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0 세르비아에서 항가리 부다페스트 가는 길에 세르비아의 국경도시 수보티차에 들려 시내를 일괄한후 국경을 넘어 항가리로 들어섰다. 국경에서 세시간 더 달려 부다페스트, 예약한 아파트는 시내중심가에 있었다. 삼십대로 보이는 친구가 우리를 맞았다.
아파트는 깨끗하고 주방엔 밥해먹을 수있는 주방설비가 다 있었다. 화장실겸 샤워실이 하나, 방이 두개 한사람은 거실소파에 자야된다. 아파트는 하루에 74유로 다만 주차시설이 없어서 걸어서 5분정도 거리의 공용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워야 되었다. 주차비 이틀에 3천포린트(약10유로 13000원)열쇠를 인수하고 체크인하고 쉬었다가 여섯시 나가는데 비가온다. 큰비가 아니라 그냥 우의입고 나갔다. 우리는 각자 자유행동을 하기로 했다.
우리부부는 셋과 헤어져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는 도나우강 유람선을 타러 걸어서 강변의 부두로갔다. 시내의 도로는 넓고, 고풍스러운 옛건물이 늘어서있는 가로의 모습이 파리의 거리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다페스트의 부다쪽에 있는 부다왕궁이 웅장하다. 이왕궁은 마차시왕시절 루네상스형식의 왕궁으로 중부유럽의 문화,예술,정치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한다.
왕궁 가까이 있는 어부의 요새는 19세기 강을 건너 공격을 해오는 적을 막기위해 어부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며, 7개의 탑은 건국당시의 부족수를 뜻한다고 한다. 부다왕궁경내의 마차시성당은 성모마리아대성당의 다른이름으로 이를 건축한 마차시가의 이름을 딴 성당이며, 대관식과 역대국왕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헝가리의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여 왔다.
고대에는 판노니아라 불리고, 판노니아족 등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속주 일리리쿰에 편입되었다가, 1세기 중엽 속주 판노니아로 분리되었다.
헝가리인이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부터 15세기경에는 주변의 여러 왕국과 동군 연합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는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526년에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1541년에 부다가 함락되어, 그 결과 동남부와 중부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북서부의 3분의 1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어(함스부르크 왕령 헝가리), 양 제국이 충돌하여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후퇴하자,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헝가리 및 헝가리 국왕령의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다.
헝가리 측에서는 지배자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변한 것, 그 이전부터 꾸준히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반복되었다.
부다페스트의 공용주차장건물에 주차되어있는 우리차 시트로엥 디젤 7인승이다.
1848년 3월 혁명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지도한 독립운동은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민족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타협을 결단케하여, 1867년에 아우스글라이히(화협)가 맺어졌다.
이렇게 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왕국에서 이중군주로서 군림하였으나, 양국은 외교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정부를 가지고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헝가리는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1918년)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에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카로이 미하이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강에서 바라다보이는 부다왕궁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왕국령 가운데, 면적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헝가리인의 전인구 중 반수 가량이 헝가리 국외로 남겨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1920년 3월 1일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나,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후원하에 1930년대 말, 뮌헨 협정과 빈 중재,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으로 일부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였으나,
전쟁의 국면은 서서히 열세가 되어, 1944년에는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나치 독일군의 판처파우스트 작전,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로 저지되어,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렀다. 국회의사당 야경
1945년 5월 8일의 패전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에 점령된 헝가리는 공산화가 되었다. ]
1946년 2월 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 왕국은 명실공히 붕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점령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89년 10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사회자유주의로 선회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산업·상업·교통·문화의 중심지다. 인구는 180만 현재 중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1873년에 도나우 강 서편의 부더(Buda)와 동편의 페슈트(Pest)가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부다와 페스트의 두 지역으로 대별된다. 부더와 페스트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경치가 다르다. 역사적 전통이 남아 있는 부다의 사적들과 장려한 의사당 등으로 알려져 있는 페스트, 부다페스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도시 중심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어 "도나우의 진주", "도나우의 장미"라고 불린다. 구릉지대인 부더는 기복이 심하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 도나우 강과 이어지는 언덕에는 변화의 역사를 겪어온 왕궁이 장엄하게 서있고, 서쪽에는 야노슈 산이 우뚝 서있다. 그 산자락에 한적한 주택가가 펼쳐지며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양안의 지구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다리가 세체니 다리이다.
마차시 성당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당이다. 정식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지만, 이곳의 남쪽 탑에 마차시 1세(1458~1490) 왕가의 문장과 그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마차시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래에 따라 원래는 1015년에 건축된 것이다. 1255년, 부다 성내에 건축되어, 역대 국왕의 결혼식과 대관식의 장소로서 이용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14세기 후반에 화려한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조된 것으로서, 1479년에 마차시 1세에 의해 대개축됨으로써, 높이 80미터의 첨탑이 증축되었고, 19세기 후반에 광범위하게 수복된 것이다. 700년이라는 교회의 역사 중, 이 성당은 부다의 풍요로움 이었고, 따라서 종종 비극의 역사의 상징을 지니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후의 황제 칼 1세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마차시 1세의 2번의 결혼식도 이곳 성당에서 행해졌다. 구 부다 지구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다.
어부의 요새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마차시 성당 옆에 있는 네오 고딕 네오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테라스이다.
국회의사당
세체니다리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해 1851~1906년 사이에 세운 성당으로서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당 가운데 최대 규모의 성당이며 엥겔스 광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요제프 힐드와 미클로시 이블의 공동 설계 작품인 이 대성당은 본래 1848년에 기공식을 가졌으나 연이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51년부터 재개되었다. 그러나 대성당 건축이 한참이던 1868년에 전례 없는 폭풍이 불어 닥치면서 대성당의 돔이 날아가버렸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야 1905년에 공사는 끝이 났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건축 양식으로는 전형적인 네오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다. 전체 구조가 그리스 십자가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 중앙 돔이 있다. 건물 내부에선 86m, 돔 외부의 십자가까지는 96m인데, 마자르족이 이 지역에 자리잡은 896년을 의미한다.그리고 한 번에 8,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고 50종류 이상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성당 내부에는 당대의 저명한 헝가리의 예술가인 모르 탄, 베르탈란 세케이, 쥴러 벤추르 등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벤추르의 성화는 성 이슈트반 왕이 헝가리 왕관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이는 곧 이교도였던 마자르족이 유럽의 일부가 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한 그림이다. 이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돔의 스테인트 글라스로, 카로이 로츠의 작품이다. 더불어 성 이슈트반의 오른쪽 손이 미라로 보관되어 있다.
헝가리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부다페스트의 일부인 페스트 중부에있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오페라 하우스이다. 안드라시 거리 22번지에 있다.
미클로시 이비가 설계하였으며, 19세기 헝가리 건축물 가운데 주요 건축물이다. 건설 공사는 1875년에서 188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부다페스트 시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건설 자금을 제공하였다. 1884년 9월 27일 헝가리 왕립 오페라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헝가리는 대통령제를 택해,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의회에 의해 선출되며, 수상을 임명하는 등 의례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국가 원수이다. 국회의사당.
대통령자신이 각료를 선택해서 행정을 행한다. 폴란드와 달리 점진적 개혁정책을 수행, 중앙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민주화과정을 밟고 있다.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 선거의 날짜를 잡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입법부인 국민의회는 일원제이며, 민선이고 임기 4년이다. 정원은 386명이다.
국회의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