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다. 북적거리는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모처럼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을 때. 그럴 때 가볼 만한 곳이 있다. 상영 중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촬영지 경북 군위다.
완연한 봄 날씨와 서울을 벗어날수록 드러나는 푸른 하늘은 경북 군위로 가는 발걸음을 즐겁게 했다. 차로 세시간을 달려 도착한 군위군 우보면의 한 농촌마을. 이곳은 겨울의 흔적을 지우고 봄빛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논은 벼의 그루터기만 남아 황량했지만 바로 옆 조그마한 마늘밭에는 푸르름이 가득했다.
평범한 시골 풍광을 따라 휘적휘적 걷다가 눈에 익은 집 한채를 발견했다.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속 혜원(김태리 분)의 집이다. 원래 비어 있었던 이곳은 1년 동안 촬영지로 쓰였다가 다시 빈집이 된 상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
어느 해 겨울, 혜원은 이곳 고향집에 돌아왔다. 왜 돌아왔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배고파서”라고 답한 그녀. 가장 먼저 한 일도 꽁꽁 언 땅에 묻혀 있던 배추를 뜯어 국을 끓여 먹는 것이었다.
이후 계절이 네번 바뀌는 동안 혜원은 제철에 나는 농산물로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는다. 도시에서 쫓기듯 먹던 편의점 도시락으론 달래지 못한 허기를 그렇게 채웠다.
넓은 마당과 크게 뚫린 창문, 딱딱한 마루. 혜원이 자주 그랬듯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바라봤다. 애완견 오구의 집, 우물 등 영화에 등장했던 소품들이 그대로다. 마치 영화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당에서 열심히 장작을 패던 그녀를 상상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흙냄새가 훅 밀려왔다. 지금은 비록 흙냄새뿐이지만 이제 곧 향기로운 꽃냄새, 좀더 지나면 짙은 녹음 향기가 더해질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혜원의 집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마을에 살고 계신 할머니와 마주쳤다. 사계절 내내 영화 찍는 것을 구경했다는 할머니는 조금 전 지나쳤던 논을 가리키며 “이곳에서도 꽤 오랫동안 촬영을 했다”고 귀띔했다.
혜원은 직접 수확한 농산물로 요리를 해먹으며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사진은 혜원이 농사를 짓던 밭.
할머니 말씀을 듣고 다시 논으로 눈을 돌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부터 그 옆의 작은 쉼터까지 영화에서 봤던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혜원이 봄엔 모를 심고 가을엔 태풍에 쓰러진 벼를 묶었던 곳이다. 그녀는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복잡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잠시 잊었다. 논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자연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산뜻한 기분으로 농촌마을을 벗어나 읍내로 향했다. 군위에 오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사라온이야기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곳은 한국민속촌의 축소판이다. 사물놀이 배우기, 떡메치기, 신수점 보기 등 다양한 전통체험 행사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볼거리가 여러가지였지만 번잡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있다 해도 가족단위의 관람객이 조용히 즐길 뿐이었다.
군위는 번화가인 읍내에서조차 여유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이곳에선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군위는 복잡한 일상 속의 누군가에게 쉼표 하나를 선물했다.
군위=최문희, 사진=김덕영 기자, 사진제공=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갑갑한 도시에서 받은 상처 잔잔한 농촌에서 얻는 치유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원작은 생생한 농촌생활을 그린 동명의 일본 만화로, 올 2월28일 개봉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선 큰 사건이 없다. 박장대소할 만큼 재밌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이야기와 농촌의 생명력 넘치는 풍경이 그 자리를 채운다.
주인공 혜원은 시험·연애·취업 등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직접 수확한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친구 재하(류준열 분)·은숙(진기주 분)과 나눠 먹으며 도시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무장한 영화를 관람하고 나면 한적한 시골에서 푹 쉬다온 것 같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