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정동(寶亭洞)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북쪽에 위치한 행정동이자 법정동.
기흥구의 북쪽 경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수지구 죽전동, 서쪽으로 수지구상현동, 풍덕천동과 마주하고 있다. 남쪽으로 탄천이 흐르며 주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구성현으로 명명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 거서현으로 개칭
-940년 고려 태조 23년 용구현으로 개칭
-1018년 고려 현종 9년 광주의 임내에 속하게 됨
-1413년 조선 태종 13년 용구와 처인을 합쳐 용인현이라 칭함
-1895년 고종 3년 용인현을 용인군으로 개칭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때 구흥면(駒興面)의 역촌 일부와 서변면(西邊面)의 보수원 · 이현 · 독정리를 합쳐 보수원(寶樹院)의 '보'자와 독정리(獨亭里)의 '정'자를 따서 보정리(寶亭里)라 하였다.
-1914년 읍내와 동변, 서변, 수진의 3 개변을 합하여 읍삼면이라 개칭
-1931년 읍삼면의 명칭을 구성면으로 명칭변경
-2000.9.1 구성면에서 구성읍으로 승격
-2005.10.31 용인지역 행정구역개편 때 기흥읍과 구성읍을 통합하여 기흥구청으로 개편하였고 기존에 있던 구성읍이 4개동 (보정동, 구성동, 마북동, 어정동)으로 분동되어 기존 보정리 일원이 보정동 행정구역으로 변경되었다.
보정동이란 지명은 현재의 연원부락에 보수원이 있었고 그곳에 큰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보정리라 한데서 유래한다.
옛날 연원부락에 조선 시대 교통수단으로 보시원(普施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연꽃과 나무들이 많은 탓에 연원(蓮院)마을, 보수원(寶樹院)이 되었다.
또한 옛날에 마을 앞에 따로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씨(李氏) 성을 갖은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하여 정자 밑에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여 과거에 합격한 후 집으로 돌아가보니 노부모님들이 모두 돌아가신 나머지 폐가로 변해 있어 오갈 데 없는 이씨선비는 과거공부 하던 곳으로 돌아와 거처를 정하고 정착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마을 이름이 홀로 서있는 큰 정자나무를 배경으로 홀로 독(獨)자와 정자 정(亭)자를 사용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獨立)'이란 말이 연상되므로 '홀로 독(獨)'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두터울 독(篤)'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는 설이 있어 유래가 구구하다.
하지만 크게 큰 정자가 있었다는 의미로 보정리(寶亭里)가 되었다는 설과 보수원(寶樹院)의 '보'자와 독정리(獨亭里)의 '정'자를 따서 보정리(寶亭里)가 된 설이 대세를 이룬다.
다른 유래로 현재 연원(蓮院) 마을이라 불리지만 원래 보시원이 폐지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에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생기게 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에 기록하기를 '보시원(普施院)은 현 서쪽 10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해동지도』에는 '보시원은 현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여지도서』를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지리지나 지도에서는 보시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보시원은 조선 후기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신구대조』에는 보수원(寶樹院)이란 명칭이 서변면에 속한 마을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독정(篤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따로 있는데 조선 시대 마을 상류에 독을 만들던 가마터가 있어 독쟁이라고 불리던 것이 독정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기흥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탄천이 흐른다. 탄천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행정동과 법정동이일치하며 24개 통으로 이루어져있다.
경부고속도록가 남북으로관통하고 있으며 그 동쪽으로 23번 지방도, 지하철 분당선이차례로 놓여있다. 지하철 분당선 보정역과 분당지하철 차량지가 있다.
용인 보정동 고분군(龍仁 寶亭洞 古墳群)
사적 제500호. 용인 보정동 고분군은 추정 80여 기의 고분이 해발 188.8m의 소실봉에서 남쪽 삼막골쪽으로 뻗은 능선의 남쪽과 동남쪽 사면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고분군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