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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사상 최악의 컴퓨터
바이러스 ‘CIH바이러스’ 대란
CIH바이러스의 범인 천잉하오(가운데).
사상 최악의 컴퓨터 바이러스 대란이
1999년 4월 26일 일어났다.
컴퓨터의 부팅기능을 아예 망가 뜨리거나
하드 디스크의 모든 데이터를 못쓰게 만드
는 CIH바이러스가 국내 수천개 기업과 관
공서의 PC를 감염시켜 일부 업무가 마비
되기도 했다.
경제적 피해규모가 국가적으로 20억-30
억원 규모로 추산됐다.대만 타이페이대
정보처리학과 4학년생인 24세 청년 천잉
하오(Chen-Ing-Hou)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된 CIH바이러스는 평상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잠복해 있다가 4월 26일
출현해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를 모조리
파괴하는 악성바이러스에 속한다.
천잉하오는 단순한 과시욕으로 인터넷
에 올렸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세계 각국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2014년 스페인 여객선 '볼칸 데타부리엔테 호'가
항해 도중 화재 발생(그러나 334명 전원 구 조).
▶2013년 북한, 회담 거부로
개성공단 잔류 인원 철수를 결정.
▶2013년 용인 경전철 개통.
▶2012년 오자와 이치로, 정치자금 문제
관련 하여 법원 으로 부터 무죄 선고.
▶2012년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한 험의로
국제 재판에 회부 되어 유죄 판결.
▶2011 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3일간의 일 정으로 북한 방문(〜 4월 28일).
▶2010년 오스트리아의 현 대통령
'하인츠 피서 재선 성공.
▶2008년 부산광역시의 개신교 복음방송 부산 극동방송(부산드드80 개국.
▶2008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산책을 나왔던
여 고생을 살해한 일명 '묻지마 살인' 피의자
이창주 (35세) 검거.
▶2007년서울대 무인항공기 ‘스너글’ 세계 첫 자동 이착륙
4월 26일 경기도 화성 서해안 간척지. 주황색 무인항공기 한 대가 공중을 선회하더니 갯벌 위 5m까지 고도를 낮췄다. 지켜보던 조암(32·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사과정)씨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비행기 엔진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워지더니 기체가 땅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조씨는 비행기를 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서울대 무인항공기 ‘스너글’이 세계 최초로 GPS(위성항법장치) 수신기 하나만 달고 자동 이착륙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기창돈(46) 교수와 학생들이 6년간의 도전 끝에 GPS를 이용한 무인항공기 이착륙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200번의 실험, 그리고 비행기 다섯 대가 부숴지는 난관을 거쳐 그들은 꿈을 이뤄내고 말았다.
5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노마시(市)에서 열린 미국항공우주학회 행사장. 기창돈 교수팀이 “관성센서 없이 단일 안테나 GPS 수신기만으로 자동 이착륙이 가능한 무인항공기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자 행사장이 술렁거렸다. 500여 명의 항공공학자들과 항공사 관계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관성센서란 비행기의 자세 정보를 감지하는 고가(高價)의 장비로 이 부품 없이 비행기가 자동 이착륙한다는 것은 학계에선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 왔다. 행사장에서 연구팀이 무인비행기의 자동이착륙 동영상을 보여주자 외국인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 교수팀은 위치·고도·속도 등 기존의 GPS 정보를 바탕으로 비행기의 기울기 등 자세 정보를 계산해 내는 노하우를 개발한 것이다.
연구는 2001년 시작됐다. 기 교수는 처음에 동료들로부터 ‘관성센서 없는 항공기 자동이착륙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연구팀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가능성을 엿보았다. 문제는 실전이었다. 기 교수는 “실전의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상처투성이인 스너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스너글(SNUGL)’은 연구팀이 지어준 날개길이 2.5m짜리 무인항공기의 이름. 지난 6년간 스너글의 비행 성적은 처참했다. 200여 차례를 날아서 20번 추락하고 5번은 완파(完破)됐다.
장비까지 포함해 대당 가격이 3000만원에 이르는 비행기가 떨어질 때마다 기 교수는 사비(私費)까지 털어가며 새 비행기를 장만했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새벽 일찍 비행장인 서해안 갯벌로 달려가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더 열심히 연구에 매달렸다. 대학원생 조암씨는 “시험 비행을 다녀오면 꼬박 이틀을 실험데이터를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착오와 오류를 반복·수정하면서 조금씩 성과가 보이자 뜻밖의 제안도 들어왔다. 2006년 10월, 기 교수는 한국인 브로커로부터 “아시아의 한 국가가 무인항공기 운영 기술을 사고 싶어한다”는 제안을 받았다. 기 교수는 국익을 생각해 단번에 거절했다.
마침내 4월 26일 스너글은 완벽한 자동 이착륙에 성공했다. 기 교수는 “GPS수신기는 관성센서 가격의 10분의 1에 불과해 무인항공기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제주관광산업고 우완 투수 김수완
제 41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효천고와의
경기에 서 대한민국 고교야구 역사상 15년
▶2006년 이란의 핵 실험 여파로 국제 유가 급등
▶2005년롄잔 대만 국민당 주석 중국 방문
▶2004년2004년 1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한국이 3.1%로 세계 1위 기록
▶2004년신목초교 신희범군,
청계천 소재 창작동요 대상 수상
“신나는 제 노래 부르며 아름다운 청계천가 거니세요.”
서울시가 실시한 ‘청계천을 소재로 한 창작 음악’ 공모에서 초등학교 5학년생이 동요 부문 대상(大賞)을 차지했다
26일 발표된 화제의 입상자는 신희범(11·서울 신목초등)군. 가곡·가요·가요가사·동요 등 4개 부문 중, 신군은 총 116편의 작품이 경쟁을 벌인 동요 부문에서 교수·작곡가 등 쟁쟁한 어른들을 따돌리고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 ‘청계천에 놀러가요’ 로 영예를 차지했다
대상 수상 노래 ‘청계천에 놀러가요’ 는 신군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그는 공모 소식을 듣곤 “청계천 복원 후의 멋진 거리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을 상상하면서 노랫말을 떠올리고 곡을 지었다” 고 했다
‘청계천에 시원한 물이 흐르고/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이어주는 다리 있죠/ 친구들과 즐겁게 수영하고 잔디밭에 뒹굴어요….’ 금세 떠오른 가사가 정리되자 멜로디는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1주일 가량 다듬은 끝에 경쾌한 노래가 완성됐다
신군은 유치원에서부터 피아노·바이올린 등의 악기를 배우며 음악과 절친한 친구가 된 소년. 곱고 투명한 고음의 목소리를 가져 ‘노래 잘하는 친구’ 로 인기 ‘짱’ 이다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듣던 신군은 자연스럽게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고 작곡을 배우게 됐다. 처음에 누나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곡을 연습하고 공부하다가 6, 7개월 전부터는 선생님 지도를 받고 있다. 게임이나 가요를 즐기는 또래 어린이들과는 달리 신군은 “작곡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만들고 동요를 부르는 것이 더 즐겁다” 고 했다
그에게 ‘노래 잘하는 비법’ 을 묻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노래할 때는요, 잘 불러야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해요. 곡을 따라 평화로운 마음으로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훌륭한 노래를 할 수 있죠.”
▶2004년이라크 새 국기 공개, 별 대신 초승달 문양
▶2004년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2500년 된 석관 공개
▶2004년제17대 국회의원 선거방송심의위원회,
4·15총선 개표 방송 관련 KBS-MBC에 중징계
▶2004년전쟁기념관, 여방오 중사
▶2004년 5월 호국인물에 선정
▶2004년미국 위조방지 50달러짜리 지폐 공개
▶2003년 국제 우주 정거장의 보급을 위해
'소유즈 우주선' 발사.
▶2002년 독일, 고교서 총기 난사
18명 사망 퇴학생이 교실서 인질극.
▶2001 년 삼성 중국CDMA사업 진출.
▶2001 년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출범.
▶2000년 개종위해 만행…교황청, 브라질에 사과.
▶2000년 참여 민주 사회 시 민 연대, 147억 원
탈세 험의로 삼성그룹 이재용을 국세청에 고발.
▶1997년‘영원한 북경시장’ 팽진 사망
▶1996년성수대교 복구 착공
▶1994년극진가라테 창시자 최배달 사망
최배달 어록
“적에게 너의 살을 주고,
적의 뼈를 부수며, 적에게 너의 뼈를 주고, 그 목숨을 취하라.
자신의 안전에 구애 받으면, 이길 수 없고,
진정한 사무라이가 될 수도 없다"
“무도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는 것뿐,
실전이 아닌 시합은 춤이나 체조에 불과하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실전공수(實戰空手) 그것 뿐이다"
”자신이 강함을 추구한다면 강하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무도의 궁극은 사랑이다”
“고향 산천을 어찌 잊어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어찌 잊어요,
내가 고향산천에 할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존심이 있어요”
“실전이 아닌 것은 인정받지 못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신용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신용이 없어지면 존경 받을 수 없다”
“세상은 넓고 상수(上手)는 많다.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내 선생이다”
“신용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돈을 뒤쫓지 말아라. 돈, 명예, 여자가 뒤쫓아오는 남자가 되어라”
“3D. 힘들다. 더럽다. 위험하다? 젊은 무렵, 내가 좋아했던 것 뿐이다”
“싸움에 임박해서 필사적이 되는 건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서는
누군들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랴.
문제는 기필코 이긴다는 신념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사물을 느낄 뿐이지만
기는 비어있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리니…”
“잔을 비운다는 것 가지고는 어림없다. 잔을 깨부숴라.
잔을 비운다고 하더라도 비어있는 ‘그대’가 있다면 그 잔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비어있음’이 그대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1994년남아공, 최초의 총선 실시
▶1994년대만기 폭발로 260여명 사망
1994년 4월 26일 저녁8시16분쯤 일본의 나고야 공항에 착륙하려던 타이베이 발 중화항공기가 착륙에 실패, 활주로 부근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사고는 활주로에 진입하던 비행기가 랜딩기어가 빠져나오지 않자 기수를 다시 올리는 과정에서 오른쪽 날개가 지면에 충돌하면서 일어났다.
사고 여객기는 대북 중정공항을 출발한 중화항공기 F140편으로 기종은 에어버스사의 A300600R형이며, 271명(승객 257명, 승무원 14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재일교포 1명을 포함해 모두 262명이 사망했고 9명이 구조됐다. 사고원인은 경험이 부족한 부기장의 조작 미숙과 음주인 것으로 밝혀졌다.
▶1991년강경대 명지대생 시위중 전경에 맞아 사망
▶1988년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6년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발생
>>> 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 >>> 콘크리트로 덮은 모습
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북동쪽 100km 지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곳에서 그린피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한 비극이 일어났다.
사고는 이날 새벽 1시24분, 가동 중인 4기 가운데 제4호기 원자로가 터빈발전기의 관성운전시험 중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시험가동 중 초고온이 된 핵연료로 인해 주위의 냉각수가 순간적으로 비등해 일어난 수증기 폭발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과 함께 지붕이 날아가고 원자로에 있던 핵연료가운데 3~4%가 공중으로 분산돼 동쪽 스칸디나비아 쪽으로 날아가 그 지역까지 오염시켰다.
누출된 방사능 물질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350배나 될 정도로 대규모 폭발이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간밤에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부의 특별지시가 없어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소련 정부가 공식적으로 폭발사고를 인정한 것은 이틀 후인 28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을 축소하는 데 급급해 "체르노빌 원전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해 총 3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4월 30일이 되어서야 반경 30km 이내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지만 이미 대부분의 주민이 방사능에 노출된 뒤였다.
1995년 발표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태로 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당했으며 최소 6,500명에서 3만 명이 사망했고 최소한 80만명이 피폭우려자로 분류됐다.
체르노빌 원전은 2000년 12월 15일 영구 폐쇄됐다.
▶1985년한미정상회담(한국시간 27일 새벽)
워싱턴서 개최
▶1982년경남 의령에서 우순경 총기난사
▶1979년중동평화조약 정식 발효
▶1978년미국 하원위원회, 주한미군 철군 수정안 통과
▶1965년인도, 파키스탄 국경에서 격전
▶1963년뉴욕 각 신문사 파업
▶1960년경향신문 복간
▶1960년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인 1952년 발췌개헌으로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1956년 대통령에 3선됐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됐고 이어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극에 달해 결국 이승만 독재와 탄압에 대항하는 4.19가 일어났다. 이를 일단락 짓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이날 하야를 발표했다.
▶1958년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회 국제해양법회의 개최, 대륙붕조약 채택
▶1954년제네바 정치회담 개막
1954년 4월 26일 한국 통일 문제와 인도-차이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UN의 한국 참전 16개국과 한국, 북한, 소련, 중국이 참가한 정치회담이 개최됐다.
한국을 대표한 변영태 외무장관은 5월 22일 UN감시 하에 남북한 자유선거 실시, 자유선거를 위해 언론자유·인권보장·비밀투표 보장, 이같은 원만한 성과가 확인되기까지 UN군의 완전철수 불가 등을 골자로 한 한국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안을 제시했다. 한편 북한을 대표한 남일은 6월 5일 외국군 철수 및 감군, 모든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전조선위원회 구성, 경제 및 문화 교류 등 6개항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회담개시 후 50여일이 지나도 양측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6월 14일 UN참전 16개국은 한국통일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기기로 결정하고 제네바회담의 결렬을 공식 선언했다.
▶1953년휴전회담 본회담 6개월 만에 개최
▶1952년일본 해상경비대 발족
▶1949년대한적십자사 조직법 국회 통과
▶1943년여성 소설가 강경애 사망
▶1941년독일군, 아테네 점령
▶1937년독일군, 게르니카 폭격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던 곳.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날,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Ⅲ와 콩커스 52를 주력으로 43대나 되는 폭격기를 게르니카 상공에 띄워 올렸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은 마을의 70%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주민 7,000여명 중 1,6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자 프랑코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지만 곧 독일군이 조준불량과 경험부족 때문이었다고 실토함으로써 독일군이 자행한 공습으로 판명됐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 때문이다.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피’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6월 4일, ‘게르니카’가 완성되자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933년경성방송국
조선어방송 시작(제1방송은 일어)
▶1925년힌덴브루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1916년스위스의 포토 저널리스트
비쇼프 출생 - 인간에 대한 이해, 강한 디자인 감각, 감각적인 빛의 사용으로 유명
▶1900년미국의 물리학자,
지진학자 리히터 출생 - 지진의 규모를 측정하는
리히터 척도 개발에 공헌
▶ 1890년 육당 최남선 출생
▶ 1889년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출생
▶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암살자 부스 사망
▶ 1731년 영국 소설가 다니엘 데포 출생 - 로빈슨 크루소 ▶ 1711년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 출생
▶ 1681년 서울에 지진 발생(숙종7년)
▶ 1607년 영국 첫 아메리카 이민단 버지니아에 상륙
▶ 1564년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출생
▶ 1412년 경회루 준공
'경회'라는 것은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삼아 그 아름다움을 뽐내며 연못 위에 우뚝 서 있는 경회루는 각종 달력과 문화재 책자에 단골로 등장하는 건물이다. 경복궁 내에서도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많아 이곳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경회루 내에서 보는 북악산 일대의 한양 모습은 최고의 차경(借景)으로 평가를 받는다. 자연과 어우러져 은은한 멋을 풍기는 경회루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에 더해서, 실제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경회루. 특히 경회루 내에서 보는 북악산 일대의 모습은 최고의 차경으로 평가받는다.
경회루의 건설과 ‘경회’의 의미
태조대인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 경회루는 없었다. 당시 이곳에는 작은 누각 정도만 세워두었다. 그런데 1412년(태종 12)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한 이후, 그 서루(西樓)가 기울어지고 위태하자 태종은 누각의 수리를 지시하였다. 공사의 총감독은 공조판서인 박자청(朴子靑)이 맡았다. 박자청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건축 기술을 인정받아 종 1품의 지위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박자청은 경복궁 서쪽의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루(樓)를 에워서 못을 파고 경회루를 건설하였다. 누각이 완성되자, 태종은 이 누각의 이름을 지을 것을 명하였고, 하륜이 그 이름을 경회루라 정하였다. ‘경회루’에 담겨 있는 이름의 의미는 하륜의[경회루기(慶會樓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공자께서 노나라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시기를,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을 잘 얻고 잘못 얻는 데 있다.” 하셨다. 대개 인군(人君)의 정사는 사람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사람을 얻은 뒤에라야 ‘경회(慶會)’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경회’라는 것은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니, 마치 [주역] 건괘(乾卦)의 구오(九五)가 그 대덕(大德)으로써 구이(九二)의 대덕을 보고, 지기(志氣)가 서로 맞아서 그 도를 행하는 것과 같이 하면, 모든 어진 이가 부류대로 나와서 국가가 창성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구름이 용을 따르고 범이 바람을 따른다는 것이다 (…) 옛일을 상고하건대, 요ㆍ순ㆍ우ㆍ탕ㆍ고종ㆍ문왕ㆍ무왕 같은 이가 임금이 되고 고요(皐陶)ㆍ기(夔)ㆍ백익(伯益)ㆍ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여상(呂尙)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 같은 이가 보좌가 되면 참으로 경회라 이를 것이다.
- [동문선] 제81권 [경회루기]
이름을 짓자,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경회루’라는 글씨를 쓰게 하여 그것을 편액으로 삼았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만난다는 뜻에 맞게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이곳에서 기우제가 행해졌고, 무과 시험이 치러지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둘레에는 못을 만들었는데 못이 깊고도 넓었으며, 연꽃이 심어져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성종대에 경회루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구름과 용과 화초들의 형상을 새겨 넣었다. 깊고 넓은 연못과 그 위에 수놓아진 연꽃, 그리고 그 사이를 헤엄치는 용의 그림자. 경회루는 궁궐 속에서 마치 신선의 세계와도 같은 곳이었다. 1477년(성종 8)에 이곳을 방문한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은 경회루의 용 그림자를 세 가지 장관(壯觀)의 하나라고 표현하였다.
유구국 왕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성종께서 경회루 밑에서 접견하였는데, 사신이 퇴관(退館)하여 통사(通事)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소.” 하였다. 통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 이것이 한 가지 장관이요, 영의정 정공(鄭公)이 풍채가 뛰어나고 흰 수염이 늘어져 배에까지 내려와서 조복을 빛나게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장관이요, 예빈부정(禮賓副正)이 항상 낮에 술 마시는 연석에 참여하여 쾌히 큰 잔으로 무수히 술을 마시되 일찍이 취한 빛을 보이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장관이오.” 하였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제7권
경회루의 야경.
경회루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
경회루에는 역사적 인물들과 얽힌 사연도 많다. 조선전기의 학자 구종직(丘從直)은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으로 있을 때, 경회루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가보고 싶어 하였다. 하루는 숙직을 하게 되어, 편복(便服)을 입은 채 몰래 몇 개의 문을 거쳐 경회루 아래에 당도하여 연못가를 산보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편여(便輿)를 타고 환관 몇 명을 데리고 경회루에 이르렀다. 왕이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하니, 구종직은 “신이 일찍이 경회루는 옥계요지(玉桂瑤池)라 바로 천상선계(天上仙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밤 다행히 예각(藝閣)의 숙직을 하게 되었사온데, 예각은 경회루와 그리 멀지 아니한 까닭으로, 초야의 천한 것이 감히 몰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하였다. 왕은 구종직에게 “경전을 외는가.” 하고 물었고, 구종직이 [춘추(春秋)]를 잘 기억합니다.”고 하자, 왕은 “소리 내어 읽으라.” 했다. 구종직이 [춘추]를 외워 읽는데, 흐르는 물과 같이 막힘없이 한 권을 마치었다. 다음날 세종은 구종직을 종9품의 말단직에서 종5품의 부교리(副校理)로 유래 없는 승진을 시켰다. 경회루에서의 왕과의 만남은 구종직에게 출세의 사다리가 되었던 것이다.
경회루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단종 3) 윤 6월, 단종을 압박하여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이 날,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경회루에서 전달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단종이 환관 전균을 시켜 우의정 한확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여, 간악한 무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 반란의 싹이 끊임없이 일어나니, 이제 장차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려 하노라.” 하였다 (…) 동부승지 성삼문에게 상서원에 가서 빨리 옥새를 내어오도록 명하고 균을 시켜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나오라 하고,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세조를 불렀다. 세조가 들어가니, 승지와 사간이 따랐다. 임금이 일어서니, 세조가 꿇어 엎드려서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손에 옥새를 들고 세조에게 주었다. 세조가 사양하다 재가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부축하여 나가라 하고, 군사가 호위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이날 박팽년은 단종의 전위에 분노하며 경회루 연못에 떨어져 죽으려 하였다. 성삼문은 이를 말리며,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上王)이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아야 장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한다면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죽음은 국가에 무익한 것이오.”라고 박팽년을 달랬다고 한다.
연산군에게 있어 경회루는 쾌락의 공간이었다. 연산군은 경회루의 연못 위에 채붕(彩棚: 채색 누각) 세 개를 만들어 놓고, 첫째 것은 만세(萬歲)라 하고 둘째 것은 영춘(迎春)이라 하고 셋째 것은 진방(鎭邦)이라 하였다. 세 누각이 산처럼 높이 솟구쳐 있어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또한,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경회루를 향락의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경회루 아래층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전국에서 뽑혀 온 기생인 흥청과 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놀았다. 경회루에서 국가 재정을 물 쓰듯이 쓰면서 기생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연산군을 두고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저주했다.
경회루는 1412년 태종 때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조선시대 사신의 접대와 궁중 연회가 베풀어졌던 공간이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면서도, 단종의 전위와 연산군대의 흥청망청 고사가 유래한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감상하면서 이곳을 거쳐갔던 역사적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 121년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출생 - `명상록`의 저자
https://youtu.be/RrnWFAx5vJg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