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바다와 파도를 벗 삼아 길을 걷는다. 길 따라 조명이 병정들 사열하듯 줄지어 서서 어둠을 밝히고, 오가는 사람 적은 길 위에는 청명한 파도소리가 벗이 된다. 가을의 정한을 느끼기 좋은 이 길은 경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다.
걷기 길은 경주시 양남면의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 1.7km를 잇는다. 두 시작 지점 중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좋다. 길을 걸으면서 출렁다리와 부채꼴 주상절리, 조망타워, 몽돌해변, 기울거나 누워 있는 주상절리 등을 만날 수 있다.
낮에 바라본 경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바다 위로 솟은 주상절리
낮 동안 여행자의 발걸음에 시달린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에 노을마저 물러나면 짙은 어둠과 함께 고요함이 가득해진다. 도로 위의 자동차 소리, 관광객들의 수다 등 불규칙하게 섞여 있던 소음이 잦아들면 풀벌레 소리와 갈매기 우는 소리, 바람에 스쳐 하느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빈자리를 메운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두 귀에 꽂히는 소리는 길의 이름만큼이나 풍성하게 부서지는 파도의 인기척.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가 우윳빛 거품을 일으키며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언제 들어도 친근한 물소리 때문일까. 자장가처럼 익숙한 리듬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지니 하루 종일 복작거렸던 근심들이 어느새 작게 조각나 쓸려가는 파도를 따라 흩어진다.
낮에 바라본 경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밤에 걷는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의 하이라이트는 ‘주상절리’다.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지표면에 닿아 식는 과정에서 수축작용으로 균열을 일으켜 다각형 기둥 모양의 절리(나란한 결)를 만들어냈다. 용암이 식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주상절리의 모양과 크기가 결정된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부채처럼 펼쳐진 모양이 있는가 하면 마른 장작을 쌓아놓은 듯 가지런히 ‘누워 있는 주상절리’도 있고, 육각형 연필처럼 응고된 결정체들이 한껏 기운 ‘기울어진 주상절리’도 있다. 제주도의 주상절리만큼 웅장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모습이 밀집해 있어 주상절리 전시장이라고도 불린다.
누워 있는 주상절리 풍경
가을밤이 연분홍빛을 내며 저물고 있다.
‘부채꼴 주상절리’는 가장 눈에 띄는 할 명소다. 부채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이 장관이다. 한 송이 해국을 닮아 있어 ‘동해의 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부채꼴 모양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기에 학술적 의미는 물론 자연적인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독보적인 주상절리인 만큼 야간에도 관람할 수 있도록 유일하게 투광기가 설치되어 있다. 온몸으로 조명을 받아내는 돌기둥들이 검푸른 바다 사이, 본연의 선명한 회색빛을 띤다. 내리쬐는 햇볕에 모습을 감추었던 초록 이끼들도 얼굴을 내민다. 한자리에서 억겁의 밤을 보냈을 주상절리의 위엄이 더욱 경이롭게 비치는 순간이다.
부채꼴 주상절리
투광기가 주상절리를 비춰 밤에도 부채꼴 모양이 훤히 드러난다.
주상절리가 아름답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하기는 힘들다. 출렁다리, 조망타워, 몽동해변 등 여행자의 마음을 훔칠 만한 장소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자.
출렁다리는 읍천항에서 출발해 조금만 걸으면 맞닥뜨리게 된다. ‘흔들’이 아닌 ‘출렁’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길답게 다리 위에 서면 파도처럼 굽이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생각보다 역동적인 움직임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살짝 졸일 것이다. 흔들림에 익숙해졌다면 일정하게 들려오는 파도 가락에 맞춰 다리를 조금씩 흔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적이 드문 시간이기에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자유롭게 다리를 일렁이면 마치 두 발로 파도 위를 걷듯이 바다와 하나가 된 기분이다.
출렁다리 위에서 밤바다를 바라보는 여행객
누워 있는 주상절리
해안에선 가장 높게 솟은 주상절리 조망타워는 바다를 알록달록 물들여주는 친구다. 낮에는 해안 절경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밤에는 오색찬란한 조명을 밝혀주는 든든한 지킴이 역할을 한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여행자를 향해 어서 오라며 시시각각 색을 바꿔가며 미소로 반겨준다. 하늘에는 노란 별이, 길 위에는 화려한 조망타워가 빛나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은 밤바다다.
몽돌해변은 단조로울 수 있는 산책길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모나지 않고 둥근 모양의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여행자를 기다린다. 평평한 산책로에서 벗어나 동글동글한 자갈도 한번 밟아보자.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잘박거리며 굴러다니는 몽돌의 소리를 더욱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밤바람에 부대끼는 바다의 음색이 때에 따라 색깔과 모습을 달리하다니.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몽돌 사이사이로 너그러운 자연의 목소리가 섞이는 것이 새삼 신비롭다.
한 시간가량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안가를 걸었다면 경주에서의 길벗은 바다인 셈. 해가 저문 바다는 고요하여 자연이 내는 소리만이 도드라진다. 산책 후에도 귓전에 남은 해조음과 포말의 화음이 마치 꿈결 같다. 어둠 속 풍광이 뚜렷하진 않아도 철썩이던 물결 소리만은 선명했던 탓이겠다. 도심에서 가져온 걱정거리는 잠시 접어두고 한 풀 꺾인 더위만큼이나 여유로워진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그 길의 낭만에 흠뻑 젖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스름이 밀려오는 저녁 산책길을 걷는 두 여행객
여행 정보
✔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문의 : 054-779-6083 (경주시 관광컨벤션과)
✔ 숙소
✔ 주변 음식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