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萬德)은, 성은 김씨(金氏)이고 탐라의 양인(良人) 집 딸인데,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녀에게 의탁하여 생활하였다. 조금 나이가 들자 관부(官府)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는데, 만덕은 비록 뜻을 굽히고 기역(妓役)에 종사하였으나 자신을 기생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이 20여 세에 자신의 정상(情狀)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관아에서 불쌍하게 여기고 기안에서 삭제하여 다시 양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덕은 비록 집에서 용노(傭奴)로 생활하였지만 탐라의 장부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재화를 증식하는 데 재주가 뛰어나 물건의 귀천을 때에 맞게 판단할 수 있었으니, 값이 귀할 때는 내다 팔고 값이 천할 때는 사서 저장해 두어서 수십 년이 지나자 자못 부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성상(정조) 19년 을묘년(1795)에 탐라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죽었는데, 상께서 곡식을 선적하여 가서 구휼하라고 명하여 넓은 바다 800리에 돛단배가 베틀의 북처럼 자주 왕래하였으나 오히려 때에 맞추어 구휼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만덕이 천금(千金)을 덜어 내어 육지에서 쌀을 샀는데, 여러 군현(郡縣)의 사공들이 때에 맞추어 도착하니 만덕은 그 가운데 10분의 1을 가져다 친족들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관아로 실어 보냈다. 굶주린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구름처럼 관아의 뜰로 모이자 관아에서 그들의 완급을 구분하여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모두들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고 하였다.
진휼(賑恤.흉년을 당해 백성을 도와줌)을 마쳤을 때 목사가 그 일을 조정에 상주(上奏)하니, 상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회유(回諭)하기를 “만덕에게 만일 소원이 있거든 어려운 일인지 쉬운 일인지 따지지 말고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목사(牧使)가 만덕을 불러 상께서 회유하신 내용으로 유시하기를, “너는 소원이 무엇이냐?” 하니, 만덕이 대답하기를,
“소원하는 바는 없습니다만, 원컨대 한번 서울로 들어가 성상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만 2천봉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탐라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국법이기 때문이었다. 목사가 다시 그녀의 소원을 상주하니 상께서 그 소원대로 해 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관아에서 역마를 지급하고 이르는 곳마다 음식을 제공하게 하였다.
만덕은 한번 범선을 타고 만경(萬頃)의 구름 낀 바다를 건너 병진년(1796) 가을에 서울로 들어와 한두 번 채 상국(蔡相國.채제공)을 만나 보았는데, 상국이 그 정상(情狀)을 상께 아뢰니 상께서 선혜청에 명하여 다달이 식량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 때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의녀들의 반수(班首)가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만덕이 규례에 따라 내합문(內閤門)에 이르러 전궁(殿宮)에 문안하니, 각 전궁에서 여시(女侍)를 시켜 전교하기를 “너는 일개 아녀자로서 의기(義氣)를 내어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을 구제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다.” 하고,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반년 동안 머물다가 정사년(1797) 늦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만폭동(萬瀑洞)과 중향봉(衆香峯) 등 기승(奇勝)을 두루 찾아다녔는데 금불(金佛)을 만나면 번번이 정례(頂禮)를 행하고 정성을 다해 공양하였으니, 대개 불법(佛法)이 탐라국(耽羅國)에 들어가지 않아서 만덕은 당시 58세에야 처음으로 범우(梵宇)와 불상(佛像)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안문령(雁門嶺)을 넘고 유점사(楡岾寺)를 거쳐 고성(高城)으로 내려간 다음 삼일포(三日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에 오르는 등 천하의 아름다운 절경을 다 구경한 뒤에 다시 서울로 들어와 며칠을 머물렀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내의원에 이르러 돌아가겠다고 고하니 전궁에서 모두 전처럼 상을 내려 주었는데, 이때 만덕의 이름이 왕성(王城)에 가득하여 공경(公卿) 대부(大夫)와 선비들이 너나없이 한번 만덕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였다. 만덕이 떠날 때 채 상국에게 사례하고 목이 메어 말하기를,
“이생에서는 다시 상공(相公)의 존안과 모습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국이 말하기를,
“진 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는 모두 바다 밖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일컬었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한라산이 바로 영주(瀛洲)이고 금강산이 바로 봉래(蓬萊)이다.’라고 하였다. 너는 탐라에서 나고 자랐으니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白鹿潭)의 물을 떠 마셨을 것이고 지금 또 금강산을 두루 답사하였으니, 삼신산 가운데 두 곳은 모두 유람한 셈이다. 천하의 수많은 남자 중에 이렇게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지금 이별하는 자리에서 도리어 아녀자의 수다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고, 이에 그 일을 서술하여 〈만덕전(萬德傳) 〉을 지은 다음 웃으며 주었다.
성상(聖上.정조) 21년 정사년(1797) 하지일(夏至日)에 78세의 번암(樊巖) 채 상국은 충간의담헌(忠肝義膽軒)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