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11월의 작업 노트
안규철
시詩와 조각
나는 조각을 하면서 시를 동경했다. 무거운 돌을 깎고 쇠를 녹이는 일 대신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무한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인들처럼 조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각가에게 요구되는 노동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기보다 조각에 동원되는 재료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하나의 조각에 사용되는 돌, 나무, 금속이 그 작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의심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불행히도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 재료들은 다 무엇이 될 것인지 걱정했다. “신처럼 창조하고, 제왕처럼 주문하고, 노예처럼 일하라”고 했던 미켈란젤로의 호기로운 슬로건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왕처럼 재료를 주문하는 조각가에게는 재료를 구해줄 제왕 같은 존재가 필요한데, 조각가가 과연 제왕의 요구와 기대를 넘어서 신처럼 창조할 수 있을까. 조각가가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면 조각의 전제조건이 되는 재료의 비중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줄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돌과 브론즈를 다루는 조각가에게는 재료뿐만 아니라 소음과 먼지를 견딜 수 있는 작업실과 공구들이 필요한데 청년 시절의 나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조각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조각 대신 사진을 찍었고, 한동안은 지점토 공예에 쓰는 종이 점토로 장난감 같은 소형 조각을 만들며 지내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15년 만에 일상의 물건들을 이용하는 개념적인 미술작업을 가지고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긴 여정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재료에 대한 생각이었다. 꼭 필요한 것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는 것, 더하기보다 빼기를 위해 노력하고, 작품에 관객 몫의 빈 공간을 남기는 것, 재료에 기대지 않고, 물질의 무게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시에서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재료를 아꼈지만, 노동을 덜 하려 했던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내 작업의 물질적 빈약함을 수공업적 노동으로 보완하려 했다. 내가 형태와 색채보다, 손재주와 감각보다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미술로 들어서는 배경에는 시가 있었다.
11월의 나뭇잎
11월의 잎사귀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망설임 없이 자신을 키워준 나무를 떠난다. 여름은 지나갔고 그들은 자신을 빛나게 했던 청춘의 푸른 색을 그것이 원래 있던 곳으로 남김없이 돌려준다. 잎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나무의 처지를 알기에 원망하지 않고, 함께 했던 시간이 끝난다고 서러워하지 않는다. 햇빛 아래 반짝이던 투명한 녹색은 자신의 그것이 아니었고, 지금 해야 할 일은 빛나던 순간의 기억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것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씨앗들은 나무의 다음 생을 향하지만, 낙엽은 더 이상 나무가 아닌 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들은 쌓이고 부서져 벌레들의 집이 되고 새들의 둥지가 되고 겨울을 나는 짐승들의 잠자리가 된다. 잎사귀의 삶을 완전히 잊고 흙으로 살아가는 시간, 빛의 기억을 지우고 어둠과 하나가 되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부활의 날이 올 것이다. 나뭇잎으로 태어나 햇빛과 바람에 손짓하던 기억을 다 잊은 뒤에 그것은 어느 나무의 또 다른 잎이 되어 세상을 만날 것이다.
11월의 장미
11월인데 장미는 무슨 생각으로 꽃을 피우나. 낙엽이 다 지고 마른풀들이 스러지는 동안 마당 구석에 있던 장미가 꽃망울을 열었다. 돌보지 않은 화단의 잡초더미 사이에 핀 희고 여린 꽃잎들을 들여다보며 어쩌다 이제야 피었느냐고 혼잣말하는데, 그 옆에 차례를 기다리는 꽃망울 몇 개가 더 있다. 한 송이가 그렇게 며칠을 피었다가 시들 때쯤 다음 송이가 열렸다. 가끔 길고양이가 지나갈 뿐인 이 마당에서 누구를 보여주려고 꽃이 피는가. 물론 우리가 없어도,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장미는 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하는 것인데, 나는 공연히 그들을 가엽다며 감상에 빠진다. 어젯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고, 꽃송이는 그대로 얼어붙어 고개를 떨궜다. 그 옆에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 몇 개가 남았다.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는 겨울이 왔다.
씨앗
씨앗을 퍼뜨리는 방식은 식물마다 다르지만, 그 집요함에 관한 한 이들을 능가하기는 어렵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수십 개의 뾰족한 바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떼거지처럼 들러붙는다. 몇 달 비워두었던 오두막을 보러 가서 마른 풀숲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김없이 그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여름에 작은 노란 꽃들로 하늘하늘 흔들리던 이 풀꽃들은 가을이면 돌변한다. 꽃송이가 있던 곳에 남은 검은 씨앗들은,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 줄 누군가가 걸려들 때까지 바싹 마른 잡초 덤불 속에서 매복한다. 옷깃과 신발에 박힌 씨앗들은 일일이 떼어내기 전에는 절대 떨어지는 법이 없고 그대로 놓아두면 옷을 파고들어 살갗을 찌른다. 나는 그 이름도 모르는데, 그들에게는 내가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자기들을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고 자란 이곳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다는 것. 연필로 쓰는 글씨의 한 획 크기도 채 안 되는 이 작은 씨앗에 담긴 결연한 의지가 놀라울 뿐이다. 우연히 이 세상에 왔던 것처럼 떠날 때도 우연에 몸을 맡기며,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것이 다른 시작이든 아니면 영원한 끝이든 개의치 않는다.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면 그들처럼 가야 할 것이다.
식물의 글쓰기
식물은 눈이 없지만 장님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알고 있다. 칡 같은 덩굴식물이 줄기를 펼치고 다른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그것을 식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을 만큼 용의주도하게 주변 환경을 알고 이용한다. 몇 가닥의 척후병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내보내고, 그것들이 어느 정도 전진한 다음에는 반드시 거점을 잡아서 땅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다. 처음 내보내는 첨병은 여리고 유연하지만, 일단 거점을 확보한 뒤에는 질기고 강인한 줄기가 된다. 이렇게 새로 확보한 구간에 잎을 피우며 그것들은 독립적인 개체의 삶을 시작한다. 광합성을 하고 뿌리에서 양분을 취하면서 끊임없이 어떤 방향을 탐사할지 어떤 나무를 숙주 삼아 타고 오를지 판단한다. 이들이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본거지에 도달할 수 있으나, 베이스캠프를 제거해도 나머지 유닛들은 자기들의 삶을 살아간다. 지휘부도 중심도 없고, 확장과 점유라는 유일하고 단순한 목표 이 외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된 목표도 없다.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며 전진하는 군대. 때때로 내가 이처럼 이것저것을 산만하게 건드리는 짧은 글을 쓰는 모습이 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평선 너머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인해 몇 년 안에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결국에는 인간의 노동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예술가는 그나마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하는데, 나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을 가리키는 말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산 너머 남촌까지 우리의 그리움은 지금 여기에 없는 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신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곳에 있었고, 깨달음은 묵상과 수행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구원은 여기 없고 진리도 여기 없지만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믿음과 기다림이 우리를 구원했다. 이제 AI에게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곧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지평선 너머에는 지금 당신이 있는 이곳과 똑같은 세계가 있고, 당신의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우리의 절망은 지평선 너머에도 무지개 너머에도 지금 이곳과 똑같은 세상이 있거나, 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