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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공부가 어려운건 외어라 써내라 다그치기 때문.
쓰는 건 컴퓨터 차지고, 우리는 읽는공부가 과제다.
훌륭한 글을 쓰려면 알맞은 用語을 驅使해야겠는데, 쓸 만한 語彙는 모조리 漢字語죠.
그래서 漢字工夫가 必須고. 漢字를 많이 알아야 좋은 大學, 좋은 職場을 꿈꿀 수 있죠.
아래에 펼쳐진 국한논설문이 쉬이 읽히지 않으시는 분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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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5) 冷戰과 新冷戰 難易度를 四級(千字) 超過 漢字 語彙 數로 봅니다, (54)
잘 알려져 있듯이, 冷戰은 第2次 大戰 以後부터 20世紀 末葉까지 當時의 超强大國 美國과 蘇聯이 世界를 各自의 陣營으로 再編한 채, 直接的 交戰 없이 軍事的 緊張 關係만을 維持하던 狀態를 指稱하는 歷史 用語다. (5)
여기서 類推하여, 最近의 國際秩序를 新冷戰으로 規定하려는 움직임이 國內外를 莫論하고 일고 있다. 東아시아의 境遇, 近來 美國과 中國의 對立 深化, 그리고 韓ㆍ美ㆍ日 對 北ㆍ中ㆍ러의 블록化 樣相으로 因해 이런 움직임이 더 큰 說得力을 얻는 듯하다. 特히, 世界 最大의 物流길 南中國海를 둘러싼 美ㆍ中 間의 神經戰, 美國의 韓半島 사드 配置 計劃과 中國의 反撥 等은 恰似 20世紀 後半의 國際政治를 聯想시키기도 한다. (6)
하지만 冷戰 時代를 綿密히 考察해 본다면, 新冷戰이라는 歷史的 類推의 適切性에 對해 深刻한 疑問이 들 수 있다. 그 時代의 美蘇 對立과 現在의 美中 葛藤에는 몇 가지 根本的 差異들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첫째, 過去 冷戰은 優先的으로 理念 對決이었다. 兩大 超强大國은 삶의 方式과 經濟 體制를 놓고 競爭하였고, 그 優位性을 宣傳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따라서 冷戰 時代에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信念 體系의 維持 및 傳播가 核心 課題였다. 一例로, 美國과 蘇聯이 全 世界를 相對로 留學生 誘致 努力을 기울였던 것은 이 까닭이었다. 美國 풀브라이트 奬學 프로그램이나 蘇聯 루데엔(民族友好大學)은 그들 陣營 內部에 體制 親和的 엘리트를 持續的으로 供給하기 爲한 代表的 機制들이었다. 엘리트를 넘어선 一般 大衆의 ‘理念化’ 作業도 活潑했다. 이에는 主로 兩國의 文化가 積極的으로 動員되었는데, 興味롭게도 美國은 靑바지, 콜라, 할리우드 映畫와 같은 大衆文化를, 蘇聯은 古典音樂과 公演藝術 等의 高級文化를 더 자주 내세웠다. 그리고 兩國은 相對方 文化 遮斷, 卽 自己 陣營이 되도록 反對便의 文化를 接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도 熱心이었다. 美國 陣營에 屬한 우리나라 音樂愛好家들은 20世紀 最高 피아니스트 舊蘇聯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公演을 冷戰 終熄 以後에야 直接 볼 수 있었다. (11)
둘째, 冷戰 時代 各 陣營은 經濟的으로 相互排他的이었다. 美國 또는 蘇聯 陣營에 屬한 나라들은 各各의 經濟圈 안에 묶여있었으며, 그 境界를 넘어서는 交易은 매우 制限的인 水準에서만 이루어졌다. 勿論, 最近 硏究들로 當時 西方과 東歐圈 間 經濟關係가 豫想보다 緊密했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亦是 그 交易 規模 面에서는 대단치 않았다. 東아시아에서는 自由陣營과 共産圈 間의 經濟交流가 더욱 微微했다. 우리의 境遇, 第2次 大戰 以後 美國이 設計한 東아시아 經濟圈, 卽 日本이 工産品 生産과 食糧 및 原料 消費를 하는 中心部로, 東南아시아가 反對 役割의 周邊部로 機能하던 體制에 屬해 있었기에, 蘇聯, 中國, 北韓을 包含하는 圈域과의 交易은 不可能했다. (11)
셋째, 事實上 準戰時 狀態였던 冷戰은 特定 陣營 所屬 國家가 이로부터 ‘脫營’하거나 그런 兆朕을 보일 境遇, ‘軍事’ 制裁가 隨伴될 수 있던 時代였다. 1968年 프라하의 봄 當時 蘇聯은 체코슬로바키아 共産黨의 自律的 外交 行步 摸索과 ‘資本主義化’ 路線을 堪耐하지 않았다. 美國 亦是 陣營 離脫 움직임에 敏感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1973年 칠레의 進步 政權 아옌데 政府를 무너뜨리기 爲해 軍部 쿠데타를 支援했던 것이나, 1981年 니카라과에서 社會主義 性向의 산디니스타 民族解放戰線이 政權을 掌握하자 이에 對한 叛軍을 組織했던 것은 그 두드러진 例였다. (8)
이런 冷戰과 달리, 오늘날 東아시아에서의 美ㆍ中 對立은 위의 要素 모두를 缺如하고 있다. 過去처럼 强大國이 自己 陣營 國家에게 强制했던 理念的 束縛은 事實上 存在하지 않는다. 經濟 活動 亦是 各 陣營 內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어느 한便에만 依存하지도 않는다. 只今은 陣營 內 獨自 行步를 軍事 介入으로 막을 수 있는 時代도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强大國 周邊의 國家들은 最大限 自己 國家利益의 觀點에서 움직일 수 있는 空間을 가진 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强大國 間의 ‘脫冷戰的’ 對立을 利用하여 外交的 實利를 얻어낼 수도 있다. (3)
하지만 우리 政府는 現在의 東아시아 情勢를 1960, 70年代 式 冷戰의 프레임을 通해 把握하는 듯하다. 그들은 北韓의 挑發 威脅에 對한 强迫觀念 속에서, 舊共産圈 國家들을 如前히 過去의 殘像을 가지고 바라본다. 過去 敵軍 陣營에 對한 對應은 지나치게 딱딱하며, 反對로 冷戰 時代 我軍 陣營에는 特別히 살갑다. 우리가 21世紀에 살면서 1960, 70年代에 思考가 머물러 있는 國家元首를 모신(?) 지 來年이면 10年이다. 첫 番째 5年이 인프라 投資와 經濟成長을 同一視하는 開發時代의 單純 論理를 踏襲했다면, 두 番째는 安保, 國民 統制, 陣營 結束에 執着했던 過去 冷戰 雰圍氣에 사로잡혀 있다. 過去를 學習함으로써, 過去로부터 偏向된 敎訓을 얻기보다는 過去가 現在와 어떻게 다른지를 理解하는 人物을 다음番에는 期待해 볼 수 있을까. (10)
【 韓國 】 2016. 8. 12. 〔칼럼〕 노경덕 光州科學技術院 敎授 西洋史
國漢變換 : 中大附屬初校長 李点榮 - 國漢混用文普及會 kukhanmoon@korea.com
국한문으로 고쳐 써봅시다
한자공부를 낱자 암기에 주력들 하는데, 이곳 국한혼용문을 읽고 삭이는 훈련이 더 좋습니다. 읽어내기에 익숙해지면 한자로 고쳐 쓰는 공부로 가는데 아래 Ⓑ <한글전용문페이지>의 문장 속 한자어를 한자로 바꾸는 작업을 말합니다. 장차라는 어휘라면 커서를 댄 채 자판의 한자키나 F9 키를 누르면 아래한글의 <한자로 바꾸기>창에 <장차>라는 한자어가 여러 개 뜨죠 . 찾는 어휘를 골라 엔터를 치면 ‘장차’가 將次로 바뀝니다. 긴 문장을 일부분씩이라도 매일 고쳐 쓰는 연습을 하고, 답지를 Ⓐ <국한문페이지>와 비교해 자가채점하고. 모르거나 틀린 단어를 메모해 두고 거듭 들여다보면 효과적인 공부가 됩니다.0000000 보급회00 김 치 억 -
----- Ⓑ 漢字 쓰기 연습용 한글전용문 페이지 -----
(4335) 냉전과 신냉전
잘 알려져 있듯이, 냉전은 제2차 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엽까지 당시의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각자의 진영으로 재편한 채, 직접적 교전 없이 군사적 긴장 관계만을 유지하던 상태를 지칭하는 역사 용어다. (5)
여기서 유추하여, 최근의 국제질서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근래 미국과 중국의 대립 심화, 그리고 한ㆍ미ㆍ일 대 북ㆍ중ㆍ러의 블록화 양상으로 인해 이런 움직임이 더 큰 설득력을 얻는 듯하다. 특히, 세계 최대의 물류길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ㆍ중 간의 신경전, 미국의 한반도 사드 배치 계획과 중국의 반발 등은 흡사 20세기 후반의 국제정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
하지만 냉전 시대를 면밀히 고찰해 본다면, 신냉전이라는 역사적 유추의 적절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시대의 미소 대립과 현재의 미중 갈등에는 몇 가지 근본적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과거 냉전은 우선적으로 이념 대결이었다. 양대 초강대국은 삶의 방식과 경제 체제를 놓고 경쟁하였고, 그 우위성을 선전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따라서 냉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신념 체계의 유지 및 전파가 핵심 과제였다. 일례로,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상대로 유학생 유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이 까닭이었다.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나 소련 루데엔(민족우호대학)은 그들 진영 내부에 체제 친화적 엘리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표적 기제들이었다. 엘리트를 넘어선 일반 대중의 ‘이념화’ 작업도 활발했다. 이에는 주로 양국의 문화가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는데, 흥미롭게도 미국은 청바지, 콜라,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소련은 고전음악과 공연예술 등의 고급문화를 더 자주 내세웠다. 그리고 양국은 상대방 문화 차단, 즉 자기 진영이 되도록 반대편의 문화를 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미국 진영에 속한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은 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 구소련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공연을 냉전 종식 이후에야 직접 볼 수 있었다. (11)
둘째, 냉전 시대 각 진영은 경제적으로 상호배타적이었다. 미국 또는 소련 진영에 속한 나라들은 각각의 경제권 안에 묶여있었으며, 그 경계를 넘어서는 교역은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이루어졌다. 물론, 최근 연구들로 당시 서방과 동구권 간 경제관계가 예상보다 긴밀했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역시 그 교역 규모 면에서는 대단치 않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권 간의 경제교류가 더욱 미미했다. 우리의 경우,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설계한 동아시아 경제권, 즉 일본이 공산품 생산과 식량 및 원료 소비를 하는 중심부로, 동남아시아가 반대 역할의 주변부로 기능하던 체제에 속해 있었기에, 소련, 중국, 북한을 포함하는 권역과의 교역은 불가능했다. (11)
셋째, 사실상 준전시 상태였던 냉전은 특정 진영 소속 국가가 이로부터 ‘탈영’하거나 그런 조짐을 보일 경우, ‘군사’ 제재가 수반될 수 있던 시대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자율적 외교 행보 모색과 ‘자본주의화’ 노선을 감내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진영 이탈 움직임에 민감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1973년 칠레의 진보 정권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던 것이나, 1981년 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반군을 조직했던 것은 그 두드러진 예였다. (8)
이런 냉전과 달리, 오늘날 동아시아에서의 미ㆍ중 대립은 위의 요소 모두를 결여하고 있다. 과거처럼 강대국이 자기 진영 국가에게 강제했던 이념적 속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활동 역시 각 진영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어느 한편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진영 내 독자 행보를 군사 개입으로 막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강대국 주변의 국가들은 최대한 자기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강대국 간의 ‘탈냉전적’ 대립을 이용하여 외교적 실리를 얻어낼 수도 있다. (3)
하지만 우리 정부는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를 1960, 70년대 식 냉전의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듯하다. 그들은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구공산권 국가들을 여전히 과거의 잔상을 가지고 바라본다. 과거 적군 진영에 대한 대응은 지나치게 딱딱하며, 반대로 냉전 시대 아군 진영에는 특별히 살갑다. 우리가 21세기에 살면서 1960, 70년대에 사고가 머물러 있는 국가원수를 모신(?) 지 내년이면 10년이다. 첫 번째 5년이 인프라 투자와 경제성장을 동일시하는 개발시대의 단순 논리를 답습했다면, 두 번째는 안보, 국민 통제, 진영 결속에 집착했던 과거 냉전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를 학습함으로써, 과거로부터 편향된 교훈을 얻기보다는 과거가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인물을 다음번에는 기대해 볼 수 있을까. (10)
【 한국 】 2016. 8. 12. 〔칼럼〕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서양사
오. 탈자가 보이시면 알려주십시오. kukhanmoo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