkhave, tisso vedan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 imā vuccanti, bhikkhave, tisso vedanā.
5. “비구들이여, [232] 그러면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katamā ca, bhikkhave, pañca vedanā?
sukhindriyaṃ, dukkhindriyaṃ, somanassindriyaṃ, domanassindriyaṃ, upekkhindriyaṃ —
imā vuccanti, bhikkhave, pañca vedanā.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392)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392) 이 다섯 가지는 본서 제5권 「기능 상윳따」(S48)의 「간단한 설명 경」등(S48:31 ~40)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katamā ca, bhikkhave, cha vedanā?
cakkhusamphassajā vedanā ... pe ... manosamphassajā vedanā —
imā vuccanti, bhikkhave, cha vedanā.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섯 가지 느낌인가?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여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katamā ca, bhikkhave, aṭṭhārasa vedanā?
cha somanassūpavicārā, cha domanassūpavicārā, cha upekkhūpavicārā —
imā vuccanti, bhikkhave, aṭṭhārasa vedanā.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열여덟 가지 느낌인가?
정신적 즐거움을 수반하는 여섯 가지 추구, 정신적 괴로움을 수반하는 여섯 가지 추구,
평온을 수반하는 여섯 가지 추구이다. 393)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열여덟 가지 느낌이라 한다.”
393) '추구'는 upavicāra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고찰(로 옮기고 있는 vicāra에 접두어 'upa-(~위에)'가 붙은 것이므로 '고찰'로 옮길 수 있지만 여기서는 느낌의 문맥에 나타나고 있어서 추구로 옮겼다.
『맛지마 니까야』「육처 분석 경」(M137/iii.216~217) §8과「요소 분석 경」 (M140) §10에 의하면 여기서 여섯 가지 추구는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에 대한 추구이다. 그래서 모두 18가지 추구가 된다.
katamā ca, bhikkhave, chattiṃsa vedanā?
cha gehasitāni somanassāni, cha nekkhammasitāni somanassāni,
cha gehasitāni domanassāni, cha nekkhammasitāni domanassāni,
cha gehasitā upekkhā, cha nekkhammasitā upekkhā —
imā vuccanti, bhikkhave, chattiṃsa vedanā.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서른여섯 가지 느낌인가?
세속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정신적 즐거움, 출가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정신적 즐거움,
세속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정신적 괴로움, 출가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정신적 괴로움,
세속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평온, 출가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평온이다. 394)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394)『맛지마 니까야』「육처 분석 경」(M137/iii.217~219) §§S9~15에는 이들의 내용이 상세하게 분류되어 나타난다.
katamañca, bhikkhave, aṭṭhasataṃ vedanā?
atītā chattiṃsa vedanā, anāgatā chattiṃsa vedanā, paccuppannā chattiṃsa vedanā —
imā vuccanti, bhikkhave, aṭṭhasataṃ vedanā.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백여덟 가지 느낌인가?
과거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 미래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 현재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백여덟 가지 느낌이라 한다.”
ayaṃ, bhikkhave, aṭṭhasatapariyāyo dhammapariyāyo”ti.
11. “비구들이여, 이것이 백팔 방편 법문이다.”
dutiyaṃ.
♦ 11. nirāmisasuttaṃ (SN 36.31) 출세간 경(S36:31) Nirāmisa-sutta
♦ 279. “atthi, bhikkhave, s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
atthi sāmisaṃ sukhaṃ, atthi nirāmisaṃ sukhaṃ,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aṃ sukhaṃ;
atthi sāmisā upekkhā, atthi nirāmisā upekkhā,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ā upekkhā;
atthi sāmiso vimokkho, atthi nirāmiso vimokkho,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o vimokkho.
3. “비구들이여, 세간적 희열[喜]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 있다.399)
세간적 행복[樂]이 있고, 출세간적 행복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이 있다.
세간적 평온]이 있고, 출세간적 평온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 있다.
세간적 해탈이 있고, 출세간적 해탈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 있다.”
399) 여기서 '세간적'과 '출세간적'과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은 각각 sāmisā와 nirāmisā와 nirāmisā nirāmisatarā를 옮긴 것이다. āmisa는 형용사 āma(날것의)에서 파생된 것인데 문자적으로는 날고기(raw meat)를 뜻한다. 이것에다 각각 접두어 'sa-(함께)'와 'nir-(없음)'를 붙여서 sāmisa와 nirāmisa가 된 것이다. 여기서는 모두 희열(pīti)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이고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āmisā pīti? pañcime, bhikkhave,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pe ...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hikkhave, pañca kāmaguṇā.
yā kho, bhikkhave, ime pañca kāmaguṇe paṭicca uppajjati p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sāmisā pī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緣而生] 희열을
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 “katamā ca, bhikkhave, nirāmisā pī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pīti.
5. “비구들이여, [236]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 “katamā ca,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
yā kho, bhikkhave, khīṇāsavassa bhikkhuno rāg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dos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moh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uppajjati p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희열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400)
400)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이란 [네가지] 선(禪)의 희열(jhāna-pīti)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을 말한다.”(SA.iii.84)
♦ “katamañca, bhikkhave, sāmisaṃ sukhaṃ? pañcime, bhikkhave,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pe ...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hikkhave, pañca kāmaguṇā.
yaṃ kho, bhikkhave, ime pañca kāmaguṇe paṭicca uppajjati sukhaṃ somanass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sāmisaṃ sukhaṃ.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즐거움을 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 “katamañca, bhikkhave, nirāmisaṃ sukhaṃ?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aṃ sukhaṃ.
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 “katamañca,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aṃ sukhaṃ?
yaṃ kho, bhikkhave, khīṇāsavassa bhikkhuno rāg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dos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moh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uppajjati sukhaṃ somanass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aṃ sukhaṃ.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237]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육체적 행복(즐거움)과 정신적 행복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 “katamā ca, bhikkhave, sāmisā upekkhā? pañcime, bhikkhave,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pe ...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hikkhave, pañca kāmaguṇā. yā kho, bhikkhave, ime pañca kāmaguṇe paṭicca
uppajjati upekkhā, ayaṃ vuccati, bhikkhave, sāmisā upekkhā.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평온을 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 “katamā ca, bhikkhave, nirāmisā upekkhā?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upekkhā.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 “katamā ca,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ā upekkhā?
yā kho, bhikkhave, khīṇāsavassa bhikkhuno rāg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dos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moh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uppajjati upekkhā, ay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ā upekkhā.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평온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 “katamo ca, bhikkhave, sāmiso vimokkho? rūpappaṭisaṃyutto vimokkho sāmiso vimokkho.
1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간적 해탈인가?
물질[色]과 관련된 해탈을 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401)
401) 앞에서 출세간적 희열, 행복, 평온으로 네 가지 선(禪) 즉 색계 4선을 들었다. 그런데 해탈과 관계된 본문에서는 이러한 색계선을 세간적 해탈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의 설명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석서는 여기서 이러한 해탈을 세간적인 것이라 부르는 이유를 그것의 대상(ārammaṇa)이 물질이라는 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rupa-āmisa-vaseneva sāmiso nāma) 설명하고 있다.(SA.iii.85)
♦ “katamo ca, bhikkhave, nirāmiso vimokkho? arūpappaṭisaṃyutto vimokkho nirāmiso vimokkho.
1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적 해탈인가?
무색(無色)과 관련된 해탈을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 “katamo ca,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o vimokkho?
yo kho, bhikkhave, khīṇāsavassa bhikkhuno rāg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dos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mohā cittaṃ vimuttaṃ paccavekkhato uppajjati vimokkho,
ayaṃ vuccati, bhikkhave, nirāmisā nirāmisataro vimokkho”ti.
1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해탈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ekādasamaṃ.
첫댓글 고맙습니다
봄봄님, 상윳따 니까야의 영역본에 대하여 스리랑카 보디 스님이 해석한 것이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SA.ii.74)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보디스님의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를 실상사 각묵스님이 한글로 재번역하고, 대림스님이 감수한 것을 여기 게시판에 올려주며...경문에서의 의미의 이해 및 정법의 수호와 홍법에 힘쓰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정법의 실참에 매진하는 한국 불제자들이 많아지길...
이러한 바램으로서 대중의 참여로 오타의 수정에 도움을 받으려는 듯 합니다...
념처와 더불어,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 삼매의 개발에 힘쓰는 수행자 또한 이들 경문을 통해 도움이 되고 있고요,
역으로 선정 수행에서의 실참 경험을 토대로 경문 특히 '정형구'에서의 의미를 앎과 봄(지견)하고 전법에 동참들을 하고 있지요...그게 윤문의 보람이기도 하지요.
선재선재선재_()_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와 한글 해석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uri2037&logNo=93555471&proxyReferer=https:%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C%2583%2581%25EC%259C%25B3%25EB%2594%25B0%2B%25EB%258B%2588%25EA%25B9%258C%25EC%2595%25BC%2B%25EC%25A3%25BC%25EC%2584%259D%25EC%2584%259C%2B%25EB%25B3%25B4%25EB%2594%2594%25EC%258A%25A4%25EB%258B%2598%26where%3Dm%26sm%3Dmob_sly.hst%26acr%3D1
//상윳따 니까야의 영역본에 대하여 스리랑카 보디 스님이 해석한 것이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SA.ii.74)이....//
잘은 모르지만 아니지? 싶습니다.
@봄봄 붓다고사 스님이군요...
붓다고사 스님은 빠알리 삼장에 대한 다음 13가지 주석서들을 지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고합니다.
1. 율장의 주석서들
1)사만따빠사디까(Samantapasadika): 율장의 주석서(VinA)
2)깡카위따라니(Kankhavitarani): 빠띠목카에 대한 주석서(VinA)
2. 경장의 주석서들
3)수망갈라윌라시니(Sumangalavilasini): 디가 니까야 주석서(DA)
4)빠빤짜수다니(Papancasudani):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MA)
5)사랏탑빠까시니(Saratthappakasini):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SA)
6)마노라타뿌라니(Manorathapurani):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AA)
7)청정도론(Visuddimagga): 4부 니까야에 대한 종합적인 주석서(Vis)
8)빠라맛타조띠까(Paramatthajotika): 쿳다까빠타(Khuddakapatha)와 숫따니빠따(Suttanipata)의 주석서(KhuA, SnA)
9)담마빠다앗타까타(Dhammapadatthakatha): 법구경 주석서(DhpA)
10)자따까앗타까타(Jatakatthakatha): 자따까 주석서(JaA)
@mindsati 3. 논장의 주석서들
11) 앗타살리니(Atthasalini): 담마상가니(Dhammasangani) 주석서(DhsA)
12)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 위방가(Vibhanga) 주석서(VbhA)
13) 빤짜빠까라나-앗타까타(Pancapakaranatthakatha): 나머지 다섯 논장의 주석서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3a3n3g3&logNo=222471829035&proxyReferer=https:%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tot%26q%3D%25EC%2583%2581%25EC%259C%25B3%25EB%2594%25B0%2520%25EB%258B%2588%25EA%25B9%258C%25EC%2595%25BC%2520%25EC%25A3%25BC%25EC%2584%259D%25EC%2584%259C%26nil_profile%3Dbtn%26f%3Dandroidapp%26DN%3DADDA%26nil_app%3Ddaumapp%26enc_all%3Dutf8%26DA%3DYZR
//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행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출세간적 행복이라 한다.”//
특히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는 붓다 유년에 잠부나무에서..
여기 정형구들이 낱낱이 이 몸에 실현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