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 명 자 산 ♣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 7명을 합장한 합장묘가 있는 해발 300m의 산정으로, 동정부부 이순이(루갈다)를 추앙하여 일명 ‘루갈다 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신자들에게는 ‘중바위’로 통하므로 길을 물을 때는 유의해야 한다.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태종 14대 손으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권씨(직암 권일신의 여동생)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깊은 천주교 신앙을 키우며 자랐다. 평생 동정(童貞)으로 살면서 기도와 묵상 속에서 한생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사회 법도상 야반 집 처녀가 독신으로 늙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주문모 신부에게 사정을 애기하고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마침 오빠(이경도, 가롤로)를 통해 전라도 갑부이자 ‘호남의 사도’로 불리우던 유항검에게 유중철(柳重喆, 요한)이라는 장남이 있었는데, 그 또한 동정으로 평생을 살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두사람은 평생을 ‘동정부부(童貞夫婦)’ 로 살기로 약속하고 1797년 가을에 결혼하였는데 유중철은 18세, 이순이는 15세 였다. 이들은 4년동안 동정부부로 오누이 사이로 정결한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한 방안에서 아랫목, 윗목으로 나뉘어 잠을 자면서도 평생 동정으로 살기를 소망했던 부부였지만 때로는 육신을 참기 어려운 때가 4년동안 10번 정도 있었다고 이순이는 나중에 술회하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기도로 유혹에 맞서며 남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깨끗하게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를 만나게 된다. 신유박해의 회오리가 호남지방에 불어닥치자 제알 먼저 체포된 이가 유항검, 유관검 형제이다. ‘호남의 사도’로 불릴만큼 호남 지방에서 천주교 전파의 중추였던 유항검 형제는 그 많은 재산과 수백여명의 노비를 다 빼앗기고 군중이 지켜보는 남문 밖에서 사지가 갈갈이 찢겨지는 ‘육시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고 유관검은 약 34세였다. 장남 유중철(이순이의 남편)과 차남 유문철(18세)은 11월 14일 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유항검의 부인 신희(申喜)와 며느리 이순이(루갈다)등 4명은 1802년 1월 31일전주 숲정이에서 도끼로 참수(斬首)되어 각각 순교하였다. 그리고 유진이(둘째 딸, 9세), 유일석(셋째 아들, 6세), 유일문(넷째 아들, 3세)은 각각 흑산도, 신지도, 거제도로 유배되어 전라도 갑부 유항검의 집안은 천주교 때문에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현재 치명자산(중바위)에 있는 이들 동정부부의 무덤은 원래 유항검의 선영이 있는 전북 완주군의 초남리에 있었는데 1914년경 전주 전동성당의 ‘보두네 (baudounet) 신부’가 이곳 치명자산으로 이장시킨 것이다. 합장되어있는 유해는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 희, 유중철, 이순이 동정부부, 유관검의 부인 이육희, 시동생 유문철(혹은 문석), 사촌 시동생 유중성(당시 17세)등 7명이다.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 1754∼1801)과 유관검(柳觀檢, 1767∼1801)형제는 BR> 신유박해가 시작된 1801년 3월에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는데 후일 박해시대 기록을 정리한 ‘샤를르 달레(dallet)’는 그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유항검은 고문에 못이겨 배교한 것 같다고 추축하였으며, 그의 동생 유관검은 명백히 배교하였으며 심지어는 교우명단까지 전라 감사(監司全羅) 검달순에게 폭로하여, 그 결과 전주, 금산, 고산, 영광, 김제 등지의 천주교인 200여명이 붙잡히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 탓이었을까. 치명자산의 합장묘에는 유관검의 유해는 제외된 채 유항검과 두 형제의 아내 2명, 유중철 이순이 동정부부, 두 형제의 아들인 유문철, 유중성등 7명의 유해만이 잠들어 있다. 달레 신부는 두 형제를 배교자로 추측 또는 단정하고 있지만 필자는 이에 대해 다소의 의문과 아쉬움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인들이 신자이기 이전에 조선의 선량한 백성들이었던 만큼 일단 매질에 못이겨 배교하면 구태여 죽이지 않고 방면하였으며, 또 그런 조치를 통해 많은 천주교들이 실젤 배교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 저간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배교자인 두 형제를 방면시키지 않고 수 많은 군중 앞에서 능지처참형인 육시형(머리, 팔, 다리, 몸통의 여섯토막)으로 죽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박해자들이 얻게 될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또 박해시대 천주교인의 법적 처리에 대한 관변문서 즉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형조의 추안(공초기록), 관장의 장계등에 나타난 천주교인 처리문건은 대부분이 천편일률적인 용어와 논조로 귀결되어 있기 때문에 두 형제에 대한 관변측의 문초기록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사료비판이 요구된다고 본다. 그 예(例)로 형조의 추안(공초, 심문기록)에 유관검이 자백하였다고 기록된 천주교인 중 상당 수가 이미 죽은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천주교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달레 신부 자신도 유관검이 의도적으로 천주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자백을 한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필자는 만에 하나 두 형제가 고문과 매질에 못 이겨 배교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처형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고통 때문에 배교한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며 처형에 임하였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형제가 의로운 죽음을 맞았기에 수개월 후 그들의 아내와 자식과 며느리 등 6명이 차례로 순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유항검, 유관검 두 형제는 육시형으로 처형되었고, 전라도 갑부였던 그들의 전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그들의 전 가족은 교수형과 참수형으로 처참하게 일생을 끝마쳤다. 또 외딴섬 (흑산도, 신지도, 거제도)으로 각기 유배되어 노비가 된 세 어린 남매는 대역부도(大逆不道)죄로 죽은 아비 때문에 비참하고 서러운 삶을 살다 죽어갔다. 하지만 천주교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두형제는 배교라는 멍에까지 짊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고, 유관검은 죽어서도 가족과 함께 묻히지 못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유관검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항검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정확한 연구와 검토가 사가(史家)들에 의해 이루어져, 여섯토막으로 찢긴 그의 육신만큼이나 갈기갈기 찢긴 그의 마음이 평화속에 잠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빈다. 달레(Dallet) 신부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이(루갈다) 순교편을 끝맺었다. “멀리 떨어진 섬으로 따로따로 귀양간 세 어린 자식들은 거기서 딸 하나밖에는 아무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딸은 몇해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집안은 완전히 멸항하였고, 오늘날 그 집안에 천주 교우가 한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순이(루갈다)가 옥중에서 친정으로 보낸 편지는 다행히도 필사본으로 전하여지고 그대로 있어 후일 순교자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옥중에서 옥리의 눈을 피해 친정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인데, 육신의 삶보다는 오히려 순교를 통한 영원한 하늘나라를 택했던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신앙관을 잘 엿볼 수 있다. 그녀의 편지를 일부 소개해 본다. 두 언니께 붓을 드니 할 말이 없군요. 우리 불쌍한 오빠(이경도, 가롤로, 22세, 1801년 12월 25일 순교)가 돌아가셨나요, 살아계신가요, 오빠소식은 9월초에 간접적으로 들었었지만, 그 뒤로는 저 자신이 붙잡혀서 갇혀있는 몸이라 아무런 소식도 제게는 오지 못합니다. 오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찍어 눌리고 조입니다. 어머니와 새 언니가 어떻게 그것을 견디실 수 있겠어요.... 저는 지금 죽음의 땅에 와 있으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몇가지 적어 보내며 이세상에서 언니들에게 영원한 하직을 고하려 합니다. 금년(1801년0에 많은 재난 때문에 저는 집안식구들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에는 살고 싶은 아무 욕망도 없어지고 좋은 기회가 있는 동안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늘 묵상하며 그것을 준비하려고 힘썼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많은 포졸들이 들어와서 저는 잡혔습니다. 순교의 기회가 없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합니다. 저는 만족하고 기뻤으나, 동시에 걱정되고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수급청(守給廳), 혹은 수금청(囚禁廳)이라는 곳에 갗혔다가 한시간도 못되서 다른 옥으로 옮겨졌는데, 거기서 제 시어머니와 숙모와 시동생들을 만났습니다. 서로 바라다보며 눈물만 흘리고 말 한마디 못하는 가운데에 차차 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9월 보름이라 맑고 환한 밤이었습니다. 달은 한껏 둥글고 찬란했으며 그빛이 감옥창을 비추고 있어서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볼수가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어 제각기 말을 하며 다섯사람이 다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하여 순교하기를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와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더해지며 모든 사정에 무관심하게 되고 아무 걱정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생각과 애정은 다른 옥에 갇혀 있는 제 남편 요한(유중철)에게로 끊임없이 향했습니다. 어떻게 잠시인들 그를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같은 날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라는 말을 남편에게 보내려고 애를 썼지만 연락이 엄금되어서 통신할 길이 일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같은 날 천주의 순교자로 함께 죽을수 있는 것이 언제나 저의 원이요 희망이요 은밀한 기구로 청하는 바입니다. 10월 9일 제 시동생(유문철)을 에려 갔는데 왜 그런지를 저는 몰랐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죠”하고 물었더니 옥졸의 대답이 “관장의 명령이다 그를 큰 옥으로 데려 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거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몸이 두 쪽으로 잘리고 천개의 칼로 찔린 것 같았습니다. 옥졸들은 그를 데려 갔습니다. 저는 시동생에게 “제가 남편과 같은 날 함께 죽기가 원이라는 말을 형님에게 전해주세요.”하고 간절히 부탁하고, 두 세 번 그 부탁을 되풀이 한다음 서로 손을 놓고 저는 돌아섰습니다. 일각도 못되어서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잘 준비하였는지가 궁금하여 제 마음속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유중철)의 옷에서 자기 누이(요한은 이순이를 늘 이렇게 불렀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고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제 모든 근심걱정은 사라졌습니다. ... 지난해 (1800년)섣달의 일이었습니다. 가장 심한 유혹을 느껴 제 마음은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절벽위에서 서 있는 것처럼 떨렸습니다. 천주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정말이지 간신히 승리하여 저희들의 동정을 보전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희들의 신뢰심은 철석같이 굳어졌고 저희들의 사랑과 성실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매와 같이 지내지는 이 약속이 있은 뒤 4년이 지난 금년 봄에 그이는 잡혀갔습니다. 4계절 내내 그이는 한번도 옷을 갈아 입지 못했고, 여덟달 동안을 옥에 같혀 있으면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수가(首架, 칼)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 10월 13일 저는 관비가 되어 멀리 ‘벽동(碧潼, 평안도 벽동군)’으로 귀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장 앞에 나아가 “천주를 공경하는 저희들은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합니다. 저도 제 집안 다른 식구들과 같이 천주를 위하여 죽고 싶습니다.”하고 수 없이 항의했습니다. 관장은 화가 나서 저를 즉시 내쫓으라고 명했습니다. 저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앞에 앉아 죽음을 청하였지만 그는 제 말을 들은체도 하지않고 포졸들을 시켜 저를 밖으로 내 쫓았습니다. 더 이상 방도가 없어 저는 귀양길을 떠나 겨우 백여리를 갔었는데 저는 다시 불려 체포되었습니다. 어찌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해야 할지요. 제가 죽은 뒤에도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여 주십시오. 저를 체포하러 뒤다라 온 포졸들을 다시 보니 마치 제 친부모를 만난 듯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 뒤 열린 첫 번 심문에서 저는 천주를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더니 후에 회답이 오자 감사는 저를 다시 출두시킨 다음 사형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했습니다. 감사는 제 다리를 때리게 하고 큰 칼을 씌워 옥에 다시 가두었습니다. 제살이 벗겨져서 피가 흘렀는데 저는 이미 아무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랄수 없었던 은혜에 또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4,5일 뒤에는 아주 깨끗하게 나았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고통중에 있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진실과는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평화와 안락 속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저는 죽음밖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회답(사형일자)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이 앉아서 옥졸들의 눈을 속여 틈을 타서 종이쪽에 언니들에게 영원한 하직을 고하는 것이 고작인데, 이 종이를 제 얼굴을 대신하는 것으로 받으시고 약간이나마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드릴 말씀이 하도 많고 급히 서둘러 해야 되기 때문에 저는 두서도 없이 아무렇게나 적고 있습니다. .....(중략) 언니들에게 꼭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선을 행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지켜 하늘에 올라와 저희가 다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저는 우리의 인자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도 인자하신 주님께 언니들을 위해 간절히 또 끊임없이 청하겠습니다..... 편지가 길어졌고 말도 많이 했습니다. 저 자신 아무 덕행도 없으면서 감히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였군요. 참말이지 저는 마치 길가에 놓여져서 길을 가리켜 주면서도 저희들은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저 장승들 같지 않을까요. 그러나 죽는 사람의 말은 바르다고 했으니, 어쩌면 제 말도 과히 틀리지 않는지도 모르죠. 그러니 너그러이 읽어주십시오. 유희 (이순이의 또다른 이름으로 추정) 드림
[치명자산 전경]
[치명자산을 오르는 길가에 세워진 십자가의길]
[유항검 일가가 묻혀있는 묘소]
이 곳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과 유주성,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유해가 모셔져있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
[순교자 기념성당]
산 중턱을 깎아낸 가파른 골짜기에 세워진 동굴식 기념 성당으로 전면을 돌로 장식하여 흡사 중세 유럽의 수도원을 연상케 한다.
[성모바위-1]
성모상을 닮은 바위와 십자가의 모습, 이곳을 방문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기 때문에 바닥의 돌이 반들거릴 정도이다.
[성모바위-2]
[바위에 새겨진 십사처 중 제 14처]
[치명자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
[치명자산 정상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1]
[치명자산 정상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2]
♬♬찾아가는 길♬♬
천호 성지-6km-비봉파출소. 직진-어우리 삼거리, 우회전- 봉동(천호성지에서 16km)-14km-전주 일단 전주시로 들어서면 임실, 남원 방향의 신 17번 국도(아중로)를 타고 시외곽을 따라 남행한다. 남행하다 좌측으로 보이는 전주 역으로부터 약 6.7km 떨어진 곳에 다다르면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전주 방향으로 꺾는다. 다시 약 2.9km를 진행하면 또다른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회전 해서 작은다리(승암교)를 건너면 치명자산이다. 삼거리에 성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동정부부 합장묘가 있는 해발 300m 의 산정까지 오르는 오솔길은 전주시내 가본당별로 구간을 정해 가꾸고 있는데, 온갖 꽃과 벤치가 오솔길 굽이마다 장식되어 있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해준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합장묘가 모셔져 있고, 합장묘 바로 밑에는 가파른 산등성이에 치명자산 기념성당이 동굴성당양식으로 세워져 있다. 산 정상에서는 전주 시내가 한눈에 시원스레 펼쳐보여 순례에 지친 순례자들의 심신을 시원한 산바람과 함께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정부부 묘소에는 한 밤중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많은 천주교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던 그들 유중철, 이순이 동정부부의 깨끗한 신덕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요, 경계라 아니할 수 없다. 살아서 이루지 못했던 부부의 사랑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이어지길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 이곳에 실린 글의 내용은 전주교구 성지 소개에 실린 글을 옮겨왔습니다. ★
사진 박종일 임마누엘
첫댓글 오! 소주소녀나연. 저 사진에서 나연이네 집이 어디지?
저희집은 전주에서도 한시간은 더 내려가야해요..부안 거쳐서~ 전남 영광하고 경계에 가깝죠~ 이 성지가 제 기억으론 영화 약속"에서 배경으로 나온 전동성당 근처에 있던걸루 기억되네요...
이 글 내용도 그렇지만 ... 솔직히 이 배경음악이 더 눈물나게 한다...휴~~~~ 아직도 나의 신앙이 너무 부족해서겠지. 왜 드라마 가을동화의 애틋한 사랑이 더 생각나는걸까? ㅡ.ㅡ;;;
앗,, 언니,, ㅡ.ㅡ;;;;;;
나연이 쐬주 한병 가따줘라~
가을동화...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만큼 가슴아픈게 또 있을까?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삶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여 두 사람만의 사랑이 되길 이렇게...~~간절히...또 간절히 바랍니다. (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말만 하는 내가 너무 밉다. ㅡㅡ;)
첫댓글 오! 소주소녀나연. 저 사진에서 나연이네 집이 어디지?
저희집은 전주에서도 한시간은 더 내려가야해요..부안 거쳐서~ 전남 영광하고 경계에 가깝죠~ 이 성지가 제 기억으론 영화 약속"에서 배경으로 나온 전동성당 근처에 있던걸루 기억되네요...
이 글 내용도 그렇지만 ... 솔직히 이 배경음악이 더 눈물나게 한다...휴~~~~ 아직도 나의 신앙이 너무 부족해서겠지. 왜 드라마 가을동화의 애틋한 사랑이 더 생각나는걸까? ㅡ.ㅡ;;;
앗,, 언니,, ㅡ.ㅡ;;;;;;
나연이 쐬주 한병 가따줘라~
가을동화...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만큼 가슴아픈게 또 있을까?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삶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여 두 사람만의 사랑이 되길 이렇게...~~간절히...또 간절히 바랍니다. (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말만 하는 내가 너무 밉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