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는 이제현의 세계체험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정치적 생애를 알아보려 한다. 부친 이진의 전 대까지 이제현의 가문은 매우 초라했다. 하지만 충렬왕 5년(1279) 이진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갑자기 가문이 흥성기를 맞이했다. 이제현에 따르면, 할머니 김씨가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성품이 근엄했는데, 스스로 경전과 사서(史書)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진의 형제는 셋이다. 이진이 둘째이고, 형과 동생은 요절했다. 이진은 입신한 다음 친자식은 물론이고 조카들도 잘 가르쳐, “꽃봉우리 세 집에 다섯 장원이 났다” (閔漬의 시)고 칭송되었다. 조카 셋과 아들 둘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했던 것이다. 큰형의 장남은 대과에도 장원 급제했다.(<年譜>)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제현은 단연 뛰어난 준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걸출하여 어른 같았고, 글을 지으면 이미 문장가의 기풍(氣風)이 있었다”고 한다. 소시부터 대문호의 자질이 약연했던 것이다. 과연 그는 15세에 성균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대과에도 잇달아 급제했다. 부친 이진은 기쁨에 넘쳐 “하늘이 우리 가문을 크게 번창시키려는 것인가”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실제로 이제현은 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이제현을 대과에서 선발한 시관은 권보(權溥)였다. 당시 습속에 과거 합격자는 시험관을 좌주(座主) 또는 은문(恩門)으로 부르고, 자신은 문생(門生)으로 칭했다. 좌주와 문생 관계는 부자관계처럼 긴밀했고, 평생 지속되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관계였다. 그런데 권보는 자신의 문생인 이제현을 사위로 삼았다. 좌주에 더해 장인까지 된 것이다. 그런데 권보도 당시에는 이제현만큼 저명인사였다. 그는 명문 안동 권씨의 실질적 시조이다. 그의 증조부는 안동 사람 권수평(權守平)인데, “행적이 미미해 그 족보를 알 수 없다”(跡微不知其族譜)고 할 정도로 무명의 집안이었다.
고려말 권문세가 안동 권씨의 일원이 되다

▎충북 음성군에 세워진 양촌(陽村) 권근의 사당. 권근이 완성한 <효행록>은 성리학이 사대부의 사상을 넘어 백성의 일상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한 토대가 되었다.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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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가 권문세족의 지위에 오른 것은 권보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기재(奇才)였다. 그 또한 이제현같이 15세 때 성균시에 장원을 했다. 3년 뒤 과거에 합격해 환로에 들어섰다. 그 뒤 그의 삶은 찬란한 것이었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다 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권보는 예외다. 권보는 충렬왕부터 충목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13년간 정방(政房)을 맡아 인사를 좌우했다. 22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며, 85세의 수를 누렸다. 최고위직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에 올랐고, 부원군(府院君)의 작호와 최고 공신 칭호를 받았다. 아들 다섯과 사위 넷, 모두 아홉이 군(君)에 봉해져 “한 집에 9봉군이 있으니,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라는 찬탄을 받았다. 막대한 부도 소유했다. 일찍이 충숙왕이 권보의 장남 권준의 저택에 옮긴 적이 있었다. 그때 “옥우(屋宇)의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과인이 감히 당할 바 아니다”라고 하였다. 재산 형성 과정은 아름답지 않다. 권보는 13년간 “오래 전형(銓衡, 인사)을 맡으매 벼슬을 팔아 가산을 영위했다.”(<고려사>) 권준도 “세력을 믿고 논밭을 탈취하였으며 뇌물을 받아 거부를 이루었다.”(倚勢奪土田, 納賄賂, 以致鉅富)
권력, 부, 명예만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교양도 풍부하고, 학문적 소양도 깊었다. 안동 권씨가 학문적 명성을 획득한 것은 권보가 가학(家學)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권보는 이인로가 편찬한 <은대집(銀臺集)> 20권에 주석을 달았다. 은대는 고려시대 학사원(學士院)의 다른 이름으로, 임금의 교서나 외교문서 같은 국서를 작성하던 기관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은대집>은 방대한 저서로, 이색은 <동국이상국집>과 쌍벽을 이루는 저서로 꼽았다. 이 방대한 시집을 주해한 권보의 박람강기와 높은 학문적 능력은 신뢰할 만하다. 이제현은 권보의 학문에 대해, “항상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쉬지 않았다. <은대집>에 주석을 다니, 보는 자들은 그 학문의 넓음에 탄복하였다. 시문을 저술하되 간결하면서도 의미는 심장했다.”고 평했다.(<墓誌銘>)
권보는 <효행록(孝行錄)>도 간행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64명의 효자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66세 된 아들 권준이 85세의 아버지 권보를 위해 편찬했다. <효행록>은 안동 권씨 가문의 부와 권력에 정신적 가치를 더해 주었다. 증손 권근은 뒷날 주석을 붙여 오늘날 전해지는 <효행록>을 완성했다. 한 가문의 땀과 정성이 모여 완성된 것으로, 안동 권씨 가문의 학문적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문정공이 나이 80여 세에 여러 책을 널리 상고하고 손수 편집하여 이 <효행록>을 만들었으니, 그 학문에 부지런하여 늙어도 쉬지 않음이 이러하였다.”(權近, <孝行錄後序>)
성리학 조선의 뿌리, 안동 권씨의 가학(家學)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은 위화도회군 직후 토지개혁을 주장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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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의 가학은 가문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윤리 확산에도 기여했다. <효행록>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 교화서이기 때문이다. <효행록>은 이야기책인데, 그림과 노랫말까지 덧붙였다. 누군가 이야기를 읽어주고, 그림을 보여주면서 노랫말처럼 읊어주면, 알아듣기 쉽고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공감각적 텍스트인 셈이다. 이 책의 독자는 세상의 보통사람들(愚夫愚婦, 田野之民)과 아이들(童蒙)이었다. 그 덕분에 이 책은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동남아에도 널리 퍼진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권씨 가문은 국가이념 형성에도 기여했다. 한국 최초로 성리학 저서를 간행토록 한 게 권보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건백하여 간행하니 동방의 성리학이 권보로부터 시작되었다.”(<고려사>) 이는 권보가 후대에 미친 가장 중요한 학문적 기여다. 권근도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고, 태종의 국사(國師) 역할도 하였다. 성리학은 조선 500년간 국가이념이니, 권씨 가문은 조선의 정신적 기원이란 명예도 얻은 것이다.
이제현은 권보의 사위가 되어 권씨 가문의 일원이 됐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종법제 사회로, 남성 중심이었다. 하지만 고려 사회는 외가, 처가와의 친밀도가 깊었다. 결혼 후 처가에 사는 경우도 많았고, 매우 자연스러웠다. 재산이나 음직(蔭職)도 상속받고, 처갓집 제사도 모셨다. 그런 사례를 보자. 이제현은 1320년 34세 때 과거시험관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뒤 관례에 따라 문생인 합격생들을 거느리고 부모와 좌주를 뵈러 갔다. 그때 부친은 77세, 모친은 70세, 장인 권보는 59세였다. 권보는 이제현의 좌주이기도 하여, 장모 변국대부인도 가마를 타고 잔치(學士宴)에 왔다. 고려인이 일생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학사연일 것이다. 모임은 성황을 이루었고 찬란한 영광과 기쁨이 넘쳤다. “잔치 벌여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 나란히 술잔 올려 어버이에게 축수하네. 앞뒤로 길 물리고 조관(朝官)이 옹위해 오고, 남북에서 고관의 수레가 달려오네.”(尹奕의 시, <역옹패설>) 1326년에는 권준이 과거시험관이 되어 부모를 모시고 학사연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 고관귀척인 형제, 조카, 사위가 모두 모여 권보 부부를 부축하니, “광채가 길에까지 가득하였다.” 윤혁이 다시 축시를 지었다. “성대한 일(盛事)로 큰 거리의 낮을 화려하게 꾸몄고, 아름다운 이야기(美談)로 온 장안의 밤을 밝혔네.”
충선왕은 이제현의 삶에 가득 차 있다. 권보도 충선왕과 인연인 깊다. 충선왕의 즉위 후 새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게 사림원(詞林院)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왕의 심복인 사림원 4학사였다. 그 1인이 이제현의 부친 이진이고, 또 한 사람이 권보다. 부친과 장인이 모두 충선왕의 남자들이었다. 권보의 아들 두 사람도 그렇다. 처음에는 첫째 아들 권준에 대한 충선왕의 은총이 더욱 융성하여 상을 내림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충선왕은 권준의 셋째 동생 권재(權載) 이야기를 듣자 보기도 전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충선왕은 어린 권재를 아들로 삼아 호적에 올리고, 나들이 때는 같은 수레에 태웠으며, 북경에 집과 밭도 사주었다. 이름도 왕후(王煦)로 고쳤다. 이제현과 충선왕의 인연은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었다. 만권당 책임자로 이제현을 선택한 것도 이런 깊은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현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충선왕과 공민왕이다. 충선왕과의 관계는 정서적이고 친밀한 가족관계 같은 것이었다. 공민왕과의 관계는 공식적이고 정중한 군신관계였다. 이제현의 정치적 삶은 양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그 기점은 1320년, 1351년이다. 1320년은 충선왕이 권력투쟁에 패해 티베트로 유배된 해이고, 1351년은 공민왕 즉위년이다. 그의 삶은 충선왕과 공민왕의 부침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의 공생애에서 1320년 이전은 빛나는 시간이었고, 이후 30여 년은 긴 실의의 시간이었다. 1351년 이후는 희망과 낙담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1320년 전은 준비의 시간, 이후 30년은 단련과 온축의 시간, 1351년 이후 15년은 개화의 시간이었다.
충선왕의 유배와 함께 찾아온 겨울1308년 22세의 이제현은 예문관·춘추관에 선발되어 처음 관직에 나갔다. 예문관·춘추관은 역사기록, 왕명,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관서이다. 학문과 문장력, 정치적 감각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이른바 문한(文翰)의 직이다. 이제현은 27세 때 왕실 창고와 재정을 담당하는 내부(內府)의 부령(副令)을 맡아서 도량형 기구를 교정하는 일을 손쉽게 해치워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고급 관인들은 이런 기술 사무에 서툴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문인이자 예인, 철인(哲人)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현은 기술업무와 행정사무 같은 이무(吏務)에도 통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특장은 역시 문한직에 있어서, 필생의 공업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1314년 28세의 이제현은 충선왕을 따라 원의 수도 대도(大都=北京)에 갔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부터 1320년 34세까지의 시간은 이제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당시 충선왕의 정치적 삶은 조금씩 쇠락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좋은 시절이었다. 그는 원 황제 무종을 추대한 공로로 원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만든 만권당은 당대 세계 최고의 문화적·정신적 보금자리 중 하나였다. 이제현은 충선왕이 제공해준 그 선물의 즐거움을 마음껏 향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중국 대륙 여행은 이제현의 정신을 더 깊이 자극했다. 여행 중 남긴 시 속에는 팽팽하게 부푼 감성과 다채로운 사유의 흔적들이 충만하게 넘쳐흐르고 있다. 그의 가슴과 영혼에 새겨진 것들은 뒷날 고려로 전해져 고려 사회를 혁신하는 에너지로 재생되었다.
1320년 9월, 이제현은 과거시험관(知貢擧)에 임명되어 잠깐 고려에 돌아왔다. 시관이 되는 것은 큰 영광이자 개인적으로 소득이 많은 일이었다. 과거 합격자들의 좌주, 은문이 됨으로써 부모와 선배를 영예롭게 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좌주가 현달해야 문생에게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관과 합격생은 정치적 명운을 함께하는 동지였다. 양자는 일종의 사회적, 정치적 부자관계인 것이다. 그런 만남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인 학사연의 모습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 과거에서 이제현은 이름 없는 집안의 이곡(李穀)을 뽑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선택이었다. 이곡은 1333년 원나라 과거시험(制科)에도 합격했다. 이 시험 합격자는 원 지배기 100년 동안 단 9명뿐이었다. 이곡이 합격한 지 20년 뒤인 1353년 아들 이색도 제과에 합격했다. 조선건국 및 성리학과 관련하여 이곡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바로 이제현과 이색을 이어줬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안향→ 백이정, 권보→ 이제현→ 이곡→이색→정몽주,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계보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13세기 말 고려의 정신혁명과 정치혁명이 배태되었다. 이 계보는 조선에도 이어져 이른바 사림(士林)의 정신적 정통성(道統)을 대표하게 되었다.
1320년 11월 15일경 이제현은 과거시험관 일을 마치고, 원의 수도 대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충선왕은 머리를 깎이고 석불사에 구금되었다가, 12월 4일 티베트 유배지로 출발했다. 이제현은 충선왕이 위험에 빠진 소식을 듣고 여정을 재촉하여, 1321년 1월 2일경 대도의 교외 황토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충선왕의 유배 소식을 들은 이제현은 낙심하며 탄식했다.
“세상일, 차마 들을 수 없구나./ 쓸쓸한 다리에 말을 세우고 말을 잊는다./ 어느 때 밝은 해가 속마음을 밝힐까./ 눈물 자욱이 도처의 청산을 가리네.”(<黃土店>) 수종하던 재상들조차 두려움에 휩싸여 모두 도망쳤다. 오직 박인간(朴仁幹), 장인지만이 충선왕을 따라 배소 사스캬(Sa-skya, 撒思結)로 갔다. 사스캬는 지금 티베트의 사꺄(Sa’gya, 薩迦)로, 수도 라싸(Lhasa)에서 약 400㎞ 떨어져 있다. 이제현은 충선왕 뒤를 따라 떠나는 박인간을 배웅하며, 그의 충성심을 높이 추앙했다. “까마귀는 원래 옻칠처럼 검어서/ 사람은 모두 싫어한다./ 들어오면 효자요 나가면 충신이니/ 아, 너는 새지만 바로 사람이라./ 세상 누가 너와 벗할 수 있으랴.”
충선왕, 원 황실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유배충선왕의 유배는 원 조정 내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현은 영종의 총애를 받은 환관 바옌툭스(伯顔禿古思)와 충선왕의 악연을 이유로 들었으나, 부차적인 요인일 것이다. 이제현으로서는 원 황제를 직접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이렇다. 1312년 원 인종이 즉위한 후 충선왕은 정치적으로 압박감을 느꼈다. 인종은 무종의 친동생이다. 충선왕은 이들보다 나이가 위이지만, 어릴 때 함께 먹고 자며 형제처럼 자랐다. 그 뒤 원 성종이 사망하고, 제위를 둘러싼 무력 투쟁이 벌어졌다. 먼저 기선을 장악한 인종이 황제를 선포했지만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한 형 무종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 차기 황제를 약속받고, 이후 번갈아 각자의 자손을 제위에 올리기로 했다. 무종이 죽고 인종이 제위에 올랐다. 인종은 자신의 아들에게 전위하고 싶었다. 그러자니 무종을 돕고, 무종 또한 총애한 충선왕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충선왕에게 고려로 환국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1313년 고려에 돌아가 아들 충숙왕에게 전위했다. 압박을 벗어나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제현을 데리고 대도로 돌아왔다. 압박의 구실은 없앴지만, 그렇다고 우환의 뿌리마저 뽑힌 것은 아니었다.
1316년, 충선왕은 심왕위(瀋王位)마저 조카 왕고(王暠)에게 물려줬다. 왕고의 부친은 충렬왕의 장남이자 충선왕의 이복형 왕자(王滋)이다. 어머니가 고려인 안비(安妃)인 까닭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불문에 출가했다. 그러나 충선왕은 이복형의 아들들을 사랑하여 함께 키웠고, 둘째 아들 왕고에게 심왕위를 전위한 것이다. 그리고는 두문불출하면서, “병을 칭탁하고 조청(朝請)을 받지 않고, 문을 닫고 향을 불사르며 해가 지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술을 많이 마셨다.”(<益齋亂藁> 卷9) 또한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금은으로 필사하고, 불경을 번역하고, 계를 받는 등 불교를 극히 존신하였다. 술과 부처에 기대어 산 것이다. 그런 충선왕에게 인종은 우승상(右丞相)을 제안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이미 왕위까지 모두 물려준 처지에, “신이 어찌 감히 영화를 탐하고 분수없이 함부로 차지하여 폐하의 명감(明鑑)을 더럽히겠습니까. 신은 늙었으니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처님을 섬기고 성수(聖壽)를 빌면, 이것이 신의 분수입니다”라고 극력 사양했다. 인종은 웃으며 “진실로 본디 권세를 잘 피하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충선왕의 은거와 근신이 본심인지, 진실로 정치적 야심은 없는지 떠본 것이다. 충선왕은 그물을 잘 피해 나갔다. 1319년 충선왕은 이제현 등과 함께 강향(降香)을 구실삼아 중국 강남 보타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대개 시사(時事)가 장차 변해가는 것을 알고 화망(禍網)을 피하려는 것이었다.”(<益齋亂藁> 卷9) 하지만 1920년 인종이 죽고 아들 영종이 즉위하자 그것도 통하지 않고, 유배를 당한 것이다.
충선왕이 떠난 뒤 이제현은 만권당을 지켰다. 기나긴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1321~1344년까지 20여 년간은 이제현의 삶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35~58세 때의 일이니, 원대한 포부와 난숙한 기량을 마음껏 펼쳐야 할 장년기였다. 하지만 충숙왕과 충혜왕의 시대였고, 충선왕의 사람으로 알려진 그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긴 세월 후 새로운 기회가 왔지만, 그는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이 암흑기에 이제현이 한 일은 충선왕 석방운동이었다. 고려를 위해 더 중요한 일은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를 원의 일부로 만들려는 시도를 저지한 것이었다. 1321년 2월, 충선왕을 유배시킨 뒤 영종은 충숙왕의 입조를 명했다. 여기에는 고려왕이 되려는 심왕 왕고의 야심이 개재되어 있었다. 충선왕, 충숙왕, 심왕 왕고 사이의 관계는 칡넝쿨처럼 복잡하다. 세 사람의 은원이 얽히고설켜 고려 후기의 정치를 난조에 빠뜨렸다. 그 씨앗은 충선왕의 권력욕과 애증이 뿌린 것이다. 충선왕은 충숙왕에게 전위하면서, 세자는 왕고로 삼았다. 1316년에는 원 양왕(梁王)의 딸과 왕고의 결혼을 주선하고, 심왕위도 물려줬다. 양왕은 충선왕비의 오빠이니, 자기의 처조카와 결혼시킨 것이다. 이에 앞서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도 영왕(營王)의 딸과 결혼시켰는데, 원 황실 위계에서 양왕보다 서열이 낮았다. 왕고는 충숙왕의 세자지만, 현실적으로는 심왕인 동시에 충숙왕보다 원 황실 내의 지위도 높았던 것이다. 이런 비틀린 관계를 통해 충선왕은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충선왕은 충숙왕을 확고히 제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전위한 것은 사실 형식적이었다. 상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전히 고려정부의 인사와 재정을 모두 좌우했기 때문이다. 충선왕의 심복들인 재상 권한공(權漢功)·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 등이 원나라에 왕복하면서 상왕의 명령을 받들었다. 충숙왕의 왕권은 껍데기뿐이었다. 충숙왕도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복종했다. 하지만 1318년부터 충선왕의 심복들을 숙청하기 시작하면서, 도전하기 시작했다. 원 정부 내 충선왕의 권력이 위태로운 것을 감안한 거조였을 것이다.
고려의 격랑에도 아랑곳없이 충선왕 위해 동분서주1320년 충선왕이 유배되자 그는 즉시 아들 왕정(王禎, 충혜왕)을 세자로 세웠다. 충선왕에 대한 구원도 요청하지 않았다. 왕고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고는 충숙왕을 제거하고, 자신이 직접 고려 왕위에 오를 결심을 했다. 새 황제 영종도 왕고를 총애했다. 왕고는 “(충숙)왕이 그 칙서를 손으로 찢었다”고 모함했다. 영종은 충숙왕의 입조를 명했다. 목숨이 달린 소환 명령이었지만 피할 방법도 없었다. 충숙왕은 범 충선왕 세력의 음모로 생각했다. 충선왕의 몰락이 확인된 1320년 12월, 충숙왕은 권한공·채홍철·이광봉 등 충선왕 측근을 모두 축출했다. 이듬해 정월부터는 이들을 모두 하옥하거나 귀양 보내고, 가산도 적몰했다. 그리고 원으로 출발했다. 원 조정에 도착한 충숙왕이 조회하자, 황제는 화를 내고 왕을 꾸짖었다. 국왕의 도장을 빼앗아 왕권도 박탈했다. 1318년 갑작스레 사망한 충숙왕의 몽고왕비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이린진발(亦憐眞八剌)의 의문사도 다시 조사하게 했다. 조사 결과 공주의 요리사는 충숙왕에게 맞아 죽었다고 증언했다. 충숙왕은 그 뒤 4년간 원에 억류되었다. 그 충격으로 충숙왕은 복위 뒤에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구중궁궐에 거처했으며, 어떤 일도 기뻐하지 않았고, 국정도 돌보지 않았다.
1321년 7월, 충숙왕이 류청신(柳淸臣)·오잠(吳潛)을 대동하고 원에 소환되었을 때 이제현의 입장은 난처한 것이었다. 충선왕의 사람이었으니, 충숙왕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충숙왕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고려 신하의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지만, 이제현이 무언가를 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이제현은 충숙왕이 원 황제의 여름 궁전인 상도(上都)로 갈 때 함께 배행했다. 지금은 넓은 평원뿐인 상도는 북경에서 약 260㎞이고, 현재 내몽고에 있다.(<서정록을 찾아서>) 이때 이제현은 충선왕을 구해달라는 시를 류청신과 오잠에게 바쳤다. “삼한의 주부(主父)시오 황제의 외손께서/ 한번 떠나시니 만릿길 티베트로다./ 외로운 신하 혼자뿐 도와줄 사람 없다./ 두 분 덕망은 백창포보다 더 향기로와라./ 이 고언(苦言)을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시라.”(<在上都奉呈柳政丞淸臣吳贊成潛>)
류청신은 몽고 역관으로 출세하여 재상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오잠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지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는 충렬왕에게 봉사해 출세했다. 그런데 상도에 도착한 류청신과 오잠은 충숙왕을 배신하고 심왕 왕고를 지지했다. 사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왕고가 고려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형식적인 추인 절차만 남았을 뿐이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이미 충선왕의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은 터였다. 그들에게는 왕고가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원에서 심왕 옹립을 주도한 것은 충선왕의 총신 조적(曺頔)과 채하중(蔡河中)이었다. 고려 국내에서도 권한공을 중심으로 왕고 옹립을 간청하는 집단 연명서가 작성되어 원 중서성에 제출되었다. 충선왕 쪽 인물들과 함께 절반 정도의 신료가 동참했다. 영종도 1321년 1월, 사신을 보내 왕고의 모비 안비에게 손수건을 선사했다. 충선왕 측근들이 왕고옹립운동의 주축이었고, 상황도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제현도 이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그는 어느 편에도 끼지 않고, 다만 충선왕의 구명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고는 결국 고려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원은 인종대부터 이미 충선왕이 두 왕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몽골 황족도 그런 사례는 없었다. 그래서 충선왕은 두 왕위를 모두 포기한 것이다. 하물며 고려인 왕고에게 그런 지위를 허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심 지역의 안보문제다. 이 지역은 북경에 수도를 둔 왕조의 안보에 핵심적이었기 때문에 이민족 지배하에 둘 수 없다. 수·당이 고구려와 긴 전쟁을 치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동 회복은 왕건의 꿈이었다. 충선왕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충선왕이 심왕이 되면서 꿈에 한 발 다가섰다. 하지만 그것은 군사적 실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입성론(立省論) 저지로 고려를 지키다
▎원(元)나라 태조 쿠빌라이 칸(1215~95)의 외손자인 충선왕은 심양왕을 겸했다. 하지만 나중에 심양왕을 차남 충숙왕이 아닌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면서 고려말 권력다툼의 불씨를 제공했다. 쿠빌라이 칸의 사냥행차도.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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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3년, 유청신과 오잠은 갑자기 원나라 도성(都省)에 고려의 입성(立省)을 주청했다. 기존의 정동행성 대신 고려에 삼한행성(三韓行省)을 세우고 왕고를 책임자로 하자는 것이었다. 정동행성 책임자인 승상에는 관습적으로 고려왕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별도의 행성을 설치하자는 것은 고려를 원의 일부로 만들려는 책동이었다. 왕고의 옹립에 실패한 심왕파들이 던진 승부수였다. 이제현이 반대의 선봉에 서서 입성 반대 상소를 도당(都堂)에 올렸다. 그 요점은 첫째,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를 차지하고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든” 위대한 원의 천자가 작은 나라의 뒤를 끊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둘째, 고려는 100년간 원에 충성을 다했고, 이에 원 세조 쿠빌라이도 조서를 내려 “공주를 시집보내 대대로 인척으로서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옛 관습을 고치지 않게 함(土風不改)으로써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세조구제(世祖舊制)’이다. 대국의 체통을 환기시키고, 쿠빌라이가 한 약속의 신성불가침성을 강조한 것이다. 원 내부에서도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그 요점은 고려가 이미 충성을 다하는데, 직접 통치는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성론은 충렬왕 28년(1302)부터 시작되어 40년 동안 7차례나 제기되었다. 이때 고려가 원의 일부가 되었다면, 명 건국 뒤 고려가 독립을 유지하는 데 심대한 곤란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의 영토를 둘러싸고 조선과 명은 극한 대립을 벌여, 전쟁 일보까지 돌입했다. 위화도회군을 초래한 우왕대의 요동정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현의 입성 반대는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입성론을 둘러싼 공방에 이어, 1323년 이제현은 충선왕 구명상소를 올렸다. 승상 바이주(拜住)가 이에 찬동하여 충선왕은 티베트에서 도스마(朶思麻)로 유배지를 옮겼다. 도스마는 지금 중국 간쑤성(甘肅省) 린저우(臨洮) 인근이다. 이 무렵 영종은 태황태후 다기의 세력을 대부분 숙청하여 정치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다기 태후는 충선왕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만큼, 충선왕은 이제 날개가 모두 잘렸다. 그래서 영종은 충선왕에 대한 고삐를 조금 늦춘 것이다. 감격한 이제현은 충선왕을 맞으러 도스마로 가는 여정에 나섰다. 길을 나서며 지은 시가 있다. “님의 은혜 만에 하나 갚지 못했으니/ 만 리 넘어 달려가기 어렵다 말하랴./ 눈처럼 흰 어머님 머리칼 염려되어/ 두 줄 맑은 눈물 안장에 떨어진다.”(<序詩>) 당시 이제현의 어머니는 73세였다. 주군을 위한 길을 떠나는데 노모의 모습이 떠오르며, 절로 불효자의 눈물이 흐른 것이다.
1323년 늦가을 영종은 상도에서 대도로 돌아오는 길에 암살당했다. 무종과 인종의 모친이자 영종의 조모였던 태황태후 다기 세력을 숙청하다 그들에 의해 시해된 것이다. 새 황제 태정제(泰定帝) 예순 테무르(也孫鐵木兒)는 충선왕의 몽골왕비 계국대장공주의 오빠였다. 그리고 심왕 왕고의 장인 양왕의 친형이었다. 하지만 태정제는 충숙왕을 복위, 환국시켰다. 처남이 황제가 되니, 충선왕도 대도에 돌아왔다. 이제현이 애타게 그리던 님이었다. 다음 호에는 이후 이제현의 정치적 행적을 살펴보려 한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