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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슬픈 구두를 신고 (Wearing sad shoes)
Written By . 미니멜 (minimell) E-Mail . mini_mell@naver.com
한참을 망설인 끝에 걸어 본 전화였다. 다섯 시면 오겠다던 사람은 열시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아닌 딱딱한 기계음만 들려오고 있었다. 힘없이 전화를 끊은 진주는 조금 지쳐보였다. 허탈했지만 그보다 연락이 닿지 않는 그가 걱정이었다. 그녀는 후, 한숨을 내쉬고 거실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손도 대지 않은 저녁 식탁을 치우려다 말고 멍하니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한 자신의 생일상이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마다하고 하루 종일 정성껏 준비한 것이었다. 미역국에 잡채, 조기구이, 양념게장, 갈비찜까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그 중에서도 갈비찜과 양념게장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요즘 들어 도통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른다는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별다르게 고맙단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많은 음식들을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자 시무룩하던 진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주는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황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 “저 안녕하세요. 전 옆집에…” “이영우씨?” 의외의 인물, 찾아온 이는 같은 회사 동료인 영우였다. 그는 집에서 갓 나온 듯한, 가벼운 외투에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현관 입구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진주의 표정은 정말 당황스러워 보였다. 물론 그것은 마주서있는 영우도 마찬가지였다. “오진주씨?” “아니, 이영우씨가 저희 집에는 어쩐 일로…?” “이사를 와서… 몰랐네요. 옆집에 오진주씨가 사는 지.” “저도 몰랐어요. 언제 이사 오셨어요?” “오늘요.” 진주는 오늘 이사 왔다는 영우의 말에 그러냐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옆집에 이사를 왔다니,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알 턱이 없었다. 전에 누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누가 이사 왔는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하루 종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그는 아니었지만, 영우의 등장은 진주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사 동료와 이웃이 되었다니 당연히 놀랠 노자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영우에 대해 진주가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와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된지 채 1년도 되지 않았고, 별로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과 같은 구두 디자이너이며 서른 살이라는 것, 그리고 적당한 키에 그럭저럭 깔끔한 외모, 그냥 평범한 느낌을 가진 독신남이라는 것뿐이었다. 평소 말수도 적고 일에만 열중하는 타입이어서 평판이 나쁘지 않는데다, 오히려 여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영우와 진주는 서로 팀이 다르기 때문에 크게 부딪치는 일 없이 데면데면히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혹시 공구가 있으면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여자 혼자 사시는 집엔 당연히 없겠죠?” “공구요?” “네. 화장실 배관이 고장이 나서요. 물이 새는데 공구가 없어서.” “그래요? 있어요. 저희 집도 가끔 그러거든요. 여기 건물이 다 그런가 보네요. 찾아보면 있긴 있을 텐데, 어디다 뒀더라.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들어오세요.” “다행이네요.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회사 동료끼리 어려울 때 도와야죠. 더구나 오늘부터는 이웃사촌이잖아요.” 진주는 상냥하게 웃으며 영우를 거실 소파로 안내하고 베란다로 나가 벽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사용하고 분명 베란다 벽장에 넣어둔 기억이 있었다. 3년째 이 연립에 살고 있는 진주는 여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면으로는 도가 텄다. 오래된 건물이어서 그런지 툭하면 화장실 배관이며 하수도가 고장이 나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문가에 수리를 맡겼지만, 고장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같은 문제들이 여러 번 반복이 되자 진주는 직접 수리를 하기 시작했고, 이제 웬만한 것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덜거덕 거리던 진주가 거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공구상자가 들려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겨우 찾았어요. 여기요.” “아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식사 중이셨나 봐요.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해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짜 괜찮아요.” 아마도 부엌에 차려진 음식을 본 모양이었다. 미안해하는 영우의 태도에 진주는 괜찮다며 밝게 웃어넘겼다. 그러자 영우는 돌아가겠다며 서둘러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배웅을 위해 뒤따라가던 진주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영우를 불러 세웠다. “영우씨 잠깐만요.” “네?” “식사 하셨어요? 혹시 안하셨으면 하고 가실래요?” 진주의 권유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영우는 회사에서도 그렇듯 별 말이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외투를 벗어 소파에 가지런히 놓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식탁으로 와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진주는 식어 버린 미역국과 갈비찜을 다시 데워왔다. 한상 차려진 식탁을 보던 영우가 미역국을 뜨다말고 문득 말을 꺼냈다. “누구 생일이었나 봐요.” “네? 아, 저요.” “오진주씨 생일이었어요?” “네. 제 생일이었어요.” “그래요? 몰랐네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고마워요. 맛은 없겠지만 많이 드세요.” 그렇게 식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어색하고 늦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혼자 먹기는 싫어서 그냥 냉장고에 치워두려고 했었다. 아마 그렇다면 버림받은 이 음식들을 다시 식탁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고, 결국 버려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연히 영우가 찾아오게 되었고, 같이 먹어주기까지 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맛있는데요. 음식 솜씨가 좋으시네요.” “정말요? 일부러 그런 말 안 해주셔도 괜찮은데. 그럼 뭐가 제일 맛있어요?” “다 맛있는데, 특히 갈비찜이요. 제가 갈비찜 진짜 좋아하거든요.” 맑게 웃는 영우의 표정에 진주는 살짝 놀랐다. 한 번도 그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잘 웃지 않는다고 해서 찡그리거나 화난 표정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단지 매사에 말수가 적고 진지한데다 일을 할 때면 무서울 정도로 공과 사가 정확한 사람이었다. 사석은 물로 회식자리도 잘 참여하지 않아서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친해지기 어려워 무섭다는 쪽과 차분하고 반듯해 보여서 신뢰가 간다는 쪽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런 영우가 저런 무방비 상태로 웃는 모습을 보이다니 뭔가 신기하면서도 놀라웠다. “우와. 그렇게도 웃으시는구나?” “네?” “아니요. 사람들이 영우씨 웃는 모습 보는 게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말도 별로 없으신데 잘 웃지도 않으시니까 영우씨 더러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근데 그렇게 웃으시니까 인상이 훨씬 좋은데요?” “그래요?” 영우의 표정이 다시 전처럼, 아니 더 심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는 얘기였다. 진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지만 본인이 듣기에 좋지 않다면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다른 말을 꺼내야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영우씨 여자 친구 있어요?” “아뇨. 없어요.” “에이~ 있을 거 같은데. 있죠?” “죽었어요. 일 년 전에.” “네? 아…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왠지 분위기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영우의 표정은 점점 더 심하게 굳어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진주는 목이 메었다. 하지만 물을 마시려고 보니 어느새 물통이 비어있었다. 진주는 냉장고에 물을 가지러 가며,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콩콩 때렸다. 괜히 가겠다는 사람에게 밥 먹자고 설레발을 떨어서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책을 하는 것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금방이라도 체할 것만 같았던 식사를 마치고 영우가 돌아갈 채비를 했다. 외투와 공구상자를 챙겨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고, 진주는 현관에서 그 모습을 보며 서있었다. 어째 둘의 사이는 영우가 처음 공구를 빌리러 올 때보다 더 어색해져 있었다. “다 쓰고 가져다 드릴게요.” “네. 천천히 쓰고 주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쉬세요.” 인사를 마친 영우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쏟아지듯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영우가 한발 물러났고, 쏟아져 들어온 누군가는 익숙한 듯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당황한 영우가 급히 막으려는 순간, 진주의 환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석씨, 왜 이렇게 늦었어? 술 마셨어?” “옷.” 조금 취한 듯 보이는 준석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외투를 벗으며 거실로 향했다. 그러자 진주는 영우의 존재도 잊은 듯, 준석의 뒤를 쫓았다. 준석은 진주를 향해 겉옷을 던지듯 건네고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현관에서 그 모습을 보던 영우는 조용히 나가려다 문득 거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자신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물.” 준석의 짧은 한마디에 진주는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금세 투명한 유리컵에 냉수를 담아 준석에게 내밀었다. 물 잔을 받아든 준석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빈 잔을 다시 진주에게 건네고는 또 다시 양말, 짧은 한마디를 꺼냈다. 진주는 빈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기대 눕다시피 한 준석의 발밑에 앉아 양말을 벗기기 시작했다. “저… 오진주씨.” 준석의 등장으로 영우의 존재를 잊은 채 양말을 벗기던 진주는 그의 목소리에 놀란 듯 벌떡 일어섰다. 휴대폰으로 인해 돌아갈 타이밍을 놓쳐버린 영우는 여전히 현관에 서서 어정쩡한 얼굴로 서있었다. 당황한 듯 보이는 진주가 준석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던 진주는 영우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녀의 손에 들린 양말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은 진주는 급히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참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당황해하는 진주의 태도에 영우도 멋쩍은 듯 거실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아…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하지만 돌아선 진주의 앞에는 이미 준석이 서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영우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진주는 고맙다며 휴대폰을 받아 영우에게 건넸다. 휴대폰을 받으면서 영우는 준석과 눈이 마주쳤다. 술을 마셔 좀 흩트려지긴 했지만, 잘생긴 외모에 제법 돈 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준석은 영우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방해한 건가?” “아냐, 준석씨. 그런 거 아니야. 이 분은 옆집에 오늘 이사를 오셨는데, 배관이 고장 나서 공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근데 사실 나랑 같은 회사 다니시는 이영우씨라고…” 준석의 말에 진주가 정말로 당황한 듯 급하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준석은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감정 없는 얼굴로 영우를 쳐다 볼 뿐이었다. 분명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설사 그렇다 한들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렇게 3초쯤 지났을까, 준석은 피식 웃으면 말했다. “됐어. 상관없어. 내가 말했잖아. 다른 남자도 만나라고. 니가 주구장창 나만 보고 있으면 너무 부담스럽거든. 잘했어.” “준석씨.” 도대체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걸까? 영우는 준석의 태도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남자들은 여자 친구가 집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화는커녕 잘했다,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일반적이지 않은 극소수의 남자들이라면 그처럼 저런 반응일까? 생각지 못한 상황에 짜증이 밀려왔고,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영우는 괜한 오해로 진주와의 회사 생활이 불편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주를 대신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저… 남자 친구 분께서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냥…” “아, 말 많네. 상관없다니까? 난 이 여자 애인도 아니고, 이 여자도 내 여자가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난 둘이 무슨 짓을 하든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지. 이제 됐지?” “이봐요. 초면에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상당히 예의가 없으시네요. 상처가 되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 오진주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적어도 그런 얘기는…” “그만. 내가 그쪽한데 그런 설교를 들을 이유가 없거든? 볼 일 끝났으면 그만 가시죠?” 재수 없는 놈. 영우는 머릿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쳐주고 싶었지만, 준석의 옆에 서 있는 진주를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붉어진 얼굴과 온몸이 떨릴 정도로 꼭 쥔 그녀의 주먹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1분 1초라도 빨리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후, 오진주씨 저 갈게요. 여러 가지로 미안합니다. 공구는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진주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영우는 준석을 힐끗 노려보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찰나, 진주는 손에 들고 있던 양말을 준석에게 힘껏 던졌다. 너무나도 원망이 가득한 눈길로 진주는 준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준석은 그런 진주의 태도가 우습다는 듯이 실소를 지으며 가볍게 진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쌩하니 몸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진주는 돌아선 준석의 뒷모습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꼭 그렇게 말해야해?!” “사실이잖아.” “오늘 내 생일이야. 잊었어?” “아니.” “근데 왜 이제와? 또 다른 여자 만나고 있어?” “다시 한 번 말해야하나? 넌 내 여자가 아닌 것처럼, 나도 네 남자가 아니라고 말이지. 싫으면 싫다고 해. 구차하게 잡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진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분하지만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준석과 그녀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하고 만날 수 있는, 밖에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친구들에게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오로지 진주만이 일방적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관계, 준석은 진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버리곤 했다. 진주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그가 내키는 대로 굴었다. 그렇게 이 년 동안이나 진주는 준석과의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젠장. 술 다 깼네.” 소파에 다가선 준석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듯 겉옷을 집어 들었다. 순간 진주의 가슴이 툭하고 떨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준석이었던가. 진주는 외투를 입고 있는 준석에게 급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등을 끌어안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그의 향기가 진주의 코끝으로 전해졌다. “내가 잘못했어. 가지마. 응? 가지마. 제발…” 간절한 진주의 말에 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자 준석의 허리를 감은 진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준석은 천천히 자신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진주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 언제나 자신을 보는 진주의 눈은 한결같았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겁에 질려서, 혹은 버려진 강아지처럼 두려움에 가득차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를 보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찡긋, 준석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옷을 걸치듯 툭, 진주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옷걸이에 걸어.” 딱딱한 말투, 하지만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외투에 가려진 진주의 얼굴 위로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 순간 준석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지는 듯 했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쳤다는 듯 스르륵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랑해.” 이윽고 일어선 진주가 준석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외투를 가슴에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주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준석이 살며시 눈을 떴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싫다… 정말.” 타박타박, 진주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콧노래 소리와 함께. 그러자 다시 준석의 눈이 감겼다. 두통, 지끈거리는 통증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wearing sad shoes 301호. 진주의 집 앞에 선 영우의 표정이 불만으로 가득하다. 어제 밤 일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저렇게 상하수직적인 관계의 연인이 있으리라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더 어이없고 짜증스러웠다. 도대체 왜 그런 남자를 만나는지 영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어지라, 마라 참견을 하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았다. 사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는 것이다. 그냥 저런 사람도 사는구나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알게 뭐야.” 휙, 영우는 그렇게 진주네 집을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쓰레기 봉지가 한가득 들려있었다. 이사 후 짐정리를 하다 보니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왔다.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계단을 내려온 영우는 건물 옆에 위치한 분리수거 쓰레기함으로 향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버리면 좋으련만, 이 연립은 반드시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고 친절히 안내문이 써 붙여져 있었다. 정말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맞은편 경비실에서 경비원아저씨가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어서 대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휴, 한숨을 내쉰 영우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렇게 원치 않는 순간이 오면 언제나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곤 했다. “꼭 지금 가야해?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안 돼.” “저녁까지 시간 괜찮다고 했잖아.” “급한 일 생겼다고 몇 번 말해? 귀찮게 좀 굴지 마. 자꾸 이러면 나 여기 다시는 안 와.”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영우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비싼 외제차 앞에 서있는 진주와 준석의 모습이 보였다. 영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준석의 얼굴을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아마도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차문을 열었고, 그 옆으로 진주가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탁, 문이 닫히고 준석의 차는 금방이라도 출발할 듯이 힘차게 시동이 걸렸다. 그러자 진주는 할 말이 있는 듯 창문을 두들겼다. 선팅으로 안이 조금도 들여다보이지 않던 창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너머로 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럼 언제 올 건데?” “시간 되면.” “전화…해도 돼?” “까먹었어? 절대로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전화 하지 마. 당연히 찾아오지도 말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진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일주일 만이었으니, 다음은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준석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이 출발해 버렸다. 진짜 재수 없는 자식, 영우는 또다시 머릿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오진주 저 여자는 왜 저런 남자를 만나는 것일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석이라는 남자가 잘생겼기 때문에? 아니면 돈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 남자를 만나기에는 진주가 받는 상처가 만만치 않을 듯 보였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둘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다 뿐일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얼굴의 진주에게 세련되고 멋있는 킹카 준석은 개발의 편자, 혹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진주가 평범한 여자라고 해서 준석처럼 여러모로 잘난 남자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여러모로 잘난 남자가 평범한 여자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한다면 이야 상관할 바 아니니까. 하지만 진주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렇게 사람 취급도 못 받는데, 그 아픔을 감내하면서까지 만날 이유는 단 1%도 없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영우씨.” 영우는 어제 그리고 좀 전의 준석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화풀이를 괜히 분리수거 쓰레기를 통해서 풀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준석을 보내고 들어가려던 진주의 눈에 띄고 말았다. “네.” “분리수거 하시나 봐요?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은데…” 그러나 영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주는 영우의 분리수거를 돕기 시작했다. 이삿짐을 담았던 종이 상자는 꼼꼼히 테이프를 떼어내어 납작하게 만들고, PET병은 뚜껑과 따로 분리해 최대한 압착시키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종이는 종이함에 플라스틱 병은 플라스틱함에 병과 유리, 캔까지 모두 따로 분리해 담는 그녀의 손놀림은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실수도 없는 솜씨였다. 그렇게 영우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진주는 빠르게 분리수거를 마쳤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으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끝났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어제 너무 죄송했어요. 기분 나쁘셨죠?” “나쁘긴요. 저보다는 오진주씨가 더…”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럼 들어갈까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진주는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러자 영우는 조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회사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일을 도맡아 하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회식이다 워크샵이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바로 진주였다. 아마도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고 심성이 여린 모양이었다. 물론 타고난 성격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로 인해 준석에게 큰 상처를 받게 될까 그게 걱정이었다. “안 가요? 같이 올라가요.” 영우가 뒤따라오지 않자 진주는 뒤돌아서서 웃으며 그를 불렀다. 항상 저렇게 웃어 주겠지. 자신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준석에게 저렇게 착하게 웃으며 넘어가 주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영우는 조금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신경 쓸 것도 상관 할 일도 아니다, 그렇게 정리해 버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배수관은 다 고치셨어요?” “아직, 그게 쉽지 않아서.” “제가 좀 봐드릴까요?” “네?” “저 그런 거 잘 고치거든요. 준전문가라고나 할까요?” 이상하게도 진주의 말에는 거절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어젯밤 식사권유도 거절하지 못하고 돌아와 새벽에 잠도 못자고 소화제를 사기 위해 약국을 찾아 헤매고 다녔었다. 겨우 아침이 돼서야 속이 편해지는 바람에 아직까지 배수관에는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지금도 영우는 진주의 말을 어쩌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진주는 아무도 없는 거실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신발을 벗고 영우네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같은 건물이라 조금 다를 뿐 집 구조는 거의 비슷했다. 진주는 곧장 고장이 났다는 화장실로 향했다. 고장이 난 곳은 세면기 본체와 하부의 트랩을 연결해 주는 팝업이었다. “물 빠지는 팝업이 고장 났네요.” “네. 그래서 사다 놓기는 했는데…” “저희 집도 그랬었어요. 줘 보세요.” 정말 말 그대로 뚝딱 뚝딱이라고 해야 했다. 차근차근 고장 난 팝업을 분해하고, 또 다시 차례대로 새로운 팝업을 조립했다. 어디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것 같은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생활력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진주 같은 여자와 결혼하면 굶어 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풋, 영우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마치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올라오신 것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영우의 어머니도 시골 아낙으로써 참 억척스럽고 독하게 살아오셨는데, 이제 보니 진주가 딱 그 짝이었다. “다 됐어요.” “대단한데요?” “네?” “오진주씨는 꼭 시골에 계신 제 어머니 보는 것 같아요.” 자신의 어머니 같다는 영우의 말에 진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힘없이 일어나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진주의 반응에 영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인지 무언가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오진주씨, 왜 그래요? 내 말이 그렇게 기분이 상했어요? 나는 나쁜 뜻으로…” “아니요. 아니에요. 제가 그렇죠 뭐. 알아요, 저 같은 여자 매력 없다는 거. 촌스럽고, 멍청하고, 푼수에다가 눈치도 없어요. 전 누구보다 저를 잘 알아요.” “네? 누가 그래요? 그자식이 그래요? 오진주씨, 그건 겸손도 뭐도 아니에요. 그냥 열등감에 사로잡힌 자기비하라구요. 알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진주씨도 충분히 매력 있어요. 그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든…” 절레절레, 흥분한 듯 소리치는 영우의 말에도 진주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고인 채로 고개를 젓는 진주에게 영우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공구함은 다음에 주세요. 저 갈게요.” 진주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도망치듯이 그렇게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영우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참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준석을 사랑하는 진주나, 그저 진주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준석이나, 그녀를 도와 줄 생각도 전혀 없으면서 아는 척 나서는 자신이나 모두 다 한심했다. wearing sad shoes “오늘 진주씨 왜 이렇게 예뻐요? 원피스 너무 잘 어울린다. 혹시 데이트 있어요?” “아뇨. 아니에요. 그냥 약속이 있어서요. 헤헤.” “뭐야 데이트 맞는 거 같은데? 그죠?” “…헤헤, 티 많이 나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진주의 표정이 좋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다가 올 무렵에는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제 밤, 갑작스럽게 준석에게 전화가 왔다. 보름 만에 온 전화였다. 내일 보자고, 밖에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를 만난다는 설레임에 한숨도 못자고 밤새 뒤척였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기운이 솟아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만나고 밖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가 먼저 그러자고 한 적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참으려고 참아보려고 해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덕분에 실없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헤헤 웃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시계가 저녁 일곱 시를 가리켰다. 진주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석이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기에 더 마음이 급했다. “저 먼저 퇴근 할게요.” 진주가 회사를 빠져나가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 둘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우는 업무가 많아 아무래도 퇴근이 늦어질 것 같았다. “영우씨는 안가요?” “야근해야 할 것 같아요.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시안이 있어서요.” “아~ 수고하세요.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하고 영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은 사람들도 모두 퇴근을 했고, 결국 영우 혼자 남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일에 열중해 있던 영우는 어깨가 뻐근한지 기지개를 폈다. 어느새 시계는 밤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퇴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외투를 입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11월 밤은 어느새 가을에서 겨울을 준비하는 듯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영우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순간 회사 입구에서 서성이는 진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볼이 발갛게 언 것으로 보아 꽤 긴 시간을 밖에서 머무른 것 같았다. 또 그 재수 없는 자식이 바람을 맞힌 것이 분명했다. 영우는 천천히 차를 몰아 진주의 옆에 세웠다. “오진주씨, 데이트 있다면서요? 아직도 기다려요?” “영우씨.” “여태 안 왔으면, 더 기다려도 안 와요. 타요, 같이 가게.” 진주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영우의 차에 올랐다. 역시나 준석은 전화 한통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두 번 겪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슬픔도 깊었다. 오늘은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일 뿐이었다. 진주는 한기가 느껴지는 듯 덜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자 영우는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자동차 히터의 온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걸로 부족함을 느꼈는지 안전벨트를 풀고는 외투를 벗어 진주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일기예보도 안 봐요? 오늘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데, 치마는 왜 입고와요.” “감사해요.” “화장실 배관 고쳐준 걸로 퉁치죠, 뭐.” 영우의 말에 진주는 또 착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영우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에게 바람을 맞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좀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웃음이 나와요?” “…아뇨. 눈물이 날 거 같아서요.” “울어요, 그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게 기대했던 데이트를 보기 좋게 바람을 맞았으니 속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영우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주는 이를 악물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아픔을 참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소주 한 잔 할래요?” 술집 안은 시끌벅적 요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속에 진주와 영우가 있었다. 소주 4병, 두 사람은 꽤나 많은 양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마신 술의 절반 이상은 영우 혼자 마신 것이었지만 아직 끄떡없는 듯 멀쩡해 보였다. 그에 반해 한 병 조금 넘게 마신 진주는 벌써 취한 듯 발그레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슬슬 혀가 꼬이는지 발음도 엉망이었다. “영우씨 여자 친구 업따고 해찌요?” “네.” “그러믄요~ 제가요! 여자 소개시켜드리게요.” “어디 괜찮은 여자 있어요?” “제 친구드리요. 다 괜차나요. 어떤 스타이를 조아하시는데요?” “친구들이 어떤 스타일인데요?” 진주의 취한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전보다 훨씬 수다스러워졌지만, 나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서 그런지 재미있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한참이나 식구들 이야기를 했다. 오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홀로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 이야기, 사고 쳐서 벌써 시집갔다는 두 살 어린 동생의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이젠 영우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며 친구들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번째로요, 신하영이라는 애가 이써요. 키도 크고 예뻐요. 머리도 또똑하구요, 약사에요. 그리고 부모님이 두 분다 교수님이라서, 집도 잘 사라요. 학교 다닐 때 인기 진짜 마나써요. 좀 여우가타서 문제지만 그래도 좋은 애에요. 쪽지 시험 볼 때 막 가르쳐줘꺼든요. 헤헤” “좋은 친구네요.” “아아, 근데요. 안돼요. 하영인 남자친구가 이써요. 윤경호라는 놈인데요, 제가 짝사랑해썼는데요. 두리 사귄지 오래 되써요. 십년이나 되꺼든요. 오래되찌요? 헤헤. 그래서 영우씨 못 소개시켜주게따. 안되겠다.” “애인이 있으면 안 되죠.” “그러믄요, 다음! 이름이 김은서빈데요, 얘는 좀 머리가 이상해요. 귀엽게 생겨가지고 하는 짓은 좀 이상해요. 인생의 모표가 대충 살다가 대충 죽는 거라자나요. 그래서 아직까지 졸업도 안하고, 취업도 안하고, 연애도 안 해요. 이상하지요?”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근데, 전 이해해요. 우리 은서비가 얼마나 부쌍한데요. 걔에 비하면 전 진짜 행복한 거거든요. 아주 어려쓸 때 친부모한테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자라다, 겁나 부자한테 입양되써는데 또 버려지고… 잘못한거또 없이 맨날 버려지기만하고. 우리 은서비, 진짜 좋은 앤데… 갠 상처가 너무 마나요. 그래서 진짜 좋은 사람 만나야 하거든요?” “난 좋은 사람 아닌데.” “그럼 영우씨도 탈락. 안 되겠다. 탈락탈락!” 탈락이라며 큰소리로 외치던 진주는 빈 술잔에 가득 술을 채웠다. 그리곤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자며 영우에게 들이밀었다. 아마도 누구에게 누굴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는지 잊은 모양이었다. 영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잔을 따라 들자 진주는 짠,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영우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아, 웃었다!” “내가 그렇게 안 웃어요?” “네에. 근데 쪼오끔, 아주 쪼끔 그래요.” “조금이라. 다행이네요.” “그 사람도… 영우씨처럼 쪼끔이라도 웃으면 조을텐데. 그 사람은 쪼오끔도 안 웃어요. 맨날 잔뜩 화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거든요. 그래서 난 너무 무서워요. 헤어지자고 할까봐.” “무섭다라…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을 만나요?” “사랑…하니까요.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어써요.” “처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 그 사람은 오진주씨를 사랑하지 않는 거 같은데요?” “…알아요. 알지만 헤어질 수 업써요.” “왜요?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거예요. 그러면 진주씨는 또 상처받을 거라구요.” “…내가 피료해요… 그 사람이 없으면… 난…” “진주씨!” 풀썩, 너무 취해 버린 진주가 결국 쓰러지듯 정신을 잃었다. 영우는 이 상황에서도 준석을 감싸기만 하는 진주가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자신도 사랑받고 싶으면서 아닌 척 구는 사람. 남들 다 가지는 것들인데 조금도 욕심내지 않고서 포기하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는 사람. 평생을 그렇게 살다 죽을 사람. “진주씨, 이제 그만해요. 그러다 죽어요. 아프잖아요… 아파 죽겠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그만하라구요…” 영우는 쓰러진 진주를 보며 참 바보같이 착했던, 너무나 착하게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참 많이 사랑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언제나 자기 일은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에 바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려고만 할 뿐 이었다. 일 년 전, 바람이 참 많이 불던 날… 영우가 사랑했던 그녀는 공을 주우려 뛰어든 6살 꼬마 아이를 구하고 대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바보 같은 자식이, 지가 무슨 원더우먼도 아니고 도로 한가운데로 왜 뛰어드냐구요. 그 애 엄마도 겁에 질려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데 도대체 지가 왜! 제가 만날 그랬거든요. 착한 척 하면서 사는 거 그만두라고, 욕심 좀 챙기고 살라고요. 그러면 걘 나보고 참 못 됐다고 그랬었어요. 나중에 죽으면 지옥 갈 거라고. 근데 죽은 다음에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무슨 상관이야. 죽으면 다 끝인데. 이거 봐, 내 말 안 듣더니… 참 쌤통이다…” 잠이 들어 들리지도 않을 진주에게 영우는 한참을 혼잣말로 떠들어댔다. 그리고 허허허, 실없이 웃었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지만,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또 한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 더 많이 피우게 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순간이면 제발 좀 끊으라며 잔소리를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남은 담배를 모두 태우고 난 후에야 영우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진주를 흔들어 깨웠다. “준석씨…" 잠결에도 준석의 이름을 부르는 진주의 모습에 영우는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걸까? 그동안 멀쩡했다던 배수관은 왜 하필 그때 고장이 났던 걸까? 또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진주가 옆집에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자장면을 시켜 먹은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왜 진주의 식사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체하도록 밥을 먹었던 것일까? 깨어나지 않는 진주를 업고 술집을 나서는 영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wearing sad shoes 하루 종일 진주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바람을 맞은 이후로 한동안 어찌나 기운이 없던지,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울 지경이더니 오늘은 달랐다. 아침 출근길에 진주는 얼핏 준석에게 전화가 왔었음을 얘기했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겨우 나흘 만에 온 연락이라고 했다. 더구나 곧 준석의 생일이라 직접 디자인해 만든 구두 선물까지 준비해 뒀는데,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영우는 바보 같은 짓 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래도 울적해 하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진주를 보며 영우는 제발 지난번과 같은 일이 없길 바랐다. 영우는 답답한 듯 담배를 피우려 자리에서 일어섰고 때마침 퇴근을 하는 진주와 마주쳤다. “영우씨, 저 먼저 갈게요.” “데이트 잘해요. 만약 오늘도 바람 맞으면 얘기해요. 그 자식 내가 한방 날려 줄 테니까.” “네.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영우씨도 담배 좀 줄이세요. 건강에 나빠요. 그럼 저 갈게요.” 진주는 환하게 웃으며 퇴근을 했다. 얼마 전 함께 술을 마신 이후로 영우와 진주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에는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옆집에 살고 있으면서, 따로 다니기도 우스운 일이었다. 덕분에 영우는 본의 아니게 진주와 준석의 사이에 대해서 시시콜콜 알게 되었다. 그때 약속에 나오지 못하고 바람을 맞힌 이유도 듣게 되었다. 심각한 교통체증과 생각지도 못한 접촉사고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영우 생각에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진주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지만, 어쨌든 더 이상 두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띄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난 기다리기만 해야 해? 너한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뭐니?” 친구를 만나 가볍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영우의 눈앞에 또 다시 진주와 준석의 모습이 보였다. 낯익은 외제차 앞에서 진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준석은 뺨이라도 맞았는지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상황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미안하기는 해?” “그래.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랬어.” “급한 일? 그래봐야 여자 만나는 일이었겠지. 아냐?” “오늘따라 왜 이래? 미안하다고 했으면 된 거 아냐? 귀찮은데도 왔더니 뭐야, 이제 그만 만나고 싶어서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잖아.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동안 준석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열흘에 한번, 보름에 한번이라도 만날 수 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석에게 진주는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존재일 뿐이었다. 진주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보려고 애썼지만 그만 만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준석의 말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가슴에 쌓아두었던 말을 토하듯 꺼내놓기 시작했다. “왜 먼저 안 해? 나라는 여자 귀찮다면서 왜 그만 만나자고 먼저 말 안 하는 거야?” “무슨 뜻이야?” “내가 준석씨 엄마 같아서… 그래서 그래?” “뭐?” 준석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두고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진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 알고 있었어. 준석씨가 날 만나 줬었던 이유. 처음 만났을 때 그랬지. 내가 꼭 자기 엄마 같아서 좋다고. 사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참 기뻤다? 그만큼 날 편하고 가깝게 느낀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기억나? 몇 달 전쯤 준석씨 잔뜩 취해서 우리 집에 왔었던 날, 그날 그러더라. 날 보면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난데. 뻔히 바람피우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려, 그조차 자기 탓인 양 매일같이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굽실거리며 사는 엄마가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다고. 그래서 나랑 헤어지고 싶은데, 그래서 안 된다고 울었어. 준석씨는 내가 말해주길 바랬던 거지?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거지?” “……오진주.” “그래… 그만 만나자. 다 알고 있으면서 미련하게. 준석씨는 단 한순간도 날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미련하게 굴었어. 미안해. 그동안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진주야.” “그렇게 다정하게 내 이름 부르지 마. 기분 나빠.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알아? 준석씨가 내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게 언제였는지 아냐구? 난 기억도 안나.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안날 정도야.” “…….” “가. 그리고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근데 하나만 기억해줘. 내가 당신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거. 아마 당신 엄마도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을 거야. 분명 미웠겠지만, 그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을 거야. 그래서 그랬을 거야. 당신한테는 구질구질하고 미련해서 죽을 만큼 싫었던 그 모습이, 그게 당신 엄마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었을 뿐이야.” 눈물이 나지 않았다. 분명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눈물이 나더니 말이다. 준석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진주는 낯선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이유를 알게 된 후, 애써 모르는 척 참아왔었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디에선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준석이 떠나는 이 순간 눈물은커녕 외려 담담했다. 준석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진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우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들이마셨다 내뱉은 담배 연기가 그의 눈앞으로 퍼져나가고,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분명 헤어지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울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웬일인지 그녀는 울지도 않았다. 가슴이 많이 아플 텐데, 혼자 힘들어 할 생각을 하니 걱정스러웠다. 몇 개비의 담배를 피웠을까? 영우의 발밑으로 담배꽁초가 점점이 떨어졌다. 바스락, 담뱃갑 속에는 마지막 한 개비만 남아있었다. 영우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누군가 쓰레기장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쁜 자식! 나쁜 놈, 나쁜 새끼! 서준석, 이 나쁜 자식아! 나쁜 놈아!” 진주였다. 쓰레기통을 향해 무언가 힘껏 집어 던지더니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아주 서럽게 큰 소리로 울어댔다. 한참을 울던 진주는 지쳤는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우는 물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다시 담뱃갑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쓰레기장으로 걸어가 들고 있던 담뱃갑을 있는 힘껏 구겨 다시는 피우지 않을 것처럼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영우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새 구두 한 켤레. 좀 전에 진주가 버리고 간 것이 이 구두였던 모양이었다. 준석의 생일을 맞아 고심 끝에 직접 디자인을 하고 손수 만들었기에 더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라 했었다. 영우는 손을 뻗어 구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신고 있던 자신의 구두를 벗고 진주가 버린 새 구두를 신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영우의 발에 맞춘 듯 딱 맞았다. 영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wearing sad shoes "Rrrrrrrrrrrrrrrr, Rrrrrrrrrrrrrrrr"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잠들어 있던 진주의 눈이 떠졌다. 눈앞에 시계는 10시 20분이 조금 넘어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 어제 친구들과의 과음으로 좀 더 자고 싶었지만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이 달콤한 잠을 깨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그리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집? “네. 와요?” - 한 시간 뒤에 갈게요. 기다려요. 뚝. 상대방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진주는 포기했다는 듯 후, 한숨을 내쉬고는 침실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고 일어나서 그런지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서둘러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를 꺼내 마시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아, 시원하다. 너희들도 물 좀 줄까?” 진주는 창가에 일렬로 늘어선 서너 개의 데이지 꽃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준석과 헤어지고 3개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동안 진주에게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그와의 이별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현실은 각오했었던 것보다 아픈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자주 만나지 않아 보다 쉬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는 것은 물론,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준석이 떠올라 1분 1초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라는 것은 없었다.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해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을 때도 그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와의 이별에 그녀에게 아픔만 준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던 살이 무려 7kg이나 빠져버렸다. 사실 제대로 먹지를 못했으니 당연히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최근에는 3kg 다시 쪄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했던 살이 빠지며 예뻐졌다는 소리도 듣게 되었고, 오로지 그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던 주말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사실 이별 후 처음 맞은 주말은 우느라고 몽땅 써버렸었지만, 요즘은 몇 주 후까지 약속이 꽉 차있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다. 덕분에 몸도 피곤하고 돈도 제법 들지만, 그 만큼 준석을 생각으로 가슴 아픈 시간은 줄어들었다. “까먹고 장을 안 봐왔는데, 대체 뭘 해주지?” 진주는 점심을 하기 위해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제 깜빡하고 장을 보지 않아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진주의 표정이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매주 일요일이면 항상 같은 사람과 점심을 했다. 전화를 걸어 진주의 달콤한 잠을 깨웠던 그리고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 바로 영우였다. 아마 준석과 이별 후에 진주를 가장 많이 위로해 준 사람이 영우일 것이다. 옆집에 사는 데다,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함께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준석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진주의 친구들조차 전혀 몰랐으니 사정을 알고 이해를 해주는 사람 역시 영우뿐이었다. 힘들어하는 진주에게 영우는 자신의 아팠던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며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진주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마도 그가 있어 이별로 인한 아픔이 조금이나마 빨리 가시게 된 것도 같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둘의 사이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영우가 놀러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으레 일요일 점심은 함께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어버렸다. “김치찌개 해야겠다. 어쩔 수 없잖아.” 결국 진주는 가장 끓이기 편하고, 특별히 별다른 재료가 필요 없는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어느새 찌개가 끓기 시작했고 맛있는 냄새가 진주의 집안에 가득했다. 밥솥에서 김이 빠지고 뜸이 들기 시작했다. 진주는 서둘러 밑반찬을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두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코앞에 살면서 왜 이렇게 늦어.” 아무래도 찌개가 식기 전에 직접 불러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막 하고 있을 때, 띵동 벨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온 모양이었다. “문 열렸어요. 들어와요.” 분명 영우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들어오라고 소리를 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찌개를 식탁으로 옮기고 밥을 푸던 진주는 의아한 듯 현관으로 향했다. 영우가 아닌 모양이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의구심을 품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 영우씨?” 현관문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영우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편안한 차림이 아니라 제법 차려입은 듯 깔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의외의 모습에 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들어오라는 소리 못 들었어요?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차려 입고…” “진주씨, 선물이에요.” 순간, 영우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진주에게 내밀었다. 노란 데이지 꽃이 활짝 핀 화분이었다. 말없이 내민 화분을 진주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하지만 금세 기쁜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가끔씩 영우는 진주의 집에 찾아오면서 분홍, 보라, 빨강의 데이지 꽃 화분을 선물했다. 지금 거실 창가에 늘어선 서너 개의 화분들도 모두 영우가 선물한 것들이었다. 남에 집에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라고는 했지만, 늘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왜 항상 데이지 꽃 화분인지도 말이다. “또 사왔어요?” “네.” “오늘도 그냥 사온 거예요?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아니요. 오늘은 축하 할 일이 있어서 사왔어요.” “축하 할 일? 그게 뭔데요?” 영우는 씩,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사실 친해지고 보니 영우는 제법 잘 웃는 사람이었다. 시시때때로 웃어대는 사람은 아니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관심이 있는 일들에 있어서는 아낌없이 웃었다. 특히 먹을 것 앞에서 더 그랬다. 그러고 보니 처음 식사를 할 때도 갈비찜이 좋다면서 환하게 웃었더랬다. 알고 보면 참 허점도 많고 싱거운 사람, 냉정할 것 같지만 발끈하는 성질이 있어 귀여운 남자였다. “뭘까요?” “지금 퀴즈 내는 거예요?” “네. 맞춰 봐요. 정답 맞추면 또 다른 선물이 있는데.” “선물이 또 있어요? 뭐지? 힌트 없어요?” “힌트? 힌트라… 백이요. 백.” “백이라…” 진주는 영우의 힌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백이라는 것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답답한 듯 열심히 생각하며, 발까지 동동 구르는 진주를 보며 즐겁다는 듯 싱글싱글 웃는 영우의 표정이 얄밉게 보였다. “아, 모르겠어요. 그냥 말해줘요.” “못 맞추면 선물 없는데, 괜찮겠어요?” “뭐 얼마나 대단한 선물이라고, 됐어요. 말해줘요.” “백일이에요.” “네?” “우리 이웃사촌이 된지 백일 됐다구요.” 생각지도 못한 영우의 대답에 진주가 당황했다. 그와 이웃사촌이 된지 100일이나 되었던가? 다시 기억을 살려 되돌아보았다. 자신의 생일날이 첫 날이었으니, 얼추 그렇게 되었겠구나 싶었다. 그건 그렇고, 일일이 날짜를 세어 챙기다니 참 우습고 신기한 일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근데 남자가 뭘 그런 걸 챙겨요?” “이상한가?” “당연하죠. 남자들은 잘 모르잖아요. 영우씨 처음 이미지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랬어요?” “그럼요. 얼마나 분위기를 잡았는데요.” “그랬나?” “그럼요. 우리 근데 계속 현관에 서 있을 거예요? 안 들어와요?” “잠시 만요. 근데 또 한 가지 더 있어요. 퀴즈.” 또라니, 진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에 것도 맞추지 못했는데, 두 번째 것이라고 맞출까 싶었다. 이웃사촌이 된지 백일이라는 상상치도 못한 엉뚱한 답일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하지만 진주는 재미있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디 한번 내보라는 표정으로 영우를 쳐다보았다. “진주씨가 들고 있는 데이지의 꽃말.” “데이지의 꽃말?” “네. 맞추면 아까 주려고 했던 선물 줄게요.” 알고 있었다. 영우가 처음 데이지 꽃 화분을 선물하고, 두 번째 또 다시 받았을 때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찾아보았었다. ‘순수함, 천진난만함’ 이라는 꽃말을 보고 거기에 의미를 두고 선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순순함이랄까 천진난만함이라는 꽃말은 어울리지가 않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영우에게 진주는 자신이 있는 얼굴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순수함, 천진난만함. 맞죠?” “딩동, 땡! 반은 맞았는데 반은 틀렸어요. 또 다른 의미가 있어요.” “또 다른 의미?” 틀렸다는 영우의 말에 진주의 자신만만하던 웃음이 사라졌다. 직접 찾아봤으니 틀렸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황한 진주의 표정에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영우가 웃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숨겨진 사랑.” 영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주먹 쥔 손이 진주의 눈앞에서 천천히 펴졌고 찰랑, 반짝이는 무언가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너무 예쁜 목걸이. “영우씨?” “좋아해요. 당신을.” “영우씨…” “받아 줄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영우의 고백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좋은 사람,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석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는 영우를 상대로 뻔뻔스럽게 그럴 수는 없었다. “영우씨, 난 알다시피 다른 남자와…” “고작 그런 이유로 거절 하는 거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게 죄예요?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오진주, 당신을 좋아하는 거니까.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해요. 그러면 받아들일 게요.” 진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미 가슴이 뛰어버린 후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말해주고 있었다. 진주는 마음을 감추려는 듯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흔들림 없이 자신을 보는 영우의 두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순간 진주의 눈에 영우의 구두가 들어왔다. 낯익은 구두, 지난 날 오직 준석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구두였다. 그리고 언젠가 이 구두를 신고 저 문을 걸어 들어오는 준석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건네주지도 못한 채, 헤어지던 날 홧김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었다. 새벽녘 후회하고 다시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런데 그 구두가 지금 이곳에 영우와 함께 온 것이다. 주르륵, 진주는 눈물을 흘리며 영우를 바라보았다. “구두… 어떻게?” “어때요? 어울려요? 신기하게 딱 맞아요. 꼭 내 것처럼.” 진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준석을 생각하며 만들었던 구두는 오히려 영우에게 더 잘 어울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영우가 한 발 걸음을 내딛어 집 안으로 들어왔고, 진주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진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기다렸죠? 이 구두를 신고 걸어 들어오는 그 사람을… 비록 내가 그 사람은 아니지만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구두를 신고 당신 앞에 서있는 모습을.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진주는 대답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흘리는 눈물은 슬퍼서, 가슴이 아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그래서 쏟아지는 기쁨이었다. 서서히 퍼지는 진주의 부드러운 미소에 영우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진주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반짝, 목걸이는 제 자리를 찾은 듯 더 아름답게 빛났다. 영우는 팔을 뻗어 진주를 가슴에 안았다. 따뜻한 서로의 체온이 오가고, 떨리는 설렘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비록 당신을 위해 만든 구두는 아니지만, 당신이 신고 이렇게 내게 와줘서 너무 기뻐요. 난 운명 같은 거 믿지는 않지만, 그런 거 같아요. 아마 처음부터 구두의 주인은 그 사람이 아니었겠죠. 하지만 다행이에요, 진짜 주인을 찾아서. 그리고 그게 당신이라서.” 어긋난 사랑이 슬픈 구두와 숨겨진 사랑의 꽃 데이지. 사랑이 아프기만 했던 진주와 사랑이 미치도록 그리웠던 영우. 상처로 가득한 그들의 지난날이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언제나 행복하길… 오래오래 영원히.
갑자기 할 일이 많아서 진주이야기는 너무 오래 걸렸네요. 그래도 드디어 하영이의 [세렌디피티], 은섭이의 [11시 58분, 사랑을 말하던 시간], 진주의 [슬픈 구두를 신고]까지 준비했던 이야기를 모두 마쳤어요. 지금 준석이의 얘기를 번외로 쓸까 말까 고민중이랍니다. 준석이가 너무 나쁜놈이 되어 버려서 말이죠. 처음에는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아이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거든요. 어쨌든 끝이나서 행복합니다. 전 새드를 좋아하는데 왜 다 해피엔딩으로 썼는지 몰라요. 지금 장편 쓰고 있는 것들은 다 새드거든요. 장편은 우선 욕심에 다 완성한 후에 연재를 시작하고 싶어서 당장은 어렵지만, 틈틈히 단편은 계속 쓸게요. 정말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댓글 많이 많이 부탁드려요 ^^* (오타나 어색한 부분 지적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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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어요 ㅋㅋㅋ 개인적으로 이런 거 별로지만 오랜만에 재밌는 소설을 찾은 뿌듯함? -_-a 전 준석이 번외......기다릴게요!!!
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준석이 이야기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그래도 써보도록 할게요. 우리 준석이가 불쌍해서...ㅠㅠ 암튼 감사합니다 ㅋㅋ
꺄아아아>_<ㅋㅋㅋㅋㅋㅋ소설 너무 맘에들어요♡가능하시면 소설 또 올리시면 연락주시면 안될까요??
어머 그럼요 ㅠ 연락드릴게요 ㅋㅋ 꼭 ㅋㅋ 쪽지드리면 되죠? ㅋㅋ 감사해요 이렇게 마음에 들어해주시다 ㅠ 눈물이 날 것 같아요 ㅠ 추운데 감기조심하세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