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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오 5,1-12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유혹할 수 없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어떤 분인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그리 깨끗하고 거룩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오랜 민담 중에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천상의 존재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숲속에서 빛나는 죽순을 발견한 나이 든 대나무를 잘라 파는 노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죽순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작고 빛나는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기뻐서 그는 그녀를 아내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를 딸로 키우며 그녀의 이름을 가구야히메(가구야 공주)라고 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꾼은 숲으로 돌아올 때마다 다른 대나무 줄기에서 금과 보물을 발견하여 금세 부자가 됩니다.
가구야 공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노인은 시골의 친구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딸을 높은 귀족과 결혼시키기 위해
황제가 사는 도시로 이사 나와 커다란 집을 짓습니다.
가구야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각지에서 귀족들이 그녀의 결혼을 청하러 찾아옵니다.
모두 고위 왕자인 다섯 명의 끈질긴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주장하지만, 가구야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기를 꺼려 각 구혼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깁니다.
그녀는 신화 속 섬의 전설적인 보석 가지와 부처의 구걸하는 돌 그릇 등 희귀한 보물을
각 왕자에게 요청합니다.
각 구혼자는 결국 속임수나 패배로 실패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격과 무가치함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일본 천황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녀에게 구혼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녀의 온화한 성격과 신비로움에 반해 그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냅니다.
가구야는 그를 좋아하고 그의 친절함을 존경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밝힙니다.
어느 날 밤, 가구야는 자신이 실제로 달에서 왔으며 곧 천상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양부모에게 밝힙니다.
상심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지구에 머물게 하려고 노력하고, 황제는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올 천상의 존재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원을 보냅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천상의 행렬이 내려오고, 깃털 옷을 입은 가구야는 출발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줄 메모와 불멸의 비약이 담긴 약병을 남겨 둡니다.
그녀가 떠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 황제는 비약을 마시지 않기로 했고, 그녀 없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대신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불로장생약을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지산(문자 그대로 ‘불멸의 산’을 의미함)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가구야 공주에 대한 천황의 영원한 기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구야는 이 지상의 존재가 아님을 알고는 이 지상의 모든 유혹에 물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오늘 제2 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상에서 하느님 자녀임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면 이 지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는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처럼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 독서에서는 오로지 구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가 힘과 재산으로 누르려 했을 때 그저 술통에 누워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구약의 욥은 다 잃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력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런 성인들을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다 가진 이들은 죄를 짓지 않기에 성인들입니다.
다 주시는 분은 전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묵시7,2-4.9-14 1요한3,1-3 마태5,1-12ㄴ
성인(聖人) 옆에 살기 힘듭니다!
저처럼 살짝 수준 떨어지는 수도자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옆에 살다가 과로사한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백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도 결코 바오로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가였습니다.
넘쳐나는 뒷골목 청소년들, 산업화의 착취물로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을 많이 잘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 돈보스코가 전혀 다른 장소인 두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돈보스코와 함께 사목했던 제자들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상상이 쉽게 갑니다.
저는 늘그막에야 철이 들어 요즘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할 일,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태안에 있었는데, 오후에는 서울에 찍고 저녁엔 대전 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뛰어다니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부담이 될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분들도 성인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게 다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든 성인 대축일 강론>
(2024. 11. 1. 금)(마태 5,1-12ㄴ)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그곳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 곳이어서 놀라고, 그 좋은 곳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만 한 자기가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고, 절대로 천국에는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들어와 있어 놀란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곳이어서 놀라고, “남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져도 나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자기가 들어와서 놀라고,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옥에 와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천국은 “제가 어찌 감히...” 라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곳, 지옥은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라고 화를 내고 항의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위선자들만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큰소리쳐도 안 되고,
“천국에 가기는 틀렸다.” 라고 스스로 포기해도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충실하게 노력하면서.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매 순간 순간 믿고 회개하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나중에 얻게 될 기쁨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주는 진통제가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바로 그 기쁨을
얻어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사도들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고난 자체가 기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뭔가 덜 하신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고난은 예수님 수난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사도들과 신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진행 중인 일이고, 종말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3) ‘성인들’은 ‘이곳’에서부터 성인으로 살았던 분들입니다.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그곳에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성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성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과 천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부터 ‘천국의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곳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성인들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이곳이 천국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은 우리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그렇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한 분들을 기리는 날이고, 동시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