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에 옷고름이 날리면.
김가영
“골이 일을 해야 하지.”
돌과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한 톨의 자갈이 바위가 되고 산이 되어가는 걸 직접 본 사람의 음성으로. 세상이 부서지는 순간이 와도 변하지 않을 유일한 것은 그것뿐이라는 듯. 늘어진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그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을 마주 보기는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자주 조용해졌다. 이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듬어진 말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날것에 가까운 단어들의 낯선 조합은 이해하기 위해 문장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골이라, 골짜기의 그 골일까 등골의 그 골일까. 골이 일을 한다니 그럼 직업군 중의 하나인가. 흔들림 없는 그 시선과 달리 단어들의 알맞은 뜻을 찾기 위해 좌우로 방황하는 내 눈동자는 뒤로 넘어가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보기 직전이었다.
“골에 든 게 있어야 고생을 안 하지비.”
할머니가 겨울나무 같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골은 머리구나. 일하는 골은 생각을 하는 머리겠구나. 꼬인 매듭이 한 번에 풀리듯 그제야 문장들이 이해됐다. 지식이 있어야 고생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회오리치며 걸러낸 인생의 그릇에 남은 그 천금과 같은 말을.
우즈베키스탄의 뜨거운 오븐과 같은 건조한 여름은 늘 같았다. 하지만 그해, 외진 시골 마을을 지글거리게 한 것은 다가오는 밀레니엄 시대도, 더위도 아니었다. 열 손가락으로는 세지도 못할 만큼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아 그 지역에서는 나름 ‘인터내셔널 마하랴(마을)’ 라 불리던 그곳에 한국인들이 공장을 세우자, 마을은 그 어떤 해보다 뜨거운 여름을 맞았다. 서로 다른 외형을 가졌지만, 소련의 영향으로, 모두 러시아어로 소통하던 사람들 사이 우리는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들어본 적 없던 낯선 한국어가 들려오면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에 찬물이 튀어 오르듯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뜨거운 주목도 계절의 뒤를 따라 서서히 식어갔고, 들이쉴 때마다 폐까지 닿던 열기가 손끝을 쩍쩍 가르는 냉기가 되는 동안 한국에서 온 우리 가족도 마을 사람이 되었다.
여느 날처럼 분주하게 여공들과 양파망 미싱을 돌리던 어머니를 경비는 난감한 표정으로 불렀다. 그는 여러 표정과 손짓을 써가며 누군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를 따라간 공장 입구 앞에는 처음 보는 노부부가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남이 아니라는 걸 어머니도 그분들도 본능처럼 느꼈다.
“조선 사람이 왔다고 들어 만나러 왔소.”
어두운색의 코트와 러시아식 털모자, 품이 큰 가죽점퍼와 턱밑에 곱게 묶은 머릿수건. 그들의 차림새는 구소련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표정과 미소는 한국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키가 큰 할아버지와 그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할머니는 차례대로 악수를 청했다.
“니콜라이라고 하오. 여기는 내 안까이(부인) 루드밀라오. 우리는 고려사람이오.”
고려 사람이라 말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억양이 강한 낯선 사투리는 알아듣기 쉽지 않았지만 분명 한국어였다. 딸이 사는 독일에서 여름을 보낸 노부부는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을 두 계절이나 늦게 알게 됐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그 소리에 여독도 풀지 않은 채 곧장 공장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절로 피어나는 반가움에 어머니도 그 손을 맞잡았다.
“여기서 고향 분을 만나네요.”
고향. 그 단어에 주물 같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청년으로 떠났던 그곳을 인생의 빛이 하얗게 바래서야 듣게 된 것이었다. 행여나 세월에 잊힐까 바늘로 자신 피부를 새겨 넣었던 그 고향. 할아버지의 팔에는 꿈에서도 잊어서는 안 될 그 단어가 적혀 있었다.
니콜라이 고리키. 류드밀라 바실리에브나.
마을 사람들은 두 분의 이름을 부를 때면 꼭 부칭을 붙였다. 긴 이름은 입 밖으로 낼 때마다 혀가 꼬이지 않게 발음을 조심해야 했지만, 그 수고로움을 자처한 것은 존중의 의미였다. 특히 중년의 나이대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아저씨들은 고개를 숙이며 모자를 벗었고, 아주머니들은 건강을 물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들이 모두 제자들이라는걸. 그리고 우리가 쉽게 마을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까레야(한국)를 신뢰와 성실함으로 새겨주신 분들의 덕분이라는걸.
중앙아시아에 터를 잡은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그렇듯, 니콜라이 할아버지도 어느 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하셨다. 억지로 몸이 실린 화물 열차는 끝도 없는 철로 위로 검은 숨을 내뿜었고 기차가 마침내 몸을 풀었을 때, 그들은 황무지 땅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보다 적은 사람이 내렸지만 아무도 머릿수를 새지 않았다. 그저 땅의 힘을 향한 믿음으로, 맨손으로 흙을 팠다. 호주머니에 숨긴 낱알들을 심고, 밤이면 토굴에 몸을 뉘며 그들은 살아갔다. 살아내었다. 20살도 되지 않았던 니콜라이는 살아서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던 굴속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어머니의 말씀을 되뇌었다. ‘골에 든 게 있어야 고생을 안 하지’. 그는 그 문장을 씨앗 대신 뿌렸다. 아이들에게 또 그 부모들에게 말하고 또 하며 지식의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던 그는 뜻이 같은 아내 루드밀라와 더 많은 아이에게 나은 미래를 가지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은 맨손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할아버지는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내보였다. 부끄러울 것들을 잡은 적 없는 거친 빈손은 자부심이었고 금붙이 대신 자리한 굳은살은 그의 이정표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의 출발점이 있었다. 원하지 않은 기찻길에 몸을 실었을 때, 그 덜컹거리는 철로 위로 구멍 난 자루처럼 삶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속이복 안에 마지막 희망 하나씩은 품은 채 땅을 밟았다. 씨앗 한 줌, 닳아진 사진 한 장에 생을 걸었다. 어린 니콜라이는 숯을 바른 자신의 팔에 바늘로 살을 찌르며 글자를 새겼다. (김해 김씨). 손에 잡히지도 배를 불릴 수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하는 건 그것 하나였다. 조상이 물려주었고 이제는 자신이 기어코 살아내어 자식에게 물려주게 될 그 뿌리.
사다리를 세우고 포도나무에 오른 니콜라이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여전히 곧아 그의 아들 비탈릭 아저씨와 큰 차이가 없었다. 선생님으로 한평생을 보냈지만, 펜보다 농기구를 잡는 날이 많았다는 손에는 길 잃은 어린 가지가 들렸다. 겨울을 보낸 포도나무에는 더듬이 같은 새 가지가 돋아나더니 기름칠을 한 듯 윤이 나는 손바닥 모양 잎사귀들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제법대로 자라나는 얇은 가지들을 울타리에 묶어 방향을 잡아주었고 비탈릭 아저씨는 우거진 가지를 잘라내며 정리했다.
“조카, 차이 먹자.” 굽은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류드밀라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자, 어머니가 넘치는 물이라도 본 듯 서둘러 일어나 차 쟁반을 받았다. 할머니는 손잡이 없는 우즈벡식 찻잔에 차를 따르시더니 다시 그 차를 주전자에 돌려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할 때마다 더 진한 색의 차가 채워졌다. 툭. 할아버지가 가지를 잘라내자 길이 트인 볕이 찻잔에 뛰어들었다. 갈색 홍차가 맑은 체리 빛으로 물들었다. 한겨울의 첫 만남 이후 두 가족은 마치 잃어버린 친지를 다시 만난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건 일부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의 성이 김해 김씨라는 걸 알게 된 그날 니콜라이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조카로 삼으셨다. 타향살이에 가장 든든한 이는 내가 가는 길을 이미 앞서 걸어 내고 ‘나도 그 길 다 지나왔지’ 하며 공감해 주는 사람이었다. 존재도 모르던 숙부와 조카는 서로의 힘듦에 고개를 끄덕여 주며 접시에 채운 음식으로 서로의 정을 표현하는 가족이 되었다.
“저번에 조카가 준 고추자이, 참 잘 먹었지. 비탈릭은 그거 발라 아침마다 부항까 (빵) 반쪽씩 먹었소.”
“고추장을 빵에 발라 드세요?” 그 맛이 입에 돌았는지 어머니는 서둘러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부항까랑 싸씨스끼(소세지) 삶아 같이 먹지. 케첩처럼. 아침에는 우즈벡식으로 차이랑 빵 먹지비. 그래도 밥이를 먹어야 하니 세끼 중 한번은 밥이랑 국장이 (된장국) 먹지.”
“국장이에 밥이를 먹어야 고려사람이지.” 어느새 사다리에서 내려오신 할아버지가 반쯤 빈 엄마의 찻잔에 홍차를 채우셨다. 다시 김이 오르는 찻잔을 향해 후, 숨을 날리려는데 무언가 볼에 닿았다. 아직 따뜻한 달걀이었다.
“새닭이 올해 처음 낳은 알이야. 새로운 세대의 시작이지.” 비탈릭 아저씨가 러시아어로 말했다. 아저씨는 어린 날 보며 웃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전혀 다른 곳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할머니는 그가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이라 했다. 아저씨가 정말 나를 보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시선의 각도에 익숙해졌다. 아저씨는 오히려 자신은 남들이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은 볼 수 있다고 했다.
“비탈릭. 술잔 좀 가져와 봐. 거실 장에 작은 잔으로.”
할아버지는 어느새 창고에서 직접 담근 포도주병을 꺼내 먼지를 쓸어내고 있었다. 비탈리 아저씨를 따라 여닫힐 때마다 높은음으로 투덜대는 문을 지나자 거실이 나왔다. 지난겨울 할머니는 이 거실에 러시아 보드카와 고려식 음식을 올린 상을 차려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셨다. 가장 넓은 벽에는 투박한 카펫이 대작처럼 걸려있었다. 벽에 스미는 냉기와 열기를 막아낸 카펫은 오래 살아낸 모든 존재가 그렇듯 희끗희끗한 세월을 들어내고 있었다. 어두운 바탕과 밝은 문양은 공평하게 색을 잃고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그죽죽한 벽의 한복판에 전에 본 적 없던 빛이 걸려있었다. 붉은 흙 사막에 자리 잡은 호수처럼 거친 카펫 위에서 물의 표면을 닮은 푸른빛이 하늘거렸다. 옥색 한복이었다. 나무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몸을 실은 옷고름이 멀리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건 할머니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옷이었다.
“우리 고려사람 마지막 길 갈 때 가장 좋은 한복이 입지. 까레야에서도 같지?”
어머니는 또 말을 잃으셨다. 이번에는 알아듣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한참 한복을 바라보다 한국의 수의에 대해 설명했다. 할머니는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으셨다.
“색 없는 옷 입고 가면 되겠소? 저 가면 다들 만날 건데, 고운 색 한복 입어야지.”
할머니는 귀한 그 옷을 미리 준비해 두시고 계절마다 꺼내어 어루만지셨다. 꿈 많던 여학생은 인생 고개를 등 뒤에 짊어진 노인이 되었지만, 그 생에 미련이 없기에 그녀는 다가올 긴 여행을 소란 없이 준비 중이었다. 주름진 손으로 구김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할머니는 그 시절의 소녀가 되었고 옷고름은 여정의 방향으로 날렸다.
모래가 부서지며 만들어진다면 이 벌판은 얼마나 큰 바위였단 말인가. 그 덧없음에 압도될 새도 없이 그들은 서둘러 흙을 쥐었다. 모래를 퍼 올리는 사이에 눈이 녹았다. 땀이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아이의 울음에 힘이 들어갔다. 물의 흐름은 강이 되어 찢어진 손금을 채웠다. 손톱 밑 흙은 돌이 되었다. 이글거리는 볕이 그늘이 되어 목덜미를 덮었을 때, 뒤돌아본 그곳에는 어느새 산이 있었다. 그렇게 한 톨의 모래는 바위가 되고 산이 되었다. 훌쩍 자란 아이의 그림자가 정상에 닿자, 그늘은 나무가 되어 푸르러졌다. 그는 그릇 안에 산을 한 줌 담았다. 두 손으로 잡고 돌리자 넘치기 위해 채워진 그릇에 회오리가 일었다. 가장 먼저 젊음이 벽을 넘어갔다. 이어서 시선들과 소음들이 따랐다. 거의 비워진 그릇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용기와 인내에 파묻힌 몇 개의 사금이 남았다. 손가락 위에 올려 건져 내기만 하면 될 그것을 그는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다음 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린 산을 위해. 손을 탈탈 털어내자, 팔뚝에 글자들이 먼지로 흩어졌다. 소매를 잠그고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보였다. 형형색색 천들의 물결이. 고결한 그 몸짓이, 잊지 못할 빛이 눈에 들어왔다. 옥색 옷고름이 볕 아래 주름 하나 없이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