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영적 교사이자 자기실현을 위한 '다이아몬드 어프로치(the Diamond Approach®)'의 창시자이며, 영성 발달을 위한 '리드완 스쿨(Ridhwan school)'의 설립자. 알마스(A. H. Almaas,1944~)가 전하는
목소리.
참고로 알마스는 1944년 쿠웨이트 태생으로 UC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전공중 임사체험과 같은 영적인 체험을 경험하면서 심리학으로 진로를
바꾼 영성가.
본명은 A. 하미드 알리(A. Hameed Ali)이며,
아랍어로 알마스(Almaas)는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고.,
* 가슴이 뜨겁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슴이 충만하지 않을 때,
진실로 깊이 만족스러운 인간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을 위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영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37
* 만약 우리의 목표가 이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작업을 통해
삶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라면,
실제로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 37
* 영적인 여정이란 뭔가를 경험하고 재미있는 통찰을 얻으며
비범한 감각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들은 영적인 여정의 한 부분으로 일어날 뿐이다.
그런 체험은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내적인 여정의 핵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면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고요로 안착하는 길이며,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참모습을 느끼는
단순함 안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실제의 메아리 대신 실제 안에 존재하기를 말한다. 41
* 소음과 드라마, 밀고 당기기, 조작과 투쟁,
그리고 영적인 수행과 작업을 수년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단순히 실제로 존재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42
* 영적인 경험과 지각, 그리고 온갖 흥미롭고 이상야릇한 체험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체험들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고양시킬 수는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 자신으로 있는’ 단순함이 없다.
자기 자신에 안착하고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것, 그 본성의 친밀함, 실제(the real)의 느낌이 그 안에는 없다. 내적인 여정, 영적인 수행은 모두 궁극적으로 여기에 도달한다. 진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말이다.
어떤 초능력을 개발하고 차원이동을 하거나 유별난 경험을 하기
위해서 내적 수행을 하려 한다면, 당신은 진실한 영적 작업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아직 실재(reality)가 무엇인지, 실제로 존재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기와 보통 경험 사이의 차이점을
알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험은 대부분 실제가 아니다.
그 경험은 그저 실제의 반영이자 왜곡일 뿐이다. 44
* 하지만 만족, 행복이나 성취감을 위해서 실제로 존재하려 한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치고 만다. 우리가 진실을 사랑함은 거기에서
좋은 느낌을 얻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성취를 주기 때문이 아니며, 혹은 그것이 어떤 영적인 깨달음이나 진보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할 때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한다. 그것이 어떤 감각이든, 어떤 맛이든 상관없다.
때로 실제로 존재함은 고통을 허용하는 것, 혹은 고통스러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진실’로 존재할 때 우리 안에는 내면의 진실한 바탕과 일치하는 뭔가가 있다. 우리는 영혼 안에 있는 올바름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며, ‘아! 여기에 내가 있고, 그저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구나.’라는 느낌을 갖는다.
*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기를 사랑함은 우리가 무엇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진실 자체만을 위해서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46
* 사랑과 고마움을 인식하는 순간은 아주 소중하다. 그때 우리는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더 개선하기 위해 명상, 기도, 염송을 하거나 영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만큼 훌륭해지기 위해서
이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발달시킨 개념이나 들어서 알고 있는 관념이 열렬히 따를 만큼 좋은 것이라서 이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뭔가를 추종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나 자신과 함께 안착하는 작업이다. 47
* 삶의 문제를 통과하고, 내적 작업의 훈련을 거쳐가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하게 존재함을 사랑해야 한다.
이 여정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를 실제에게로 끌어당기고 있는
내면의 사랑과 감사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48
*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늘 가지고 있는 것은 매순간의
경험이다. 순간순간의 경험에 존재하기를 허용한다면, 경험을 보고 맛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알아차리려고 한다면, 우리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고 본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58
*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면, 먼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있는 그 자리를 자각하는 것이 반드시 자신으로 존재함을 뜻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는 있다. 있는 그 자리의 자각은 참자기의 요소, 혹은 맛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맛이나 요소를 ‘진리’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의 경험이 무엇이든, 그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참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그 경험이 떨어져 있거나 단절되어 있거나,
반응 혹은 반영이거나 대체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참본성에 이어져 있다. 59
* 실제로 존재할 때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진리를 더 많이 보게
되며, 역으로 그 상황의 진리를 많이 볼수록
더욱더 실제로 존재 할 수 있다. 61
* 자아탐구는 두 가지의 기본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있는 그 자리가 분명히 드러날 때까지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기, 즉 실제의 경험을 매 순간 자각하기다.
둘째는 "무엇 때문이 이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묻기 시작하기,
이 질문을 하는 순간, 탐구는 있는 그 자리의 경험을 확장시키기 시작한다. 64
*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열어준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진실로 일별하거나 진리의 실제성을 본다면
더 많은 자각을 얻게 된다.
그 말은, 더 많은 빛이 비추어질 때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본다는 뜻이다.
그 빛은 자각의 빛을 말한다. 66
*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어떤 경험이든 우리는 그 경험의 사실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존재하기를 사랑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사랑해야 한다.
있는 그 자리를 알지 못하면 거기에 존재할 수 없다. 69
*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경험을 더욱 더 많이
자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경험을 많이 자각할수록 그 자각은 더욱더 역동적이 되어
그 경험의 의미를 더 많이 드러내준다. 71
* 우리의 마음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참본성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대단히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애씀을 완벽하게 멈추라.
자신의 경험에서 손을 떼라. 80
* 참본성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참본성은 스스로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단지 그렇게 존재하는 방법이다. 81
* ‘감정(emotion)’이 단순히 ‘현재 상황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감정에는 보통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담겨 있다. 만일 우리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면, 감정은 과거와 함축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참본성이 항상 현존하긴 하지만, 참본성에서 감정적인 현실을 분리시키는 아주 얇은 장막 안에 진리를 가로막는 백 가지의 층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참본성을 깨닫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인 것이다. 103
* 참본성의 드러남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더 현실적이 될 수 있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더 친절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이란 일어나는 모든 일에 깨어 있고 현존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갖고 경험이 펼쳐지게 하며, 경험의 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 어느 순간 감정의 궁극적인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자각하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자각하고 현존하라”고 말했다. 자각과 현존은 사실은 둘이 아니지만, 내가 자각하라고만 말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것을 일반적인 자각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즉, 경험을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고,
대상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초연해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내가 “자각하고 현존하라”고 말할 때에는 “자각하는 것에 현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은 경험을 단지 알아차릴 뿐 아니라,
또한 그 경험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5
*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충동, 욕망 등의 형태로 현현되는
내면의 경험들은 우리의 일부로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면의 경험을 포함해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든 언제나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참본성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이 참본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한다. 107
* 우리가 에고의 입장, 자신의 스토리와 동일시하는 입장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바로 저항을 내포한다. 저항이 없는 에고란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저항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참본성에 대한 저항이다. 에고가 항상 어떤 것을 하려고 애쓰는
반면, 참본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참본성은 그냥 존재한다.
그래서 참본성은 있는 그대로이다. 참본성은 빛나는 현존이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이 에고의 본질이다. 단지 에고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본성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본성에 저항하지 않을 때, 그 즉시 우리는 본성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참본성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무한한
현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저항을 의미한다. 111
* 자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항하지 않고
그 모두를 껴안는다는 뜻이다.
저항이나 둔함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있는 그 자리이다. 119
* 수행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 실제로 존재하는 법을 모른다. 그냥 스위치를 탁 켜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본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수행할 방법을 얻게 된다. 120
* 위험이나 위협을 감지할 때, 혹은 그러한 것을 상상할 때,
우리는 자기보호를 위해 자신을 경직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신을 경직시키면
우리의 의식은 둔해지고 단단하게 굳어져버린다.
그래서 자신으로 존재하기의 섬세함과 부드러움,
친밀함을 경험할 수 없다. 131
* 에고는 엄청난 양의 과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에고는 그 경험을 정신적 방어를 통해서 무의식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 방어는 대부분 우리의 자각을 넘어서 있다. 133
* 인간의 영혼은 본성에 가 닿을 때 열린다.
그 열림 속에서 영혼은 상처받기 쉽다.
그러나 상처받기 쉽다는 것은 위험에 대해 단지 열려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134
* 경험을 탐구하고 인식하며,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배우는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방어 상태를 마주하고 점점 더 의식적으로 자각하게 된다.
그 방어는 무의식에 대한 장벽이기도 하지만,
또한 상당부분 우리 잠재력에 대한 장벽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과 자각의 확장에 대한 현존에 대한
그리고 실재로 존재하기에 대한 방어이기 때문이다. 138
* 방어는 우리 내면에 장벽들을 만듦으로써 의식이 딱딱해지고
둔해지게 한다.
우리가 그런 장벽들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변형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139
* 오직 경험 속에 현존하는 것, 특히 자신을 방어하려는
경향성에 자신을 열어둠으로써 우리는 실재로 존재하기에 대한
두려움에 맞설 수 있다.
방어를 더 많이 바라보고 이해할수록 우리는 방어벽 뒤에
숨어 있는 영혼의 부드럽고 친밀한 열림 안으로 더욱더 깊이 초대받는다. 144
* 현존하는 법을 배우는
초기단계에서는 경험과 탐구가 평범한 감각,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반응을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음 단계의 시작은 우리가 참본성의 표현으로서 현존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순간이다.
참본성은 여기 있음이라는 순수한 감각과 진실함, 존재,
본성의 결점 없음으로 표현된다.
셋째 단계에서 우리는 현존 안에서 여행한다.
그저 현존과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 현존이 중심무대로
옮겨온다.
그리고 현존은 모든 경험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장이 된다. 155
* 그래서 자비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비심은 모험정신을 가진
힘과 균형 잡혀야 한다. 그 정신은 미지의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는 일에 역동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힘과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미지의 어딘가를 향해 서슴없이
나아가려는 마음가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은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매순간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171
* 용기와 자비, 확신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출 수 있다면,
본질적인 힘과 친절함은 우리가 자신이 있는 곳에 존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한 특질을 가지고 열려있음으로써 우리는 주요경험과 함께 머물며,
내적인 공격성의 부차적인 반응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거기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173
* 우리는 아직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상호연결성,
즉 사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봄으로써 조화를
알 수 있다.
상호연결성이 의미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조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188
* 탐구에 있어서 이해 과정의 주요 부분은 경험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 사건들을 나란히 놓고 그것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189
* 비교하는 판단이 슈퍼에고에 의해 지배될 때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감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당신은 경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당신은 경험이 참으로 원초적인 조화의 반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 경험을 다른 쪽으로 밀어내버리려고 한다.
* 지금 나의 경험은 이 순간 우주가 나에게 주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나에게 백퍼센트 꼭 맞는 것이다.
만일 그 경험을 정말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나를 알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 195
* 경험을 감사하고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면,
내가 경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진리는 스스로 펼쳐져서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는,
의미 있는 조화를 드러내줄 것이다.
* 지금까지 말해온 것을 고려해볼 때,
당신은 판단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판단을 멈추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거기에 있는 판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196
* 식별능력이 에고의 욕구에 의해 비교하는 평가 혹은 판단으로
변질되면 그 능력은 위험해진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에게,
또 참으로 존재하고 자신으로 존재하는 능력에 치명적인 것이
된다. 203
*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거부하면 할수록, 당신은 자신을 더욱 더 조각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증오든 좌절이든, 사랑이든 자만심이든,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그것을 당신이 밀쳐버리거나 쓸어버리고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영혼을 찢는 엄청난 일이 된다. 당신이 비록 알지 못한다 해도, 당신에게 그러한 영향을 끼친다. 207
*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완전히 거기에 존재할 수 없다. 완전히 존재하고 현존할 수 없으면,
우리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으면 우리는 실제(實際)로 존재할 수 없다. 209
*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대부분 좋은 느낌의 뭔가에 집착하려고 하거나, 좋지 않은 느낌의 뭔가에 대해 다른
방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체념한 것이다. 215
* 참본성은 완벽한 고요이자 평화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곳에
존재한 다면,
경험 안에서 이 참본성이 자연스럽게 현현될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변화시키려는 내적인 행위들은 종종
참본성이 현현되는 것을 막는다. 225
* 자기 증오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그 증오와 함께 있으면서
아무런 판단 없이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알아차리고 이해해야 할 모든 것은 참본성의 지혜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233
*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상처주고 모욕하거나 좌절시켰다는 사실을 증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느낌들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
그 말은 우리가 실제로는 자신의 느낌을 증오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한 증오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일으킨 느낌을 증오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237
* 관념적인 앎은 항상 개념적인 무지가 된다.
심지어 우리가 진실한 무엇을 안다고 하더라도 침본성에 관한
뭔가를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개념화되고 정리되는 순간
참본성은 이미지가 된다. 264
*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의식이 자각의 장 전체를 가득 채워야
한다.
의식은 어떤 것이든 베일이나 필터 없이 경험해야 한다.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자각의 전체를 채우도록 허용해서 직접적이고 완벽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 일어나는 일의 경험은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앎에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265
* 경험에 대해 참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배운다면
우리는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게 된다.
역으로, 있는 그 자리에 참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경험에 대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274
* 축적된 지식이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장애물이 되는
두 번째로 주요한 것이다.
그런 일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경험을 조종하려고
애씀으로써 경험에 개입하는,
그래서 경험이 저절로, 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는
훨씬 더 미묘한 방식을 통해서 일어난다. 275
* 자기발견의 첫 단계에서 ‘여기에 존재하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 말은 내가 느끼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면서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공공연하게 애쓰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각하고 느끼고
인식하면서 그것과 싸우지 않는 것뿐이다. 283
* 자각과 현존을 가지고 경험을 관찰하는 것은 구상화를
구상화로서 드러냄으로써 거기에 도달한다.
우리의 신념이 구상화를 계속 유지한다.
우리는 거기에 매달리고 구상화들이 진짜라고 믿음으로써
구상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구상화들이 정신적 구조임을 인식하게 되면,
그것들은 투명해지고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 가능해진다. 289
* 매 순간 마음의 구조물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되지 않을 때,
또 마침내 직접성을 가지고 자신을 경험하고 자신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자신과 경험에 대해 내적으로 행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된다.
어떠한 내적 행위도 하지 않기 그리고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정확히 같은 것, 단지 여기에 존재하는 단순성이기 때문이다. 290
* 수행의 초기에는 직접성이 내적 경험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결국은 모든 경험이 직접적인 것이 된다.
뭔가를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바로 그 실체를 경험한다.
우리가 바로 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기가 오직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만 본래 모습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한다. 292
* 평범한 지식이 구상화라고 부르는 미묘한 정신작용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았다.
구상화는 어떤 경험, 지각, 인상이나 개념을 취한 다음,
그것을 대상화하고 저장해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경험을 바라보는 렌즈나 필터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경험이 이 마음의 활동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배웠다.
마음의 활동은 지각을 끊임없이 필터로 거르고 축적된 지식과
역사에 따라 경험을 형성하고 있다. 297
* 자신이 덫에 걸려있는 어떠한 구상화나 구조라도 동일시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에 동일시에 빠져 있을 때
더욱 쉽게 알아차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더욱 현존할수록, 그리고 현재의 순간을 더 많이 자각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안정되며 경험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자각이 강렬해짐에 따라 경험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 더욱더
쉬워진다. 315
* 스스로 존재하는 진실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빛의 존재다.
* 우리는 흐르는 상태에 있는 빛의 존재다.
부딪힘 없이 온전히 빛을 발하며, 온통 환하게 밝고 자유롭다.
참본성 안에서 우리는 무거움이 없고, 부피와 질량도 없다.
흐르는 빛이 충만함과 몸이라는 느낌을 가진다는 측면에서만
우리는 물질성을 가진다.
그렇지만 그 충만함, 그 물질성은 완벽하게 가볍고 부드럽다.
그것이 바로 자각의 본질이다. 323
* 빛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빛은 시간을 통과해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빛은 공간 속을 최대속도로 여행한다.
그것이 빛의 속도이다.그러면 시간에서의 빛의 속도는 어떨까?
제로이다.
즉, 공간 속에서의 속도는 빛의 속도이고,
빛의 속도가 최대속도이므로 시간 속에서의 속도는 제로이다. 326
* 빛의 바깥에서 활동하는 인간에게는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이 나이가 든다.
빛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빛은 특정한 속도로 공간을 여행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경험은 갖지 않는다.
빛은 늘 새롭지만 언제나 그대로다.
빛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빛은 언제나 자기의 본성 그대로이다. 328
*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시간과 시간 없는
현존 사이에 있는 교차점이다.
우리가 참본성을 만나는 유일한 곳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순간에 있다.
현재의 순간 속에 참본성이 시간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이다. 329
* 인간으로서 우리가 경함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면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실제이며 현재에 있는 것이 오직 지금뿐이라면
어떻게 내가 영향받을 수 있겠는가?
오직 지금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나의 경험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를 원할 때 마다
우리는 빛의 길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연결이 끊어진다.
빛은 오직 지금, 바로 이 순간만을 경험한다.
빛은 지금 있는 것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는
이 순간의 현재성임을 알고 있다.
비록 당신이 이것을 논리적으로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지금 말고는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 나머지는 전부 마음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음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당신은 과거와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330
* 우리의 시간적인 경향성이 참본성에서 우리를 분리시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 경향성이 참본성의 현재성과 무시간성에 상충되기 때문이다. 334
* 시간의 축은 마음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마음은 늘 과거의 것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은 좀처럼 지금 이 순간에 안착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마음은 고요해질 것이다. 335
* 과거에서 오는 영향이 또 계속해서 우리를 향하게 만든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과거로부터 떠오른다면 우리는 미래에는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하려는 욕망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서 자신을 분리시킨다.
우리는 지금을 놓치는 것이다.
지금을 놓칠 때 우리는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의 실제인 자신의 현재성, 실제성과 여기 있음을 놓치게 된다. 336
*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는 단지 그 순간의 경험의 내용들을
자각하는 것 보다 더욱 심오한 경험이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 내용이 지금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것은 자각과 함께 시작된다.
그래서 이 순간의 내용들을, 즉 이 순가에 일어나는
몸의 속성, 느낌, 생각들을 우리는 자각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일치될수록 이 순간에 더욱더 현존하게 되며, 시간은 더 느려지게 된다. 337
* 멀리 떨어진 별에서 오는 빛이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즉, 빛의 여행에는 시간의 경과가 개입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빛을 볼 때 그것은 수십억 년 전에 있었던 빛과 동일한 빛이다.
빛은 늘 지금이다.
그리고 그 현재성에서 우리는 원하는 만큼 온전히 완벽하게
과거를 경험할수 있으며 진실로 그것을 다룰 수 있다. 339
* 경험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지향성에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런 경향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동일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밀쳐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이렇게 인식할 수 있다.
나의 진실한 모습은 빛의 존재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마주하는 모든 장애물들에 걸리지 않는다.
그것들을 피하거나 거부하거나 밀쳐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빛의 존재에게는 그 장애물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41
* 있는 그 자리에 머물기를 말할 때 그것은 정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 자리가 끊임없이 변형될 때, 그 변화와 함께
편안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350
* 저항과 싸우거나 변화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이 변하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그 집착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할 전부이다.
왜냐하며 경험은 스스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352
* 내면의 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형이 깊어지는 지점이 찾아온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게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일이
낯설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황스러울수 있으나 또한 해방감을 준다
우리는 과거의 느낌과 행위, 행동방식이 확장된 모습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55
* 우리가 참본성일 때, 다음 순간이 같은 것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된다.
우리는 다음 순간이 동일한 것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완전히 무관심해진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새로운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매 순간 빛의 유희 속에 빛나는 형상들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역동적인 흐름, 자유로운 현존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참자유이다. 367
* 경험이 늘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행해가는 동안
어느 시점에서 의식이 끊임없이 변화와 변형으로서 자신을
현현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의식은 하나의 느낌, 생각 혹은 반응에서
다른 것으로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간다. 373
* 첫 단계에서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기는 그 자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단계, 즉 현존과 함께하는 여정으로 나아 갈때,
현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의미가 된다.
셋째 단계에 도달할 때, 현존은 계속해서 경험의 의미가 되지만,
이제는 다른 모든 것이 그 현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376
* 있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수행을 진실로 행한다면,
우리 각자에게는 늘 의미의 지속성이 있다.
이 의미의 지속성을 나는 개인적인 인연의 끈이라 부른다.
우주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우주 자체가 흐르고 움직이며 변화한다.
그리고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
모든 이들 역시 움직이며 변화한다.
그렇게 공유하는 현실 안에서 각자는 있는 그 자리의 견지에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인연의 끈이다. 378
* 개인적인 탐구를 통해서 그 틈을 채워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모름의 시간, 비어 있음과 공백의 시간도 의미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어 있음과 공백 안으로 탐구해 들어갈 때 어느 지점에서
그것은 의미를 찾게 되고, 우리가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끈이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부분이 잠시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384
* 우리가 순수자각으로 바라보면,
그 대상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새롭고 신선하다.
모든 사물이 빛나 보이고 이제 막 태어나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투명하며 가볍고 청량하다.
대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다.
마음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은 앎과 함께 나타난다.
마음이 없을 때는 그저 순수자각만이 존재하는 앎의 이전 상태이다. 402
* 식별하는 능력이 발달하는 과정 중에 인지능력은 스스로 자기의 한계에까지 자신을 몰고 간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내적 작업이 하는 일이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실재 자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한계에까지 식별능력을 끌고 가는 것. 인지능력은 알고, 알고 또 알다가 마침내 더이상 알 수 없는 실재에 닿기 시작한다. 인지능력이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인지능력이 발달하지 않아서도, 혹은 뭔가 잘못돼서도 아니며, 뭔가에 막혀 흐려져서도 아니고, 다만 지금 직면하고 있는 실재가 앎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앎을 초월해 있다. 그렇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마음은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마음은 오랫동안 그러기를 바라왔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은 탐구하는 힘든 작업을 해왔고 이제는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은 쉬고 싶어 한다. 마음은 자기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기를 원한다. 마음은 지금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도맡아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403
* 우리에게 오직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개념적인 마음뿐이라면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자각이 개념적인 마음을 넘어서 있고 우리가 바로
그 자각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우리가 늘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마음에 묶여있는 것뿐이다. 407
* 구상화, 비교하는 판단, 비난, 동일시, 집착 등은 궁극적으로
개념의 구상화에 근거하고 있다.
몸을 구상화할 때 우리는 몸 자체를 구상화하는 게 아니라
몸에 대한 개념을 구상화하는 것이다.
행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행위의 개념을 구상화한다.
우리가 구상화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의 이미지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그 자체를 구상화할 수 없다.
실재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다만 실재의 개념에 대해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09
* 명상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앉아 있다.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 실재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둘 뿐이다. 436
* 참본성은 스승이다.
가장 높은 궁극의 스승이다.
참본성은 언제나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참본성은 매 순간 가르치며, 모든 존재가 그의 학생이다.
매 순간의 경험이 참본성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443
*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리는 얼마나 잘 배우고 있는가?
잘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수행하고 배운다는 것은 삶의 매 순간을 통해 다가오는
가르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448
* 매 순간이 자신만의 본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배워나갈수록
우리가 매 순간이 어떻게 펼쳐지든 자신을 그 순간에
그저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
그러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자신이 있는 그곳임을 알게 된다. 455
* 자기 자신의 존재에 내재하는 가치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없다.
그 가치는 마음과 개념, 이상과 희망과 꿈을 넘어서 있다.
자각과 이해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 단순히 존재하는 것의소중함은
우리의 가슴을 만족감으로 채워준다.
우리는 자신의 본질인 우리의 본래 자리가 또한 삶 자체의
가장 실제적이고 소중한 본질임을 깨닫는다. 457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