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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우니까...... 이런 글도 쓰게 되는 군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시리즈물로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재밌게만 읽어주신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즐감하시길.
창문을 열어보니 새까만 밤하늘 속에
눈송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괜한 감상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아무 기대없이 창문을
열었을 때 세상이 질식할 것만 같은 하얀색으로 가득 차 있으면 마음이 괜히 시큰해지곤 했다. 밤새 눈이 내리는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던 내가
어찌나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지금도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눈을 사무치게 좋아하는 감정에는 변함이 없다.
-어? 눈 오냐? 젠장. 내일 자대
복귀 안 하고 세영이랑 놀러나 갈까.
오랜만에 꿈같은 감상에 젖어 있는데 저놈의 개주둥아리가 또 입을 함부로 놀린다. 확 입을 귀 밑까지
찢어버릴까...... 컴퓨터로 켜놓은 음악소리에 발목을 까닥까닥 거리면서 소주잔을 쭈욱 들이키는 저 놈이 내 인생에 돋아난 잡초와도 같은
제이라는 녀석이었다. 군대 간다고 해서 이젠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줄 알고 축배를 들었었는데 이제는 휴가 나와서 저 지랄이다. 저를 보면은
인사보다는 욕이 먼저 나오고, 칭찬보다는 코웃음이 먼저 나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또 주머니에 손을 꼽고 쭐레쭐레 나를 찾아왔다. 한 손에는
슈퍼에서 제일 사이즈가 크다는 두꺼비 대병을 들고서 말이다 .
-뻥이라도 그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 좋겠다. 근데 넌 멀쩡히 여자친구
있으면서 왜 나 같은 우울한 솔로를 찾아왔냐?
-아, 세영이랑은 어제 같이 놀았어.
-하루 가지고 되냐? 휴가 나온 내내 같이
있어줘야지. 내가 여자친구 생기면 그렇게는 안 한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제 그동안 군대가느라 쌓아뒀던 빚을 한 방에 다 갚았다니까.
-빚을 갚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자 제이는 손에 담배를 꼬나들고서 허리를 들썩들썩 해 보인다.
-빠구리 말야.
빠구리. 어른들은 그렇게 논단다. 얘야.
나는 그대로 달려가 이단 옆차기로 그 녀석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녀석은 그대로 두 바퀴 굴러
하숙집 벽에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이놈의 개주둥아리는 도대체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떻게 친구 앞에서
하나뿐인 여자친구의 가치를 떨어트릴 수가 있는가.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놈이었다.
-이 새끼, 또 오바하고 자빠졌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똥바가지에 밥을 비벼먹든 알게 뭐냐? 대학교 2학년이면 이제 그 정돈 한 판 게임으로 즐길 줄도 알아야지. 너 혹시 내가 빠구리
떴다니까 질투하는 거 아냐?
-한 마디만 더 해봐라.
-어이구, 무서워서 픽 하고 돌아가시겠다. 이게 어디 휴가 나오신 형님한테
눈까릴 야리고 있어. 눈 안 깔어? 그러지 말고 술이나 받어라. 눈도 오고, 분위기 좋으니까 술맛이 쫙쫙 산다. 야.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녀석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눈도 오는데 내가 참아야지. 나는 건배도 하지 않고 술잔을 훌쩍
들이켰다. 제이 녀석은 또 내가 멋대가리 없는 새끼라고 투덜거린다. 멋대가리가 있는지 없는지 니가 봤어? 젠장. 녀석은 또 흥이 오르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대다가 내가 계속 눈만 보고 있자 군대에서 삽으로 눈 치우던 일을 떠벌리기 시작한다. 고 쬐끄만 삽까리로 무릎만큼 쌓인 눈을
팥빙수 떠먹듯이 슥슥 퍼담아 내는데 진짜 좆빠지게 힘이 드는 거야. 이마에선 연유같은 찐득찐득한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리고...... 아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언젠간 나도 군바리가 되겠지만 군바리들의 고충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녀석이 떠들어대든 말든
나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나이를 먹으면서 눈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예전에 철없이 눈을
좋아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면 좋으련만. 이미 그런 회상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릴 만큼 세상살이에 각박해진 것일까? 나도 군대에서 똥줄이
설만큼 눈을 치워보고, 나중에 차를 사서 서울 시내의 교통문제를 읊조리며 한숨을 푹푹 내쉴 때쯤이면 눈을 봐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나도 결국엔 그들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겐 눈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한 가지 있다. 일명 눈사람
사건.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겐 짝사랑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마치 아프리카 대초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한 마리의 암사자
같았다. 뒤로 단정하게 묶어 넘긴 새까만 머리카락하며 봉긋히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 그 맵시 있는 걸음걸이에는 절대 천박하지 않은
발랄함이 숨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발랄함에는 위엄까지 서려있었다. 그 어떤 남자들의 추파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마치 팽팽히
당겨져 있는 활시위 같았다. 그래서 언제든 제 몸을 튕겨낼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몸에서
튕겨지는 한 가닥 화살이고 싶었다. 저 멀리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사랑이란 과녁으로 날아가 단 한번에 관통시켜 버리는 그런 화살. 하지만 그녀가
나를 대하는 눈빛은 언제나 아끼는 동생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먼저 고백하는 건 죽어도 싫다고 생각했었다.
한 일 년을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었다. 남들보다 술을 잘 마신다고 치기를 부리던 나를 귀엽게만 바라보던 그녀. 나는 그녀의 그런 진지하지
못한 눈빛을 좀 더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꾸기 위해 드디어 고백을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스스로를 로맨티스트라 생각했었기에 결코 흔해빠진
방법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내 가슴팍을 툭툭 치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약국에 가서 감기약 한 봉지와
뜨끈뜨끈한 쌍화탕 한 병을 샀다.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송이도 샀다. 그리곤 그녀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컴퓨터 학원 앞으로 갔다.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서 그 학원 컴퓨터 학원 가방을 들고 다니는 순진하게 생긴 애를 하나 꼬셔다가 천원짜리 한 장을 쥐여 주면서 누구누구 선생님한테
갔다드리라고 약봉지를 쥐여 주었다. 꼬마애는 사탕을 질질 빨면서 알았다고 학원으로 들어갔고, 나는 느긋하게 전봇대에 기댄 채로 그녀가
뛰쳐나오기를 기다렸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장미꽃을 건내주리라.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돌아서서 어디론가 사라지리라. 그럼 필경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자연스러운 에프터 신청...... 거기서 나의 뜨거운
마음을 전해주면 볼 것도 없이 게임오버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내 시나리오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학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그녀의 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녀가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얼굴에 한 가득 떠오르는 저
황당해 하는 표정. 그래 바로 내가 노리던 바야. 나는 애써 얼굴에 표정을 지우며 뒤에 숨기고 있는 장미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약봉지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걸 알게 된 그녀가 갑자기 나를 향해 막 뛰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녀가 뛰어오는지 몰라 당황한 마음을 감출 데 없어 바짝 긴장한 채로 그녀의 얼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략 20미터쯤 되는 거리를
달려온 그녀는 내 앞에 급정거하는 자동차처럼 딱 멈춰 서더니 약봉지를 내 품에 쑤셔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나 감기 다 나았으니까
이거 필요 없어. 지금 무척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뒷모습만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나의 1차 프러포즈는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내가 장미 한 송이를 준비했단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갑자기 내가 그런 행동을 보이면 얘가 어디 아프나 하는 마음에 말이라도 붙여볼
법하건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허탈한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춘다면 천하의 로멘티스트 케이라고 불릴 수 없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는지 기회는 곧 돌아왔다. 마침 그녀의 생일 바로 전 날에 눈이
내렸던 것이었다. 아는 형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밖이 왠지 소란스러워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하늘 추락하는
그것을 보면서 쾌자를 불렀다. 눈이야 말로 여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아이템이 아니었던가. 나는 소주를 서너 잔 더 마신 다음
형에게 먼저 자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머니에는 그녀의 집주소가 적혀있는 조그마한 수첩만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눈을 계속 내리고 있어 골목길에 찍힌 누군가의 발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버리고 있었다. 재료는 충분했던 샘이었다. 그녀의 집은 약간 비탈진 곳에 있었는데, 그 골목길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해서 그녀의
집이 있는 곳까지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눈을 굴리면서 한 번 내려오는데 대략 이십분쯤 걸렸다. 양은 충분했지만,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이었다.
게다가 미처 장갑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올라 꼭 불에 데인 것 같았다. 개똥벌레처럼 눈덩이를 굴려 그녀의 집에 도착해보니
겨우 작은 수박만한 크기 정도 밖에 눈이 뭉쳐져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 눈덩이와 함께 언덕 위로 올라갔다. 눈덩이가 농구공만해졌다. 그렇게
왕복으로 열 번 정도 왔다갔다 했더니 대충 내 허리춤까지 왔다. 이만하면 눈사람 몸통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집 담벼락 아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직도 눈은 쉴새 없이 내리고 있어 내가 눈사람을 만드느라 생긴 자국을 그새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위해 이 한몸 아끼지 않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워 노래를 불렀다. 김현식의 골목길.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내 노랫소리가 너무 컸던지 갑자기 개가 짖어대기
시작했다. 왈왈! 그러자 온 동네 개들이 한 번에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건 내 노랫소리에 감동해서 우리 같이 불러보자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들어줄 수 없으니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시위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깡통이 너 입다물지 못해! 잠 좀 자자 제발!
그 소리는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방 창문이
바로 담장 위에 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들킬세라 고개를 푹 숙이고 두 다리를 오므린 채로 숨을 죽였다. 내 머리 위에서 그녀의
생생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무슨 놈의 눈이 이렇게도 징그럽게 내려? 토하겠다. 토하겠어. 내일 또 눈 치우려면 고생 꽤나 하겠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계속 눈에 대해 저주를 퍼붓더니 이윽고 창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딸칵 하고 불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로소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눈송이가 내 머리 위로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사람을 다 완성했을 땐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내 키가 그 당시 180쯤 되었으니까 눈사람이 내 어깨에 닿을 정도였으니
초대형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감각이 없어진 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면서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신문을 돌리는
한 소년이 나의 몰골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내 마음은 바닥에 싸였던 눈들이 다시 하늘 위로 승천할 만큼 가벼웠다. 형의 하숙집으로 돌아가
뜨뜻한 이불 속에 몸을 푹 파묻는데 형이 밤중에 어딜 갔다 온 거냐면서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몰라도 된다고 말하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점심쯤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한 다음, 날이 좀 어둑어둑해질 때를 기다려
그녀가 일하고 있는 학원으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그녀에게 선물할 은목걸이 하나가 보석함 속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무실 창문을 힐끗 쳐다보니 그녀가 마침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는 동상 때문에 반창고가 붙어있는 손으로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의 얼굴을 보더니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그녀의
책상 옆으로 가서 앉았다. 늘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고 와서 그런지 그녀는 오늘따라 무척 청순하게 보였다. 그녀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개
뽑아 하나는 날 건내 주고 하나는 자신이 훌쩍이면서 나를 향해 그 아름다운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놀러 온 거야?
-으응......
-너두 참 할 일 없는 모양이구나. 방학이라고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 거야?
-아냐,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
-에이, 또 거짓말한다. 누나한텐 그런 거짓말 안 해도 돼. 맨날 집에서 게임만 하지?
-으응. 사실은 맨날
게임만 해. 하하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도저히 그녀의 눈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여기서
당당히 준비한 멘트를 날려야만 했다. 누나 혹시 어젯밤에 산타크로스한테 선물 받았어? 뭐? 못 받았다고? 어허, 그럴 리가 있나. 분명히 산타가
누나네 집 담장을 넘는 걸 내가 봤는데. 뭐? 정말 없다고? 아, 맞다! 산타가 담장을 넘진 않았지. 담장 바로 앞에다가 선물을 놓고 갔지.
아마 그게 영어로는 스노우 맨이라고 하는 거라지? 응? 뭐라고? 그거 혹시 내가 만든 거냐고? 흐응. 글쎄. 누나를 정말정말 사랑하는 한 남자가
만들어 놓은 건 확실한데 그게 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정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일단 이걸 목에 걸어보던가. 누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특별히 준비한 은목걸인데, 쓰뎅 아니래. 진짜 순은이래. 야아, 요즘 같은 불경기에 순은이라니. 이 남자 진짜 누나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한번 목에 걸어보라니까. 그럼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거야. 응? 혼자선 목에 걸기 힘들다고? 저런, 내가 도와줘야겠는 걸. 자, 누나
이리로 와봐......
-너 혹시 누나한테 무슨 할 말 있지 않니?
나는 순간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아,
영리한 그녀는 이미 내 행각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으로 목걸이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래?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봐. 이 누나가 시간이 별로 없단다.
-아, 저...... 그게 말이야. 호
혹시 산, 산타를......
-응? 뭐라고?
-아, 아니. 혹시 누나네 집 담장에 말이야.
-응.
-그......
그 뭐시냐. 눈사람 말야. 괴, 굉장히 커다란.
-눈사람?
-으응. 거의 누나 키만한 눈사람 말야. 누나 혹시 못 봤어?
-......
머릿속에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 혹시 너무 유치한 짓이라고 웃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전에
감기약 사건처럼 무시당해 버리는 건 아닐까? 동상 때문에 쓰라린 손가락을 꼭 쥐고서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럴 땐 당당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봐야 한다고 책에서 읽었는데,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발목 근처의 미세한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케이야.
아,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있는 힘껏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울고
있었다.
-봤어. 눈사람 봤어. 담장 너머 하얀 눈덩이가 불쑥 튀어나와 있기에 나가봤더니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거기 서 있더라.
눈사람이 너무 커서...... 집 안으로 옮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옆집에서 손수레를 빌려다가 오빠랑 나랑 둘이 같이 옮겼다. 밖에서 그렇게
혼자 눈을 맞고 있는 걸 보니 얼마나 안 되 보이던지. 내가 집에 있던 밀짚모자를 씌어 줬어. 잘 어울리더라.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내
동공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그 큰 걸 집 안으로 옮겼다니. 그건 분명 내 사랑의 허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가슴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나오는 북처럼 저 혼자 쿵덕쿵덕 울려대고 있었다. 그녀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밀짚모자를 씌어 줬더니 또 혼자 그렇게 처량하게 있는 게 보기 안 좋은 거야.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아니? 장갑 챙겨들고
나와서 나도 눈을 굴렸어. 정말 오랜만에 눈사람 만들어 보니까 기분이 참 좋더라.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눈사람처럼 크게는 안 굴려지는
거야. 결국엔 어떻게 두 덩이 만들어서 몸통 위에 머리를 올려두긴 했는데, 그 눈사람 반밖에 안 돼. 얼마나 우습니. 담장보다 더 키가 큰
눈사람과 그 눈사람 허리춤밖에 안 되는 눈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나중에 날이 따뜻해지면 큰 눈사람은 끄떡없어도 작은 눈사람은 그냥 스르륵
녹아버리고 말겠지?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만약에 녹으면 다음에 눈이 왔을 때 다시 만들면 그만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누나가 내 말을
잘라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케이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지만...... 미안해. 미안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그리고 누나는 수업이 있다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야말로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고맙고 무엇이 미안하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아? 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더러워진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 저녁도 먹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버렸다. 은목걸이는 집으로 오는 길에 빗자루질을 하느라 쌓여진 눈더미 속에다 파묻었다.
-그래서? 그 후엔 어떻게 됐냐? 마지막 로멘티스트.
-로멘티스트 좋아하시네. 그건 그냥 객기였어. 객기...... 아무튼
결국엔 나는 정신차리고 공부를 해서 대학엘 갔고, 누나는 학원 강사를 계속 하다가 무슨 조그마한 회사에 경리로 들어갔어. 아무래도 학원 강사는
아무래도 돈이 안 됐던 게지.
-그게 뭐야? 그럼 결국엔 맺어지지 못했단 소리야?
-맺어지는 게 뭐냐. 지금까지 연락도 한 번
못하고 있다.
-야, 너 병신 아냐? 그 정도로 감동 먹여 놨으면 손으로 툭 치기만 해도 넘어오는 거 아냐?
-넌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 누나가 나한테 한 말을 잘 생각해봐. 암만 눈을 굴려도 내 눈사람보단 키가 작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날이 따뜻해지면 먼저 녹아버릴
거라고 했잖아. 그 말이 무슨 뜻이겠냐? 너도 머리가 있다면 녹슬기 전에 기름칠도 하고 좀 닦아도 보지?
-아...... 그게 그런 뜻인
거냐?
-그래, 그런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단다.
-푸하하. 그래서?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아직까지 여자한테 마음이 없다고?
에라이 호로 자슥아!
-닥쳐! 너 같은 개주둥이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아.
-에그 요 녀석아, 요 녀석아, 앞으로 형님한테
배울 게 태산같다.
나는 정말 그 날 이후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전화라도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소문에 의하면 그녀에겐 어머니가 없었다고 한다. 위로는 하는 일 없이 여자만 후리고 다니는 오빠가 하나 있었고, 또 밑으로는 오빠 못지 않게
철이 없는 동생들이 둘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던 건 어쩌면 그러한 가정배경 때문인지도 몰랐다. 연애는 상상도 못할 일이고,
학업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몸이 아프지만 수업을 해야했기 때문에 내가 준 감기약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이고, 눈사람을 마당 안에다 들여다 놓고 그 옆에 조그마한 눈사람까지 만들었으면서도 내 사랑을 거절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인간이란 동물은
그렇게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을 덜어놓고서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해가 뜨면 곧 녹아버린다는 걸 눈사람 본인은 모르지만, 눈덩이를
바닥에 굴리며 그걸 만들어가는 진짜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다. 언젠가 녹아버릴 거라는 것. 사라져 버릴 거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눈사람 만드는 것이 시들해지는 것이다.
-자, 한 잔 하면서 옛날 일은 훌훌 털어 버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 아니냐.
내가 세영이한테 부탁해서 소개팅이라도 주선해 볼까? 너도 잘만 꾸미면 몇몇 여자들 눈은 속여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안 그래?
-일없다.
닥치고 술이나 마시자.
하지만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밤새도록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한 남자와, 또
그 다음 날 그 눈사람이 안 되어 보인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어 그 옆에 함께 있게 해줄 한 사람의 여자를.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누군갈 좋아한다는 건 내리는 눈처럼 늘 더럽혀지지 않아야만 한다는 답답하도록 순진한 상상을.
후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도 이제는 예쁘고 마음 착한 여자 친구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또 한 번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말이다.
첫댓글 아주 읽기 힘들었다. 내용이 그래서가 아니라.....왠지 글이 눈에 안들어오네. ^^
그런가, 줄 간격을 늘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