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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인
잠 10:6-12
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이 썩게 되느니라
8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 올바로 살아가려고 몸부림 치는 이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나, 못된 짓 꾸미며 남을 짓누르고 착취하는 자, 하는 말마다 `숨통 조여, 짓눌러, 고문해.' 7) 올바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칭송을 받으나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은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죽일 놈이란 소리만 들으리라. 8) 슬기로운 사람은 남이 뭐라고해도 그 말에 열심히 귀기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이 망하는 길인 줄 알지도 못하고 혼자서 떠들어대기만 한다. 9) 바른길 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안전할 것이나 구부러진 길 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그 행실이 밝히 드러나리라. 10) 뒤에서 욕만 하면 둘 사이가 벌어질 것이나 앞에서 대놓고 서로의 잘잘못을 이야기하면 차라리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11) 올바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은 하는 말마다 죽임이 아닌 살림을 이야기하지만, 못된 짓 꾸미고 남 짓누르고 착취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하는 말마다 `숨통 조여, 짓눌러, 고문해.' 12) 증오는 갈등만 낳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입이 미련한 자, 바른 길로 행하는 자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의 삶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언어와 그 영향(6-7) ‘의인의 입에는 복이 임한다.’는 히브리어 숙어로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온갖 복을 다 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도 복을 베풀 수 있으며 족장, 제사장, 왕은 복을 중재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의인에게 주권적으로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악인의 입에 있는 ‘독’은 기본적으로 ‘폭력’이며 ‘머금다’는 ‘채운다’는 뜻으로서 악인의 입에는 폭력적인 말이 가득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인에 대해서는 입으로 축복을 넘치게 빌어주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악인의 입에서는 저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현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의인을 기억할 때 칭찬을 할 것입니다. 칭찬은 단지 그에 대하여 좋게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은 그 사람처럼 복받기 원합니다’라는 기원형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악인의 이름은 썩을 것입니다. 악인이 죽은 후에 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생의 비애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전 1:11).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한 기억을 없애 버린다’는 구약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시 9:6; 34:16). 악인의 입에는 폭력과 저주가 가득하였지만 그의 말과 그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람에게서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상과 벌(8-12) 의인은 마음이 지혜롭고, 바른 길로 행하며, 계명을 받고, 걸음이 평안하며 그의 입은 생명 샘이며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의인은 ‘자기 눈에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3:7)과 대조되며, 그는 스승이나 부모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필요한 줄 알고 그들의 명령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는 더욱 성숙하고 완성되어 가야 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굽은 길로 행하며 눈짓하며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하여서 멸망을 받습니다. 악인의 입에는 독이 머금어 있습니다. 함부로 말을 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것은 내적이어서 보이지 않지만, 입술은 외적이어서 잘 드러납니다. 입술이 미련한 자는 언어생활에 있어서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과 다툼을 일으키며 결국 멸망을 받습니다.
적용: 언어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힘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입술은 사랑으로 충만하십니까?
미국의 어느 70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일과는 할 일 없이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원봉사자가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앉아 계시는 것보다 그림을 배워보시면 어떠세요?"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지금까지 제대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너무 늦었어."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의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더 문제 같은데요?" 자원봉사자의 말에 할아버지는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의 격려 속에서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101살에 22번째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습니다.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던 미술가 해리 리버맨입니다.
< 설 교 >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 이국진 목사
오늘 말씀 6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이고, 악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매절 매절 대비시켜서, 악인의 모습과 의인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말씀이 쭉 연달아서 나오고 있습니다. 한 절씩 한 절씩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예로 들면서,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한다고 그랬는데, 악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아니라 입을 언급하면서, 그 입은 독을 머금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독을 먹으면, 머금으면 어떻게 되죠? 죽는 거죠. 사망에 이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지만,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 독을 머금었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데요.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악인의 경우에는 입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 수사적인 표현법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어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서양의 어법 같은 경우는 같은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말을, 다른 단어를 써서 다르게 표현하기를 잘 합니다. 따라서 한 번은 머리를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도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입도 복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머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는 화가 임하는 것이죠.
그래서 표현은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표현을 보면서, “아, 그러니까, 의인에게는 머리에만 복이 임하고, 악인에게는 입에만 독이 임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도 복이 임하고 입에도 생명이 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도 화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인을 이야기할 때는 칭찬한다는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칭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악인의 경우에는 그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름이 썩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음식이 아닌데, 그냥 물질이 아닌데, 왜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했을까요? 그리고 도대체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있는 말을 보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인의 이름이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의인의 이름이 칭찬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과 대조되고 있는, 대비되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이름이 썩을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당하게 되고, 의인의 이름의 경우에는 칭찬을 받게 되겠지만, 악인의 이름의 경우는 비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고, 싫어하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계명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의인이죠. 계명을 받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 계명을 받는 자가 곧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그런데 정반대로 악인의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악인은 입이 미련하게 되고, 곧 멸망할 거라고 했는데, 그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인과는 반대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이 지혜롭고, 그 마음에서 계명을 받게 되지만, 미련한 자는, 악한 자는 그 입이 미련해서 멸망할 거라고 하는데, 역시 의인의 경우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입과 마음 전부를 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계속해서 9절 말씀에서도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의인을 이야기하는 거죠. 의인은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 계명의 말씀에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텐데,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평안함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고,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옳은 길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편법의 길로 가는 것이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죠. 굽은 길로 가는 것이죠. 바르지 못한 길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굽은 길로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드러나리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드러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그 악행이 발각되고, 그 악행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발가 벗겨져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그런 대로 나는 잘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면서 발각되지 않으면서 그래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그래서 괜찮은 줄 알지만, 그러나 잠깐의 성공처럼 보이는 것도 금방이고, 얼마 뒤에 가면 결국 그 악행들이 하나씩 둘씩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숨기운 것이 감추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여기서 눈치 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눈짓 하는 얘기는 속임수를 쓴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눈짓을 하면서 모략을 저지르고,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으로, 그래서 악한 일을 하려고 눈짓을 하고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속임수를 쓰게 되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인 반면에, 또 근심을 끼치게 되고 입이 미련한 자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는 결국 그 입이 생명의 샘이라. 살아나는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는, 결국 독을 머금고 죽을 수밖에 없는 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읽은 6절에서부터 11절의 말씀에까지 의인과 악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강조하고 이렇게 강조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의인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형통함이, 복이, 생명이, 칭찬이, 평안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오 미련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는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화가 있을 것이고, 근심이 있을 것이고, 비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극명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오늘 저녁 시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사실을 그게 복된 것이고, 그게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잠언서를 살펴보면서 뭔가 기발한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잠언서에서 일관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말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게 그게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또 귀 기울이고 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다시 또 듣고 또 들어야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이 말씀과는 정반대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많이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만, 우리가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우리들의 집 안에서 우리들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 현장 속에서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런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죠. 의인의 머리에는 화가 있을 뿐이고, 이 세상에서 재주껏 악을 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의인의 이름은 무시당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게 되느니라가 이 세상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때그때 순발력을 발휘해서 이득을 취하는 게 그게 가장 현명하니라 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것이죠. 바른 길로 가면은 멸망할 뿐이고, 이리저리 묘수를 찾아 다녀야 결국 성공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를 듣는 것입니다. 눈치껏 해야 근심이 없이 사는 것이지, 눈치 없이 직진만 하고 성경 말씀대로만 살다가는 멸망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 압수수색 당하기도 하고, 패가망신 당하기도 하겠지만, 악인들과 함께가 되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귀에 들리게 되는 것이죠.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똑같이 들 것이라고 유혹했던 그 사탄의 유혹이 그때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해서 내용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또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이 세상에 잘못된 길로 미혹을 받아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주님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매일 아침마다 저녁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우리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이 있어서 다툼이 일으켜지는 그런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을 가리는 그 상황, 이 두 가지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미움을 통해서 다툼이 나타나는 그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이 가려지는 이 두 극단적인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완전히 다른 상황인데,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앞에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미움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사랑을 가지고 모든 허물을 가릴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허물이 있는 사람을 볼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 두 가지 반응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미움을 미움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사랑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이 두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허물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허물 투성이의 인간들입니다. 허물투성이의 인간과 허물 투성이의 인간이 만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요. 이 허물 투성이에 인간들이 서로 만나 살아가는 가운데, 그 허물을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하나는 미움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는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냐면, 미움으로 반응합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늘 우리가 쉽게 나타낼 수 있는 반응이 미움의 반응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예가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바리세인들의 경우를 볼 수가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잘못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세리를 보면서 세리들의 잘못을 지적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비난했고, 여러 가지 잘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그들의 허물을 지적한 것이죠.
왜 바리새인들은 그 허물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잘못들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그렇게 다툼을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던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잘못을 비난하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적어도 내가 비난하고 그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될 거라고 하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나는 공정과 상식의 사람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에요. 남을 비난하면 나는 그 비난에서부터 면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착각일 뿐, 그렇게 된다고 해서 자기가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예전에 우리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데려다 줄 때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 아이를 고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둘째 아이를 중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리고 교회로 출근을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했었는데요. 하루는 고등학교에 가게 됐는데,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 건물 밖에 줄을 쫙 서 있는 거에요. 이상하다. 왜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이렇게 학교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밖에 저렇게 서 있나?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날 그냥 아무튼 돌아갔습니다. 근데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와서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전날 어느 학생이 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했다는 거예요. 뭐라고 낙서를 했냐면, “나는 내일 총을 가지고 와서 누구를 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낙서를 화장실 벽면에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녁 때 청소부들이 학교 건물들을 청소를 쭉 하는 가운데, 그 화장실에 있는 그 낙서를 보고, 교장 선생님에게 보고를 했고, 학교가 발칵 뒤집혀진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학교 문 앞에 메탈 디텍터(metal detector)를 설치해 놨습니다. 마치 공항의 검색대와 같이,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메탈 디텍터를 학교 문 이곳저곳에 세워놓고, 학생들 한 명씩 한 명씩 그 메탈 디텍터를 통과하게 만들면서, 가방을 조사하고 한 명씩 한 명씩 혹시 총 가져왔는지, 다 검사하고, 그리고 그 학교로 모든 학생들이 들어가게 됐는데, 입장하는 데만 한 2시간 3시간 걸려서 그 학교 안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다 불러놓고, 왜 오늘 아침에 이렇게 학교 들어올 때 이렇게 검사를 했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낙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보완 조치로 인해서 이렇게 하게 됐다라고 학생들한테 설명을 쫙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세상에 어떤 그런 나쁜 놈이 그런 낙서를 한 거야?” 하면서 막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그런데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 들어 오라고 할 때, 알고 보니 그 학생이 낙서를 한 거예요. 도둑이 제발 저린 거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나는 그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남을 비난하면서 나는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정죄하면, 그러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게끔 착각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속는 그런 반응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그런 생각입니다. 결국 그 학교는 그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학생은 영국 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추방돼서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왜 허물이 있는 모습을 보면, 왜 비난하는가? 비난하면서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그런 자기 착각을 하면서 자꾸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9절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라고 하는 말씀처럼, 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잠깐 동안 속일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고, 더더욱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는데요. 결국 그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변화시킬 수 없고, 바로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잘못한 것을 책망하고 지적하면, 그러면 그것을 고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툼만 일으킬 뿐이고 미움만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모른 척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방치해 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나 혹은 우리들의 자녀들이나 우리 성도들이나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모른 척 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냥 옳은 말을 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복시켜주고, 돌이키게 만들기 위해서 정말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사랑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한 여인을 끌고 오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돌 하나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저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 여인을 향해서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몰려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그렇게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 돌을 들어야 내가 자신들의 죄가 감추어지기 때문인 것이죠.
그들을 향해서 돌을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 여인만 죄인인 줄 알았는데, 나도 죄인이구나! 나도 허물이 많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사람들, 한 줄기 예수님의 말씀의 빛의 줄기가 그들의 양심에 전달되게 될 때, 그들의 양심에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게 하게 될 때, 결국 그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물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허물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죄만 해서는 그 여인을 살릴 수가 없고, 사랑으로 그 여인을 회복시켜주시고 살리기 위해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접근해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봤던 만화 중에 하나가 있었는데요. <목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잡지에 간단하게 성경을 소재로 한 만화가 네 컷짜리 만화가 수록돼 있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한 한 30년 전에, 아마 그때 나왔던 만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바로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화를 그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 컷에서 돌이 하나 날아갔습니다. 돌이 날아왔는데 어디서 날아왔을까요? 하늘 위에서 날아, 하늘 위에서 날아와서 그 여인의 머리를 탁 때리고 돌이 떨어지니까, 그 다음 장면에 그 여인의 머리에 혹이 이만하게 나고, 그다음에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 장면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보시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발 제가 하는 일에 방해 좀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재밌게 웃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만든 만화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왜곡할 수가 있을까?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의견에 통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신성 모독적인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 이거 항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 만화를 생각하고 있는데,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는 만화예요. 그게 맞는 만화에요. 우리들은 그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돌을 던지지 않으셨어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지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을 살리신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난 거예요. 우리가 허물이 있을 때, 우리의 허물을 보고, 하나님께서 심판해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잘못됐다고 심판해버리고 죽여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을 감싸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의 매닮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볼 때마다, 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비난하고 욕하면서, 미움이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결과를 나타낼 게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모든 허물들을 덮으며, 또한 회복시켜 나가는 그런 믿음의 귀한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질 때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주옵소서. 사랑으로 허물을 덮을 수 있고, 그리고 따뜻하게 반창고처럼 붙여서 회복시키는, 그런 평화의 도구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입은 생명의 삶
잠 10:6-12 / 영문장로교회
우리 얼굴에 여러 기관이 있는데 눈이 창문과 같다면 입은 출입문입니다. 집에 문이 있어야 드나들 수 있듯이, 입은 곧 몸에 문이 되어서 음식물을 안으로 들어 오게 하고, 마음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입은 인간을 대표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를 셀 대에 <인구 (人口)>. 사람의 입이라 그 말입니다. 또 한가족을 식구라고 하는데 한상에서 밥을 먹는 입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입과 짐승의 입은 다릅니다 짐승의 입은 먹기만 하면 되지만 사람의 입은 먹기도 하고, 입을 통하여 마음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입에는 위장으로 통하는 이이 있는가 하면, 마음으로 통하는 입이 있습니다. 위장으로 통하는 입이 먹는 입이라면 마음으로 통하는 입은 말하는 입이라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위장으로 통하는 먹는 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먹는 입이라고 아무 것이나 구별없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에 많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은 먹는 것을 구별합니다. 구약 레위기 11장에 먹고 마시는 규례가 아주 세밀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한 동물은 먹고 부정한 동물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한 동물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발의 굽이 갈라졌고, 또 되새김질 하는 것, 소나 양이나 염소나 이런 것들은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동물은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또는 돼새김질 하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돼지는 굽은 가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돼지같은 것은 부정한 동물로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 돼지고기엔 지방질이 너무 많아서 콜리에스톨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인병 또는 고혈압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학적인 상식도 없고, 일일히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아 저것은 되새김질하는 것이구나, 저것은 굽이 갈라졌구나, 그래 정한 동물이라 하여 먹고, 그렇지 않으면 먹지 말도록 이렇게 구체적으로 눈으로 보면서 판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규례를 정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한 동물 가운데 물고기같은 경우 이 물고기 가운데도 비늘이 없거나, 지느러미가 없으면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비늘이 없거나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독이 많습니다. 장어라든지 복어라든지 엄청난 독이 있습니다. 복어 알 하나로 3,000명을 죽일 수 있는 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이 있다, 없다 일일히 설명할 수 없으니 비늘이 없는 생선, 지느러미가 없는 생선은 아예 먹지 말아라. 독이 있는 것이다.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실수하거나 먹는 일로 인하여서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러한 규례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에는 피를 먹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 먹지 말라 하는 말씀입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볼때에 짐승을 죽일 때에, 여러분이나 저의 몸 속에는 독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동물은 독이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때에 피 속으로 전부 그 독이 모인다고 합니다 사람이 분노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아드레날린이 피 속에 급격히 올라 가서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때에 소위 말하는 엔돌핀이 많이 나와서 우리의 모든 질고를 모든 병을 제어할 수 있는 큰 힘을 일으켜 준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을 때에 때려 잡거나 칼로 찔러서 죽이는데 그럴 때에 피 속에 아드레날린이 급격히 많아져서 그 피를 마시면 다시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피를 먹지 말라. 그렇게 설명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음식물이 사람의 인격 형성에 영향이 크다는 내용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식보다는 채식을, 또는 자연 식품을 많이 먹습니다. 옛날에는 못 먹어서 영양 실조로 죽는 사람이 많지마는 지금은 너무 잘 먹어서 영양 과다로 죽어 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식생활 개선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왜 그러냐하면 육체가 비대해 지니 두뇌가 열등해 지고 불치의 병에 걸릴 확률이 높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소식 또는 채식을 권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23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먹는 문제에 대하여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을 덕을 세우는 데 먹어야 한다. 덕되지 않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의사가 3백 추방 운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 3백은 <흰 쌀밥>, <흰 조미료>, <소금 또는 흰 설탕> 이 세 가지를 3백이라고 합니다. 실은 미국 어느 의과대학의 실험을 보면 쥐 60마리를 3분류로 나누어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흰 쌀만 주고, 또 한 부류는 현미만 주고, 다른 한 부류를 굶겼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굶긴 20마리의 쥐는 다 살아 있지만, 백미를 먹은 쥐는 20마리의 쥐 중에서 8마리가 죽고 나머지 12마리도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약해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미를 먹은 쥐들은 살이 찌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더라는 실험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서 이 먹는 것, 지성인으로서 덕을 세울 수 있는 음식을 어떻게 선별하여 먹을 것인가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시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운전 사고의 제 1위에 올라 있습니다. 앞으로 이것은 더 증가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하여 좀더 심각해야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 두번째로는 우리의 마음을 밖으로 내 보내는 입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으로 들어 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태복음 15:17-18) 그랬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서 그 인격을 평가할 수 있고, 사람을 가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로고스로 창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식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게 되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 그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싸움입니다만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더 많이 받기 위한 그러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 아버지가 손을 얹고 축복해 주느냐. 말로써 복을 빌어 주느냐. 그것에 대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와 재산을 잃고 디아스포라, 나그네로 살아 왔지만 언어만은 잃어 버리지 않은 백성입니다. 그만큼 언어의 중요성을 여기는 민족입니다.
사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 자체 속에 사상이 있고, 그 이념이 있고, 철학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음으로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먹에 얻어 맞은 상처는 1주일 정도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과 독이 서려 있는 말에 얻어 맞은 상처는 일생동안 갑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한 가정에서는 이웃끼리 말 때문에 상처를 입어 몇년간 바로 담 하나 사이에 이웃으로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상종치 않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 갑니다. 벤자민 프랭크린(Benjamin Frankl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덕을 끼치려면 입술에 파숫꾼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9-11까지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악에서 떠나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언어 생활이 어떤 언어 생활이냐에 따라서 그 앞길을 결정해 주고, 그 인격을 말해 주며, 현재 어떤 상태 속에서 살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거울 앞에 비춰지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말 또 하나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긍정적인 언어는 긍정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인데 <할 수 있다>, <하면 될 것이다>, <잘했다>, <괜찮다>,<수고했다> 이런 것들은 다 긍정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언어는 부정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인데 <못한다>, <안된다>,<미치겠다>,<죽겠다> 이런 것들은 다 부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요즈음 정신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언어 신경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모든 생이 지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청년이 지난 봄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공부도 꽤 잘 했는데 자기가 들어 가고자 하는 직장에 들어 가질 못했습니다. 그런 후에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로, 대할 때마다 "목사님 미치겠습니다. 목사님 죽겠습니다. 못 견디겠습니다." 늘 그래요. 학교다닐 때에 늘 밝고 환한 모습이 차츰 차츰 사라지고 모든 일에 소극적인 태도로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만나서 좀더 적극적인 언어,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라고, 나도 할 수 있다든지, 해 본다든지, 그 마음의 자세를 그렇게 가지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랬더니만 여름이 지난 후부터는 "목사님 그 말씀을 제가 마음에 간직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내가 찾으려고 힘썼습니다." 요즈음은 어떤 회사에 들어 갔습니다만 회사에서 참 모범적인 자세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 친구간에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느냐, 가정에서 어떤 언어를 많이 사용하느냐, 여기에서 우리의 인생관이 결정될 수도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단어 가운데 Impossible이 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정적인 자세로 되어 있는 사람은 모든 사사건건을 "That's impossible." 이렇게 말합니다. <안된다>, <못하겠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긍정적인 사고, 긍정적인 자세로 바꾸어질 대 꼭 같은 환경일 경우 긍정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Impossible 이 아니라 `I 'm possible.' 스펠링은 같지만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자세는 그 마음에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장미 한 송이를 보고서도 `그 징그러운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어.' 마음이 부정적인 자세로 살아 가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 가는 사람은 `그 가시나무에 너무 아름다운 꽃.'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다리를 절고 지나 가는 사람이 있으며 `에이그, 저 사람 한 다리는 짧은가 보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살아 가는 사람은 '저 사람의 한 다리는 긴다 보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국민학교 다니는 아이가 100점 받을 수 있는데 80점을 받아 왔습니다. 그 어머니가 부정적이라면 "야! 오늘도 스므 개나 틀렸느냐 80점밖에 받지 못했느냐" 그렇게 말하면서 윽박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자세로 자녀를 대하는 어머니는 "야! 너 오늘 80개나 맞았니 80점이나 받았구나!" 이것이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아이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어떤 자세로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환경이 달라지고, 장래가 달라지고, 그 인생에 축복이 임하느냐 저주가 임하느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어주신 말씀에 "입은 생명의 샘이라. 악한 말을 머금은 입은 독이 있어서 패망한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여기에서 주어진 기회를 살아 가는 동안에, 배우고 익히는 동안데, 여러분의 입이 생명의 샘이 될 수 있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참 좋은 말을 하며 <괜찮다>, <사랑한다>, <수고했다>, <그만하면 됐어> 이러한 긍정적인 자세로 나아갈 때 여러분의 인격과 교우 관계는 더 한층 성장하고 좋은 기로 이끔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잠언 10장 15절 해석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The rich man's wealth is his fortress, The ruin of the poor is their poverty.
비슷한 성경구절
(잠언 18:11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메튜 풀 주석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
1. 전 7:12(전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에 보면 '돈'은 '보호하는 것'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때로 사람을 위험이나 재앙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내 생각에는, 잠 18:11(잠 18:11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에 나와있는 것처럼, 돈은 안전하게 하고 자신감있게 한다.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
'패망'은 '회한', '두려움', '실망' 이라는 단어로 옮길 수 있다. 그들의 가난은 그들의 마음과 용기를 빼앗아 가고 공포와 절망으로 채운다.
존 길 주석 /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부자의 부는 부자에게 마치 전쟁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요새와 같다. 그것으로 그는 부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공공 재난의 때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돈은 실제로 방어책이 되기도 하고(전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부자는 재물에 자신의 신뢰와 확신을 두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불확실한 재물을 신뢰할 때, 그것은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이것들(부)은 그에게서 날아가 버릴 수 있고, 그를 고통과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때에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멸망에서 그를 보호하지 못 할 것이다. 또는 그는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견고한 성에서처럼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고통, 질병 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또는 그들의 가난은 그들의 실망(절망)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알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전쟁, 기근, 역병과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거나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다.
나의 생각
부와 가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하이델베르크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잠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재앙의 때에 하나님의 자녀를 그 재앙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덜 노출시키기 위해서) 부를 사용하신다. 반대로 그 일반적인 재앙에 더 노출시키시기 위해서 가난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기후재난(홍수, 가뭄, 태풍, 지진, 화산, 혹한, 혹서 등)이나 국가재난(폭동, 폭군, 전쟁, 파산 등)과 같은 광범위하고,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있다. 이런 재난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하이델베르크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렘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하나님은 하나의 재난(사건)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하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덜 영향을 미치게 하신다. '같은'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각 사람의 부의 차이가 그런 차이를 낸다.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재난이 신자에게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재난의 때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어떤 신자들은 자신의 안일함, 게으름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온다. 또 하나님의 영이 여유있는 성도들에게 역사하셔서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형제 자매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게 하시고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고후 8: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서로를 더욱 하나로 묶으신다.
재난이 불신자에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완전히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때에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부를 혹은 국가를 의지하게 내버려 두신다(잠언 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그리고 자신의 안일함, 게으름을 깨닫고서는 후회하기는 하지만,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저 순전히 인간적인 경각심과 부지런함으로 살아간다.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와 쭉정이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외면한 채 (잠언 28:27 못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잠언 29:7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자신의 부를 지키려 하고 더욱 빠르게 지옥으로 돌진한다.
너무 지엽적으로 깊게 들어온 것 같다. 정리하자면, 부는 때에 따라 성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쓰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