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의 힘
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한 가지 고백을 한다.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예전에 어떻게 글을 완성했었는지 의아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도 이제 이 느낌을 조금 알 것 같은데, 대가의 입을 통해 확인하니 큰 위로가 됐다.
이미 유명한 작가가 됐고, 또 이전에 명작을 남긴 사람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명작을 쓸 수 있을까? 골드버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또다시 명작을 써낼 확률이 높을 수도 있지만 지나친 기대는 독자의 소망일 뿐이다.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은 실제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래서 그녀는 글쓰기를 가리켜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그녀가 훌륭한 작가임을 입증하는 탁월한 비유가 아닐까? 글쓰기는 불편한 낯섦과 설레는 새로움의 절묘한 동행이다.
☆ 준비되지 않은 여행길에 나서다
내 평생에 딱 한 번,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한 달간의 긴 여행보다 더 촘촘하게 살아 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여행가는 것을 마치 출장처럼 치밀하게 준비하는 성향이 있었다. 내 업인 방송 제작·관리에 길들어진 습관 때문이었다.
그때는 제작 업무에서 벗어나 편성 피디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해외 연수의 기회가 있어 베를린에 열흘간 체류했다. 일정표를 보니 주말 이틀이 자유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은 틈틈이 서로의 주말 계획을 주고받았다. 쇼핑을 하거나 주변 마을을 둘러보거나 숙소에 남아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중 한 사람이 함부르크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무슨 심리가 작동했는지 나도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기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보았던 체코의 마을이 떠올랐다. 체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도시인 프라하는 카프카의 고향이기도 하면서 건축의 도시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볼 것인가?’
숙소 근처에 걸어갈 수 있는 기차역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을까? 토요일 새벽, 그렇게 나는 숙소를 나섰다. 기차는 어렵지 않게 올라탔다. 그런데 다른 기차로 갈아탈 때가 되자 슬며시 겁이 났다. ‘이러다 국제 미아가 되는 거 아닐까?’ 간신히 영어로 길은 물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현지인들의 선행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타고 있는 기차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프라하에 묵을 숙소는 있을까?’ 수많은 걱정이 설렘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인가? 아니면 여행 준비 중인가?’
당시만 해도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과정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안다. 여행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프라하 역에 내려 두리번거리다 한인 민박을 발견했다. 숙박비를 낸 후 손에 관광 지도 하나만 들고 무작정 걸었다. 동네가 그리 크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날 30킬로미터는 족히 걸었다. 카프카 생가에 들어가다 선글라스를 깨 먹기고 했고, 공중화장실이 유료인 줄 몰랐다가 말도 안 되는 실랑이도 벌였다.
지나고 나니 모두 추억이 됐지만, 추억 이상으로 느낀 것이 많았다. 프라하에서의 하루는 유럽 근대 역사의 힘을 온몸으로 느낀 여행이었다. 하루를 사흘처럼 보내며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깨달은 여행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도 내가 글을 썼다면 지금처럼 ‘그 느낌이 정확히 뭐였더라?’ 하고 머릿속의 기억을 뒤적거리는 일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여행이 삶의 한 부분이 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왜 즐거울까?’ 질문을 바꾸어봤다. ‘글쓰기는 왜 즐거울까?’ 이유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쓰기 역시 나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작업이 아닌가. 그 세계에서 마주하는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물론 새로운 세계에서 전혀 다른 나를 만나는 즐거움 이면에는 스트레스도 있다. 여행의 낯선 여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듯,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돌파해야 하는 상황이 꽤 많다. 그럼에도 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글을 쓰고 나면 반드시 무언가를 얻기 때문이다. 어제와 달라진 나를 발견하는 것은 글을 쓰지 않는 일상에서는 얻기 힘든 짜릿한 경험이다. 이 경험이 나를 또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 ‘일단 오늘 한 줄 써봅시다,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아주 쉽고 단순한 하루 3분 습관(김민태, 비즈니스북스,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2.26.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