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남자와의 연합으로 얻게 되는 구원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성경은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장가가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요일5;12).
여기서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성령)을 칭하는 생명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성령)이 예수님 안에 즉, 아들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자의 근원은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살을 채움으로 되어진 남자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치로도 여자를 남자의 반쪽이라고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줄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음란한 아내 고멜을 취하여 아내로 삼을 것을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와 관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 사복음서에 나열되어 있는데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로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갖고 이 땅에 파송된 남자(아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여자의 입장으로서의 제자들(교회)은 남자되신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홀로 거하면(독처하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연합을 이루지 못하면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밖에 버리워 말라자는 것과 같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자의 존재가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남자와의 연합이 성사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유는 여자는 원래 남자의 일부분(갈빗대)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체를 여자로 보게 되는 것과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여 남자의 아이를 낳는 것으로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쌍방이 유익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씨앗과 밭으로도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 심겨지지 못한 씨앗은 그냥 밭과 무관한 곳에서 그냥 굴러다닐 뿐 밭에 심겨지지 않아서 생명을 틔울 수가 없으므로 아무리 씨앗을 보냈다고 하여도 씨앗을 보낸 목적이 성취되지 않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밭(여자)은 그 존재가치가 어떤 씨앗이 심겨졌느냐에 따라 그 씨앗의 이름으로 불리워질 뿐입니다. 감자가 심겨진 밭은 감자 밭, 옥수수가 심겨진 밭은 옥수수 밭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밭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만약 밭에 아무 씨앗도 심겨지지 않고 그냥 방치된 밭은 그냥 아무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황무지(없음)일 뿐입니다. 성경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씨앗을 영접한 그 밭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서 구원받은 밭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윗 구절의 의미는 예수 이름을 주문처럼 부른다고 얻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부르는”이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가 아니라 과거 중간태 시제로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사실을 두고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진 자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분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름은 부여하는 주체가 존재하여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지 갓태어난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오늘날 세상교회가 알고 있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은 무분별한 생각일 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연합)하여 얻는 구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워서 얻는 구원이라면 성경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남편)와 교회(여자)의 연합은 사도 바울께서도 이미 언급하였던 바로서 자신이 고린도교회(여자)와 그리스도를 중개하는 중매쟁이로 언급한 것처럼 또한 갈라디아교회를 위해 자신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교회에게로 전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역할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하나님)를 떠나서 세상으로 파송되는 남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말이었고 그 파송되는 남자로서의 역할이 예수(아들)님이나 사도바울과 같은 남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할 대원칙입니다. 막연하게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예수님도 한분의 종으로 쓰임받으신 분이었고, 바울 사도 역시 소아시아 교회의 전도자로서 쓰임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지금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지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 한분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약에는 사사나 선지자들이 이미 그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었고 신약의 예수님이나 사도바울 역시 그 하나님의 사역을 동일하게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세상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르침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천년 전에 이미 부활 승천한 그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무모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현재에도 동일하게 가르치는 자(남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여자=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은 여자에서 출발합니다. 그 여자들은 남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넘겨받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전가받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남자가 되어 파송되는 그 남자와의 연합을 통하여서야 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성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라가는 과정에는 배우는 여정이 또한 필요합니다. 이러한 배움은 가르치는 누군가(남자)가 존재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딤전2;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 존재하고 과정이 존재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까지의 여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무시하고 스스로 장성한 자(이미 구원받음)로 여기고 있다면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서 여전히 하나님의 도의 초보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는 스스로 존재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다만 남자와 결혼(영접)하는 여자들만이 남자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시집을 가면 자기 이름 대신 남편이나 시댁과 관련된 누구누구 댁으로 불리며 사는 것입니다.
첫댓글 신비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