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조선 건국의 시원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 말 혁신 정치세력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배출된 인물들이 하나의 이념을 가진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조선 건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다음으로 이제현은 고려 역사 속의 ‘정치적 사유’와 ‘인문주의’ 전통의 계승자였다. 이 전통은 고려 초기 최응(崔凝, 898∼932)을 시작으로 최승로(927∼989), 김부식(1075∼1151)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제현은 이를 성리학과 결합시켜 고려 말 혁신 정치세력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한국 역사 속에서 이제현이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는 이와 같다.
그런데 이제현이 이런 역사적 사명을 수행한 데는 그의 삶이 지닌 독특한 여정이 바탕을 이루었다. 그는 13∼14세기 몽골제국 하에서 이루어진 제1차 세계화를 직접 체험하고 이를 소화해낸 첫 번째 고려인이었다. 이제현은 이를 고려에 전달하여 여말선초의 문화적 폭발을 가능하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국역사에서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신라 중기의 원광법사(555∼638), 신라 말의 최치원(857∼?), 한말의 유길준(1856∼1914)을 들 수 있겠다. 조선 건국의 문화적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몽골제국 하의 제1차 세계화로부터 유입됐다.
충선왕과 운명적으로 조우하다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만권당을 세워놓고 고려를 살리기 위한 외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만권당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베이징 위위안탄(玉淵潭) 공원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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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은 13세기 말 충렬왕대에 태어나 14세기 중엽 공민왕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세계사적으로 몽골제국의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 시기에 고려는 몽골제국의 일부로 존재했다. 한반도의 국가가 세계제국의 일부로 강력히 결합돼 존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이 가진 특징은 기본적으로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의 삶의 이미지는 ‘브리지’이다. 그는 고려인이자 동시에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는 두 개의 삶을 살고, 그 둘을 연결시켰다. 시대가 그의 삶을 투과하여 이제현이라는 인격체에 자신의 무늬를 아로새긴 것이다.
이제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려 제26대 국왕 충선왕이다. 1313년 27세의 이제현은 왕궁에서 열린 팔관회 자리에서 충선왕과 운명적 조우를 했다. 이제현은 이 날을 회상하는 시를 남겼다. 1320년 11월 15일 위기에 처한 충선왕을 구하기 위해 그는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향했다. 그 노상에서 <十日月十五日>이란 시를 지었다. 매년 11월 15일 고려에서는 팔관회가 열려 군신이 함께 즐겼다.
“송악산 아래 용이 서리어 명당을 둘러싸니/ 위봉루 앞 넓은 마당이라/ 선왕의 유풍이 자손에 이어지니/ 매년 이곳에 군신이 모여 잔치하네/ 못난 이 사람도 아미반(蛾眉班)에 줄 서고 있다가/ 임금의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다/ 상왕(충선왕)이 주렴 안에서 함께 구경하시니/ 전고 없는 태평성대라.”
1313년 충선왕은 고려에 돌아와 6월에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14, 15일 열린 팔관회에 참석하고, 이듬해 1월 연경으로 돌아갔다.
충선왕과의 인연은 이제현의 아버지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가계는 태조 왕건 때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에서 비롯됐다. 이금서의 장인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왕건은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냈다. 둘 사이에 탄생한 딸이 이금서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진의 조부와 부친은 현직에 오르지 못했다. 가문이 한미했던 것이다. 이진은 충렬왕 5년(1279)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충렬왕이 주재한 시험에서 2위에 뽑힐 정도로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충선왕이 발탁하기 전까지는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충선왕은 1298년 즉위하자마자 전면적인 관제 개편을 단행하고, 신설된 사림원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사림원의 업무는 전통적으로 왕명에 따른 문서 작성이었지만, 여기에 인사·비서·고문 업무가 더해져 사림원은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 이 사림원의 핵심인물이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지은 박전지(朴全之)·최참(崔旵)·오한경(吳漢卿)·이진(李縝) 등 4학사였다. 충선왕과 이제현의 관계는 이처럼 개인을 넘어 가문 차원에서 맺어진 것이었다.
1314년 상왕 충선왕은 원나라로 돌아가면서 28세의 청년 이제현을 데리고 갔다. 연경의 저택에 지은 만권당(萬卷堂)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만권당은 충선왕의 정치적 사교장이자 종교 행사장이었고,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인들의 고급 살롱이었다. 충선왕은 단순한 고려왕이 아니라, 몽골제국의 세계 군주였다. 그의 어머니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친딸 제국대장공주였고,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다. 그는 그 점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정체성과 자부심, 나아가 그의 정치적 생애도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는 어린 충선왕을 깊이 총애하여, 17세 때 고려국왕세자를 제수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외손자라는 사실을 공표했을 뿐 아니라, 침전에 불러 손수 공부하는 내용을 묻기도 했다. 중국을 정복하고 원 왕조를 창건한 위대한 군주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은 어린 충선왕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충선왕은 자신을 고려인보다 몽고인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원 황실의 일원으로서의 일생을 영위했다.
원나라 중앙정치 무대를 주무른 충선왕
▎충선왕이 이제현과 중국 강남 여행길에 들렀던 냉천정(冷泉亭)의 현액. 이제현이 쓴 같은 이름의 오언절구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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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수한 고려인이었던 아버지 충렬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권력투쟁 끝에 왕위에서 축출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이자 어머니의 연적인 무비(無比)를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병들었을 때는 간호에 침식을 잊었다. 충선왕의 몽고 왕비는 쿠빌라이의 친손자이자 성종의 친형인 진왕(晉王) 카밀라(甘麻剌)의 딸 계국대장공주 부다시리(寶塔實憐)였다. 충선왕은 원 황실의 황위 계승전에도 깊숙이 개입, 무력을 동원해 무종과 인종을 황위에 올려놓았다. 그 공으로 고려국왕과 함께 요동을 통치하는 심왕(瀋王)에 임명됐다. 몽골제국에서도 두 개의 왕위를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태자태부로서 중서성의 정사에 참의(參議)하여 원의 국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에도 거의 고려에 머물지 않고, 국사는 측근들에게 전지(傳旨)를 보내 처리했다. 그는 연경에 머물기 위해 종국에는 고려국왕의 지위조차 포기했고, 심왕도 조카 왕고(王暠)에게 전위했다.
원 중앙무대에서의 정치생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원사(元史)>는 “충선왕 부자는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많은 재산을 기울여 조정의 신하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적었다. 그 비용은 고려로부터 조달됐다. 해마다 베 10만 필, 쌀 400곡(斛)이 운반됐고, 다른 물건은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만권당의 운영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고려의 재정은 고갈됐다. 고려 국왕으로서의 충선왕은 좋은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왕과 공공연히 권력 투쟁을 벌여 제거했고, 성관계도 난잡했다. 신료들과의 대화보다는 독단적인 정치를 했고, 측근정치에 의존했다. 무엇보다도 고려는 그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에 의한 세계화의 세례를 흠뻑 받고, 그 열매를 고려에 전했다. 충선왕은 만권당에 “염복(閻復)·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 등의 대유(大儒)를 초청하여 그들과 종유하면서 고구(考究)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즐겼다.” 하지만 그는 “원나라 수도의 글을 하는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뽑힌 사람들인데, 내 부(府)에는 아직 그러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현을 불렀다. 이제현은 1314년부터 1341년 귀국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그곳에 머물렀다. 중간에 고려에 왕래한 적은 있었지만 삶의 황금기 30년을 원에서 보낸 것이다.
충선왕은 이제현의 문학적 재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중국 강남 지역을 유람할 때 충선왕은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흥취를 시로 적으면서, “이런 좋은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번은 이제현에게 거란이 보낸 낙타를 태조 왕건이 굶겨 죽인 이유를 물었다. 낙타 사육에 큰 비용이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이제현은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군왕의 원대한 식견과 깊은 생각은 후대 왕이 따라갈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랑캐들의 간악한 잔꾀를 꺾어버리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충선왕은 또한 당시 고려 유학이 불교에 의존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이제현은 의종 대의 무신란 때 문신들이 모두 죽거나 산중에 은거하여, “공부하는 자들이 승려들을 좇아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1319년 강남에 갔을 때, 충선왕은 이제현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강남의 명사 탕병룡(湯炳龍, 1241∼1321)에게 화상찬(畵像贊)을 짓게 했다. 신하에게 각별한 후의를 베푼 것이다. 만권당을 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충선왕 자신도 높은 지성의 소유자였다.
이런 왕으로부터 깊은 지우(知遇)를 받은 것은 이제현의 일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를 각골난망의 은혜로 생각했다. 1320년 12월 4일 이제현은 티베트로 유배될 위기에 빠진 충선왕을 구하고자 개경에서 달려왔다. 연경 교외 황토점에서 충선왕의 유배 소식을 듣고,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했다. “의관만 뻔드레하고 재주는 하나도 없구나/ 나처럼 은혜받은 사람 죽어도 부끄럽지.”(<黃土店>, 聞上王見譖不能自明) 1323년 티베트에서 도스마(朶思麻)로 유배지를 옮긴 충선왕을 찾아 3000㎞의 길을 떠나며, 그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임금의 태산 같은 은총에 아직 보답하지 못했으니/ 만릿길 달려가기 어렵다 할 수 있으랴.”(<益齋亂藁>, 至治癸亥四月二十日發京師)
만권당에 출입했던 명사와 학인들 역시 이제현의 재능을 인정했다. “이제현이 그들을 따라 학문이 더욱 진보하니 요수 등이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원의 명신으로 문명이 높았던 장양호(張養浩, 1270∼1329)는 이제현에 대해 “삼한의 문물 본래부터 훌륭한데/ 뛰어난 현인을 또 보았네/ 채찍을 휘두르면서 산 놀이할 때/ 달 뜨도록 읊은 시 구슬처럼 아름답구나”(<益齋亂藁>, 張侍郞詩)라고 칭송했다. 조맹부(1254∼1322)는 송설체를 창안한 저명한 서예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이제현보다 33세 연상이지만 서로 친밀하게 지냈고, 이제현이 중국 성도(成都)에 사명을 받고 갈 때 송별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우집(1272∼1348)은 대유로서, 그 문집에 <익재명(益齋銘)>을 남겼다. 하지만 이색(李穡)이 지은 <익제난고서>에 등장하는 염복(1236∼1312), 요수(1239∼1313)는 잘못된 기록이다. 생몰연대상 이제현과 교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몽골 지배하에서 도래한 100년의 평화
▎TV 드라마 <마르코 폴로> 시즌1의 한 장면. 마르코 폴로(맨 오른쪽)는 이제현과 동시대인으로 두 사람의 세계탐구 정신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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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권당에서의 교유가 이제현과 고려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색이 잘 소개하고 있다. “(이제현은) 20세 전에 이미 당세에 문명이 있었다. 충선왕이 크게 소중히 여겨, 원의 수도에서 왕을 따라 거처했다. 그리하여 요목암(姚牧菴)·염자정(閻子靜)·조자앙(趙子昻)·원복초(元復初)·장양호(張養浩)와 같은 조정의 대유(大儒)와 관리들과 함께 왕의 문하에서 교유했다. 선생이 이들 모두와 교제하여, 보는 것이 바뀌고 듣는 것이 새로워져서, 격려되고 변화되어 진실로 그 정대하고 고명한 학문을 다 연구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생을 태산같이 우러러보았으며, 학문하는 선비들이 그 비루한 습관을 버리고 차츰 고상해진 것은 모두 선생의 교화 때문이었다.”(<益齋先生亂稿序>)
이제현은 만권당을 통해 중국과 몽골제국이 성취한 문명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과 자각을 고려에 전달하여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혁신운동을 배태했다. 그 운동은 조선 건국이라는 정치적 결실을 맺었다. 문화적 영향은 세종대에 이르러 종합되어 조선의 국가적 정체성을 창조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전통적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몽골제국은 사상 유례없는 잔혹성과 낭자한 피 위에 건설됐다. 고려는 그런 몽고에 30여 년간 저항했으며, 이는 몽골제국의 전쟁사에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모두 백성이 감내해야 했다. 고종 41년 몽고군의 침입 때는 끌려간 남녀 포로가 20여 만 명이었다. 무수한 백성이 살육되고,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었다. 끌려간 자들은 비참한 노예로 일생을 마쳐야 했다. 항복한 고려는 독립성을 거의 상실했다. 젊은 여성들은 공녀로 끌려갔고, 장정들은 일본 정벌에 동원되어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지배 아래서 100년의 평화가 도래했다. 이 평화 속에서 세계의 문명이 유라시아를 넘나들며 소통하고 섞였다. 이색의 생각을 들어보자. “원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가 통일되자, 삼광(三光)·오악(五嶽)의 정기가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여 중화(中華)와 변원(邊遠)의 차이가 없었다.”(<益齋先生亂藁序>) 김호동 교수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은 그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제국의 영역 안에는 얌(Jam)으로 불리는 그물망 같은 교통-통신망이 건설되어, 다기한 문명이 흐르는 수로가 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근대 이전에 건설된 것 중 가장 장대한 규모였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제왕의 길’은 총 연장 2757㎞에 역참은 111개였다. 이집트 맘룩 왕조는 간선도로 총 3000㎞, 역참 200개였다. 15세 후반 프랑스 루이 11세 때는 도로 총 2000㎞에 역참은 72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의 도로는 중국 중심의 대칸의 직할령만 총 6만㎞이고, 역참은 1400개에 달했다. 육지만이 아니라 수로와 해로도 연결됐고, 6000척의 배가 운용됐다. 당시 몽골의 수도 카라코롬에서 헝가리까지 10일 만에 편지를 전달했다. 도보로 이어지는 전령 시스템 급체포(急遞鋪, express post)도 운영됐는데, 하루 300리를 주파했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이 1266년 쿠빌라이 칸(맨 왼쪽)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15세기 회화. 쿠빌라이는 이제현이 평생 봉사했던 충선왕의 외조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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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한글 창제도 몽골시대 문화교류의 산물몽골제국은 개방적이고 유연했다. 자신의 문화와 풍습을 복속민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협력자는 인종,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수용됐다.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몽골 군사에 합류했다. 티베트인은 종교 분야에, 위구르인은 재정과 문서행정에 등용됐다. 유럽인도 있었다. 전성기의 원나라에 거주한 고려인은 3만 명에 달했다. 이런 다양한 인종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각종 사전이 편찬되고, 언어학과 음운학이 발전했다. 13∼14세기는 유라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서부터 서쪽 끝 지중해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와 문자가 동시에 통용되면서 문화가 서로 교류되는 시대였다. 15세기 한글 창제는 이러한 발전에 기초해 이룩된 언어학적 혁신 사례로 볼 수 있다. 내륙 실크로드만 아니라 해로가 열리면서 인도양-말라카 해협-중국 동남해안이 연결됐다. 은으로 태환하는 지폐(교초, 교자)가 통용되고, 은본위제를 시행하여 이슬람 경제권과 통합됐다.
이와 함께 ‘대여행의 시대’가 도래했다. 유라시아를 포괄하는 원거리 여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15∼16세기 ‘대항해의 시대’에 선행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행기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그는 1271년 17세 때 베네치아를 떠나 4년 뒤 원나라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쿠빌라이의 치세기였다. 그는 16년간 중국에 체류하다가 1291년 귀향했다. 그런데 <동방견문록>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원래의 제목 <세계에 관한 서술(Description of the World)>이 시사하는 바처럼, ‘세계’의 탄생을 알리고 이를 서술한 책이다. 몽골제국 아래서 처음으로 인류의 시야에 ‘세계’가 들어왔던 것이다. 몽골제국 하의 문명 교류와 융합을 제1차 세계화로 보는 이유다.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 10만㎞를 여행했고, 유라시아·아프리카를 시야에 넣는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했다. 이런 새로운 체험과 세계관은 조선 태종대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도 집약돼 있다. 이 지도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아우르고 있다.
이제현은 고려의 마르코 폴로다. 그가 보고 체험한 ‘세계’는 마르코 폴로보다 규모가 작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의 대여행은 잠든 중세 유럽을 흔들어 깨우고, 대항해의 시대로 가는 지리적·문명적 상상력을 촉발했다. 그로부터 제2차 세계화가 시작돼 유럽이 근대화로 나간 것이다. 이색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제현의 여행과 체험도 고려에 깊은 충격을 가했다. 이제현은 세 차례 중국을 여행했고, 6∼8차례 개경에서 연경을 왕래했다. 28세에 중국에 처음 간 이제현은 37세 때 3차에 걸친 대륙 장정을 마쳤다. 여행 거리만 4만350㎞였다. 그는 이 여행의 감회와 소감을 수많은 시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익재집>에 수록된 270수의 시와 54수의 장단구 중 중국 여행과 북경 체류와 관계되는 시는 134수, 장단구는 54수다.(지영재, <서정록을 찾아서>)
1316년 30세의 이제현은 첫 중국 대륙 여행을 떠났다.(西蜀行) 황제의 명으로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서촉 아미산(蛾眉山)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명목은 제사지만 사실은 국가 경비로 여행하도록 특전을 베푼 것이니, 충선왕의 배려였을 것이다. 이제현은 여행경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趙), 위(魏), 주(周), 진(秦)의 옛 지역을 거쳐 기산(岐山) 남쪽에 이르렀으며, 다시 대산관(大散關)을 넘고 포성역(褒城驛)을 지나 잔도(棧道)를 건너 검문(劍門)으로 들어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여기서 뱃길로 7일을 가서 비로소 아미산에 도착했다.”(<櫟翁稗說> 後集1)
▎제주도 곳곳에 남아 있는 대몽항쟁을 위한 돌성. 고려는 끝내 복속되었지만 몽골제국을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하며 또 하나의 문명 ‘조선’을 준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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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비루한 관습을 교화하다연경을 떠난 그는 황하를 건너고 화산(華山)을 지나 서안(西安)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길을 바꾸고, 검각(劍閣)과 촉도(蜀道)를 경유하여 사천(四川)에 들어갔다. 다시 성도(成都)에 도착하여 민강(岷江)을 따라 내려가 아미산을 유람한 뒤 함곡관을 넘고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왔다. 한여름에 출발한 여행은 반 년 정도 걸렸고, 답파한 거리는 3600㎞였다. 이색이 쓴 이제현의 묘지명에 따르면, “병진년(1316) 서촉(西蜀) 지방으로 사명을 받들어 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지어 인구에 회자됐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산천, 풍습, 역사, 인물을 읊었다.
이제현의 2차 여행은 33세 때인 1319년 강남지방에 향을 하사하러 가는 충선왕의 여행을 수종한 것이었다. 충선왕은 이해 3월, 황제에게 주청하여 “남쪽으로 강소, 절강 등지를 유람하고, 보서산(寶抒山)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권한공·이제현 등이 수행했는데, 수행하는 신하들에게 지나는 산천의 경치를 기록하도록 명하여 행록(行錄)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여행의 왕복거리는 3000㎞였다. 이 여행에서 이제현은 탕병룡·오수산(吳壽山) 같은 강남의 명사들과 교유했다. 1320년 영종황제가 즉위하면서 충선왕은 실세(失勢)했다. 황제는 그를 티베트의 살사결(撒思結)에 유배시켰다. 1323년 37세의 이제현은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도스마(朶思麻)로 떠났다. 세 번째 대륙여행으로, 종점은 감숙성((甘肅省)의 린타오(臨洮)였다.(西蕃行) 여행거리는 왕복 3000㎞를 넘었다.
이제현은 만권당에서의 교유와 대륙 여행을 통해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듭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유를 통해서는 당대인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선생이 이들 모두와 교제하여, 보는 것이 바뀌고 듣는 것이 새로워져서, 격려되고 변화되었다.(視易聽新 摩厲變化) 그에 따라 학문은 극히 정대하고 고명하게 되었다.(固已極其正大高明之學)”
여행을 통해서는 고금의 인물들과 풍물, 산천과 감응했다. 한반도의 지식인이 광활한 중국 대륙을 이처럼 모두 여행한 것은 이제현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산천 속에 새겨진 역사를 돌아보고 고금의 인물들과 대화하며 감흥을 토로했다. 황하의 가장 큰 지류인 산서성 ‘분하(汾河)’를 지나며 읊은 시를 보자. “주야로 흐르는 분하 넓고 넓은데/ 강가의 행인들 그 얼마나 늙어갔나/ 도당씨의 유물은 산만 홀로 남아 있어/ 만고의 흥망에도 푸른 빛은 변함없네.”(汾河日夜流浩浩 兩岸行人幾番老 陶唐舊物山獨在 萬古興亡靑未了) 도당씨는 요임금이다. 여행은 그의 정신을 깊게 하고 학문을 넓혔다. 이색의 말을 들어보자. “서촉 지방으로 사명을 받들어 가고, 오나라 땅이었던 동남지방으로 왕을 수행하는 등 만여 리의 길을 왕복했다. 장엄한 산하와 특이한 풍속, 옛 성현들의 유적 등 이른바 크고 넓고 절묘한 경관(閎博絶特之觀)을 남김없이 다 포괄했으니, 그 툭 트이고 거리낌 없는 기이한 기운(疏蕩奇氣)은 아마 사마천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益齋先生亂藁序>) 장엄한 산하와 풍속, 성현이 모두 그의 안으로 들어와 활연하고 뛰어난 기운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제현의 성숙은 고려의 문명적 혁신을 자극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 다시 이색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생을 태산같이 우러러보았으며, 학문하는 선비들이 그 비루한 습관을 버리고 차츰 고상해진 것은 모두 선생의 교화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는 이제현의 정치적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