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5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루카 14,15-24
본당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는 가장 완전한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이 누구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돈에,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 집착하여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라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집사람들과 친척들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길과 골목’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한길과 골목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이번에는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라고 명령합니다.
점점 더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집 안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큰길로 나아가 그들을 데려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가난한 이들이야 부족한 게 많아서 잔칫상에 쉽게 나오겠지만,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냉담자 회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선교, 그다음은 길거리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가두선교의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께서 그 본당에 충만히 활동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이 가두선교입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자에게 그만큼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모세에게는 엄청난 성령의 힘을 지팡이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지팡이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바다도 갈랐습니다.
그 힘을 통해 한 것은 무엇일까요? 서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갈라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따르지 않으면 만나도 먹지 못하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불만도 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과 계약을 이루어 계약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런 의도를 가져야 합니다.
매일 강론하는 이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아니면 평일 강론은 안 하고 주일 강론도 그냥 자기 생각만 말하는 사제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우리 의도가 중요합니다.
본당이 결국엔 밖으로 나아가 선교하겠다는 열정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명에 맞는 성령은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러한 본당에 어떤 일을 이루실까요? 대구교구 이판석 신부님은 지산성당에 있을 때 가두선교를 통해 7년간(1995~2002) 3,2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당이 하나 분가될 수 있었습니다.
2007년엔 서울 성내동 성당에서는 60일간 가두선교를 하여 5,000명에게 안내 책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1,600명에게 자기소개서를 받았고 그중에서 400명이 입교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중 3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큰 희생과 용기가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이 성당에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본당의 일치입니다.
일치된 본당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 집을 어떻게 해서든 가득 차게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성령으로 본당이 일치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5일 [연중 제31주 화요일]
복음: 루카 14,15-24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사이클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측의 거부, 하느님의 진노, 이스라엘의 회개,
그러나 또 다른 배신과 타락, 그리고 우상 숭배,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 또 다시 이어지는 하느님의 초대, 그러나 은혜로운 초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하느님 나라의 큰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또 다시 그 중요한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밭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땅이 하늘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을 몇 푼 안 되는 부동산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근에 산 겨릿소 다섯쌍을 부려봐야 된답니다.
보아하니 일 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일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나 영혼의 양식, 영원한 생명마저도 뒷전입니다.
과도한 일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습니다.
그의 온 정신과 마음은 오로지 인간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본능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가장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1. 5. 화)(루카 14,15-24)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먹이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하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16ㄴ-24).”
1) ‘혼인 잔치의 비유’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비교이기도 하고, ‘영원한 것’과 ‘허무한 것’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들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구원이냐? 멸망이냐? 사느냐?
죽느냐?’ 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일만 신경 쓰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의 가르침도 같습니다.
‘잔치’ 라는 말 때문에 긴박감을 못 느낄 수도 있는데, 그 잔치가 시작되는 날은, 사실은 재림과 심판 날입니다.
곧 닥칠 심판을 대비하지는 않고, 밭을 보러 가거나 소를 부려 보려고 가는 것 등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장가를 드는 것’ 자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혼의 행복감에 빠져서, 다가오는 심판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2) 그런데 종말, 재림, 심판 같은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 승천 후에 너무 긴 세월이 흘러서 그런 것인지, 긴박감을 느끼거나 긴장하기는커녕 ‘늘 듣는 상투적인 말’ 정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허무한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신앙생활은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신경 쓰면서 산다면, 허무한 것들이 정말로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들과 함께 허망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 생명을 얻기만을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게 됩니다.
3) 이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 나중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면,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초대받아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에 신앙생활을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4)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참석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서 강제로 참석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성체를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성체를 먹이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붙잡혀서 끌려가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잔치는 스스로 희망하고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참석하는 잔치이고, 그 잔치의 음식은 먹고 싶어 하는 사람만 먹게 되는 음식입니다.
따라서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먹기 싫다면서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 잔치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일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 음식을 못 먹는 것은 주님께서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안 먹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이,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 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그 심정과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쪽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것도 전적으로 인간들의 몫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