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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는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이 세 글자를 찾느라 30여년을 가슴에 담고 찾아다녔습니다.
숨어있던 당신을 찾아놓고 보니 당신은 나 혼자만이 그리워하는 “님”이 아니었습니다.
한민족 모두의 “님(어머니, 고국, 고향, 친구, 그리움, 한, 사랑하는 사람 등)”이 었습니다.
나 혼자만이 가슴에 묻고 갈 “님”이 아니었기에 “님”의 얼굴을 세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아리랑”은 우리의 “민족혼”입니다.
우리는 “아리랑”을 한층 더 연구, 발전, 전승시켜야 합니다.
=아리랑 지킴이 김동철 =
♣ 아리랑 설에 대한 갖가지 해프닝
아리랑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크게 고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 대원군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리랑이란 말은 고대에 성립되어 차츰 변형이 이루어져 대원군 시대에 들어와 경복궁 공사를 위한 가렴주구가 얽혀서 “아이롱”이라는 변형된 말이 생기고 내용상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는 설인데, 어설픈 면이 많다.
그리고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에 대해서도 그 유래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다.
아낭설(阿娘說)·알영설(閼英說)·알영고개설을 비롯하여 대원군시대를 시점으로 보는 아이롱설(我耳聾說)·아난리설(我難離說)·아리낭설(我離娘說)·아랑위설(兒郞偉說)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양주동(梁柱東)이나 이병도 등의 학자에 의해 아리랑이 옛 지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아리랑의 성립 시기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몇 가지 아리랑 설을 살펴보자.
1). 아낭설(阿娘說): 옛날 밀양 사또의 딸 아랑이 통인(通引)의 요구에 항거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을 애도한데서 비롯하였다는 설
2). 알영설(閼英說):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妃 알영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 부른 것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하였다는 설.
3). 아이롱설(我耳聾說):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백성들이 원납금(願納金) 성화에 못견뎌 "단원아이롱 불문원납성(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聲):원하노니 내 귀나 어두워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구나" 하고 부른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와전되었다는 설.
4). 아리낭설(我離娘說): 역시 흥선 대원군 시절 경복궁 공사에 부역 온 인부들이 부모와 처자가 있는 고향생각을 하며 '아리낭(我離娘)'을 노래 한 것이 발단이었다는 설
5). 아리랑을 아리(곱다), 아리다(마음이 아리다), 아릿다운(아리다운), 랑(님)등 언어의 의미론적 접근 설,
6). 최근 신용하 교수의 어원설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아리랑’의 첫째 뜻은 ‘아리’가 고운이라는 뜻이고, ‘랑’은 ‘님’이라는 뜻이므로 ‘아리랑’은 ‘고운님’이며,
둘째 뜻은 ‘아리’가 ‘그리운’의 뜻을 담고 있어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이라는 뜻의 관념론적 어원설
7),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에 나오는 “알천”이 “아리랑”과 “아리수”의 언어적 근원이라는 양주동박사의 언어학적 근원 설
♠.이밖에 인터넷으로 떠도는 아리랑설을 소개하면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하고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이며,
*랑(朗)은 즐겁다, 밝다는 뜻이므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 이랍니다.
또 다른 아리랑 설은
“아리랑”의 아리는 가슴이 아리도록 그립다는 뜻이고,
'랑'은 화랑도의 “랑” 낭자 할 때의 '랑'으로 님 이라는 뜻이므로
아리랑은 사무치도록 그리운 님 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다.
♣ 아리랑에 대한 기록들
황현은 (1855 - 1910년) 전라도 광양 사람으로
1863년-1910년 동안의 사회상을 梅泉野錄 이라는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겼는데, 여기에 아리랑이란 말이 “新聲艶曲 阿里娘 打令”이라는 말로 처음 등장된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阿里娘 打令”을 1894년 창덕궁 보수공사 때 노동자들을 위해 위문공연으로 부른 신성염곡(新聲艶曲)이라 하였다.
이 노래를 “아리랑(阿里娘) 타령”이라 하였는데, 아리랑을 “阿里娘”이라고 한 것은 언어학적으로 볼 때 순 우리말 “아리랑”을 향찰식 표기 방법에 의해 의미와 관계없이 “음”을 차용한 말(글자)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아리랑”이란 말은 188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가 “아리랑”을 채록하여 악보를 남겨 전했으며,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 의하면 상해민단의 신년 축하회에서 “아리랑 타령”을 불렀는데 최영년은 이 노래를 “말세의 소리”라고 하였다.
1926년 나운규는 어린 시절 고향 회령에서 철로부설 공사를 하러 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노래가사를 바탕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개사하였는데 노동자들 대부분이 한양에서 온 사람들이라 하여 이 노래를 “경기아리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김지연 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요 아리랑”을 기고하였는데, 여기에 신 아리랑, 별조 아리랑, 아리랑 타령, 원산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서울 아리랑 등의 가사를 실어 놓았다.
이것으로 보아 “아리랑” 노래가 정착된 것은 188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가 채록하여 악보로 기록한 19세기 초로 보아야하며, 선소리 타령으로 선조들에 의해 불러 내려온 가장 오래된 농요 “정선 아리랑”은 그 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아리랑”이란 말은 그 발생 시기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등 각 지역마다의 아리랑은 1920년대에 창작되어 전해내려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각 지역마다 불려진 “아리랑”의 노래는 최근 기록에 의해 찾을 수가 있지만,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는 추상이나 감성에 의해 관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리랑”의 어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학적 연구를 통하여 어원을 찾아야할 것이다.
♣ 아리랑을 실체가 없는 관념어로 볼 것인가?
“아리랑”을 관념어로 본다는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노래가사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상적이거나 감성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인문학적 견해에서 우리가 추리할 수 있는 상상력을 총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은 각자의 생각과 추리에 의해 다양한 의미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는 “아리랑”의 실체는 찾지 못하고 “아리랑”의 노랫말을 통하여 고향, 사랑, 이별, 한, 그리움, 등의 추상적 의미가 담긴 관념어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아리랑”의 실체를 찾는 그날까지 그럴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아리랑”의 실체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아리랑의 언어적 실체
“아리랑”은 사랑, 그리움, 슬픔, 같은 관념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랑”은 해, 달, 별처럼 우리선조들이 쓰던 실체가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의 실체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 해결방법은 “아리랑”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방법일 것이다.
다행히도 “아리랑”에 관련된 우리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관련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에 “알천”이라는 말이 나오며, 정선아리랑의 가사에는 구구절절 강물이 흘러가는 이별의 애절함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리랑”이 강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과 송하강을 “아리수”라 했다는 것과 제주도의 한천 하류에 “아라리(아라동)”라는 마을이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이 곧 "아라리(아리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강”과 깊은 관련성을 가진 말이라고 볼 수 있어 물이 흘러가는 물길의 명칭을 찾아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 골짜기 마다 물이 흐르는 물길 “알(개울)”이 있다. 물길에는 깊은 산골짜기나 밭고랑 사이로 흐르는 “고랑”, 논밭사이나 마을안길 따라 흐르는 “도랑”, 도랑물이 합쳐 흐르는 “거랑(큰거랑)”, 거랑이 합쳐서 마을 밖으로 흐르는 내(川)라고 하는 “알(아리)”이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물은 고랑-도랑-거랑-알(아리)을거쳐 바다로 간다.
그런데 물길의 명칭을 조사하면서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면, 물이 흐르는 물길에는 모두 물이 졸졸 흐를 물결“랑(浪)”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리)”에도 당연히 “랑(浪)”을 붙였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목말라 찾던 “아리랑”인 것이다.
그런데 “알(아리)”의 주변(강변)은 우리 선조들이 수렵생활을 할 때 이웃이 함께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수렵생활을 하면서 “아리랑(아리수)”의 강변(둔치)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에 삶의 터전인 마을 이름도 “아리랑”, 고개도 “아리랑,” 노래도 “아리랑”, 온통 “아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어머니가 계시던 고향이요,
그리움과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아리랑”인 것이다.
♣ 알천과 아리랑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에
“周元 宅於 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주원의 집은 경주북쪽 20리에 있었는데 큰비로 “閼川”이 넘쳐 주원은 입궁하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알천”을 통하여 “아리랑”을 찾아보고자한다.
“알천”은 지금의 경주 북천이다.
경북일보 2016. 4. 28.(알천과 북천) 및 경북일보 2020. 7. 22.(삼국유사 오디세이)에 “양주동 박사는 여기에 나오는 “알천”이 “아리랑”의 어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알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다.“
즉 “아리랑”이라는 말의 모태가 “알천”이며, “알천(냇물)”이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을 잊어버릴까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제주도의 한천 하류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아라동(아라리)”이라는 강변마을이 현존하고 있다.
이것은 “아라리(아라동)”가 한천(아리랑)의 강변마을 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강릉 사람들은 물이 “알”로 간다고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물이 아래로 간다는 말이 아니라
물이 “알(川)”이라는 명사 즉 “알(아리)”로 간다는 말이다.
강릉에는 “알”을 향찰로 “월(月)”자를 차용하고 있는데, “沙川(사알)”을 沙月이라 말하고 있고, “알천”을 향찰로 “月川(달래)”이라고 하는데, 강릉과 양양의 경계(지경)에 있는 상월천(웃달래)과 하월천(아랫달래)이 그렇고 삼척군 원덕읍의 가곡천을 월천이라 한다.
강릉의 지명유래를 통하여 “浪,(良)”을 살펴보자.
고구려 때는 물(강)이 서쪽에서 흐르는 곳이라 하여 “河西浪(하서랑)”이라 하였고, “알(川)”이 거문고의 6현처럼 동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호수를 펼쳐놓은 곳이라 하여, 고구려와 신라시대에는 하슬라(河瑟羅)라 하였다.
이처럼 우리선조들은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보고 지명을 작명하는 지혜가 있었다.
특이할 사항은 우리선조들이 물길에다가 물이 졸졸 흐를 “浪(랑)”을 붙여 “고랑”, “도랑”, “거랑”, “아리랑“, ”하서랑“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알(川)”을 살펴보자.
“알”은 “아리”에 준말이며, 파생어로 “아리 아리 알아리(아라리)”라고도 쓴다. 그리고 “아리”는 물이 흐르는 물길이니 “아리”에 “浪(랑)”을 붙이면 “아리랑”이 된다.
즉“아리랑”은 물이 흘러가는 냇물(川)이며, “강”이라는 것이다.
“강(물길)”에 대한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북간도의 송하강도 한때 “아리수”라 하였고, 고구려는 청천강을 “살수”라고 하였듯이 “아리랑”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서울시는 한강을 “아리수”라 부르고 있다.
“아리수” 그리고 “아리랑”은 정말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 아리랑을 뒷받침하는 각종의 자료들
1). “아리랑”이란 말은 고려가요 “가시리”를 보더라도 구전으로 오래 전부터 불러 내려왔다고 볼 수 있으며, “구 경기아리랑”은 한글 창제 이후에 현재의 가사로 정착된 노래로 추정 된다. 그 이유는 “나 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 순 한글 가사 때문이다. 그리고 “아리랑”이란 말은 언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가 없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알천” 때문에 그 이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2). “아리랑”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모두가 당시 생활상과 관련된 구체화된 명칭이나 일상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정선 아리랑”은 강가에서 살아가던 선조들의 생활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따라서 “아리랑”은 추상적 관념어가 아니라고 보아야한다.
때문에 당시 모든 마을의 이름이 “아리랑”이었거나 고개의 이름도 “아리랑”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신 경기아리랑”에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말은 고향 즉 강가의 마을 “아리랑”을 두고 떠나가는 님(사랑하는 사람, 고향, 고국, 부모형제 등)과 헤어지는 이별의 통한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정선아리랑의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아우라지 뱃사 공아/ 배 좀 건네주게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송정 앞 나루터가/ 한강수 되었오
내가왔다 간뒤에/ 도랑물 뿔거든 / 내가왔다 간뒤에/ 울고간줄 알아요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남자더냐/ 산넘구 물건너면/ 남자 또 있겠지
아우라지 강물이 / 소주약주 같다면/
강물은 돌고돌아/ 바다로 가지만/ 이내몸 돌고 돌아/ 어디로 가나/
앞내 물레방아/ 물살안고 도는데/ 우리네 서방님은/날 안고 돌줄 몰라/
이처럼 비가오고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을 나르는 뱃사공이 돌아오 고 이들 뱃사공과 노닐던 사랑이야기가 구구절절 쏟아져 나오고 있 다. 그런데 노래의 시작이 “아리랑”이고 추임새에도 온통 “아리랑” 이다.
즉 “아리랑”이 삶의 터전이고 그 곳이 “강”이라는 것임을 더 이 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4). 물길에 대한 현존해있는 언어로 이랑, 고랑, 도랑은 지금도 통용 되고 있지만, 도랑보다 큰 “거랑”은 사라지기 직전의 언어이며 “알”은 다행하게도 아직 강릉사투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즉 도랑물이 “알(아래)로 흐른다.” 라고 하지 않고 도랑물이 “알(냇물)루 간다.”고 한다.
이처럼 강릉 사투리에서는 알(川)에 대한 두 가지 의미에 따라 서로 다른 동사(간다. 와 흐른다.)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어법상 도랑물이 알루 간다. 와 알로 흐른다.는 “알”에 대한 그 의미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즉 물이 알로 “흐른다”고 하면 물이 아래(下)로 간다는 의미지만,
물이 알루 “간다”고 하면 물이 냇물(알)이라는 장소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때문에 도랑물이 “알”루 간다는 것은 도랑물이 냇물(川)로 간다는 것이다.
다행히 강릉에서는 “알(천)”을 향찰로 유사음 “月”을 차용하고 있는 예를 볼 수가 있는데, 이에 대한 물증은 강릉의 沙川(사알)을 “沙月” 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沙川(사알)”을 향찰식 유사음 “沙月”이라 표기한 물증이다.
그런데 경주의 북천을 삼국사기에는 “閼川”으로 기록하고 있다.
“閼川”의 “알”은 당시 신라에서 “알”을 향찰로 표기할 때 의미와 관계없이 음이 같은 “閼”자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한다.
그리고 “알”은 “아리”의 준말이므로 “아리수”의 어원 또한 “알”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한때 강을 “아리수”라고 했다는 기록이 문헌에 가끔 나타나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한강을 “아리수”라고 홍보하고 있다.
5). 강릉지역 사투리를 조사하다가 “거랑”이라는 말과 “알”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강릉의 옥계면 산계리와 울진군 온정리, 그리고 경상북도 안동 내 륙에서 “거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본고의 연구자는 “강릉토박이로서 사투리를 정리하고 연구하다보니 아리랑의 어원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고랑, 이랑, 거랑, 아리, 아리수에 대한 참신한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고 하였다. (중앙대학교 김선풍 교수)
즉 “고랑”, “도랑”, 다음의 말이 “거랑”이었으며, “거랑물”이 “알(아리 또는 아라리)”로 가거나 “아리수”로 흘러간다.
그리고 경주 보문에서 흐르는 북천을 “알천”이라 하고, 제주도 한라산에서 흘러내리는 “한천” 하류에 마을명칭을 “아라동(아라리)”이라 하고 있다.
이것은 “아리랑” 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말이다.
때문에 본고의 연구자는
강릉 전통시장과 임계장터, 진부장터, 주문진과 옥계장터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였을 뿐 아니라, 타도 및 멀리 중국 북간도까지 찾아가 그곳 교수들과 교류도 하면서 기초자료를 수합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의 아리랑에 대한 탐구열은 우후죽순격인 기존 학계의 학설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대학교 김선풍 교수)
6). “浪”이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지만 고랑, 도랑, 거랑, 아리랑, 하서랑, 에서의 “랑”은 물이 흘러가는 물결“浪”인데 물이 흘러가는 물길의 명칭 에 모두 “랑(浪)”을 붙였다는 것이다.
7). 참고문헌으로는 1993년9월 동아출판사 발행 “대조선 제국사” 20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아리수”를 음역, 의역을 한 한문식 표기인 阿利水, 阿禮江, 列水 등은 모두 긴 강을 의미한다. 또한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과 만주의 송하, 요하, 난하, 등을 향찰,이두 문으로 쓴 옛 이름을 찾으면 모두 “아리수”라 하였다. 또한 강변에는 씨족집단이 모여 살았는데 그곳을 “나루”라고 하였으며, 후일 차츰 그 의미가 변하여 “라루-라라-나라”로 발음이 변하면서 “국가”를 뜻하게 되었다.”
8). 물이 흐르는 물길에 대한 말은 다양하다. 살펴보면 고랑, 도랑, 거랑, 알, 아라리, 알천(경주북천), 아리수, 河(요하, 송하, 황하), 列水, 살수(청천강), 가람, 내, 川, 江, 개울, 실개천, 개여울, 등이 있다. 이 말은 “아리랑”을 고증하는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9). 제주도에는 한천(대천) 하류의 강변마을을 “아라동” 또는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이 “아리랑”의 강변마을 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뿐만 아니라 아리랑의 어원을 찾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10). 정선 아오라지와 동강의 떼꾼들에 의하면 강을 따라 가면서 뗏목꾼들이 쉬어가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이 주막을 송문옥(정선 떼꾼 1991년 사망)은 “아라리 주막”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오라지에서 한양까지 흘러가는 물길을 “아라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만지나루 전산옥도 “아라리 주막” 이라 하였다고한다.
그리고 강릉의 학산 오독떼기 후렴에 “아리 아리 아라리 아라리고개를 넘어 간다.” 라고 하는데, 강릉에서는 “아라리”가 “아리랑”이라 한다고 동기달(강원도 무형문화제 제5호, 학산 오독떼기 기능보유자)님께서 강조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아라리”가 “아리랑”이라는 사실을 고증 해 주신 것이다.
(제보자: 오독떼기악보 제작, 구정초 전직교장 권오이)
11). “알천”을 향찰로 “月川(달래)”이라 하고 있다. 강릉의 沙川(모래내)을 “沙月”이라 하는데 이것은 내(川)를 “알”이라 했기 때문이며, “알”을 향찰로 “月”이라는 음을 차용하여 쓰기 때문에 沙川(사알)을 향찰로 “沙月”이라 표기 하였다. (제보자:김순정)
“알천”을 향찰로 “月川(달래)”이라 하는데 영동지방에는 이런 곳이 몇 곳 남아있다. 즉 “월천”이라는 명칭은 영동 지방의 알천(냇물)을 이르는 말인데, 강릉과 양양의 경계(지경)에 “상월천 (웃달래)” 과 “하월천(아랫달래)이 그렇다. (제보자: 상월천리 유제원)
그리고 영동지방에는 큰 강(아리수,아리랑)은 없고, 대부분 작은 개울이나 냇물(알,아리)이므로 “알” 또는 “아라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동지방 농요 “오독떼기” 후렴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강릉을 “아라리” 고장이라고 한다.
12). “현대 민속학은 발로 글을 쓰는 것이요, 자료의 현장을 몸소 찾아 자료를 구하고 그를 밑바탕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현장론적 접근방법(performance-centered approach)으로 연구자는 알의 제보자, 거랑의 제보자, 사월의 제보자, 월천의 제보자, 아라동의 제보자 등등 제보자의 주소와 성명을 일일이 매거하고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자료를 수집하되 설화를 쓰듯 하였을 뿐 아니라 조사자의 견해까지 삽입 ‧ 정리하여 글을 쓴 사례도 얼마간 있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글을 써야만 한다.” (중앙대학교 김선풍 교수)
13). “고랑”의 물은 “도랑”으로 가며, “도랑”의 물은 도랑보다 큰 물길 “거랑”으로 가고 “거랑”보다 큰 물길은 “큰거랑”으로, “큰거랑”의 물은 “내(川)”로 간다. 그리고 “내(川)” 보다 큰 물길을 “가람(江)” 또는 “알” 이라하며 이것보다 더 큰 물길을 “하(河)” 즉 “강”이라고 한다.
때문에 “아리랑”과 “아리수”는 “알(川)”보다 큰 물길인 “강”이다.
14). 고랑, 도랑, 거랑, 아리랑에 공통으로 붙어있는“랑”은 무었 일까? “랑”은 명사형 접미사로서 그 의미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물이 흘러가는 물길에다 물이 졸졸 흐를 ”浪“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물길의 명칭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15). “알”은 “아리”에 준말이며 강릉에서는 내(川)를 “알”이라고 한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강릉사람들에게 물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알”루 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이 아래로 간다는 말이 아니라 냇물(알)로 간다는 말이다.
16). “알”을 삼국유사에 “閼”이라고 써놓았는데, 이것은 한자의 음을 차용한 향찰식 문자로 보아야한다. 당시 신라의 문자가 향찰, 이두문자였다.
때문에 “아리랑”을 향찰로 다양하게 阿里郞, 我理朗, 阿離朗, 阿里娘,등 으로 표기할 수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물이 졸졸 흐를 물결 “浪”을 붙여 阿里浪, 我理浪, 阿離浪,으로 해야 옳은 표기가 아닐까한다.
하지만 “아리랑”은 별, 달, 해, 와 같이 순 우리말이라는 것이다.
굳이 “아리랑”을 향찰로 표기한다면 “涐里浪”이라 표기할 수 있다.
17). “알(아리)”을 반복하면 “알알이(알아리)”라는 추임새가 만들어지는데, 아리랑의 후렴에 “아리아리 아라리요”라는 말은 “알(아리)”의 파생어이며, 노래의 흥을 돋우는데 많이 쓰이고 있다.
18). 물길의 명칭을 살펴보면 고랑, 도랑, 거랑, 알, 아라리, 알천(경주북천), 아리수(한강,송하강), 河(요하, 송하, 황하), 列水, 살수(청천강), 가람, 내, 川(남대천,옥천), 江(한강,대동강), 개울, 실개천, 등 다양하다.
여기서 “랑”이 붙은 물길을 눈여겨 살펴보자.
“랑”이 붙은 물길 즉 고랑 - 도랑 - 거랑 - 큰거랑 - 알(아리)은 “아리랑”을 찾는 근거가 되는 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우리선조들은 물길에 물이 졸졸 흐를 “浪”을 붙여 물길의 이름을 아름답게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은 “아리”의 준말이므로 “아리”에 물이 졸졸 흐를 “浪” 이 붙여진 말, 이 말이 “아리랑”이다.
19). “아리랑”을 찾다보면 “쓰리랑”이라는 말이 나온다.
“쓰리랑”이란 말은 “아리랑”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누구나 가질수 밖에 없다.
“쓰리랑”은 19세기 들어 “진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이 창작되는 과정 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만들어진 “신종어” 즉 노래 후렴의 추임새다. 그리고 19세기 무렵부터 “아리랑”의 열풍으로 지역 및 마을마다 창작되어 불러진 아리랑이란 노래는 수 백곡으로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20). 189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가 채보해 만든 서양식 악보가 “구조 아리랑” 악보인데, 헐버트는 아리랑을 한국인의 “포크송”으로 소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과 같은 노래다. 조선인들은 서정적이며 교훈적이고 서사적이며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 ”아리랑“은 즉흥의 명수인 조선인에 의해 수없이 즉흥곡으로 변주되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불려진다.”고 했다.
21). 중국 연변 정암촌(청주가 고향인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청주 아리랑”은 노래 가락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본조 아리랑”과 그 가락이 흡사한 면이 많다.
22). 지금 부르고 있는 “아리랑”은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나운규가 1926년 구 경기아리랑을 개사하고 단성사 빅터 악단이 작곡 반주한 “신 경기 아리랑”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이며, 노래는 김연실이 불렀다.
이 노래가 일제 강점기에 금창령이 내려졌던 우리국민들의 애창곡이 며, 애국가처럼 불러졌던 “본조 아리랑” 즉 “경기 아리랑”이다.
23). (카톨릭관동대학교 명예교수 엄창섭)에 의하면
“본고에 조사된 현존해 있는 언어로 이랑, 고랑, 도랑,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지만 “도랑”보다 큰 “거랑”은 사라지기 직전의 언어이며, “알”은 강릉사투리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알(川)”과 “아래(下)”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음이 또한 주지할 바다.
그리고 본 결과물은 그간의 “아리랑” 해석의 왜곡(歪曲)을 바로잡은 정체성의 확장에 기인(起因)한 새로운 개념의 몫이며, 지대한 언어학적 연구결과의 집산물이다.”라고 하였다.
24). “≪삼국사기≫ 악지에 보면, 덕사내(德思內)라고 하는 강릉 향토민요가 소개되어 있는데, 바로 이 민요가 한국 아리랑의 효시였다. 당시 강원 도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릉의 이 덕사내 가락이 대관령을 넘어가 평창 아리랑을, 삽당령을 넘어가 정선아리랑을 재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김선풍)
♣ 경기아리랑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노래이다.
“아리랑”의 실체는 찾지 못하였지만, 나운규는 청진에서 회령까지의 철길공사 노동자들이 부르는 구슬프고 한이 서려있는 노동요 “아리랑” 곡조를 듣고, 일제강점기(1926년)에 “아리랑” 영화를 제작(조선 키네마 프로덕션이 제작한 흑백 무성영화)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할 당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창작하여 노래는 김연실이 불렀고, 반주는 일본의 빅터 악단이 했었는데, 빅터 악단의 실수로 노래 제목이 “아르렁”이 되었다고 한다. “구 경기아리랑” 이 바탕이 되어 창작되었다고 하여 “신 경기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가 전국에 유행되자 일제는 “금창령”을 내렸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 백성들이 일제 강점기 때 애국가처럼 부르던 국민의 노래, 지금의 “아리랑”이다.
♣ 신 경기아리랑
“신 경기아리랑”은 작사*작곡 미상의 곡이 아니다.
“아리랑” 영화감독 나운규가 철길공사 노동자들의 노동요를 바탕으로 하여 “구 경기아리랑”을 개사하여, 단성사 빅터악단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1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2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대요. 이강산 삼천리 풍년 온다네.
(3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산천초목은 젊어가건만 우리네 인생은 늙어 지네
(4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 구 경기 아리랑 가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 넘어 아라수를 건너 아리랑 아리세계 찾아가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우리내 인생이 짧다고 해도 이어지면 천년이요 손잡으면 만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사람에 한평생 사연도 많고 이어지면 천년이요 손잡으면 만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경기아리랑의 또 다른 개사곡
아리랑 춘자가 보리쌀을 씻다가 이도령 피리소리에 오줌을 쌌네
오줌을 싸도 짧게나 쌌나 낙동강 칠십리에 홍수가 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맺으면서
아리랑은 강(River)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이고 삶의 원천입니다.
물을 떠나서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의 삶 또한 물과 함께하였고, 수렵생활을 하면서부터 강가에 정착을 하면서 이웃을 이루고 혈연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함께 더불어 살았습니다.
이곳에는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자매가 있고 친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정든 고향이고, 그리움이 있고, 이별과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아리랑”입니다.
자료제공 : 아리랑 연구가 김동철(mail - kim_d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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