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기의 고사성어 1~155
001 온고지신(溫故知新) / 溫(익힐 온) 故(옛 고) 知(알 지) 新(새 신)
옛 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공자는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因果) 관계 속에서 발전의 원리를 깨달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은 대립과 단절만을 만들어낸다. 구세대와 신세대, 여기에 쉰 세대와 낀 세대, X세대와 Z세대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말들이다. 올챙이를 한자로 과두( ) 라고 하고, 올챙이 적을 가리켜 과두시절( 時節) 이라 한다. 올챙이 없는 개구리, 개구리 없는 올챙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인들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에게 반성과 발전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가장 적절한 溫故知新 의 도구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우리말의 복습(復習) 을 온습(溫習) 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이는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혀 늘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이 고사성어(故事成語) 란을 집필함에 있어, 짧지만 깊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002 후안무치(厚顔無恥) / 厚(투터울 후) 顔(얼굴 안) 無(없을 무) 恥(부끄러워할 치)
두꺼운 얼굴에 부끄럼은 없다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 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
厚顔 이란 두꺼운 낯가죽 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 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 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 을 가
리킨다. 지난 주 동안, 한보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낸 증인들 중 에는 후안(厚顔) 을 무기로 나온 이들이 많았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수치(羞恥)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만백성들은 지금 그들이 태강의 동생들이 불렀다는 이 노래를 한번만이라도 읊조려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003 난신적자(亂臣賊子) / 亂(어지럽힐 란) 臣(신하 신) 賊(해칠 적) 子(아들 자)
임금을 죽이는 신하와 어버이를 죽이는 아들 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나 역적 등의 뜻이다.
孟子 <등문공 文公>하편에는 맹자의 제자인 공도 자가 제기한 논쟁에 관한 맹자의 답변이 실려 있다. 맹자는 자신이 논쟁을 피하지 않는 이유를 인의(仁義)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은 두려워하였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라는 구절이 나온다. 후한서 <동탁전董卓傳>에도 너희들은 반역하여 천자를 핍박하니, 역적들 중에도 이제껏 너희 같은 자들은 없었다(亂臣賊子未有如汝者) 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亂臣賊子란 옛날 영국에서는 국사범들을 런던탑(the Tower of Londen)에 감금하였는데, 이 탑의 Thames강 쪽의 문을 the Traitor's Gate 라 하였다. 이는 곧 亂臣賊子之門 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많은 亂臣賊子 들이 탄생과 함께 이슬로 사라져 갔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난신(亂臣) 의 탄생은 불과 18년전인 1979년 10월 26월에 있었다. 하지만 한 시기에 亂臣 과 賊子 의 출현을 모두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004 신출귀몰(神出鬼沒) / 神(귀신 신) 出(날 출) 鬼(귀신 귀) 沒(없어질 몰)
동에 번쩍 서에 캄캄 아무도 모르게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뜻
회남자淮南子 <병략훈兵略訓>에는 교묘한 자의 움직임은 신이 나타나고 귀신이 걸어가는 듯하며(神出而鬼行), 별이 빛나고 하늘이 운행하는 것 같아, 진퇴 굴신의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한계도 없어, 난조(鸞鳥:전설 속의 새이름)가 일어나듯, 기린이 떨치고 일나는 듯, 봉황새가 날 듯, 용이 오르듯, 추풍과 같이 출발하여 놀란 용과 같이 빠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으로 하여금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하도록 철저한 보안 유지나 위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神出鬼沒 이란 바로 神出而鬼行 이라는 구절에서 연유된 말이다. 이며, 행동이 신속하고 그 변화가 심하여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神出鬼沒 했던 홍길동의 출생지를 놓고 요즈음 관련 지방 자치단체들의 논쟁이 매우 진지하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거니와, 귀신같은 양반을 서로 모시겠다고 열을 올리는 후손들의 길동 할아버지 에 대한 존경심은 시대적 해결사의 출현 을 고대하는 우리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005 정중지와(井中之蛙) / 井(우물 정) 中(가운데 중) 之(갈 지) 蛙(개구리 와)
개구리는 짠물에서 못 산다 우물 안의 개구리, 즉 생각이나 식견이 좁은 사람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황하의 신(神) 하백(河伯)은 가을 홍수로 황하의 물이 불어나자 기뻐하며 천하의 훌륭함이 모두 자기에게 모여있다고 생각하였다. 물을 따라 동해의 북쪽 바다에 이르자 하백은 바다의 위세에 눌려 한숨을 지었다. 그러자 북해의 신(神)인 약(若) 은, 우물 속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가 좁은 곳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오(井蛙不可以語於虛也, 拘於虛也). 지금 당신은 대해를 보고 비로소 자신의 꼴불견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대도의 이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井中之蛙 井蛙不知大海 井底蛙 라는 표현도 모두 같은 의미이다. 얼마 전 까지만해도 Globalization 인지 세계화 인지를 외치며 우물 안의 개구리 소탕을 선도했던 사람을 요즘 들어선 보기 어렵다. 뜬금없이 우물 밖으로 나가라 하니, 영어 과외가 급증하지 않고 국제공항이 붐비지 않고서야,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006 조장(助長) / 助(도울 조) 長(길 장)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는 것. 도와서 성장시키다 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쓸데없는 일을 해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다 라는 부정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孟子 <공손추公孫丑>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자기가 심은 곡식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싹들은 뽑아 올렸으나, 그 싹들은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리해서라도 잘 되게 하려고 했던 농부의 행동은 오히려 무익(無益)의 정도를 넘어서 해악(害惡)이 되었던 것이다.
싹과 같은 우리의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그리고 과외 학원을 전전하며 뿌리가 흔들리도록 助長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맹자는 아이들을 가르침에 마음을 망령되이 갖
말며(心勿忘), 무리하여 잘 되게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勿助長也) 고 우리 어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날 하루 만이라도 마음껏 놀도록 아이들을 助長 해 보았으면.
007 도룡지기(屠龍之技) / 屠(잡을 도) 龍(용 룡) 之(갈 지) 技(재주 기)
용의 눈물, 여기에서 그치다
장자莊子 <열어구편列禦寇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장자는 주팽만은 용을 죽이는 방법을 지리익에게서 배우는데, 천금이나 되는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삼 년만에야 그 재주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朱 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成技, 而無所用其巧). 성인은 필연적인 일에 임할 때에도 필연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다툼이 없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마음속에 다툼이 많다. 라고 말하며, 소인들은 사소로운 일에 얽매여 대도(大道)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屠龍之技 란, 곧 많은 돈과 세월을 투자하여 배웠으나 세상에서 써먹을 데가 없는 재주를 말한다. 본시 龍 이란 상상 속의 동물일 뿐이니, 주팽만이 고생 끝에 배운 기술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다. 九龍 이다 二龍 이다 해서 먼저 승천(昇天)하려고 다투는 용들이 유독 많은 것도 요즈음 들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모두 승천하는 기술과 용 잡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주팽만의 屠龍之技가 진가를 발휘하여, 용의 눈물이 그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008 호가호위(狐假虎威) / 狐(여우 호) 假(빌릴 가) 虎(범 호) 威(위엄 위)
여우 뒤엔 호랑이가 있었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기원전 4세기 초, 중국의 전국시대 초나라의 선왕(宣王)이 위(魏)나라 출신의 신하인 강을(江乙)에게 북방 강대국들이 초나라 재상(宰相)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묻는 대목이 실려 있다. 강을은 여우와 호랑이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즉, 짐승들이 두려워 한 것은 여우가 아니라 그의 뒤에 있던 호랑이였다는 것이다. 이는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재상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선왕의 강병(强兵)임을 비유한 것이었다.
이렇듯 狐假虎威 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권세나 배경을 빌어위세 부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狐假虎威를 일러 영어로는 an ass in the lion's skin(사자의 탈을 쓴 나귀) 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죽은 사자의 탈을 쓴 나귀보다는 살아있는 호랑이를 꼬여 뭇 짐승들을 속인 여우 쪽이 훨씬 교활하고 가증스럽다. 여우같은 사람과
여우의 잔꾀에 속아 넘어간 눈먼 호랑이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는 전에 없이 뒤숭숭한 것이다.
009 烏鳥私情(오조사정) / 烏(까마귀 오) 鳥(새 조) 私(사사 사) 情(뜻 정)
할머니를 모시는 손자의 효심
진(晋)나라 사람 이밀(李密)이 쓴 <진정표陳情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실려 있다. 이 글은 조모 유씨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 말이 부득이 관직을 사양하게 됨을 황제께 고하는 글이다.
저는 조모가 안 계셨더라면 오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며, 조모께서는 제가 없으면 여생을 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금년 44세이고, 조모 유씨는 96세이니, 제가 폐하게 충성을 다할 날은 길고 조모 유씨에게 은혜를 보답할 날은 짧습니다. 까마귀가 어미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 까지만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烏鳥私情, 願乞終養). 이 말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하씨가 개가하자,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효심이 두터워서 할머니의 병간호를 하고자 황제가 내린 관직을 물리쳤다.
烏鳥私情 이란 까마귀가 자라면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듯 그처럼 부모를 모시는 지극한 효심 을 이르는 말이다. 옛부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이 말의 <陳情表>를 읽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손자의 카네이션 한 송이가 돋보이는 특별한 어버이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010 鼓腹擊壤(고복격양) / 鼓(두드릴 고) 腹(배 복) 擊(부딪칠 격) 壤(흙 양)
배 두드리며 골프는 치지만
십팔사략十八史略 에는 요(堯)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민심을 파악하고자 천한 옷을 입고 시내를 돌았을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요임금은 거리에서 아이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조금 후에는, 한 노인이 무언가를 먹으면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鼓腹), 격양 놀이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노인은 해가 뜨면 들에 밭을 갈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네.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농사지어 먹고 사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리오. 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치가 잘 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요 임금은 흐뭇한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 왔다.
鼓腹은 부른 배를 두드리다라는 뜻이다. 壤은 본시 나무로 만든 신발모양의 놀이 도구이며, 30-40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것을 서로 맞치는 놀이를 격양擊壤 이라 했다. 따라서 鼓腹擊壤 은 부른 두드리며 양 치기 놀이를 하는 것 인데, 이는 곧 太平聖代(태평성대) 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저 잘 먹고 골프 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태평성대일 수는 없다. 鼓腹擊壤 은 진정 마음까지 편안한 시대에라야 어울리는 말이다.
011 西施目(서시빈목) / 西(서녘 서) 施(베풀 시) (찡그릴 빈) 目(눈 목)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
莊子 <천운편天運篇>에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나온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서시가 가슴을 앓아 눈을 찡그리고 있으니, 그 마을의 다른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와서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렸다(西施病心而 ,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 그 결과 어떤 이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
이 이야기는 공자의 제자인 안연과 악관(樂官)인 金 이라는 사람이 나누는 대화중에 나온다. 장자는 당시 주(周)왕조에서 이상 정치를 재현하려는 것을 서시의 찌푸림을 본받는 추녀의 행동 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놀림 받는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던 것이다.
西施 目(서시가 눈을 찡그리다) 이란 아무런 비판 없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효빈(效 :눈 쌀 찌푸림을 흉내 내다) 이라고도 한다. 맹신(盲信)과 맹목적 추종은 그 추녀다운 사고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유행에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주관(主觀)과 합리적 비판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012 苛政猛於虎(가정맹어호) / 苛(매울가)政(정사정)猛(사나울맹)於(어조사어)虎(범호)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 기슭을 지나고 있는데, 한 부인이 무덤 앞에서 울며 슬퍼하고 있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그 까닭을 묻게 하였다. 그 부인은 대답하길 오래전에 시아버님이 호랑이게 죽음을 당하였고, 저의 남편 또한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의 아들마저 호랑이게 목숨을 잃게 되었답니다. 라고 하였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말에 그 부인은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無苛政). 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자로의 말을 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잘 알아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다(苛政猛於虎也). 라고 하였다.
춘추 말엽 노(魯)나라의 대부 계손자(系孫子)의 폭정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물려죽는 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苛政 이란 번거롭고 잔혹한 정치를 뜻한다. 政을 徵(징)의차용으로 보아 번거롭고 무서운 세금과 노역 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잔혹한 정치, 무거운 세금이나 노역은, 결국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들이다.
013 家貧思良妻(가빈사양처) / 家(집가)貧(가난할빈)思(생각할사)良(좋을량)妻(아내처)
모두 어려운 시기에는 유능하고 어진 인재가 필요하게 된다.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는 위나라 문후文侯가 재상 임명을 위해 이극(李克)에게 자문을 요청하면서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위문 후는 이극에게 말하길, 선생께서 과인에게 말씀하시길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그리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 라고 하셨습니다. 제 동생인 성자(成子)와 적황(翟璜) 중, 어떤 이가 적합합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극은 문후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진언한다. 평소에 지낼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할 때에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위나라 재상이 된 사람은 바로 성자(成子)였다. 비록 문후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득 중 10%만을 생활에 쓰고, 나머지 90%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어진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어진 재상으로서도 적임자였던 것이다. 家貧思良妻 나 國亂思良相이라는 말은 모두 어려운 시기에는 유능하고 어진 인재가 필요하게 된다. 것을 뜻한다.
014 肝腦塗地(간뇌도지) / 肝(간 간) 腦(뇌 뇌) 塗(칠할 도) 地(땅 지)
전란(戰亂)중의 참혹한 죽음을 형용한 말이다.
사기(史記) 유경열전(劉敬列傳)에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유경의 대화가 실려 있다. 유경은 고조에게 폐하께서는 촉땅과 한을 석권하고, 항우와 싸워 요충지를 차지하도록 까지 대전(大戰) 70회, 소전(小戰) 40회를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간과 골이 땅바닥을 피칠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자식이 들판에서 해골을 드러내게 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使天下之民, 肝腦塗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 라고 하였다.
유경은 덕치(德治)가 이루어졌던 주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한나라 고조는 많은 전쟁을 치르며 땅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발생할 반발세력의 저항이나 외부의 침략을 예상하
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조에게 옛 진나라의 요충지인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肝腦塗地(간과 뇌가 흙과 범벅이 되다.)란 전란(戰亂)중의 참혹한 죽음을 형용한 말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겪어야하는 죽음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지난 주 TV에 보도되었던 르완다 사람들의 죽음의 귀향 열차 91명 압사 라는 화면은 肝腦塗地를 연상케 하였다.
015 靑出於藍(청출어람) /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 藍(쪽 람)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변화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군자가 말하길, 배움은 그쳐서는 아니된다. 푸른색은 쪽풀에서 취하였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며,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라고 하였다. (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성악설을 주장한 전국시대의 학자 순자는 남풀과 청색, 그리고 물과 얼음의 비유로써 교육에 의한 인성의 교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고 이(利)를 탐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므로, 스승의 가르침과 예의로써 이를 교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靑出於藍이란 본시 그 잎으로 남색 염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식물의 이름이다. 남 풀 에서 챙색을 추출하는 과정이나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곧 교육 을 비유한 것이니, 靑出於藍 이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변화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出藍 이라는 표현도 같은 뜻이다.
진정으로 남풀과 물의 역할을 하는 스승, 챙색과 얼음으로 변화된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靑出於藍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스승의 날이 되었으면 한다.
016 三人成虎(삼인성호) /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진실처럼 들리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는 위나라 혜왕(惠王)과 그의 대신 방총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방총은 태자를 수행하고 조(趙)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신을 중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위 혜왕에게 몇 마디 아뢰게 된다.
만약 어떤 이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위 혜왕은 그걸 누가 믿겠는가? 라고 하였다. 방총이 다시 다른 사람이 또 와
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왕은 그렇다면 반신반의하게 될 것이네. 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방총이 세 사람 째 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라고 하자 왕은 곧 과인은 그것을 믿겠네. 라고 하였다. 이에 방총은 시장에 호랑이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三人言而成虎). 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중상 모략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청하였다.
三人成虎란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진실처럼 들리게 되어버린다 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말들이 혹시 진짜 호랑이를 만들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017 一刻三秋(일각삼추) / 一(한 일) 刻(새길 각) 三(석 삼) 秋(가을 추)
짧은 시간도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나타낸 말이다. 하루가 삼년 같은 그리움.
시경(詩經) 왕풍(王風)에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채갈(采葛) 이라는 시(詩)가 있다. 그대 칡 캐러 가시어 하루 동안 못 뵈어도 석 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그대 대쑥 캐러 가시어 하루 동안 못 뵈어도 아홉 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그대 약쑥 캐러 가시어 하루 동안 못 뵈어도 세 해나 된 듯하네(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 고대 중국에서는 일주야(一晝夜)를 일백각(一百刻)으로 나누었는데, 절기(節氣)나 주야(晝夜)에 따라 약간 다르다. 예컨대, 동지에는 낮이 45각, 밤이 55각이었고, 하지에는 낮 65각, 밤 35각이었다. 춘분과 추분에는 낮이 55각반이었고, 밤은 44각반이었다. 청(淸)대에 이르러서는 시종(時鐘) 으로 시간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현대 중국어에서는 15분을 一刻 이라 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一刻 이라는 말로써 매우 짧은 시간을 표현하였다. 一刻三秋 나 一刻如三秋(일각여삼추) 라는 말은 이 시의 一日三秋 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것으로 모두 같은 의미이다.
一刻三秋란 짧은 시간도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나타낸 말이다.
018 蓋棺事定(개관사정) / 蓋(덮을 개) 棺(널 관) 事(일 사) 定(정할 정)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 된다 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두보(杜甫)가 사천성(四川省)의 한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이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 아들인 소계(蘇係)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소계에게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의 군불견 간소계(君不
見 簡蘇係) 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길 가에 버려진 못을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백년 되어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만들어지며 / 조그만 물웅덩이 속에도 큰 용이 숨어 있을 수 있네. / 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이네(蓋棺事始定) /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이 시를 읽은 소계는 후에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서 설객(說客)이 되었다고 한다. 蓋棺事定이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 된다 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죽은 이의 업적을 찬양하기도 하고, 생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80년 5월에 관 뚜껑이 덮혀 졌던 많은 이들, 그들은 거의 20년만에야 자신들의 자리가 정해지게 된 셈이다.
019 一葉知秋(일엽지추) / 一(한 일) 葉(잎 엽) 知(알 지) 秋(가을 추)
하나의 낙엽을 보고 곧 가을이 왔음을 알다라는 뜻이다.
회남자 설산훈(說山訓)에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해가 장차 저물려는 것을 알고(見一落葉而知歲之將暮), 병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에 추위가 닥쳐옴을 아는 것은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논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나라 한 시인의 시(詩)에는 떨어지는 잎 새 하나로 천하가 가을임을 알다. (一落葉知天下秋). 라는 구절이 보인다.
一葉知秋는 하나의 낙엽을 보고 곧 가을이 왔음을 알다라는 뜻이다. 이는 사소한 것으로써 큰 것을 알며, 부분적인 현상으로써 사물의 본질이나 전체, 발전 추세 등을 미뤄 알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들은 정치와 경제에서, 그리고 교육에서도 낙엽들을 보았으며, 지금도 사회각 분야에서 새로이 떨어지는 많은 잎사귀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서양 속담에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성급한 판단을 삼가라는 뜻이다. 지금 몇몇의 낙엽들이 눈에 띄인다고 해서 가을과 겨울의 뒤를 이어 나타날 봄까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一葉知秋 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以偏槪全(이편개전), 즉 반쪽으로써 전체를 짐작하다 라는 말이 있다.
020 佳人薄命(가인박명) / 佳(아름다울 가) 人(사람 인) 薄(엷을 박) 命(목숨 명)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 을 뜻하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송대(宋代)의 시인 소식(蘇軾)은 진사, 학사, 예
부상서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치적으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이러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심도 있는 작품을 쓰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佳人薄命 이라는 말은 그의 칠언율시 박명가인(薄命佳人)에 나온다.
두 볼은 엉긴 우유 빛 머리는 옻칠한 듯 검고 / 눈빛이 발에 비추어 구슬처럼 반짝인다. / 하얗고 하얀 비단으로 선녀의 옷을 지어 입고 / 타고난 바탕을 더럽힐까 입술연지는 바르지 않았네. / 오나라 사투리의 예쁜 목소리 앳되기만 한데 / 한없는 근심은 전혀 알 수 없네. /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自古佳人多命薄) / 문을 닫은 채 봄이 지나가면 버들 꽃도 떨어지리.
본래 이 시에서는 佳人命薄 이라 하였으나 후에는 佳人薄命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美人薄命(미인박명) 이라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佳人薄命이란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 을 뜻하는 말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뜯어고친 여인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은 외모를 위해 수명과 운명이라는 내실(內實)을 포기한 것일까.
021 一木難支(일목난지) / 一(한 일) 木(나무 목) 難(어려울 난) 支(지탱할지)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 을 비유한 것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편(任誕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위(魏)나라 명제(明帝)의 사위인 임개(任愷)는 가충(賈充)이라는 사람과의 불화로 그만 면직당하고 말았다. 그는 권세를 잃게 되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임개의 친구인 화교(和嶠)에게 말하길 당신은 어찌 친구인 임개의 방탕함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좌시만 하는거요? 라고 물었다.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던 화교는 임개의 방탕은 마치 북하문(北夏門)이 무너질 때와 같아서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쳐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非一木所能支). 라고 대답하였다.
一木難支는 一柱難支(일주난지)라고도 하는데, 이는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 을 비유한 것이다.
개인의 경우 방탕함으로 얻게 되는 최후의 결과는 망신(亡身)이고, 나라의 경우에는 망국(亡國)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방탕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충실한 기둥을 하나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022 徙木之信(사목지신) / 徙(옮길 사) 木(나무 목) 之(갈 지) 信(믿을 신)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인 상앙(商 )의 법령 시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南門)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았다. 상앙이 다시 五十金을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것을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일 년 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왔다. 이때 태자(太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태자의 보좌관과 그의 스승을 처형하였다. 이후 백성들은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徙木之信이란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을 뜻하며, 移木之信(이목지신) 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상앙의 徙木之信 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야 하며, 만든 법은 자신들부터 반드시 지키겠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어야한다.
023 一饋十起(일궤십기) / 一(한 일) 饋(먹일 궤) 十(열 십) 起(일어날 기)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 했음 을 뜻한다.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는 우(禹)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 라고 하였다.
一饋十起란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 했음 을 뜻한다. 이는 곧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一饋十起 하면서 열성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했던 통치자가 몇이나 있었으며, 그리고 통치자들 때문에 국민들이 끼니를 건너뛰어야만 했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024 七步成詩(칠보성시) / 七(일곱 칠) 步(걸음 보) 成(이룰 성) 詩(시 시)
문재(文才)가 민첩함을 말한다.(일곱 걸음에 숨겨진 재능)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는 위(魏)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와 그의 동생인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간에 일어난 고사가 실려 있다.
문제는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못 지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동아왕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불에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서로 지저댐이 어찌 이리도 급할까! 문제는 조식의 이 시를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조조(曹操)와 그의 큰 아들인 조비, 셋째 아들인 조식은 중국 문학에서 삼조(三曹) 라 칭하는 유명한 문장가들이다. 이들 중 조식의 시재(詩才)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비는 천자(天子)가 된 후에도 조식에 대한 시기심이 변하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이러한 시를 짓게 했던 것이다. 七步成詩는 문재(文才)가 민첩함을 말하며, 칠보재(七步才)란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025 塗炭之苦(도탄지고) / 塗(진흙 도) 炭(숯 탄) 之(갈 지) 苦(괴로울 고)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 을 말한다.
서경(書經) 중훼지고(中 之誥)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신하였던 중훼가 탕왕에게 고하는 글이 실려있다. 탕왕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을 늘 괴롭게 여기고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구실 삼을까 염려하였다. 중훼는 이러한 탕왕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아뢰어 그를 격려하였다.
하늘은 총명한 이를 내셔서 이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임금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民墜塗炭), 하늘은 이에 임금님께 용기와 지혜를 내리시어, 온 나라의 의표가 되어 바로 다스리게 하시어, 우(禹)임금의 옛 일을 계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법을 따라서 하늘의 명을 받드시는 것입니다.
塗 는 진흙을 뜻하고 炭 은 숯불 을 뜻하니, 塗炭之苦란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 을 말한다. 이는 재난(災難) 등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나타낸다.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묘사함에 도탄(塗炭) 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은 지금 塗炭之苦를 겪고 있는 것이다.
026 刻舟求劍(각주구검) /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뱃전에 새겨놓은 표시만을 믿고 물에 빠뜨린 칼을 찾으려함을 뜻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는 융통성 없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의 한 사나이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칼을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다른 칼을 꺼내어 그 배의 옆 부분에 칼 빠뜨린 곳이라는 자국을 새기면서(遽刻其舟) 여기는 내 칼이 빠진 곳 이라고 말했다. 배가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새겨 놓았던 곳을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 칼을 찾으려 했다(求劍). 그러나 자신이 탔던 배는 칼을 빠뜨린 곳을 지나 계속 이동하여 왔으므로, 그가 칼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刻舟求劍 이란 뱃전에 새겨놓은 표시만을 믿고 물에 빠뜨린 칼을 찾으려함을 뜻한다. 이는 곧 시세(時勢)나 세상 형편에 어둡거나 고지식함 을 비유한 말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文句)에 얽매어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경우에도 刻舟求劍 이라는 말은 들어맞는다.
이렇듯 현실 감각이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 반대로 시류(時流)에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약삭빠르게 앞서 가는 사람은 대사(大事)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027 鷄口牛後(계구우후) / 鷄(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큰 집단의 말단보다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낫다.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전국(戰國)시대의 모사(謀士) 소진의 일화가 실려 있다. 소진은 합종책(合從策)으로 입신(立身)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진(秦)나라 혜왕, 조(趙)나라의 재상인 봉양군 등을 만나 보았으나 환영 받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연(燕)나라로 가서 문후(文侯)를 만나, 연나라가 조(趙)나라와 맹약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한다는 합종의 계획을 말하였다. 문후의 후한 사례에 고무된 소진은 얼마 후 한(韓)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한나라의 선혜왕(宣惠王)을 만나 진나라를 섬기지 말 것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유세하였다. 이번 기회에 남북으로 연합하는 합종책으로써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막아보십시오. 옛말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말라(寧爲鷄口無爲牛後). 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선혜왕은 소진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나머지 다섯 나라들도 그에게 설복되었으며, 결국 소진은 6국의 재상을 겸임하게 되었다.
鷄口牛後란 큰 집단의 말단보다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낫다 는 것을 뜻이다. 이제 대선(大選)이 가까워지면서 鷄口 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맛으로 치자면 꼬리곰탕 이 훨씬 나은 것을…
028 食言(식언) / 食(먹을 식) 言(말씀 언)
밥이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듯 약속을 슬그머니 넘겨 버리는 것
서경(書經) 탕서(湯誓)에는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려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맹서가 기록되어 있다. 탕왕은 박( )땅에서 출전에 앞 둔 전군(全軍)에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라의 임금이 죄가 많아 하늘이 명하시니 그를 치려는 것이오. 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니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소. 하나라 임금은 백성들의 힘을 빠지게 하고, 하나라 고을을 해치게만 하였소. 탕왕은 하나라 걸왕의 죄상을 설명하며, 계속하여 정벌의 불가피함을 외친다. 바라건대 나를 도와 하늘의 법이 이루어지도록 하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여러분들은 믿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爾無不信).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오(朕不食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처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제시한다.
食言 이란 밥이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듯 약속을 슬그머니 넘겨 버리는 것 이니, 이는 곧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을 말함 을 뜻한다. 떡값 받아 떡을 사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거 때 내뱉었던 공약의 말(言) 까지도 깡그리 먹어치우는 이들은 탕왕에게서 신의(信義)를 배워야 한다.
029 越俎代 (월조대포) / 越(넘을 월) 俎(도마 조) 代(대신할 대) (부엌 포)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꺼리다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요(堯)임금과 기산에 숨어 살았다는 은자(隱者) 허유(許由)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요임금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이야기 하며 허유에게 천하를 맡아줄 것을 권유한다. 일월(日月)이 밝은데 횃불을 계속 태우면, 그 빛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때맞추어 비가 내리는데 여전히 물을 대고 있으니 그 물은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부디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이러한 요임금의 권유에 허유는 뱁새와 두더지를 비유로 들며 다음과 같이 거절의 뜻을 표한다. 그대는 돌아가시오. 내게 천하란 아무 소용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못 만든다고 할지라도 시동이나 신주가 술단지와 고기그릇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오( 人雖不治 ,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越俎代 란 자신의 직분을 넘어 타인의 일을 대신하는 것 을 말한다. 越俎之嫌(월조지혐) 이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꺼리다라는 뜻이다. 일 처리가 썩 훌륭하지 않더라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030 亡國之音(망국지음) /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 音(소리 음)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 을 말한다.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산동의 복수( 水)라는 곳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랑하였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음악을 듣고 깜짝 놀라 이건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라고 말하며 연주를 중지시켰다.
사광은 그 음악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것은 주나라의 악사인 연(延)이 주왕(紂王)을 위해 만든 음탕한 음악입니다.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정벌하자 연(延)은 복수까지 도망 와서는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음악은 복수 강변에서만 들을 수 있으며, 최초로 듣는 자는 반드시 나라를 빼앗긴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 을 말한다. 최근 일부 유행가의 가사에도 음란한 표현이나 욕설 등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주왕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음악이라면 곧 亡國之音 이 아닐까.
031 匹夫之勇(필부지용) / 匹(필 필) 夫(지아비 부) 之(-의 지) 勇(날쌜 용)
사려분별 없이 혈기만 믿고 날뛰는 소인들의 경솔한 용기를 말한다.
맹자(孟子) 양혜왕하(梁惠王下)편에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맹자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선왕은 왕도정치를 설명하는 맹자에게 이웃 나라들과 사귀는 방법이 있겠는가를 물었다. 맹자는 인(仁)과 지(智)에 의한 교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선왕은 맹자의 말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용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맹자는 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왕께서는 작은 용기를 갖지 마십시오. 칼자루을 어루만지며 노려보면서 네가 감히 나를 당해내겠느냐? 라고 하신다면, 이는 필부의 용기입니다(此匹夫之勇). 그것은 겨우 한 사람만을 대적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제발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匹夫之勇 이란 사려분별 없이 혈기만 믿고 날뛰는 소인들의 경솔한 용기를 말한다. 얼
마전 고층빌딩에서 돈을 뿌렸던 한 노동자의 행동을 두고 匹夫之勇이니 호연지기(浩然之氣) 이니 하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匹夫之勇 으로 즉각 반응을 보여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껏 침묵하고 있다.
032 蒲柳之姿(포류지자) / 蒲(부들 포) 柳(버들 류) 之(-의 지) 姿(맵시 자)
잎이 일찍 떨어지듯 일찍 노쇠(老衰)하는 체질 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 등을 비유한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에는 진(晉)나라 간문제(簡問帝)였던 사마욱(司馬昱)과 유명한 화가인 고개지의 부친이자 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의 관직을 지내게 될 고열(顧悅) 사이의 대화가 실려 있다.
고열은 간문제와 같은 30대의 나이였지만 머리가 먼저 희어졌다. 간문제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경은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는가? 라고 물었다. 고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은 송백(松柏)과 같아서 설상(雪霜)을 겪으면서도 더욱 무성해지지만, 저는 물버들과 같아 가을이 되면 곧 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 고열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지나치게 공무에만 몰두하여 침식(寢食)을 소흘히 하였던 까닭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蒲柳 란 물가에서 자라는 버들을 가리키며 수양(水楊) 포양(蒲楊) 이라고도 한다. 蒲柳之姿는 蒲柳之質(포류지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蒲柳 의 잎이 일찍 떨어지듯 일찍 노쇠(老衰)하는 체질 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 등을 비유한 말이다. 빈둥거리며 살찌는 사람보다는 아직은 열심히 일하는 고열 같은 이들이 많아 정말 다행스럽다.
033 似而非(사이비) / 似(같을 사) 而(말 이을 이) 非(아닐 비)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장하(盡心章下)편에는 스승 맹자(孟子)와 제자인 만장(萬章)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만장이 온 고을이 다 그를 향원(鄕原)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향원일 터인데 공자께서 덕(德)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망령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혼란시킬
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세속에 따라 야합라는 위선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 이다라고 하셨다 .
似而非란 사시이비(似是而非) 에서 나온 말이며,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似而非는 큰 해악(害惡)이다. 하지만 似而非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이다.
034 季札掛劍(계찰괘검) / 季(끝 계) 札(패 찰) 掛(걸 괘) 劍(칼 검)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 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계찰은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의 군주를 알현하게 되었다. 서나라의 군주는 계찰의 보검(寶劍)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사신의 자격으로 중원(中原)의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검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에 도착해보니 서나라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무덤가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수행원이 그 이유를 묻자 계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이 칼을 그에게 주려고 결심하였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훗날 계찰은 자신에게 맡겨진 왕위(王位)마저 사양한다. 季札掛劍(季札이 검을 걸어놓다) 이란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 을 비유한 말이다. 대권(大權)주자 가운데에 계찰 같은 이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035 欲速不達(욕속부달) / 欲(하고자 할 욕) 速(빠를 속) 不(아닐 불) 達(다다를 달)
서두르면 도리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거보( 父)라는 고을의 지방관이 되어 공자를 찾아와서 정치에 관하여 묻는 대목이 실려 있다.
공자는 자하의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을 빨리 하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돌보지 말아라. 빨리 하려고 들면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欲速則不達), 작은 이익을 돌보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欲速이란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얼른 성과를 올리려는 성급한 마음을 말한 것이며, 欲速不達이란 서두르면 도리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에는 급할수록 천천히 라는 표현이 있고, 영어에는 Haste makes waste. 나 More haste, less speed. 라는 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조급한 심리를 경계한 표현들이다.
얼마 전 고속 전철을 달릴 TGV열차가 차고에서 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보도가 있었다. 총알 같은 TGV를 좀 더 일찍 굴려 보려는 성급한 마음에 철길 만드는 일에는 정신을 제대로 쏟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036 朝三暮四(조삼모사) /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본시 눈앞의 차이만을 알뿐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열자(列子)의 황제(黃帝)편과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원숭이를 기르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를 너무 사랑하여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원숭이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들도 저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원숭이를 사육하다 보니 먹이 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는 원숭이의 먹이를 제한하고자 하였으나 많은 원숭이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서 먼저 그들을 속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 준다면(若與 朝三而暮四) 족하겠느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면 족하겠느냐? 라고 했다. 이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朝三暮四 란 본시 눈앞의 차이만을 알뿐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나,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037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 / 民(백성민) 以(써이) 食(밥식) 爲(할위) 天(하늘천)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임을 뜻한다.
사기(史記) 역생 육가열전( 生 陸賈列傳)에는 한(漢)나라의 역이기( 食其)라는 모사(謀士)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항우는 우세한 병력으로 유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유방은 성고의 동쪽 지역을 항우에게 내주고자 하였다.
이때 유방의 모사였던 역이기는 식량 창고인 오창(敖倉)이 있는 그 지역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말했다. 저는 천(天)이 천(天)이라는 것을 잘 아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있으나, 천을 천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없다. 왕자(王者)는 백성을 천(天)으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천(天)으로 안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방은 역이기의 말에 따라, 곧 전략을 바꾸었다.
民以食爲天이라는 말은 한서(漢書) 역이기전(食其傳)에도 실려 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임을 뜻한다. 임금 된 자는 백성을 하늘 섬기듯 섬겨야 하고, 백성들의 하늘은 임금이 아니라 곧 식량임을 알아야 한다.
038 駑馬十駕(노마십가) / 駑(둔할 노) 馬(말 마) 十(열 십) 駕(멍에 가)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는 무릇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간다면 이를 따를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 라는 말이 있다. 또한 반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 라는 말도 있다.
駑馬 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一駕 라 하니, 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한다.
駑馬十駕란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니다 라는 뜻이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영어의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라는 표현과 비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학습자의 능력에 따른 수준별 지도가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일부 과목에서 다소 부진한 학생일지라도 駑馬十駕하듯 노력한다면 상당히 향상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039 與虎謀皮(여호모피) / 與(더불 여) 虎(범 호) 謀(꾀할 모) 皮(가죽 피)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08에는 마치 이솝 우화(寓話)와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周)나라 때, 어떤 사나이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여우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면 가볍고 따뜻하다는 말을 듣고, 곧장 들판으로 나가 여우들과 이 가죽 문제를 상의하였다(與狐謀其皮). 자신들의 가죽을 빌려달라는 말
을 듣자마자 여우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맛좋은 제물(祭物)을 만들어 귀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곧 양들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며, 그들에게 고기를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양들은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與狐謀皮라는 말은 후에 與虎謀皮로 바뀌었으며, 與虎謀皮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요구 하다라는 뜻이다. 여우나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어 내라하고, 양에게 고기를 썰어 내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與虎謀皮란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 을 비유한 말이다.
040 四知(사지) / 四(넉 사) 知(알지)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음 을 뜻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양진전(楊震傳)에는 후한(後漢) 때의 관리인 양진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儒學)에 정통했던 양진은 한 고을의 군수(郡守)가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군의 하급 관청인 현(縣)의 현령(縣令)이 몰래 많은 금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양진에게 건네주려고 하며 지금은 밤이 깊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양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고 있는데(天知地知子知我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현령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대로 물러갔다. 훗날 양진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환관과 황제의 유모인 왕성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게 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四知란 天知地知子知我知를 가리키는 말이며,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음 을 뜻한다. 四知와 비슷한 서양식 표현으로는 영어의 Walls have ears. 라는 속담을 들 수 있다.
041 含沙射影(함사사영) / 含(머금을 함) 沙(모래 사) 射(활 쏠 사) 影(그림자 영)
암암리에 사람을 해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책의 해설에 따르면, 역 이라는 괴물은 자라의 모습인데 다리는 셋뿐이고, 입김을 쏘아 사람을 해친다고 한다. 청대(淸代)의 왕균(王筠)이라는 학자는 이 或자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일명 사공(射工), 사영(射影), 축영(祝影)이라 한다. 등은 딱딱한 껍질로 되어있고 머리에는 뿔이 있다.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다. 눈은 없으나 귀는 매우 밝다. 입안에는 활과 같은 것이 가로로 걸쳐 있는데,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숨기운을 화살처럼 뿜는다. 물이나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는데(含沙射人), 이것을 맞으면 곧 종기가 나게 되며(中卽發瘡), 그림자에 맞은 사람도 병이 나게 된다(中影者亦病). 含沙射影(모래를 머금어 그림자를 쏘다) 이란 암암리에 사람을 해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떳떳치 못한 수단으로 남을 해치는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042 兵不厭詐(병불염사) / (군사 병) 不(아닐 불) 厭(싫을 염) 詐(속일 사)
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야 함 을 말한다.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에는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초(楚)나라와 전쟁을 하고자 구범(舅犯)에게 견해를 묻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는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이 일을 성취하려면 어찌해야 되겠는가? 라는 진 문공의 물음에 구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가 듣건대, 번다한 예의를 지키는 군자는 충성과 신의를 꺼리지 않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戰陣之間, 不厭詐僞). 그러니 적을 속이는 술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진 문공은 구범의 계책에 따라, 초나라의 가장 약한 우익(右翼)을 선택하였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신속하게 그곳을 공격함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후퇴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좌익(左翼)을 유인해냈다. 진 문공은 곧 좌우에서 협공하여 초나라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다.
조조(曹操)도 삼국연의(三國演義) 23회에서 兵不厭詐 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兵不厭詐는 군불염사(軍不厭詐) 라고도 하는데, 이는 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야 함 을 말한다. 대전(大戰)과 대선(大選)에는 兵不厭詐 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043 掩耳盜鈴(엄이도령) / 掩(가릴 엄) 耳(귀 이) 盜(훔칠 도) 鈴(방울 령)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양심을 속임을 비유한 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자지(自知)편에는 귀를 막고 종을 훔치던 한 사나이의 비유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말엽, 진(晉)나라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귀족들의 격렬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대표적인 신흥 세력이었던 조간자(趙簡子)가 구세력의 핵심인 범길사(范吉射)의 가족을 멸하였는데, 그의 가족 중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진나라를 탈출하였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미 몰락해 버린 범길사의 집에 들어와서는 대문에 걸려있는 큰 종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종을 훔쳐가려고 생각했으나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종을 조각내어 가져가려고 망치로 종을 내리친 순간, 꽝 하는 큰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얼른 자기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는 자기의 귀를 막으면 자기에게도 안 들리고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掩耳盜鈴(귀 막고 방울 도둑질하기)은 掩耳偸鈴(엄이투령) 掩耳盜鐘(엄이도종) 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양심을 속임 을 비유한 말이다.
044 望梅解渴(망매해갈) / 望(바랄 망) 梅(매화나무 매) 解(풀 해) 渴(목마를 갈)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 만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매실(梅實)같은 개혁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045 各自爲政(각자위정) /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각자가 자기의 주장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을 비유한 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2 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와 정(鄭)나라가 전투를 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대장인 화원(華元)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마부인 양짐(羊斟)이라는 사람에게만 주지 않았다. 양짐은 이 일로 화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다음 날 접전이 시작되자, 화원은 마차 위에서 양짐에게 마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양짐은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 라는 화원의 호령에 양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고,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疇昔之羊子爲政, 今日之事我爲政). 결국 화원은 곧 정나라 군사들에게 생포되었고, 대장이 없어진 송나라 군대는 정나라에게 크게 패하였다.
各自爲政이란 각자가 자기의 주장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을 비유한 말이며, 동시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조화와 협력을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046 門前雀羅(문전작라) / 門(문 문) 前(앞 전) 雀(참새 작) 羅(새그물 라)
문밖에 새그물을 쳐도 될 만큼 찾아오던 이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비유한 말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는 한(漢)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급암(汲 )과정당시(鄭當時)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이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두었다.
급암이나 정당시 같은 어진 이들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지면 빈객들은 흩어져 같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규(下 ) 사람 적공(翟公)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 적공이 처음 정위(廷尉)라는 관직에 오르자 빈객들이 그의 집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찾아오는 빈객들이 없어 대문에다 참새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지경이 되었다(門外可設雀羅). 후에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되자 빈객들이 또다시 밀려들었다.
門前雀羅란 문 앞의 참새 그물 이라는 뜻으로 門可雀羅(문가작라) 라고도 한다. 이는 문밖에 새그물을 쳐도 될 만큼 찾아오던 이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부(富)와 권세(權勢)를 누리며 문전성시(門前成市) 를 바라보다가 몰락한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훨씬 더 큰 참새 그물이 필요할 것이다.
047 壽則多辱(수즉다욕) / 壽(목숨 수) 則(곧 즉) 多(많을 다) 辱(욕되게 할 욕)
나이 먹고 오래 살면 그만큼 좋지 않은 일도 많이 겪게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는 요(堯) 임금이 화(華)라는 고장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 실려 있다. 요 임금이 화(華)라는 고장에 이르자 그곳의 관원이 다음가 같이 말했다. 아, 성인
(聖人)이시군요. 성인께서 장수하시도록 축복해주소서. 이에 요 임금은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그 관원이 부자가 되시도록 해주소서. 라고 말하자, 요임금은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관원은 다시 많은 아들을 두소서. 라고 말했다. 요임금은 이 말에도 그것도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관원이 사양하는 이유를 묻자, 요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이 많아지면 걱정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집니다(壽則多辱).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사양하는 것입니다.
壽則多辱이란 나이 먹고 오래 살면 그만큼 좋지 않은 일도 많이 겪게 된다는 말이다. 얼마 전 치매 노인을 택시 회사에 방치한 일이 보도되었다. 곱게 늙는 것은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다.
048 歸馬放牛(귀마방우) / 歸(돌려 보낼 귀) 馬(말 마) 放(놓을 방) 牛(소 우)
전쟁에 사용할 말과 소를 숲이나 들로 돌려보내어 다시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이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음 을 말한다.
상서(尙書) 무성(武成)편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의 주임금을 쳐부수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아침에 주(周)나라로부터 출발하여 상(商)나라를 치러 갔었다. 그 네 째달 초사흗날 왕은 상나라로부터 와서 풍(豊)에 이르러 무력(武力)을 거두고 문교(文敎)를 닦아, 말은 화산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천하에 다시 쓰지 않을 것을 보이었다.
歸馬는 군용(軍用)으로 쓰던 말을 산으로 돌려보내어 놓아 주었음을 뜻한다. 歸馬放牛 란 곧 전쟁에 사용할 말과 소를 숲이나 들로 돌려보내어 다시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이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음 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남북이 통일되면, 남북한 군사력의 70%정도가 감소되리라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정말 탱크와 장갑차는 논밭을 갈고, 군함은 원양 어업에 닻을 올리며, 전투기는 총알택시처럼 한라에서 백두까지 날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049 紙上兵談(지상병담) / 紙(종이 지) 上(위 상) 兵(군사 병) 談(말씀 담)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론(空論)을 비유한 말이다.(卓上空論)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는 허울좋은 한 장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에 조사(趙奢)와 염파(廉頗)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진(秦)나라의 침공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는 염파의 지략(智略)을 당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조나라에 거짓정보를 흘렸다. 조나라 왕은 결
국 염파를 대신하여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병법을 공부하였지만 실전(實戰)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장군의 직에 임용되지 않기를 원하였으나 조나라 왕은 끝내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괄은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죽고 수십만의 조나라 군사들은 항복했다가 모두 생매장 당하였다.
紙上兵談(Mere paper talk)이란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론(空論)을 비유한 말이며, 탁상공론(卓上空論:an armchair argument) 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050 肝膽楚越(간담초월) / 肝(간 간) 膽(쓸개 담) 楚(나라이름 초) 越(나라이름 월)
간과 쓸개의 거리가 초나라와 월나라의 관계처럼 멀다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는 중니가 말하길 뜻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같으며(肝膽楚越也), 뜻이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도 모두 하나이다 는 대목이 있다. 또한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유협(劉 )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비흥(比興)편에는 물체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합치고 보면 간과 쓸개처럼 가까운 사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간담(肝膽) 이란 본시 관계가 매우 가까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편( 眞篇)에서는 肝膽胡越(간담호월) 이라 하였는데, 肝膽楚越 과 같은 표현이다. 이는 간과 쓸개의 거리가 초나라와 월나라의 관계처럼 멀다라는 뜻이며, 비록 거리상으로는 서로 가까이 있지만 마치 매우 멀리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도 입장에 따라서는 멀어 질 수도 있고, 또 서로 다른 관계가 있는 것일지라도 형편에 따라서는 가까워질 수 있다. 후보 경선에 나서고 있는 크고 작은 용(龍)들은 서로 肝膽 처럼 가깝기도 하고 楚越처럼 멀기도 하다.
051 巧言令色(교언영색) / 巧(공교할 교) 言(말씀 언) 令(착할 령) 色(빛 색)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하게 꾸민 말을 뜻한다.
상서(尙書) 경명( 命)편에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백경(伯 )을 태복(太僕)으로 임명하며 훈계하였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대의 아래 사람들을 신중히 고르되, 교묘한 말을 하는 자, 좋은 듯 꾸민 얼굴을 하는 자, 남의 눈치만 보는 자, 아첨하는 자는 쓰지 말고, 오직 올바른 사람만을 쓰도록 하시
오(無以巧言令色便 側媚, 其惟吉士).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는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에는 인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교언영색선의인). 이라는 말이 있으며, 공야장(公冶長)편, 양화(陽貨)편 등에도 巧言令色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巧言(fine words)은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하게 꾸민 말 을 뜻하며 令色(an insinuating appearance) 이란 보기 좋게 꾸민 거짓된 표정 을 뜻한다. TV 토론회에 출연한 대선주자들은 예상 문제(?) 풀이와 답변 연습, 그리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얼굴 가꾸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그들의 말재주와 멋있는 표정이 아니었으리라.
052 開卷有益(개권유익) / 開(열 개) 卷(책 권) 有(있을 유) 益(더할 익)
책을 읽으면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다.
승수연담록( 水燕談錄)은 송(宋)나라 왕벽지(王闢之)가 남송(南宋) 고종(高宗) 이전의 잡다한 일화들을 모아 엮은 책인데, 이 책의 권6에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던 송나라 태종(太宗)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종은 이방(李昉) 등 14명의 학자들에게 사서(辭書)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발간된 많은 책들을 널리 인용하는 등 7년 동안의 작업을 통하여 사서를 완성하였다. 55개 부문으로 일천 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은 처음 서명을 태평편류(太平編類)라 하였으나 후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으로 개칭하였다.
태종은 이 사서가 완성되자 몹시 기뻐하며 매일 이 책을 읽었다. 스스로 하루에 세 권씩 읽도록 정하여 놓고, 정사(政事)로 인해 못 읽는 경우에는 쉬는 날 이를 보충하였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태종은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을 펼치면 이로움이 있으니, 짐은 이를 피로하다 여기지 않소(開卷有益, 朕不以爲勞也).
開卷有益(Reading gives advantages) 이란 책을 읽으면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다. 요즘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들 황제(皇帝)보다 더 바빠진 탓일까?
053 轍 魚(학철부어) / (물 마를 학) 轍(바퀴자국 철) (붕어 부) 魚(물고기 어)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실려있다. 집이 가난한 장주(莊周:장자의 이름)는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고을의 세금을 거둬들여 그때 삼 백금을 빌려주겠다는 감하후의 말에 장주는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지며 말을 했다.
내가 이리로 오는데 도중에 부르는 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붕어가 있있소(車轍中有 魚焉). 그 붕어는 약간의 물만 있어도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남쪽의 오월(吳越)의 왕에게로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보내주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 붕어는 불끈 성을 내며 차라리 건어물 전에 가서 자기를 찾으라고 하더군요.
轍魚(a fish in a dry rut-in extremities)는 학철지부( 轍之 ), 철부지급(轍 之急), 고어학철(枯魚 轍), 학부( ) 등이라고도 하며,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북한 인구의 4분의 1인 550만 명이 기아선상에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 허울 좋은 주체 낙원 건설 이 아니라 한 그릇의 강냉이 죽 이다.
054 金迷紙醉(금미지취) / 金(쇠 금) 迷(미혹할 미) 紙(종이 지) 醉(취할 취)
지극히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의 도곡(陶谷)이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이라는 책에는 당나라 말엽의 명의(名醫)인 맹부(孟斧)의 고사가 실려있다.
그는 독창(毒瘡) 치료에 뛰어나서, 자주 황궁에 들어가 소종(昭宗) 황제의 병을 진료하였다. 차츰 황제를 진료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그는 황궁내의 실내 장식이나 기물의 배치 등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훗날 맹부는 사천(四川)지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황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장식하였는데, 방안의 기물들을 모두 금종이로 포장하였다. 창문을 통하여 햇빛이 비칠 때면, 방안은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돌아가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방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만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해 버렸다네(此室暫憩, 令人金迷紙醉). 金迷紙醉는 紙醉金迷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극히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일부 초대형 호화 빌라의 실내장식에도 금빛나는 외제품들만 사용된다고 하는데, 입주자들의 건강(?)이 걱정스럽다.
055 徒勞無功(도로무공) / 徒(헛될 도) 勞(힘쓸 로) 無(없을 무) 功(공 공)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음 을 뜻한다.
장자(莊子) 천운(天運)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가 서쪽의 위(衛)나라로 유세(遊說)를 떠났다. 스승인 공자의 여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안연(顔淵)에게 사금(師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물길을
가는 데에는 배가 가장 좋으며, 육지를 가는 데에는 수레가 최고이지. 그런데 만약 배를 육지에서 밀고 간다면 평생 걸려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네. 옛날과 지금의 차이는 물과 육지의 차이와 같으며, 주나라와 노나라의 차이도 이러한데, 공자께서 주나라에서 시행되었던 것을 노나라에서 시행하려는 것은 배를 육지에서 미는 것과 같아 애만 쓰고 보람은 없으며(是猶推舟于陸也, 勞而無功), 틀림없이 몸에 재앙이 있을 걸세. 徒勞無功(Toil in vain)은 도로무익(徒勞無益)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음 을 뜻한다.
얼마 전 국가대표 청소년 축구팀이 국민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게 10대3으로 패하였다. 어린 선수들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버린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056 朝薺暮鹽(조제모염) / 朝(아침 조) 薺(냉이 제) 暮(저물 모) 鹽(소금 염)
냉이와 소금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몹시 빈곤한 생활을 의미한다.
당(唐)나라 한유(漢愈)의 문장 가운데 송궁문(送窮文)이라는 글이 있다. 한유는 이 글에서 자신에게 어려움을 주는 다섯 가지의 일들을 귀신으로 묘사하고, 이것들을 쫓아버리려는 자신의 마음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유는 이 글에서 의인화된 궁귀(窮鬼)에게 세 번 읍하고 자신으로부터 떠나줄 것을 간청하였다.
가난 귀신이라는 궁귀 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와 선생님이 함께 살아 온지 사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저는 선생님을 어리석게 여기지 않았으며, 선생님께서 남쪽으로 귀양 갔을 때, 저는 그 고장에 익숙하지 못하여 여러 귀신들이 속이고 능멸하였습니다. 태학에서 4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침에는 냉이 나물을 먹고 저녁에는 소금으로 반찬하며(大學四年 朝薺暮鹽), 오직 저만이 선생님을 보살펴 주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었습니다.
朝薺暮鹽 이란 냉이와 소금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몹시 빈곤한 생활을 의미하며, 몇 주 전 KBS 일요스페셜 에 나타난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생활을 묘사하는데 딱 들어맞는 표현이기도 하다.
057 人面獸心(인면수심) / 人(사람 인) 面(낯 면) 獸(짐승 수) 心(마음 심)
얼굴은 비록 사람 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 같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한대(漢代) 흉노들의 활동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흉노족은 서한(西漢) 시대 중국의 북방에 살았던 유목 민족이었다. 당시 한(漢)나라는 흉노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부하였으
므로, 흉노족들은 자주 한나라를 침입하였다. 흉노족의 수십만 기마병(騎馬兵)은 해마다 한나라의 북방 국경을 넘어 들어와 농가를 기습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납치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133년, 한 무제(武帝)는 흉노 정벌에 나서 수년 동안의 전투를 겪으며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동한(東漢)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 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같다(人面獸心) 라고 기록하였다.
人面獸心(man in face but brute in mind) 이란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를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058 得意洋洋(득의양양) / 得(얻을 득) 意(뜻 의) 洋(넘칠 양) 洋(넘칠 양)
의기양양(意氣揚揚) 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 )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 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得意洋洋(triumphant)은 의기양양(意氣揚揚)이라고도 한다. 당선될 것처럼 득의양양 떠들어대는 대선주자들에게서 마부의 모습을 보게 된다.
059 殷鑒不遠(은감불원) / 殷(성할 은) 鑒(거울 감) 不(아닐 불) 遠(멀 원)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남의 실패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 을 뜻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탕(蕩)이라는 시는 나라의 흥망(興亡)에 대한 교훈을 노래한 것이다. 하(夏)나라 최후의 왕인 걸왕(桀王)은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다 결국 그
들의 반항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16세기경 상(商)부락의 지도자인 탕(湯)는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4세기경에는, 상나라의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지역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1세기 중엽 당시 서백후(西伯侯)의 아들인 발(發)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은나라가 멸망하기 전, 서백후는 주왕에게 간언하기를 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가지와 잎은 해가 없어도 뿌리는 실상 먼저 끊어진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鑒不遠 在夏後之世)라고 하였다. 鑒은 선례(先例) 본보기라는 의미로 쓰였으니, 殷鑒不遠(An example is not far to seek) 이란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남의 실패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 을 뜻한다.
060 一擧兩得(일거양득) /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모두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의 혜왕은 초(楚)나라의 사신 진진(陳軫)에게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진진은 다음과 같은 고사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변장자(卞莊子)가 범을 찌르려고 하자 여관의 아이가 만류하면서 지금 두범이 서로 소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는데,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서로 빼앗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그 때 다친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에 두 마리의 범을 잡았다는 이름을 얻게될 것입니다(一擧必有雙虎之名) 라고 말했답니다. 조금 후에 두 범이 싸워서 큰 놈이 다치고 작은놈이 죽자, 변장자가 다친 놈을 찔러 죽이니 과연 한 번에 두 마리 범을 잡은 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一擧果有雙虎之功). 一擧兩得은 一石二鳥(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 一箭雙 (일전쌍조: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뜨린다)와 같은 표현이며, 모두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뜻한다.
061 時不可失(시불가실) / 時(때 시) 不(아닐 불) 可(옳을 가) 失(잃을 실)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는 뜻
상서(尙書) 태서(泰誓)편은 주(周)나라 서백후의 아들인 발(發)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함에 임하여 군사들을 모아 놓고 훈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소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 문왕의 명을 받았으니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큰 땅에도 제사를 지냈으며, 그대 무리들을 거느리고 하늘의 벌하심을 이루려는 것이오. 하늘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니,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그대로 따르시오. 그대들은 바라건대 나 한 사람을 도와 영원히 온 세상을 맑게 하시오(爾尙弼予一人, 永淸四海). 때가 되었으니 잃어서는 아니 되오(時哉弗可失)! 기원전 222년, 서백후 문왕(文王)의 아들인 발(發)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중국 땅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 무왕(武王)인 것이다.
時不可失(Must not lose the opportunity)이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는 뜻이며, 물실호기(勿失好機) 와 비슷한 표현이다. 역사적으로 부(富)와 명예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의 몫이었다.
062 空城計(공성계) / 空(빌 공) 城(성 성) 計(꾀 계)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준비가 전혀 없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텅빈 성(城)에 속아 넘어간 조조(曹操) 휘하의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갈량은 양평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두고, 대장군 위연(魏延) 등을 파견하여 조조의 군대를 공격케 하였다. 때문에 성 안에는 병들고 약한 소수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 때, 조조의 군대가 대도독 사마의(司馬懿)의 통솔로 양평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성을 지키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과감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시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입구와 길을 청소하여 사마의를 영접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자신은 누대(樓臺)에 올라가 조용히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당도하여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성 안에 이미 복병이 두고 자신을 유인하려는 제갈량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곧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空城計란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준비가 전혀 없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피서 철 빈집털이가 우려된다고 하는데, 제갈량의 계략을 응용해 봄직하다.
063 明鏡高懸(명경고현) / 明(밝을 명) 鏡(거울 경) 高(높을 고) 懸(매달 현)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을 비유한다.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는 진(秦)나
라 때의 신기한 거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함양(咸陽)궁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들 가운데, 너비가 4척, 높이가 5척9촌으로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臟)이 나타났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환부가 나타났으며, 이 거울은 사람의 나쁜 마음까지도 비춰 보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보았다.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던 혼란 속에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明鏡高懸(a clear mirror hung on high)은 진경고현(秦鏡高懸) 이라고도 하며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 을 비유한다. 일전에 한 법관이 판결한 술자리의 한 턱(?) 값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 같다.
064 弱肉强食(약육강식) / 弱(약할 약) 肉(고기 육) 强(굳셀 강) 食(밥 식)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이다. 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도 이 말은 전투수칙(?)이나 생존법칙(?)처럼 쓰이고 있다.
065 不可救藥(불가구약) / 不(아닐 불) 可(옳을 가) 救(건질 구) 藥(약 약)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음 을 형용한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에는 한 충신의 답답한 마음을 노래한 판(板) 이라는 시(詩)가 실
려 있다.
서주(西周) 말엽, 여왕( 王)은 포학하고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백성들은 몰래 그를 저주하였으며, 일부 대신(大臣)들까지도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여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유명한 관리였던 범백(凡伯)은 왕의 이러한 처사를 지나치다고 여겨 과감하게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하늘이 저리도 가혹한데 날 그렇게 놀리지 마소. 늙은이는 진정으로 대하는데 젊은이는 교만스럽네. 내 하는 말 망녕된 것 아닌데도 그대들은 농으로 받네. 심해지면 그땐 고칠 약도 쓸 수 없다오(不可救藥). 기원전 841년, 백성들의 폭동으로 여왕의 폭정은 결국 종말을 맞게 되었다. 不可救藥이란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음 을 형용한 말이다. 학원 폭력의 심각한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모두가 좋은 약을 찾아야 할 때이다.
066 知難而退(지난이퇴) / 知(알 지) 難(어려울 난) 而(말 이을 이) 退(물러날 퇴)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을 뜻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조에는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다(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 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정(鄭)나라는 패권(覇權)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정나라는 먼저 진나라에 의지하였다. 그러자 초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위하여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먼데 있는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듯 진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던 환자(桓子)는 정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었다. 이에 그는 철군하려 하였으나, 지휘에 따르지 않던 부하들은 초나라 군사와 교전을 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知難而退 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을 뜻한다. 대권을 향한 용(龍)들이 아직껏 꿈틀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대세의 불리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얄팍한 자존심과 환상(?) 때문일 것이다.
067 物腐蟲生(물부충생) / 物(만물 물) 腐(썩을 부) 蟲(벌레 충) 生(날 생)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곧 유방은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 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불건전한 사회와 부패한 정치는 곧 범죄와 비리(非理)의 무대인 것이다.
068 조장(助長) / 助(도울 조) 長(길 장)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 시키 다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버려 두어도 잘 될 일을 쓸데없이 건드려 망쳐버린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강하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싹이 빨리 자라지 않자 그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궁금하게 여겨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싹들은 자라기는커녕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은 사람을 드물다(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여 내버려두는 사람은 김을 매지 않는 자이고, 자라도록 돕는 사람(助之長者)은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니,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助長 이란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 시키 다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버려 두어도 잘 될 일을 쓸데없이 건드려 망쳐버린다 는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강하다.
069 南郭濫吹(남곽남취) / 南(남녘 남) 郭(성곽 곽) 濫(함부로 람) 吹(불 취)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에는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무능한 자의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피리 우) 라는 관악기의 연주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는 많은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매번 300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우를 전혀 불지 못하는 남곽이라는 한 처사가 선왕을 위하여 우를 불겠다고 간청하였다. 선왕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합주단의 일원으로 삼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남곽은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민왕(緡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민왕은 아버지인 선왕과는 달리 300명의 합주단이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듣지 않고 단원 한 사람이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난처해진 남곽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도망치고 말았다.
南郭濫吹(남곽이 우를 함부로 불다)는 남우충수(濫 充數) 라고도 한다. 이는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070 利用厚生(이용후생) / 利(이로울 리) 用(쓸 용) 厚(투터울 후) 生(날 생)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라는 뜻이다.
상서(尙書) 우서(虞書)의 대우모(大禹謨)에는 우(禹)와 순(舜)임금과 익(益) 세 사람의 정치에 관한 대담이 기록되어 있다.
우는 순임금에게 말하길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덕으로만 옳은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보양(保養)하는데 있으니, 물·불·쇠·나무·흙 및 곡식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함을 잘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 惟和) 하고 하였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7년 조에도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여섯 가지가 나오는 것을 육부(六府)라 하고,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는 정덕(正德)과, 백성들이 쓰고 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이용(利用)과,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후생(厚生), 이것을 삼사라 이릅니다(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 라는 대목이 보인다.
利用厚生 이란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라는 뜻이며, 정치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판에는 利用厚生은 커녕 국민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삶과 지위를 풍족하게 하려는 사람들
이 적지 않다.
071 玩火自焚(완화자분) / 玩(가지고 놀 완) 火(불 화) 自(스스로 자) 焚(불사를 분)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 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州 )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 진(陳), 채(蔡) 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노(魯)나라에 알려지자 노나라의 은공은 중중(衆仲)이라는 대부에게 주주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물었다.
중중은 대답하길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을 잃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夫兵, 猶火也. 弗 , 將自焚也)라고 하였다.
玩火自焚 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지난 주 북한군의 도발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이러한 불장난이 곧 자신들을 불태우는 일임을 모르는 것 같다.
072 駟不及舌(사불급설) / 駟(사마 사) 不(아닐 불) 及(미칠 급) 舌(혀 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는 경솔한 말을 경계한 대목이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극자성(棘子成)이 군자는 바탕만 있으면 되었지 문(文)이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타깝습니다. 그대의 말씀은 군자의 말씀입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합니다(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質)이 문(文)과 같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입니까?
송(宋)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필설(筆說)에도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번 입을 떠나면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라는 대목이 있다. 駟不及舌(A
word, once uttered, is beyond recall)은 駟馬難追(Four horses can't overtake it
-- a spoken word)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모 정당의 경선 후보들은 자신들이 쫓아 갈 수도 없는 약속을 마구 해대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공약(空約) 남발하는 연습을 미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073 喪家之狗(상가지구) / 喪(죽을 상) 家(집 가) 之(-의 지) 狗(개 구)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정(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문(東門)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 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말을 듣고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라고 했다. 喪家之狗이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며, 연말 대선에서 패배한 용들의 모습 또한 이러하리라.
074 酒池肉林(주지육림) /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지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술자리나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달기( 己)라는 요부에 빠져 그만 극악무도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 내어 자신을 반대하는 관리나 백성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여기에서 쾌락을 느꼈다.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 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한 다음, 많은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발가벗고 서로 희롱하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며, 자신도 먹고 마시면서 이러한 광란의 잔치를 감상하였다.
酒池肉林(sumptuous feast) 이란 지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술자리나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기업들의 연이은 부도 속에서도 향락 산업만은 불황을 모른다고 한다.
075 同心同德(동심동덕) / 同(한가지 동) 心(마음 심) 同(한가지 동) 德(덕 덕)
일치단결된 마음을 뜻한다.
상서(尙書) 태서(泰書)에는 단결을 호소하는 주(周) 무왕(武王)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다. 상(商)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포학무도한 정치는 제후(諸侯)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제후들 가운데, 주나라 문왕(文王) 희창(姬昌)의 아들인 희발(姬發)은 아버지를 이어 무왕으로 즉위한 후, 곧 제후들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주나라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맹진(孟津)이라는 곳을 통해 황하를 건너, 상나라의 도읍인 조가(朝歌)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가성의 남쪽들에서 진군의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상나라 주왕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밝히면서 정벌군의 협심과 단결을 외쳤다.
억조의 평범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마음이 떨어지고 덕에서 떠나 있고,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이 있으나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고 있소(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 비록 친한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어진 사람만 못하오.
同心同德 이란 일치단결된 마음을 뜻한다. 어려움에 처한 한 자동차 회사의 사원들이 회사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들의 단결된 마음과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았으면 한다.
076 胸有成竹(흉유성죽) / 胸(가슴 흉) 有(있을 유) 成(이룰 성) 竹(대 죽)
일을 하기 전에 완전한 계획을 구상하여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동파문집(東坡文集)49에는 운당곡언죽기( 谷偃竹記)라는 글이 있다. 동파라는 호로 유명한 소식은 문장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그에게는 자(字)가 여가(與可)인 문동(文同)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또한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소식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그가 그린 대나무와 그 기법은 옥국법(玉局法)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화죽기(花竹記)라는 책에서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해야 한다(故畵竹, 必先成竹于胸中) 라고 하였다. 그의 친구 문여가는 생동
적인 대나무를 그리기 위하여, 많은 대나무를 심어두고 매일 관찰하며, 대나무의 특징과 모습을 기억해 두었다. 당시 유명한 한 문인은 문여가가 대나무를 그릴 때, 완전한 대나무가 이미 그의 가슴속에 있었다. (與可畵竹時, 成竹已在胸) 라고 칭송하였다.
胸有成竹은 成竹在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을 하기 전에 완전한 계획을 구상하여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지금도 成竹은 속셈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대쪽(?) 인물이 대선후보로 결정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벌써 成竹 이 있었던 것이다.
077 難兄難弟(난형난제) / 難(어려울 난) 兄(맏 형) 難(어려울 난) 弟(아우 제)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서로 엇비슷하여 우열을 분간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동한(東漢)시기, 영천(潁川)의 허(許)지방에 진식(陳寔)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그는 생활이 검소하여 집안에 하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기(紀)이고 자(字)는 원방(元方)이었으며, 작은 아들은 이름이 담(湛)이고 자(字)는 계방(季方)이었다. 이들 또한 모두 명망이 드높은 인물들이었다. 원방에게는 장문(長文)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계방에게는 충(忠)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각각 자기의 아버지의 공적을 다투었는데, 끝내 해결할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묻기로 하였다. 진식은 원방은 형이 되기 어렵고, 계방은 동생이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 라고 대답하였다. 두 손자는 이 말을 듣고 모두 만족하여 물러났다.
難兄難弟 란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서로 엇비슷하여 우열을 분간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일본,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과 9승에 도전하는 박찬호. 이들은 難兄難弟 의좋은 예이다.
078 泰山壓卵(태산압란) / 泰(클 태) 山(뫼 산) 壓(누를 압) 卵(알 란)
매우 강하여 상대가 없거나 일이 매우 용이함 을 비유한 말이다.
진서(晉書) 손혜전(孫惠傳)에는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晉)나라 때, 손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은 모두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당시 진나라는 각지역 황족들의 다툼으로 몹시 혼란한 와중에 있었다. 손혜는 처음 제(齊)나라의 사마(司馬) 경( )의 부하로서, 조왕(趙王) 사마 윤(倫)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 후 성도(成都)의 왕 사마 영(潁)의 장군이 되어 장사(長沙)의 왕 사마 의(義)를 정벌하러 가기도 했으나, 이후 그는 한때 은거생활을 하였다. 동해(東海)의 왕사마 월(越)이 군사를 일으켜 그 세력이 커지자, 그는 사마월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를 칭송하였다. 그대의 깃발이 한번 휘날리면 오악(五岳)이 무너지고, 그대의 입김 한번이면 강물이 거꾸로 흐르니, 그대의 이러한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밀고 나아가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고, 정의를 바로 잡으소서. 이는 실로 맹수가 여우를 삼키고, 태산이 계란을 깔아뭉개고, 작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넓은 들을 태우는 것처럼(泰山壓卵, 因風燎原), 쉬운 일입니다 .
泰山壓卵 이란 매우 강하여 상대가 없거나 일이 매우 용이함을 비유한 말이다.
079 實事求是(실사구시) / 實(열매 실) 事(일 사) 求(구할 구) 是(옳을 시)
실제에 근거하여 진리를 밝혀냄을 뜻한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는 학문을 즐겼던 한 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하였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秦)나라 이전의 옛 책들을 그에게 받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修學好古, 實事求是) 라고 말했다.
實事求是(By verification of the facts to get the truth) 란 실제에 근거하여 진리를 밝혀냄을 뜻하며, 바로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다.
080 以卵擊石(이란격석) / 以(-써 이) 卵(알 란) 擊(부딪칠 격) 石(돌 석)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이니, 이는 곧 손해만 볼 뿐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 을 비유한 말이다.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말이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기, 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 북쪽의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점쟁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 점장이는 묵자에게 북쪽으로 가는 것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묵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계속 북쪽으로 향하여 치수(淄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치수의 물 흐름이
너무 빨라 건널 수 없게 되자 묵자는 다시 돌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오는 묵자를 보고 그 점쟁이는 거만하게 굴며 묵자의 기분을 건드렸다. 묵자는 제나라에 가지 못하게 된 판국에 점쟁이의 비웃음까지 받게 되자, 몹시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말은 근거 없는 미신이오. 당신의 말을 믿는다면 천하에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한 말로써 나의 말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소(以其言非吾言者, 是猶以卵投石也). 천하의 계란을 다 없앤다 해도 돌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오.
以卵擊石 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이니, 이는 곧 손해만 볼 뿐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 을 비유한 말이다.
081 起死回生(기사회생) /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回(돌이킬 회) 生(날 생)
죽을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 을 뜻한다.
사기(史記) 편작창공(扁鵲倉公)열전에는 춘추(春秋)시대의 명의(名醫) 진월인(秦越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월인은 당시 의원(醫員)이었던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천하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속의 신의(神醫)인 편작(扁鵲)이라 호칭하였다.
백성들을 치료해 주며 천하를 돌던 어느 날, 그는 괵( )나라를 지나면서 멀쩡하던 태자(太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왕의 부름으로 입궐하여 태자의 상태를 검사하였다. 태자는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 진월인은 태자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태자가 깨어나자, 그에게 처방문을 써주었다. 그의 처방대로 치료를 받은 태자는 한 달도 못되어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진월인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로 하여금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越人非能生死人也. 越人能使之起耳). 라고 하였다.
起死回生(Restoration of the dead to life) 이란 죽을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 을 뜻한다. 요즘 이 말을 보면 起亞回生 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082 一國三公(일국삼공) / 一(한 일) 國(나라 국) 三(석 삼) 公(공변될 공)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함 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진(晋)나라의 군주인 헌공(獻公)은 공자(公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위하여 대부(大夫)인 사위(士蔿)를 시켜서 포(蒲)땅과 굴(屈)땅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의 축성
작업에 불만을 품은 이오는 헌공에게 호소하였다. 크게 노한 헌공의 문책에 사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이 없는데도 성을 쌓으면 그 성은 적군에게 이용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견고하게 쌓아 훗날 적에게 진지로 이용당한다면, 이는 곧 불충(不忠)의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실하게 쌓는다면 이는 임금에 대한 불경(不敬)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불충불경의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덕으로 나라가 안정되어 후대가 견고하다면, 이보다 나은 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집에 돌아와서 여우가죽 옷 갈래갈래 찢어지듯, 한 나라에 세 임금 있으니, 내 누구를 따라야 할꼬(狐 尨茸, 一國三公, 吾誰適從)! 라는 시를 읊었다. 一國三公 이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함 을 비유한 말이다. 지난 주 여야 대선 후보들의 TV토론회가 방영되었는데, 바로 一國三公 의 형상이었다.
083 騎虎難下(기호난하) / 騎(말탈 기) 虎(범 호) 難(어려울 난) 下(아래 하)
이미 시작된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음 을 비유한 말이다.
수서(隋書) 독고황후전(獨孤皇后傳)에는 수나라의 건국에 관한 대목이 있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북주(北周)의 자사(刺史)인 양견(楊堅)은 북주 대사마 독고신(獨孤信)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독고신의 또 다른 딸은 주나라 명제(明帝)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양견은 또 자신의 맏딸을 명제의 아들인 선제(宣帝)에게 시집보내어 황후가 되게 하였다.
서기 580년, 선제가 세상을 떠나자 8세된 정제(靜帝)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양견은 정제를 보좌하며 쉽게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독고씨는 양견이 이미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제위를 차지하도록 종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의 일이 이미 이렇게 된 바, 당신은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大事已然, 騎獸之勢, 必不得下). 581년 3월 정변(政變)을 일으킬 시기가 되었다고 확신한 양견은 마침내 정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수(隋)나라 문제(文帝)였다.
騎虎難下(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는 騎虎之勢 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미 시작된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음 을 비유한 말이다.
084 班門弄斧(반문농부) / 班(나눌 반) 門(문 문) 弄(희롱할 롱) 斧(도끼 부)
전문가 앞에서 얄팍한 재주를 뽐냄을 비유한 말이다.
명(明)나라 매지환(梅之渙)은 이태백의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여 제이백묘시(題李白墓詩)라는 시를 썼다. 태백(太白)이라는 자(字)로 더 유명한 이백은 술을 매우 즐겼으며, 사람들은 그를 이적선(李謫仙)이라 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채석강에서 익사했다거나, 풍랑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고래와 신선들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고 있던 그를 데리고 하늘로 사라졌다고 하는 것 등이 그렇다.
훗날 채석강 부근에는 이백의 묘를 비롯한 적선루, 착월정 등의 많은 명승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많은 문인들도 이곳에서 시흥(詩興)를 느꼈다. 이렇다보니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저마다 한 수씩를 읊어대게 되었다. 시인 매지환은 나무 공예, 즉 목장(木匠)의 시조라는 노반(魯班)의 고사을 인용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채석강변에 한 무더기 흙, 이백의 이름 천고에 높은데, 오고 가는 사람마다 시 한수씩 읊조리니, 노반의 문앞에서 도끼 자랑하는도다(來來往往一首詩, 魯班門前弄大斧)
班門弄斧(Teach a dog to bark)란 전문가 앞에서 얄팍한 재주를 뽐냄을 비유한 말이다.
085 傑犬吠堯(걸견폐요) / 傑(뛰어날 걸) 犬(개 견) 吠(짖을 폐) 堯(요임금 요)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는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충성을 다함 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노중련추양(魯仲連鄒陽)열전에는 한(漢)나라 경제(景帝)때의 유명한 학자인 추양(鄒陽)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에, 추양은 뛰어난 문장력과 언변을 가지고 오왕(吳王) 수하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오왕이 반란을 꾀하자,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추양은 양(梁)나라 효왕(孝王)에게 귀순하였다.
그러나 효왕의 심복들은 추양의 재능을 시기하여, 효왕에게 그를 중상모략했다. 크게 노한 효왕은 추양을 구금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효왕에게 글을 올려 모략당한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충절지사였음을 말하고, 사실을 정확히 살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글에서 어진 선비에게 벼슬과 봉록을 베푼다면, 포악한 걸왕의 개라도 성왕(聖王)인 요임금에게 대들어 짖게 할 수 있다(傑之狗可使吠堯) 라고 하였다. 양 효왕은 이 글에 매우 감동하여, 그를 석방하였다.
傑犬吠堯란, 하(夏)나라 폭군 걸왕이 부리는 개가 그의 명을 받고 요임금과 같은 성왕(聖王)에게도 짖고 덤벼드는 것처럼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는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충성을 다함 을 비유한 말이다.
086 靑天霹靂(청천벽력) / 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본시 갑작스런 행동 을 뜻했으나, 지금은 뜻밖에 발생한 재난(災難)이나 변고(變故) 를 비유한 말로 쓰인다.
송(宋)나라에 육유(陸游:1125-1210년)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평생 광범한 제재(題材)로 1만 여수의 시를 썼으며,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고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의 저작 중의 하나인 검남시고(劍南詩稿)에는 사일야계미명기작(四日夜鷄未鳴起作)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병상에서 지냈던 그는, 음력 9월 어느 가을 날 닭들도 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이 시에서 자신의 적막한 만년(晩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내 병든 채 가을을 보내려다, 문득 일어나 붓을 놀리니, 마치 오래 동안 틀어박혀 있던 용이, 푸른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듯 하네(正如久蟄龍, 靑天飛霹靂) 육유는 병들어 드러 누워있던 자신이 갑자기 붓을 들어 시를 짓는 행동을 맑은 하늘에서 용이 벼락을 치는 것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靑天霹靂(a bolt from the blue sky) 이란 본시 갑작스런 행동 을 뜻했으나, 지금은 뜻밖에 발생한 재난(災難)이나 변고(變故) 를 비유한 말로 쓰인다. 괌에서 발생한 KAL기 추락 사고는 靑天霹靂 바로 그 자체였다.
087 杯盤狼藉(배반낭자) / 杯(잔 배) 盤(소반 반) 狼(이리 랑) 藉(깔개 자)
잔치가 파할 무렵이나 파한 뒤의 어지러운 술자리를 형용한 말이다.
사기(史記) 골계(滑稽)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 위왕(衛王)은 주색을 즐겨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초(楚)나라가 공격해 오자 언변에 능한 순우곤(淳于 )을 시켜 조(趙)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조나라 도움으로 초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위왕은 크게 기뻐하며 순우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주량을 묻는 위왕에게 순우곤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라고 대답하며, 그 까닭을 설명했다. 대왕 앞에서는 황공하여 한 말이면 취해 버리지만, 만약 남녀가 함께 앉아 마신다면, 여덟 말쯤 마셔야 취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절정에 이르고, 남녀가 한 자리에서 무릎을 맞대고 신발이 뒤섞이며, 잔과 접시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履 交錯, 杯盤狼藉), 아름다운 주인 여자가 저 한 사람만 머물게 한다면 저는 마음이 즐거워져서 한 섬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杯盤狼藉(Cups and plates are all in disorder after a feast)란 잔치가 파할 무렵이
나파한 뒤의 어지러운 술자리를 형용한 말이다. 피서 철인 요즘, 사람들 이 모이는 곳에는 떠들썩한 술자리와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088 華而不實(화이부실) / 華(꽃 화) 而(말이을 이) 不(아닐 불) 實(열매 실)
사람이나 사물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음 을 비유한 말로서, 곧 사람들의 가식과 허영을 경계하고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진(晉)나라 대신(大臣) 양처보(陽處父)는 위(衛)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 영성( 城)의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집 주인 영( )은 양처보의 당당한 모습과 비범한 행동을 보고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다만 사납고 강한 성질로만 처세하고,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으로는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키고 있소(且華而不實, 怨之所聚也). 이러한 사람을 따른다면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지도 못하고 이익은커녕, 도리어 그의 재난에 관련될 것을 두려워했소.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 돌아 온 것이오.
華而不實(Flowery but bears no fruit) 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음 을 비유한 말로서, 곧 사람들의 가식과 허영을 경계하고 있다.
089 不寒而慄(불한이율) / 不(아닐 불) 寒(찰 한) 而(말 이을 이) 慄(떨 률)
몹시 두려운 상황 을 형용한 말이다.
사기(史記) 혹리(酷吏)열전에는 혹독한 관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중앙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 세력을 억압 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다. 당시,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은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과 도위를 지내다가, 남양 태수를 거쳐 다시 정양 태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남양태수로 재임하면서, 도위(都尉)였던 영성(寧成)의 일가를 죽인 바 있어, 이미 법 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정양 태수로 부임하자, 정양군내의 호족세력을 평정한 후, 2백 여명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을 죄수 탈옥 기도 죄로 구속하였다. 의종은 이 자들은 사형수들을 탈옥시키려 하였다라고 판결하고,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전원 죽였다. 이후
군내의 호족들과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其後郡中不寒而慄), 교활한 자들은 알아서 관리에게 협력하여 공무를 도왔다.
不寒而慄(Trembling without being cold)은 몹시 두려운 상황 을 형용한 말이다. 무더위 속에서 공포 영화를 즐기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090 不恥下問(불치하문) / 不(아닐 불) 恥(부끄러워할 치) 下(아래 하) 問(물을 문)
분발하여 학문을 함에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구하는 정신 을 형용한 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는 배움의 태도를 일깨워주는 대목이 있다.
춘추(春秋)시기, 위(衛)나라 대부(大夫)였던 공어(孔 )는 매우 겸손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공어가 죽자, 위나라 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호학(好學) 정신을 배우고 계승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문(文) 이라는 봉호(封號)를 하사하였다.
당시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위나라의 자공(子貢)은, 공어에게는 잘못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그렇게 훌륭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자공은 스승인 공자에게 공어의 시호(諡號)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 합니까? 라고 물었다.
공자는 말하길 그는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도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 그래서 그를 문(文)이라 하였던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不恥下問(Not ashamed to ask of one's inferiors)은 하문불치(下問不恥) 라고도 하는데, 이는 분발하여 학문을 함에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구하는 정신 을 형용한 말이다.
091 人琴俱亡(인금구망) / 人(사람 인) 琴(거문고 금) 俱(함께 구) 亡(죽을 망)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 을 비유한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편에는 죽음에 대한 애상(哀傷)을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동진(東晋)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字는 子猷)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字는 子敬) 형제가 모두 병에 걸렸는데, 동생인 자경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 자요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자경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까? 그 얘가 이미 죽은 게 아닙니까? 라고 물으면서 조금도 슬퍼하거나 울지는 않았다.
형 자요는 즉시 수레를 타고 동생의 빈소로 달려가서는 동생의 관(棺) 위에 올라가 동생이 평소에 좋아하였던 거문고를 꺼내들고 타보았다. 그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내지 않자, 자요는 이를 내던지며 자경아, 자경아, 너와 거문고가 함께 죽었구나(子敬, 子敬, 人琴俱亡) 하면서 한참동안이나 애통하였다. 한 달쯤 지나 형 자요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人琴俱亡은 인금병절(人琴幷絶)이라고도 하며,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 을 비유한 말이다. 하지만 울부짖음만으로 애통함을 달래야 하는 KAL기 희생자 유가족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역시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092 白眉(백미) / 白(흰 백) 眉(눈썹 미)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권39에는 마씨(馬氏) 5형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마량(馬良:서기187-222년)은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으로서 자(字)는 계상(季常)이었는데, 동네에서는 흔히들 마씨 다섯 형제 중, 흰 눈썹이 가장 낫다네(馬氏五常, 白眉崔良) 라고 하였다. 마량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成語)의 주인공인 마속 등 다섯 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들의 자(字)에 모두 常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오상(五常) 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들 형제 중 맏이인 마량의 눈썹에는 흰털이 나있었는데, 그의 재능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흰 눈썹이 최고라고 하였던 것이다.
유비(劉備)는 촉(蜀)땅에 들어와서 마량을 좌장군연(左將軍 )으로 임명하였으며, 제위(帝位)에 즉위한 후에는 그를 시중(侍中)에 등용하였다. 마량은 유비를 수행하여 이릉(夷陵)전투에 참가하였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白眉(The best of all)란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흰 눈썹으로 유명한 한 인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고 한다. 과연 白眉 의 값을 하는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093 多多益善(다다익선) / 多(많을 다)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 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 을 뜻한다.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는 한신(韓信)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秦)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였다. 한신은 먼저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중용(重用)되지 못하자,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옮겼다. 유방은 황제가 되자, 한신의 병권(兵權)을 없애고, 그가 모반을 꾀하였다고 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체포된 한신에게 유방은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묻자, 한신은 폐하께서는 불과 10만의 병마를 통솔하는 장수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유방이 다시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 라고 물었다. 한신은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臣多多而益善耳)라고 하였다.
이에 유방은 이처럼 용병(用兵)에 뛰어난 그대가 어찌하여 나에게 붙잡히게 되었는가? 라고 묻자,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는 장병을 거느리는 장수는 될 수 없으나 장수들을 이끄는 장수는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 잡히게된 까닭입니다.
多多益善(The more the better) 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 을 뜻한다.
094 如魚得水(여어득수) / 如(같을 여) 魚(고기 어) 得(얻을 득) 水(물 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諸葛亮)전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동한(東漢) 말기, 천하가 대란(大亂)에 휩싸이자, 각 세력들과 다투던 유비는 인재(人才)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직접 세 차례나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하고, 조조, 손권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제갈량 또한 유비의 대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유비는 중대한 일들에 대하여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이에 유비는 그들에게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자네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라고 말했다.
如魚得水(Like fish getting water)란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095 邯鄲學步(한단학보) / 邯(땅 이름한) 鄲(조나라 도읍 단) 學(배울 학) 步(걸음보)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면 양쪽을 다 잃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의 한단(邯鄲) 사람들의 걷는 모습이 특별히 멋있었다고 한다. 연(燕)나라의 수릉(壽陵)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은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배우 위해 직접 한단에 갔다. 그는 매일 한단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원래의 걷는 방법을 버리고, 걷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발을 어떻게 들고 또 어떻게 놓는지를 생각해야만했다. 뿐만 아니라 다리의 조화와 걸음의 폭 등에 대해서도 주의해야만 했다. 이렇다보니 그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몹시 힘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한단 사람들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네발로 기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邯鄲學步는 한다지보(邯鄲之步)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면 양쪽을 다 잃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 왜색(倭色) 패션이 유행되고 있다한다. 혹시 이름까지 바꾸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096 老馬之智(노마지지) / 老(늙은이 로) 馬(말 마) 之(-의 지) 智(슬기 지)
경험 많은 사람의 지혜를 비유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세림상(說林上)에는 경험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春秋)시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제일의 위치를 차지하자, 많은 소국(小國)들은 제나라의 명을 받듬으로써 제나라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당시, 산융(山戎)이라는 나라가 제나라에 의지하고 있던 연(燕)나라를 침범하자, 환공은 산융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663년, 제나라는 산융을 크게 물리치고 도읍을 점령하였다. 산융의 국왕인 밀로(密盧)가 고죽국(孤竹國)으로 도망하자, 환공은 계속하여 고죽국을 공격하였다. 제나라는 봄에 고죽국을 공격하였으나, 고죽국의 장군인 황화(黃花)가 지형을 이용하여 응전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쟁은 겨울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제나라 군대는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려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함께 참전하고 있던 국상(國相) 관중은 이럴 때는 늙은 말의 지혜를 써보는 게 좋겠소(老馬之智可用也) 라고 말하고, 늙은 말 몇 마리를 골라 대열의 앞에서 마음껏 달리도록 하였다. 제나라 군대는 그 말들의 뒤를 따라 곧 출로를 찾아 귀환할 수 있었다.
老馬之智(An old dog for a hard road)란 경험 많은 사람의 지혜를 비유한 말이다.
097 口蜜腹劍(구밀복검) / 口(입 구) 蜜(꿀 밀) 腹(배 복) 劍(칼 검)
겉으로는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품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에는 이임보(李林甫)라는 사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宰相)으로서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다른 재주도 많아서,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능력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상하고 제거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이임보는 황제가 병부시랑(兵部侍郞) 노현(盧絢)과 엄정지(嚴挺之) 등을 중용하려 하자 그들을 비방하여 그들의 승진을 막기도 하였다.
이임보는 겉으로는 매우 선량하게 좋은 말만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자, 세상 사람들은 마침내 그의 위선적인 면목을 알고 이임보는 입에는 꿀이 있지만 뱃속에는 칼이 들어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 라고 말하였다. 口蜜腹劍(A honey tongue, a heart of gall) 이란 겉으로는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품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098 亡羊補牢(망양보뢰) / 亡(망할 망) 羊(양 양) 補(기울 보) 牢(우리 뢰)
일이 발생한 후에라도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 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大臣) 장신(莊辛)은 경양왕에게 왕을 수행하는 주후, 하후, 언릉군, 수릉군 등은 사치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경양왕이 이 말에 몹시 분노하자, 장신은 만약 신의 말을 믿을 수 없으시다면, 신이 조(趙)나라로 피난하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장신이 떠난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을 점령하였다. 경양왕은 먼 곳까지 도망하고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신을 찾아오도록 하여, 그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하여도 늦지 않으며, 양이 달아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들었습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 라고 대답하였다.
亡羊補牢(It is never too late to mend) 란 일이 발생한 후에라도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 을 비유한 말이다. 각종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비는 결코 늦는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099 赤子之心(적자지심) / 赤(붉을 적) 子(아들 자) 之(-의 지) 心(마음 심)
어린 아이의 마음, 즉 어린 아이 때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 을 뜻한다.
맹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라는 대목이 있다.
赤 에는 붉은 색 이라는 뜻 이외에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옷을 걸치지 않고 몸을 드러냄 이라는 의미가 있다. 적빈(赤貧) 이란 극빈(極貧)을, 적수(赤手) 란 맨손을, 적지(赤地) 는 불모지를 뜻한다. 순자(荀子)는 참되고 정성스런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적심(赤心) 이라고도 하였다.
赤子 란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색깔이 붉은 색이라는 점에서 갓난아이를 가리키는데, 서경(書經)에서는 赤子를 백성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맹자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이를 대인(大人)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니, 赤子之心(a child's heart) 이란 어린 아이의 마음, 즉 어린 아이 때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 을 뜻한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이 선량하고 순결함 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권에는 모 인사의 월북사건으로 적색(赤色)경보(?)가 발령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만사 제처 두고 색깔 가리기에 정신들이 없다. 그들은 赤子 같은 마음으로 좋은 정치만을 기대하고 있는 국민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100 名從主人(명종주인) / 名(이름 명) 從(좇을 종) 主(주인 주) 人(사람 인)
사물은 원래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됨 을 뜻한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름철 4월, 노(魯)나라는 고( )나라에서 만든 큰 솥을 송(宋)나라로부터 입수하여, 무신(戊申)날에 주공(周公)의 대묘에 바쳤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이름은 그 주인을 따르고, 물건은 중국을 따르는 법이니(名從主人 物從中國), 고나라의 큰 솥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솥(大鼎)은 본시 고나라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후에 송나라가 이것을 차지하였다가, 다시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환공에게 뇌물로 제공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나라에서는 내력이 복잡한 이 물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자의 의견을 들었던 것이다.
名從主人 이란 사물은 원래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됨 을 뜻하며, 이는 곧 사물의 명칭이 그것의 소재지나 나라의 호칭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명함에 표기된 보조(?) 국호(國號)로 물의를 일으켰던 모 국회의원은 단순히 한자권 인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몇몇 무식한 중국인들의 편의만을 위해 국민적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은 발상에 불쾌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은 스스로 지킬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101 悖入悖出(패입패출) / 悖(어그러질 패) 入(들 입) 出(날 출)
땀 흘리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쌓이지 않고 다시나간다는 뜻이다.
대학(大學)에는 덕과 재물과의 관계를 말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군자는 먼저 덕에 조심하는 것이다. 덕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사람이 생기고, 사람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땅이 생기고, 땅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재물이 생긴다.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용도가 생긴다. 덕은 근본이 되고 재물은 말단적인 것이다. 근본이 되는 것을 밖으로 돌리고 말단적인 것을 안으로 들이면 백성들을 서로 다투게 만들고 서로 빼앗는 짓을 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말이 남에게 거슬리게 나가면 역시 자기에게 거슬리게 들어오고, 재물이 남에게 거슬리게 들어오면 역시 자기에게 거슬리게 나가는 것이다(貨悖而入者, 亦悖而出) 라고 하였다.
悖는 도리나 사리에서 벗어나다 라는 뜻이니, 悖入悖出(Ill got, ill spent)이란 곧 땀 흘리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쌓이지 않고 다시나간다는 뜻이다.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일부 주부들의 억대 비밀 도박이 보도된데 이어 미국에서 수십억의 외화(外貨)를 날린 사회지도층 해외도박꾼들이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들은 불의(不義)의 재물(財物)을 탐하여 패가망신(敗家亡身)한 본보기가 된 것이다.
102 老益壯(노익장) / 老(늙을 로) 益(더할 익) 壯(씩씩할 장)
나이는 비록 많지만 그 활동과 정신이 더욱 강성해짐 을 나타내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한(東漢)시기,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에 부풍군의 독우(督郵)를 지낸 마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군 태수의 명령으로 죄인들을 장안(長安)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들의 형편을 동정하여 그만 도중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변방으로 도망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조정으로부터 대사면(大赦免)을 받고, 과거의 일을 다시추궁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항상 열심히 일하였다. 몇년 지나지 않아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가축들도 그 수효가 많아져서, 그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변방으로 도망 온 사람들에게 자주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생활이 궁핍할수록 그 의지를 굳게 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정신을 왕성하게 해야한다(窮當益堅, 老當益壯) 라고 말했다.
老益壯(Live to agreen old age) 이란 나이는 비록 많지만 그 활동과 정신이 더욱 강성해짐 을 나타내는 말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대선 후보들의 활동은 쉽게 포기해 버리는 나약한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103 對症下藥(대증하약) / 對(대할 대) 症(증세 증) 下(내릴 하) 藥(약 약)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화타전(華 傳)에는 동한(東漢) 말기 뛰어난 의술로 신의(神醫)라는 칭송을 받았던 화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번은 고을의 벼슬아치인 예심(倪尋)과 이연(李延) 두 사람 모두 고열(高熱)과 심한 두통(頭痛)을 앓게 되었다. 다른 의원들이 와서 그들을 살펴보았으나 효과가 없자, 결국 화타가 초빙되어 왔다. 그는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 본 후, 각각 다른 처방을 내렸다. 증상이 똑같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약을 먹게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화타는 예심은 신체 외부에 병은 없으나 잘못 먹어 내부에 배탈이 났으므로 사약(瀉藥)을 먹어야 하고, 이연은 신체 내부에 병은 없으나 외부의 영향으로 감기에 걸린 것이니 발산약(發散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對症下藥(There is a slave for every sore)는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함 을 비유한 말이다. 환경문제, 학원 폭력 문제, 기아(起亞) 문제 등을 놓고 말들이 많다. 증세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이다.
104 亡羊補牢(망양보뢰) / 亡(달아날 망) 羊(양 양) 補(기울 보) 牢(우리 뢰)
우리말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와 같은 표현이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大臣) 장신(莊辛)은 경양왕에게 왕을 수행하는 주후, 하후, 언릉군, 수릉군 등은 사치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라고 간언하였다. 경양왕이 이 말에 몹시 분노하자, 장신은 자신이 조(趙)나라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장신이 떠난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을 점령하였다. 경양왕은 먼 곳까지 도망하고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신을 찾아오도록 하여, 그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하여도 늦지 않으며, 양이 달아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들었습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 라고 대답하였다.
亡羊補牢(It is never too late to mend)란 우리말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와 같은 표현이다. 북한의 이집트 대사 형제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의 한국행 여부와 북한의 외양간 고치기 수법(?)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105 齊人攫金(제인확금) / 齊(나라이름 제) 人(사람 인) 攫(붙잡을 확) 金(쇠 금)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거유(去宥) 편에는 한 날치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우 탐욕스럽고 재물(財物)을 좋아하여,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궁리 하는게 하루 일과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의관(衣冠)을 잘 차려 입고 시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금(金)을 팔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는 느닷없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금을 한 웅큼 쥐고 도망하기 시작하였다(攫其金而去). 금을 팔던 사람은 도둑이야, 저 놈이 내 금을 훔쳐간다. 라고 외쳤다. 금을 훔쳐 도망가던 그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순찰을 돌던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포졸들이 그에게 대낮에 남의 금을 훔쳐간 이유를 묻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금만 보았지 사람은 보지 못했소. 齊人攫金 이란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운반 중이던 2억 원대의 돈 가방이 대낮에 날치기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제나라 사람을 닮은 범인들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106 以火救火(이화구화) / 以(-로써 이) 火(불 화) 救(건질 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는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인 안회(顔回)의 대화가 실려 있다. 안회는 위(衛)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스승께 위나라 국왕은 제멋대로 독재를 한다고 합니다. 국권을 남용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죽은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라. 의사 집에 환자가 많이 모이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이에 따르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는 위나라 왕이 어진 이를 반기고 어리석은 자를 싫어한다면, 어찌 너를 써서 다른 일을 하겠느냐? 그는 왕의 권세로 너를 누르며 능숙한 말솜씨로이기려고 덤벼들 것이니, 이는 불을 끄려고 불을 더하고 물을 막으려고 물을 붓는 일과 같다(是以火救火, 以水救水). 라고 하였다.
以火救火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막 시작된 위성 과외를 보충하기 위한 학원 과외가 등장했다 한다. 부담스런 과외를 없애자고 시작한 위성 과외가 불법 변칙 과외를 낳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107 氷山難 (빙산난고) / 氷(얼음 빙) 山(뫼 산) 難(어려울 난) (기댈 고)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에는 부정한 권세의 무상함을 말한 대목이 있다. 당나라 현종은 양옥환(楊玉環)을 특별히 총애하여 그녀를 귀비(貴妃)에 봉하였다. 그녀의 사촌오빠였던 양쇠(楊釗)는 감찰어사에서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는 15개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현종은 그에게 국충(國忠) 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얼마 후, 재상이 된 양국충은 40여개의 관직을 관장하며, 관리를 자기의 마음대로 임명하였다.
당시 관직에 나서지 못한 장단(張彖)이라는 진사(進士)가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양국충에게 가면 금방 관직을 얻어 출세할 수 있다고 하며 그에게 양국충을찾아가 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단은 그들에게 자네들은 모두 양국충을 태산(泰山)처럼 든든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는 한 덩이의 빙산에 지나지 않는다. 네 장차 천하에 변고(變故)가 있게 된다면, 그는 즉시 태양에 빙산이 녹듯 무너지고 말걸세. 라고 말했다.
氷山難이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빙산과 같은 이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이들이 든든한 태산을 찾아 눈을 돌릴 때가 멀지 않았다.
108 文君司馬(문군사마) / 文(무늬 문) 君(임금 군) 司(맡을 사) 馬(말 마)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 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임공(臨 )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지내는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평소 이러한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탁문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렇듯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한 애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文君司馬란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 을 비유한 말이다. 숱한 애증(愛憎)의 뉴스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국의 卓文君(?) 다이애너. 그녀는 사마상여 같은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찌그러진 자동차 속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109 骨肉之親(골육지친) / 骨(뼈 골) 肉(고기 육) 之(-의 지) 親(친할 친)
혈육 관계인 부모나 형제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정통(精通)편에는 혈연에 관한 글이 실여 있다.
주(周)나라에 신희(申喜)라는 사람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였다. 어느 날, 걸식(乞食)하는 사람이 문밖에 서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슬퍼서 그것이 얼굴에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그 걸인을 집으로 불러오도록 하여, 그에게 어찌 걸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나누다보니, 그 걸인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는 본디 한 몸뚱이에서 갈라지고, 동기(同氣)였다가 분리된 것이다. 풀의 꽃과 열매, 나무의 뿌리와 심(芯)처럼, 이 둘은 비록 있는 곳이 다르더라도 서로 통하고, 고통이 있으면 서로 도우고, 근심이 있으면 서로 느끼며, 살아 있을 때는 기뻐하고, 죽으면 서로 슬퍼하는 것이다. 이것이 골육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此之謂骨肉之親). 라고 하였다.
骨肉之親이란 곧 혈육 관계인 부모나 형제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훈 할머니가 55년만에 동생과 올케를 찾았다. 골육의 정이 얼마나 강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110 逆鱗(역린) / 逆(거스를 역) 鱗(비늘 린)
군주의 노여움을 일으키는 일 을 비유하며, 군주의 노여움을 사는 것.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용(龍)은 상냥한 짐승이다. 친하게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목 아래에는 거슬려 난 비늘이 하나 있는데 지름이 한 자나 된다(喉下有逆鱗徑尺). 만일이것을 건드리는 날이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게 된다. 군주에게도또한 이러한 역린이 있다(人主亦有逆鱗).
용은 본시 상상의 동물이지만, 봉(鳳), 인(麟), 귀(龜)와 더불어 네 가지의 영물(靈物), 즉 사령(四靈)중의 하나이다. 또한 용은 비늘(鱗) 달린 짐승 중의 으뜸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몰고 온다고 한다. 이러 점 때문에 중국에서는 군주(君主)를 높여 용에 비유하였다. 용상(龍床)이나 용안(龍顔) 외에도, 황제의 후대를 뜻하는 용자(龍子), 황제의 수레인 용여(龍輿) 등은 그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 말들이다.
逆麟이란 군주의 노여움을 일으키는 일 을 비유하며, 군주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촉역린(觸逆麟) 이라 한다. 여당의 한 경선 낙선자가 정치적 아버지(?)라는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逆鱗 을 건드릴지의 여부는 조만간 있을 그의 진로 선택에 달려있는 것 같다.
111 毛骨悚然(모골송연) / 毛(털 모) 骨(뼈 골) 悚(두려워할 송) 然(그러할 연)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 짐 을 뜻한다.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 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 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 짐 을 뜻한다. 최근 발생한 끔찍한 토막 살인사건과 아동 살인사건 등등. 그 잔인한 수법은 공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112 鹿死誰手(녹사수수) / 鹿(사슴 록) 死(죽을 사) 誰(누구 수) 手(손 수)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후조(後趙)의 국왕인 석륵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을 능가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鹿死誰手란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한 마리뿐인 중원의 사슴(?)이 과연 어느 후보의 손에 잡히게 될지 지금은 예측하기 어렵기만 하다.
113 車水馬龍(거수마용) / 車(수레 거) 水(물 수) 馬(말 마) 龍(용 룡)
권세 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을 묘사한 말.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 실린 이야기다.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의 딸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비(妃)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얼마후에는 후(后)의 자리에 올랐다. 명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마후(馬后)는 곧 태후(太后) 로 받들어졌다.
마태후는 재능과 인품이 출중하여 문무백관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으므로, 장제도 그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일부 간신들은 태후의 형제들을 제후에 봉해 줄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고, 태후에게 아부하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마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여유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있었소. 그들의 문 앞에 수레들은 흐르는 강물과 같았고, 마필(馬匹)들의 움직임은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교룡(蛟龍)과 같았소(車如流水, 馬如游龍). 내 비록 당시에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車水馬龍이란 권세 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을 묘사한 말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썩한 상황 을 뜻한다.
114 一簞一瓢(일단일표) / 一(한 일) 簞(대광주리 단) 一(한 일) 瓢(박 표)
극히 소박하고 적은음식으로 유지되는 청빈(淸貧)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편에는 한 그릇의 밥, 한 쪽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마을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지지 못할 것이지만, 안회(顔回)는 그렇게 살면서도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다. 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대, 안회는 노(魯)나라 사람으로서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으며,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그는 총명한 머리에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진지(眞摯)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자는 그에게 비천한 집안을 떠나 벼슬에 나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안회는 29세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32세에 삶을 마쳤다. 60세가 넘은 그의 스승 공자는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 라고 하며 제자의 요절에 통곡하였다.
一簞一瓢는 단사표음(簞食瓢飮) 이라고도 한다. 이는 극히 소박하고 적은음식으로 유지되는 청빈(淸貧)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빈민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났다. 허름한 사리에 구멍 난 스웨터, 양말을 신지 않은 발. 그것은 그녀 생전의 옷차림이었다.
115 名 利鎖(명강리쇄) / 名(이름 명) (고삐 강) 利(이로울 리) 鎖(쇠사슬 쇄)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 을 뜻하니.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여우인서(與友人書)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唐)나라 덕종(德宗) 년간, 못생긴 외모에다 음흉한 마음씨를 가진 노기(盧杞)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어느 날, 노기는 길가에서 풍성(馮聲)이라는 가난한 선비와 마주쳤다. 노기는 여태 그를 멸시해 온터라, 마음대로 그의 주머니를 뒤져 묵(墨) 조각을 찾아내고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러나 풍성은 점잖게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짐꾸러미를 한번 뒤져보기로 하겠습니다. 라 말하고, 작은 종이 삼백여장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의 명함으로서 고관대작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풍성은 웃으며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삼백여장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명리(名利)의 노예인 당신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더 나은 쪽은 누구이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名 利鎖는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 을 뜻하니, 이는 곧 명예와 이익에 얽매어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단일화협상 한답시고 법석떨던 한 후보가 이번에는 내각제 개헌에다 대선 연기를 들먹거렸다. 知難而退라고 했다. 상황 판단이 끝났으면 알아서 물러나야지, 명리의 노예임을 자처하는 꼴이 추하기만 하다.
116 米珠薪桂(미주신계) / 米(쌀 미) 珠(구슬 주) 薪(땔나무 신) 桂(계수나무 계)
치솟아 오르는 물가를 비유한 말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각국으로 유세(遊說)를 다니며,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했던 유명한 종횡가(縱橫家)였다.
그가 초나라의 회왕(懷王)에게 합종책을 실행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는 사흘을 기다린 끝에 겨우 초회왕을 알현할 수 있었으나, 초회왕이 자신을 소흘하게 대접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소진은 초회왕이 나타나자 일부러 당장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초회왕이 그 까닭을 묻자, 소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의 식량은 주옥(珠玉)보다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 비쌉니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제가 주옥같이 비싼 양식을 먹고, 계수나무처럼 비싼 땔감을 태우면서, 어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米珠薪桂란 치솟아 오르는 물가를 비유한 말이며, 영어에는 Up corn, down horn(곡식 값이 오르면 쇠고기 값이 내린다)라는 속담이 있다. 추석을 앞두고 쌀과 축산물 등을 중심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잘만(?) 하면 이번 추석에는 향내 나는 땔감으로 보석(?) 쌀밥을 지어 먹게 될 지도 모르겠다.
117 五日京兆(오일경조) / 五(다섯 오) 日(해 일) 京(서울 경) 兆(조짐 조)
임직(任職)기간이 너무 짧거나 또는 아무 때나 직위를 떠나 버림 을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 장창전(張敞傳)에 실린 이야기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장창은 수도 장안(長安)의 부윤(府尹), 즉 경조윤(京兆尹)을 지냈다. 장창의 친구 양운(楊 )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모함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장창에게는 서순(絮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그는 도적 잡는 적포연(賊捕 )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부 대신들이 장창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장창이 곧 파면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러 다녔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 양반은 이제 길어봐야 닷새짜리 부윤인데(今五日京兆耳),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창은 즉각 명령을 내려 서순을 체포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형집행에 앞서, 장창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너는 날더러 닷새짜리 부윤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어떠냐? 라는 말을 전했다.
五日京兆란 임직(任職)기간이 너무 짧거나 또는 아무 때나 직위를 떠나 버림 을 비유한 말이다.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드디어 사직하였다. 적어도 5일 이상(?) 출근하였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뻔뻔했다.
118 倚門倚閭(의문의려) / 倚(의지할 의) 門(문 문) 閭(이문 려)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 王)은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아, 나라의 보물을 모두 빼앗겼다. 또한 제나라 민왕은 위(衛)나라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초나라 대장군 요치( 齒)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제나라 대부인 왕손가(王孫賈)의 어머니는 왕손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소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나는 항상 문간에 서서 너를 기다린다. 만약 네가 저녁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마을어구 까지 나가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이제 왕의 행방을 알 수도 없고, 지금까지 왕이 돌아오지도 않는데, 너는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왕손가는 어머니의 말씀에 감동되어 즉시 민왕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민왕이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사백여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요치의 거처로 쳐들어가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倚門倚閭란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 을 비유한 말이다. 유괴된 딸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대했던 나리양의 부모. 그들의 마음은 바로 자식 가진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었다.
119 目不識丁(목불식정) / 目(눈 목) 不(아닐 불) 識(알 식) 丁(고무래 정)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신당서(新唐書) 장굉정(張宏靖)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유주(幽州) 절도사(節度使) 장굉정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 날, 그들은 수하(手下)의 한 군관을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 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라고 하였다.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한자를 모르는 한맹(漢盲)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 업자들의 한자능력이 평균 30점도 못된다는 한 조사결과도 나왔다. 학사 학위에 까막눈이라니. 이는 벙어리 영어교육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120 眼中釘(안중정) / 眼(눈 안) 中(가운데 중) 釘(못 정)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 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 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眼中釘(a thorn in the eye)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경기지사를 사직한 인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아들의 병역문제 이후 추락하는 여당 후보, 이제는 두 눈에 푸른 대나무(?) 못이 박힌꼴이 되었다.
121 終南捷徑(종남첩경) /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終南捷徑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런 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지름길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122 別無長物(별무장물) / 別(나눌 별) 無(없을 무) 長(길 장) 物(만물 물)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을 뜻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회계(會稽)에 갔다가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돌아오자, 왕침(王 )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공이 새로운 대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이 멋있는 대자리는 필시 회계의 명물(名物)일 것이며, 하나만 사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왕침이 대자
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왕공은 자기가 앉아 있던 하나뿐인 대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 후, 왕공은 풀로 엮은 헌 자리를 깔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일이 왕침에게 알려지자, 그는 서둘러 왕공의 집으로 달려와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왕공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이제껏 저는 물건을 남도록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恭作人無長物). 長物은 여분(餘分)이라는 의미이니, 別無長物이란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을 뜻한다. 이는 물욕이 없는 검소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123 割席分坐(할석분좌) / 割(나눌 할) 席(자리 석) 分(나눌 분) 坐(앉을 좌)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를 비유한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실린 이야기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관녕(管寗)과 화흠(華歆)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였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관영은 검소하고 학문을 즐겨 부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흠은 그렇지 않았다. 화흠은 한(漢)나라의 태수(太守)를 지내다가, 한때 오(吳)나라의 손책(孫策)의 휘하에서 일을 하였으며, 후에는 위나라의 조비(曹丕)를 도와 한나라를 찬탈하였다. 그러나 관녕은 위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내 사양하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한 돗자리를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멋있는 의관(衣冠)을 입은 높은 관리가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 관녕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책을 읽었으나, 화흠은 곧 밖으로 나가 그 관리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태도에 몹시 분노하였다. 그는 칼을 꺼내더니 함께 깔고 있던 돗자리를 반으로 자르고 따로 앉아, 자네는 이제 나의 친구가 아닐세 라고 말했다(寗割席分坐曰:子非吾友也).
割席分坐란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를 비유한 말이다. 지지도 2위에 빛나는(?) 모 인사가 소속당을 떠났다. 그는 조각난 돗자리에 앉아 고관의 행차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124 聲東擊西(성동격서) / 聲(소리낼 성) 東(동녘 동) 擊(칠 격) 西(서녘 서)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을 비유한 말이다.
통전(通典)의 병전(兵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 위왕(魏王) 표(豹)의 투항으로 한나라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위왕 표의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되어 매우 위험한 형세에 처하였다. 그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내어 정벌에 나섰다.
이에 위왕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하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한신은 포판의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사병들로 하여금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게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강공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백직은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어리석은 작전을 비웃었다. 한편으로 한신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으로 황하를 건넌 한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군하여 위왕 표의 후방 요지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聲東擊西(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란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을 비유한 말이다. 개인이나 정치인들의 처세, 또는 운동 경기 등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125 擧棋不定(거기부정) / 擧(들 거) 棋(바둑 기) 不(아닐 불) 定(정할 정)
확고한 주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로 바뀜 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말기, 즉 기원전 548년 위(衛)나라 대부(大夫) 손임보(孫林父)와 영식( 殖) 등은 위나라 헌공(獻公)을 축출하고, 그의 동생인 상공( 公)을 군주로 삼았다. 복귀하려는 계책을 세우던 헌공은 사람을 보내어 영식의 아들인 영희( 喜)에게 자신을 도와준다면 돌아가서 위나라의 정무(政務)를 그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전했다. 영희는 매우 기뻐하며 곧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대숙문자(大叔文子)가 이 소문을 듣고, 영희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걱정하며 말했다. 군자는 행동함에 그 종말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해도 좋은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군주 보기를 바둑 두는 일 같이도 여기지 않으니, 어찌 화를 면하랴! 바둑 돌을 들고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면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데(擧棋不定不勝其 ), 하물며 군주를 모시는 일에 주관이 없어서야? 12년 후, 영희는 군주로 복귀한 헌공의 손에 죽었다.
擧棋不定이란 확고한 주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로 바뀜 을 비유한 말이다. 안개 속의 대선주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헤쳐 모이려(?) 하고 있다. 만지작거리던 바둑돌을 놓을만한 곳이 이제야 보이는 모양이다.
첫댓글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