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람 외 2편
홍인혜
오려진 듯 웃지만 손쉽게 구겨지는 사람 가슴에 손을 넣어 점자 같은 흉터를 쓸어보는 사람 딱 한 장만큼 자주 부끄러운 사람 흘러드는 음악에 얼룩지는 사람 젖은 발을 끌며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 마른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 팔을 길게 뻗었다가 천천히 접는 사람 조금씩 늦어지는 사람 매일 피부에 일상을 적어 넣는 사람 까맣게 번성하는 단어들 더는 빈칸이 남아 있지 않은 몸 오늘을 남기기 위해 어제를 문질러 지우며 조금씩 얇아지는 사람 비가 쏟아지던 날 나무로 된 사람이 불어나고 솜으로 된 사람이 무거워지고 유리로 된 사람이 영롱해지는 동안 조용히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사람 오래전 누군가 손바닥에 그려줬던 지도를 꺼내보는 사람
파본
밤이 우리에게 버터 칠을 한다 큰 입으로 너와 나의 귀를 부드럽게 삼킨다 폭발하는 고요 속에 어둠의 섬모가 무성해진다 우리는 목소리가 탈색되어 즐겁게 후퇴한다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이야기를 넘겨짚는다 밤의 농담엔 뼈가 없다
밤은 정체를 덧칠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찾다가 밤에 걸려 넘어진다 너와 나는 입술을 맞대고 암호를 공유한다 바, 하고 벌리고 암, 하며 가둔다 내일도 밤의 복판에서 만나자 단단히 약속하지만 흐르는 혀에는 좌표가 없다 우리의 약속은 언제나 불시
밤의 품에서 모든 윤곽은 곤죽이 된다 드디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사이좋게 숨이 죽는다 검은 종이에 인쇄된 검은 글자들처럼 너와 나는 같은 페이지에서 느긋해진다 하얀 날이 우리를 도려내도 뭉뚝하게 웃는다
소설
십일월의 공기엔 푸른 이빨이 섞여 있지
나는 살을 감추며 버스를 기다리네
점퍼마다 새를 가둔 사람들
모여 서서 날개뼈를 웅크리고
"들었어?
오늘이 소설이라니"
문듣 올려다보는
이마에 차가운 느낌표가 찍히네
나는 주머니 속에 구겨져 있던
손바닥 한 장을 하늘 아래 펼친다
내리는 것을 받아 적으려고
문법에서 탈주한
플롯에서 낙오
하루는 무수하고 사람들은 숱해서
내가 바라는 건 내리는 것 내려버리는 것
노선도에서 신분증에서 핏줄에서 오늘이라는 소설에서
배경이 하얗게 살찔수록
길 위의 인물들 앙상해져가고
깃털 하나가
점퍼를 비집고 나와
눈송이에 섞이네
투명한 새가
투명한 파국을 향하네
― 홍인혜 시집, 『우리의 노래는 이미』 (2022 / 아침달)
홍인혜
카피라이터, 만화가, 시인. 2018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지은 책 『루나파크』『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혼자일 것 행복할 것』『고르고 고른 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