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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께서 유언하기를,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 겸손히 사양하는 뜻이 아니라 도리가 이와 같아야 할 뿐이다. 이른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은 실로 엄자릉(嚴子陵.엄광)의 간의대부(諫議大夫)와 같다. 엄자릉의 간의대부와 같은 것은 결코 신주에 적을 수가 없다. 신주에 적을 수 없다면 예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본래 그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다.” 하였다. 대저 기축년(1709, 숙종35) 정월에 우의정으로 임명된 후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한 것인데, 뼈에 사무치게 간절하여 사람을 감동시켰다.
또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내 심정이 어떠한지와 무관하게 관직이 수차례 더해진 뒤에는 곧 앞길을 그쳐야 함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더구나 벼슬을 그만둘 나이를 넘어서 지위가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아이들과 심부름꾼들도 결코 이치에 없는 일임을 알고 있는데, 온 나라가 모두 하나의 연극판을 만들어 억지로 뜻밖의 말을 하고 억지로 뜻밖의 일을 만들어 내어 40여 년 사이에 사람을 뜻밖의 곳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나의 처절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도 함께 뜻밖으로 돌아가므로 살아서는 허위(虛僞)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 한 시대에 허위의 풍조를 빚어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 하였다. 간곡한 훈계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때때로 느끼고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려온다.
아, 40여 년의 허위이니 참으로 지루하다고 말할 만하다. 나처럼 편협한 사람은 결코 인내하며 지나칠 수 없고, 결코 관례대로 사직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먼저 조정에서 명한 관작에 옳음도 없고 이치도 없음을 밝힌 뒤에 전후로 받든 교지(敎旨)를 반납해야만 마음이 편안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결코 그만두는 것만으로 용납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공경히 소명(召命)에 달려가서 분수대로 힘을 다하여 천거를 받아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자처한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행하기 위함이요 의롭지 않은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도리를 알게 하려는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산림(山林)’으로 지목하고 소지(召旨)가 내려와도 늘 이런 명분으로 전교(傳敎)하였다. 대개 지금은 그로 인해 ‘사환(仕宦)’이라는 별도의 길이 만들어졌고 또 사람들이 함께 이 길을 따르게 되었다.
아, 40여 년 동안 빚어 만든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허위로 그 창자와 위를 바꾸고 허위로 그 눈을 현혹시켰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정사년(1737, 영조13) 겨울에 강관(講官)의 소명을 사양할 때에 허위의 풍조에 관한 설명을 덧붙여 개진하였고, 인하여 내가 천거를 받아 벼슬에 종사한 전말을 낱낱이 진술하였다. 대개 ‘산림’이라는 전교를 받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 소장을 벼슬을 구하는 소장으로 여긴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이른바 귀머거리에게 고성을 지르는 격이니 도리어 우습다.
● 대개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천위(天位.하늘이 준 지위)에 있으면서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것은 천공(天工.하늘의 조화)을 대신하는 실제적인 일이 아님이 없으니 구차하게 관직이나 작위의 칭호로 그 몸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아야할 뿐이다. 선비가 벼슬하는 것은 농부가 밭갈이하는 것과 같아 각각 그 직분을 마땅히 해야 할 뿐이니, 선비가 어찌 벼슬하지 않을 의리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 벼슬하지 않으면서 헛되이 관직이나 작위의 칭호를 받아 영광으로 여기겠는가. 다만 시대의 치란(治亂)이 같지 않고 사람의 기품(氣稟)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혹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하(虞夏.순과 우 임금)의 시대에 이른바 소보(巢父)ㆍ허유(許由)ㆍ변수(卞隨)ㆍ무광(務光)과 같은 사람들이 곧 세상에서 이른바 ‘벼슬하지 않은 사람’인데, 사마자장(司馬子長.사마천)이 열전을 지을 때에 “육예(六藝)의 글에 조금도 보이지 않아 고증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이후로는 춘추 시대에 신문(晨門)ㆍ하괴(荷蕢), 하조(荷篠)ㆍ우경(耦耕)과 같은 부류가 모두 난세에 처하여 세상을 피해 멀리 떠난 사람들인데, 공자는 오히려 “자기 몸만 깨끗하게 하다가 큰 윤리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다. 한나라의 엄자릉(嚴子陵.엄광)과 주당(周黨), 송나라의 진희이(陳希夷)와 같은 사람도 벼슬과 녹봉을 하찮게 여긴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귀를 찾아 남에게 굽히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빈천하더라도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뜻대로 살고 싶어 하였다. 이는 단지 세상이 쇠퇴해졌다는 뜻인데 또 송나라 유겹(劉韐)의 아들 자휘(子翬)는 별도로 지키는 사적인 의리가 있다. 대저 이는 광무제(光武帝)가 “또한 각각 뜻을 지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선비들이 어찌 까닭 없이 한 세상에서 요행히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종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작록(爵祿)을 영광으로 여기는 일을 즐겨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몸을 굽혀 신하 노릇을 할 수 없다면 또한 작록을 영광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인정은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이니 저들도 어찌 작록이 영광됨을 모르겠는가. 다만 기꺼이 하늘의 조화를 대신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지 않고 헛되이 실속이 없는 관직이나 작위의 칭호를 받는다면, 온 세상을 속일 수 없으니 비록 관직을 무릅쓰고 영광을 누리고 싶겠지만 사람들이 장차 뭐라고 말하겠는가. 몸소 쟁기와 따비를 잡아보지 않고서 농부로 칭하고 손수 북과 바디를 조종해 보지 않고서 직녀(織女)로 자처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엄자릉은 이미 부춘산(富春山)으로 돌아간 뒤에 결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자처하지 않았고, 이미 죽은 뒤에도 간의대부로 명정을 쓰거나 신주에 적지 않았다. 엄자릉의 한 몸은 광무제의 배에 발을 올려놓던 날 순식간에 조정에 있었으니, 세상에 어찌 부춘산 중에 간의대부가 있었겠는가.
함장(函丈.스승 윤증)은 일생동안 유봉산(酉峯山) 아래를 떠나지 않았으니, 또 어찌 유봉산 아래의 우의정이 있겠는가. 스승은 평소에 수재(守宰)들이 안부를 묻고 선물을 줄 때 조금이라도 관청의 물건과 관련이 있으면 반드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작은 것을 이와 같이 하였다면 큰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스승의 우의정은 참으로 천지 고금에 없었던 허위다. 내 생각으로는 바로 우의정에 임명된 뒤에 나에게 하신 말씀이 분명히 사직 상소 속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전하의 개석(開釋.무고하게 죄를 받은 신하의 죄를 풀어줌)을 받았을 것이다. 대저 이 의리는 반드시 우의정에 제수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당초에 관직이 몇 차례 더해진 뒤에는 결코 관례대로 사직 소장을 올리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미 벼슬을 그만둘 시한이 지났다면 더욱 머뭇거리며 기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허위는 본래 알기 어렵지 않으니 한마디 말로 논파하기를 해와 별처럼 밝게 하여 아래로는 사사로운 의리로 굽혔던 것을 펴고 위로는 군주의 의혹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온 세상의 허위의 관습을 크게 바로잡았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스승의 사직 상소에서 “궁벽한 골짜기를 나오지 않고 전전하다가 요행히 성은을 무릅쓰고 정승 자리에 올랐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분명히 설명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 “신은 전하께서 어찌 시험해 보지도 않은 쓸모없는 천신(賤臣)을 취하여 지나치게 은총을 내리기를 한결같이 이처럼 하시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면, 으레 겸손한 사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야에서 발탁하여 낭묘(廊廟.의정부)에 등용하니 삼대(三代) 이후로 없었던 일입니다. ……”라고 하니, 그 말은 마치 “전하께서 삼대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자 하지만 신은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듯하다. 이는 허위의 물정을 형용하는 것이므로 도리어 헐후(歇後)한 듯하지만 이처럼 저항만 한다면 결국 언제 수습하겠는가.
감히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상소를 빗대어 정해보기를 “신이 삼가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 여섯 개로 천지사방을 향해 쏜다. 천지사방은 남자가 일을 삼아야 할 곳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일을 삼아야 할 곳에 뜻을 둔 뒤에 감히 젖을 먹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논밭 사이에서 일어나 몸소 보필(輔弼)을 맡은 사람이 자연히 있게 되었으니, 이윤(伊尹)ㆍ태공(太公)과 같은 사람이 이들입니다. 그 나머지도 모두 수시로 운을 타고 힘을 다해 직위에 나아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뒤에 그만두었으니, 이것이 곧 고금에 공통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强仕)의 나이(40세를 말함)로부터 해년마다 사직을 일삼는다면 한평생의 나이인 40여 년을 다 보내고 그가 여든이 된 뒤 비로소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 관직을 받을 때부터 관직마다 사양하고 받지 않은 것이 한 나라의 관작 중에 20여 개의 관직이 됩니다. 의정부에 들어가 우의정(右議政)이 된 뒤에 비로소 일어나 왕명에 응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고금에도 없는 일입니다. 낯짝이 부끄러운 허위만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사욕과 의리의 유무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허위의 일은 사람들이 목격할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온 세상이 이것을 하나의 큰 일로 여기고 있는데 조정에서 특별히 천직(天職) 한 자리를 비워두고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신하에게 헛된 호칭을 준다면, 몸은 궁벽한 골짜기에 숨고 발은 작은 샛문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조정에서 헛된 호칭을 얻어 순서에 따라 해마다 임명되고 전직되어 날로 높은 지위로 향하고, 관작과 품계를 따라 점차 높아진다고 칭송하여 마을의 영광이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웃음을 사는 허위입니다. 만일 앉아서 군부(君父)의 은총을 욕되게 한다면 더욱 놀라운 허위가 될 것입니다. 엄중한 윤음(綸音)이 한 번 오고 가다가 언제나 허위로 돌아가고, 곁에서 모시는 높은 신하도 이미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또한 허위로 돌아가니, 해년마다 허위요 날마다 허위여서 4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허위만 일을 삼았습니다. 조정의 천위(天位)를 우러러보면 40여 년이나 오래도록 비어있어 천공(天工)과 천직(天職)은 주관할 사람이 없이 날마다 허위로 오고 가기에 바쁠 것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음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답하는 것보다 빠르며, 조정은 사방에서 향하여 바라보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유학을 숭상하고 도리를 중시함이 이와 같다고 말하고, 또 유자(儒者)가 자처하는 도리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보고 듣는 일에 익숙해져 당연하게 여김으로써 허위로 이루어진 풍조는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습니다. 이에 조정의 천위와 천직은 공연히 유학을 숭상하고 도리를 중시하는 바탕이 되고, 유자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좋은 벼슬을 얻기 위한 미끼가 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연히 황보희지(皇甫希之)처럼 충은(充隱)하는 모양새를 짓습니다. 그러나 황보희지의 충은은 위초(僞楚)의 몇 년 간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을 뿐입니다. 오늘날 신(臣)의 충은은 전하께서 융숭히 장려하였으나 4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신의 일로 사람들이 모두 그 귀와 눈을 바꾸고 그 창자와 위를 바꾸어 은둔을 배우고 익혀 도처마다 무리를 이루어 천고에 없던 색다른 풍속을 만들어냈습니다. 옛사람이 하안(何晏)과 등양(鄧颺)의 죄를 걸주(桀紂)보다 지나치게 논하면서 ‘자신을 망친 죄악은 작고 대중을 미혹시킨 해악은 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논한다면 신의 죄가 황보희지보다 많음은 또한 분명합니다. 신은 일찍이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고 아래로는 마음에 부끄러웠으며 밖으로는 사람에게 부끄러웠습니다. 밤낮으로 부끄러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완고하게 미혹되어 시일만 끌었습니다. 신은 스스로 한탄하건대, 살아서는 허위의 사람이 되어 온 세상에 허위의 풍조를 빚어내었고, 죽어서도 장차 허위의 귀신이 되어 영영 구천(九泉)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면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의 부모이시니 애처롭고 가엾게 여겨주소서. ……”라고 한 뒤에, 아들과 손자를 시켜 받은 교지를 반납하도록 했다면 전하께서 어찌 환하게 깨닫지 않았겠는가. 아, 스승께서 이 점에 대해 우연히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일까. 평소에 이런 뜻으로 스승께 질문하지 못했으니, 뒤늦게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 무오년(1738, 영조14) 봄에 민사상 옥(閔士相鈺)이 찾아와 내가 저술한 〈복수의(復讎議)〉를 구해보고 나서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갔다. 기미년(1739) 봄에 또 찾아와 〈복수의〉를 되돌려주고 또 이 〈조포혜소사왕복후설(趙苞嵇紹事往復後說)〉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갔는데,
“서울에 있으면서 조진빈(趙震彬)과 상종하였습니다. 조우(趙友)가 말하기를 ‘내가 명재(明齋.윤증)의 문집 중에서 존장(尊丈)이 말한 이기(理氣) 관련 문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좋아했는데, 〈복수의〉를 보고나니 또 좋네. 이 〈조포사(趙苞事)〉는 우리들이 또한 일찍이 강설했던 것이네.’ 하며 조우가 기필코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갔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올해 3월 11일에 또 찾아와서 〈조포사왕복후설〉을 소매 속에서 꺼내 돌려주었다. 내가 말하기를,
“저번께 그대가 〈복수의〉를 되돌려줄 때에 조우가 좋아하더라고 범범하게 말하였는데, 그대에게 그 말의 상세한 내용을 묻지 못하였네. 조우는 과연 뭐라 말하였는가?” 하니, 사상(士相)이 말하기를,
“조우는 의리가 통창(通暢)하여 지적하여 논의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고, 이 〈조포사〉 문자도 통창하여 논의할 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문자가 너무 많아 《명재집(明齋集)》에서 이기(理氣) 문자를 간명하게 설명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우는 또 이 두 건의 문자는 다 좋은데 상소문은 어떻든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 맹자가 말하기를 “그 예절을 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음악을 들으면 그 덕을 알 수 있다. 백세 뒤에 가서 역대 제왕을 평가해 본다면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들이 평소에 벗들과 주고받는 문자가 곧 왕 노릇할 자의 예악(禮樂)이니, 훗날의 독자는 또한 이 글에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 〈단궁 상(檀弓上)〉편에서 현자 쇄(縣子瑣)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옛날에는 강복(降服)을 하지 않고 상하가 각각 그 친속(親屬)의 등위에 따라 복(服)을 입는다.……” 하였다.
주소(注疏)에서 운운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이상에서는 대체로 친족을 친히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뜻만 있었으나, 주(周)나라에 이르러 또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많은 예절이 더해져, 처음 봉해진 군주는 아버지의 형제와 자신의 형제를 신하로 삼지 않았고, 군주에 봉해진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형제는 신하로 삼지 않지만 자신의 형제는 신하로 삼았으며, 기년상(期年喪)에 천자와 제후는 상복을 입지 않고 대부는 줄여서 입었으나 죽은 사람이 제후와 대부처럼 벼슬의 높이가 같으면 또한 안 입지 않고 줄이지 않았으며, 자매가 제후에게 시집간 경우에도 안 입지 않고 줄이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뜻이다. 상고 시대에는 모두 간략하여 줄이거나 귀하게 여기는 예절이 있지 않았다. 대체로 이것은 모두 천하의 큰 법으로 옛날에는 갖추지 못했으나 주공(周公) 때에 이르러 샅샅이 가려내어 제도를 정하고 다시는 바꾸지 않았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처음 봉해진 군주는 첫 번째 계층이 되고 봉해진 군주의 아들은 두 번째 계층이 된다. 이에 아버지의 형제와 자신의 형제가 첫 번째 계층이 되어 아버지의 형제는 신하로 삼지 않고, 자신의 형제는 신하로 삼아 두 번째 계층이 되었다. 이로부터 층층이 내려가 아버지의 형제를 신하로 삼기에 이르렀고, 결국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아버지인 연왕(燕王) 우(宇)가 표문(表文)을 올리면서 신(臣)이라 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물을 따라 흐르는 형세요 반드시 그렇게 될 이치이다. 아, 고요(臯陶)가 순 임금에게 고하기를 “하늘이 펴서 오전(五典)을 두었다.” 하고 또 “하늘이 차례를 만들어 예법을 두었다.” 하였으며, 《중용》에서 이르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 하였다. 맹자는 인성이 본래 선함을 밝히면서 “어린 아이도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지 않고, 자라서는 자기 형을 공경할 줄 모르지 않는다.” 하였고, 주자는 말하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께 공손한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며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천도(天道)의 펼침과 차례, 인사(人事)의 거느림과 따름은 곧 천리(天理)가 저절로 그러하여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천지의 큰 법이어서 고금에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지각이 있어 자기 형을 공경할 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곧 아버지의 형제를 신하로 삼고 자기 형을 신하로 삼는 것은 바로 이른바 ‘너의 마음에 편안하느냐? 네가 편안하거든 그렇게 하라.’는 것이니, 어찌 흐름을 따르고 억지로 함이 없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본성을 따르는 길이 과연 이러한 것일까. 어떻게 펼쳤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떻게 차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고자(告子)의 기류배권(杞柳桮棬)의 비유를 논파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키버들을 휘어 나무그릇을 만든다면 사람도 그 본성을 해쳐서 인의(仁義)를 할 것인가. 천하의 사람들을 몰아서 인의를 해치는 것은 분명 그대의 말이로다.” 하였다. 대체로 그 아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신하로 삼도록 하는 것이 본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걸음쇠와 곱자는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리는 데 최고의 표준이요, 성인(聖人)은 인륜의 지극한 본보기이다. ‘륜(倫)’이란 차례이다. 아버지는 아래에 있고 아들은 위에 있는 것이 과연 그 차례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어찌 내 몸이 귀하다고 해서 부모의 동기(同氣)간과 나의 동기간의 죽음에 슬퍼하는 정이 없겠는가.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예(禮)란 인정에 따라 천리를 예절로 만들어 인간사의 예의준칙으로 삼는 것이다. 슬퍼하는 정은 보통사람과 같건만 몸이 귀하다고 해서 상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절문이며 무슨 의칙인가. 반복해서 생각해보아도 끝내 그 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분심(憤心)과 비심(悱心)을 이기지 못하고 부득불 글로 써서 지혜로운 사람의 변론을 기다린다.
●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음악은 난세의 음악이므로 오만에 비유하였다. 상간(桑間)과 복상(濮上)의 음악은 망국의 음악이므로 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유랑하였으며 윗사람을 속이고 사적인 일을 행하였으나 저지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이 ‘윗사람을 속이고 사적인 일을 행하였으나 저지하지 못하였다.’는 구절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며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오늘날 과거시험장에 달려가는 사람을 보면 날마다 동분서주하여 이미 제수(製手)와 약속하고 또 사수(寫手)와 약속했으면서, 또 한 명의 제수와 한 명의 사수가 기한에 맞추기 어려울까 싶어 다시 2, 3명을 좌우에 두고, 심지어 세력이 있는 사람은 3, 4명에 그치지 않았으니, 초연히 빼어나 속습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것이 공공연히 자행된다고 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온 나라에 습속이 보편화될 것이고 이른바 서울의 어진 사대부 자제들이 도리어 더 심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아, 서울은 왕의 교화가 미치는 근본이요 어진 사대부는 한 나라의 희망이다. 과거시험과 같은 일은 곧 사군자가 몸을 세우는 시초이며 군주를 섬기는 시작이다. 몸을 세우는 시초와 군주를 섬기는 시작이 이와 같고 왕의 교화가 미치는 근본과 한 나라의 희망이 이와 같다면, 이른바 ‘저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이치와 형세로 보아 반드시 그러할 것이며, ‘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유랑하였다.’는 것은 옛사람이 이치에 통달하여 남의 나라를 잘 꿰뚫어보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 맹자가 말하기를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도를 종식시키지 않는다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학설이 백성들을 속여서 인의(仁義)를 막는 것이니, 인의가 막히면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서로를 먹게 될 것이다.” 하였다.
주석에서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학자가 옳고 그름의 원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 해악이 백성들에게 흐르고 재앙이 후세까지 미치기 때문에 맹자가 바르지 못한 학설을 변증하기를 이처럼 엄정하게 한 것이다. ……” 하였다.
살펴보건대, 양주의 위아(爲我)와 묵적의 겸애(兼愛)는 우리가 말하는 도(道)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신불해(申不害)ㆍ한비(韓非)의 형명(刑名)이나 소진(蘇秦)ㆍ장의(張儀)의 권모(權謀) 에 비하면 그 맑고 흐림, 사특함과 바름의 분별이 마치 음양과 흑백이 상반되는 것과 같아, 그 폐해가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서로를 먹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것은 거의 실정을 벗어난 평에 가깝다. 그러나 성현은 결코 실정에 지나친 말로 옛사람을 논하거나 후세에 교훈을 남기지 않았다. 이처럼 헤아려 생각해도 명백히 판별할 수 없는데 보통으로 읽는다면 가슴속에서 환하게 풀릴 수 없다. 이제 세상사를 겪은 지 이미 오래되고 이치를 살펴본 지 이미 익숙한 뒤에 비로소 그 이치와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대개 우리의 도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지고 만 가지 다름이 하나의 근본으로 귀결될뿐이다.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지는 것은 성(誠)일 뿐이다. 이것은 즐거워해도 어지럽지 않고 반복해도 싫지 않으며 만세(萬世)를 지내도 폐단이 없는 것이다. 이미 하나의 근본을 잃어버리면 단지 위(僞)일 뿐이다. 한 번 거짓을 겪으면 이끗으로 달려가 돌아오기를 잊어버려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 사방을 택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그 흘러가는 폐단이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해악이 백성들에게 흐르고 재앙이 후세까지 미친다.’고 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어긋남’이란 하나의 근본과 두 가지 근본의 사이, 성실과 거짓이 나누어질 뿐이다.
● 성선설(性善說)은 맹자가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고 기질설(氣質說)은 정자가 처음으로 발표한 것인데, 그 뜻은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이 이미 갖추고 있다. 본성을 따르는 길이 성선의 뜻이 아니겠는가. 도를 닦는 가르침이 기질의 뜻이 아니겠는가. 선하기 때문에 따르고 잡박하기 때문에 닦으니, 맹자와 정자는 특별히 그 뜻을 해석했을 뿐이다.
● 용풍(鄘風)의 장유자(牆有茨)에 대해,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음란한 군주는 규문(閨門) 안에서 은밀히 행하니 세상이 알 수가 없다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에 멋대로 행동하여 돌아올 줄 모른다. 성인(聖人.공자)이 이것을 경전에 드러내어 후세에 악행을 저지르는 자에게 규문의 말이라 할지라도 또한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을 알도록 했다.” 하였다. 양씨의 말에서 숨기고 드러내는 이치는 그렇다 하더라도 위풍(衛風)에서 훈계가 되었다고 한다면 헐후(歇後)할 뿐만이 아니다. 《좌전(左傳)》에 의하면, 혜공(惠公)이 즉위할 때 어렸는데 제(齊)나라 사람이 소백(昭伯)으로 하여금 선강(宣姜)과 간통하도록 했고, 옳지 않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시켜 제(齊)나라의 아들 대공(戴公)ㆍ문공(文公), 송(宋)나라 환공(桓公)의 부인, 허(許)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을 낳았으니, 이것을 오히려 ‘규문 안에서 은밀히 행하니 세상이 알 수가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정녀(靜女)ㆍ상중(桑中) 등의 시는 바로 이러한 일을 밤낮으로 먹고 쉬는 것처럼 여겨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드러난 곳에서는 감히 할 수 없어서 반드시 은밀한 곳을 찾는 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는 것이지 남이 알까 해서가 아니다. 은밀하고 드러남으로 훈계를 한다면 또한 헐후가 아니겠는가.
● 위(衛)나라 선공(宣公)이 아들 급(伋)의 아내를 맞아들이니 이미 명교(名敎)로 보아 용납할 수 없는 짓인데, 그 아들 혜공(惠公) 삭(朔)은 곧 맞아들인 급의 아내 이른바 선강(宣姜)의 소생이다. 그 아들의 아내를 맞아들여 자식을 낳고서도 엄연하게 신하와 백성 위에 군림하니, 실로 천지 사이에 하나의 큰 변고였다. 더구나 또 혜공의 서형(庶兄) 완(頑)은 선강과 간통하여 2남 2녀를 낳아 남아는 대공(戴公)과 문공(文公)이 되고 여아는 송(宋)나라 환공(桓公)의 부인, 허(許)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이는 아들이 어머니와 부부가 되어 자녀를 낳았는데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받들어 군주로 삼고 이웃나라의 제후가 통혼을 하니, 오랑캐의 풍속은 또한 이러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좌전(左傳)》에 의하면 완(頑)이 간통한 것은 제(齊)나라가 실제로 시켰고 심지어 옳지 않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시켰으니, 이는 당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보통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성왕(聖王)의 시대와 멀지 않았는데도 윤리와 기강이 땅에 떨어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무슨 까닭일까. 제나라 환공이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나라를 옮길 때 단지 패도를 이루는 데 뜻을 두었지 조금도 명교를 아끼는 뜻을 두지 않아서이다. 공자가 이른바 “관중(管仲)이 아니면 나는 오랑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왼편으로 옷깃을 매었으리라. ……” 한 것은 참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왼편으로 옷깃을 매는 것을 면할 수 있어서였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부터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와 ‘증자(曾子)가 대자리를 바꾸었다.’에 이르기까지는 단지 실제로 실리(實理)를 본 것이다. 실리가 유행하여 중간에 끊임이 없기 때문에 생의(生意)가 활기차 저절로 이와 같다. 이것이 곧 만 가지 이치의 근원을 만나는 것이며, 이것이 곧 도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일관(一貫)의 뜻으로 함께 돌아가 같이 꿰뚫는 것이다. 순수하고 정교하다는 것은 본래 《주역》을 찬미하는 말이다. 만 가지 이치의 근원을 만나는 곳을 볼 수 있다면 때에 따라 이르는 곳마다 순수하고 정교한 경지가 아님이 없으니, 이것이 근본을 하나로 하는 이치이고 거짓 없는 도리이다. 하나의 근본이므로 정교하고 거짓이 없으므로 순수하며 또 순수하므로 정교하고 정교하므로 순수하다. 건곤(乾坤)의 쉽고 간략한 이치는 본래 이와 같다.
● 동자(董子.동중서)가 말하기를 “즐거워해도 어지럽지 않고 반복해도 싫지 않는 것을 도(道)라고 말한다. 도란 만세토록 폐단이 없는 것이니 폐단이란 도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께 공손한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니, 이는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일 뿐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따르기 때문에 어지럽지 않고 억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지 않는다. 어지럽지 않고 싫어하지 않기에 만세토록 폐단이 없는 것이다. 아, 인(仁)의 실질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고, 의(義)의 실질은 형을 따르는 것이며, 지(智)의 실질은 이 두 가지를 알아서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고, 예(禮)의 실질은 이 두 가지를 절도에 맞추어 꾸미는 것이며, 악(樂)의 실질은 이 두 가지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면 그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이 일어나면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춤추고 발이 뛰게 된다. 이것이 즐거워해도 어지럽지 않고 반복해도 싫지 않으며 만세토록 폐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을 궁구해 보면 단지 본성을 자연스레 따르고 억지로 행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근본을 하나로 하는 이치이며 거짓이 없는 도리이다. 인성(人性)이 본래 선하고 성인(聖人)이 지극히 성실하여 쉼이 없는 것은 여기에서 다할 뿐이다. 건곤이 쉽고 간략함은 곧 어지럽지 않고 싫어하지 않은 것이요, 건곤(乾坤)이 크고 오래갈 수 있음은 곧 만세토록 폐단이 없는 것이다.
● 한나라 헌제(獻帝) 흥평(興平) 원년(194) 여름 4월에 조조(曹操)가 순욱(荀彧)과 정욱(程昱)에게 견성(鄄城)을 지키도록 하고 다시 진군하여 도겸(陶謙)을 공격하니, 장막(張邈)이 여포(呂布)를 맞아들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삼아 조조를 막게 하였다. 당시 연주의 군현은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는데 오직 견성현(鄄城縣)ㆍ범현(范縣)ㆍ동아현(東阿縣)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정욱이 돌아가다가 범현에 들러 현령 근윤(斳允)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듣자하니 여포가 그대의 어머니와 동생과 처자식을 잡아두고 있다고 하던데 효성스런 아들로서 참으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이오. 지금 천하는 매우 혼란하여 영웅들이 모두 일어났지만, 반드시 세상의 구원을 명받아 천하의 혼란을 그치게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상세히 가려야 하는 법이오. 대체로 여포는 거칠면서 친근함이 적고 힘이 세지만 무례하니 필부의 영웅일 뿐이오. 진궁(陳宮) 등이 일시적으로 세력을 합치긴 했으나 그대를 도울 수는 없소. 조 사군(曹使君.조조에 대한 경칭)이 지닌 불세출의 지략은 거의 하늘이 준 것이오. 그대가 반드시 범현을 굳건히 하고 내가 동아현을 지키면 전단(田單)의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충신을 거역하고 악인을 좇다가 모자(母子)가 다 죽는 것과 같이 하겠소.” 하니, 근윤이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였다. 마침내 범의(范嶷)를 죽이고 병사들을 정돈하여 수비하였다.
서중(徐衆)이 평하기를, “근윤은 조공(曹公.조조)과 아직 군신 관계가 아니었고 어머니는 매우 가까운 친족이니 의리로 보아 마땅히 떠나야 했다. 위(衛)나라 공자(公子) 개방(開方)이 제(齊)나라에서 벼슬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그 어버이를 생각하지 않는데 어찌 군주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는 것이니, 근윤은 먼저 어머니를 구해야만 했다. 서서(徐庶)의 어머니가 조공에게 잡혀있자 유비(劉備)는 서서를 보내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자식 된 자의 심정을 이해해야 하니 조공도 마땅히 근윤을 보내야 했다.”
살펴보건대 서공(徐公)의 평은 의리에 맞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그 주된 뜻은 오로지 군주와 신하의 의리에 대해 말한 것이지, 어머니와 아들의 친애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또 ‘지친(至親)’ 두 글자는 오직 형제 이하에서 말할 수 있지 부자간이나 모자간에서 말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맹자가 도응(桃應)의 질문에 답할 때에 만일 ‘아버지는 지친이다.’라는 한마디 말을 먼저 하고 이어서 ‘남몰래 업고 도망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의 뜻이 도리어 헐후(歇後)가 될 것이니 마땅히 어찌해야 할까. 또 이미 ‘근윤은 조공(曹公.조조)과 아직 군신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 뜻은 이미 군신 관계가 되었다면 그 어머니는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임을 말했을 뿐이다. 그 주된 뜻이 이미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말이 이처럼 헐후하게 되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대개 맨 처음에 본 곳이 오직 그 어머니에게 효성을 드리지 못한 데에 있다면, 반드시 군신 사이에서 힘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논리가 성립되었고 결국 군신 쪽의 뜻이 더 중하기 때문에 소견이 여기에 그쳤으니, 하나의 근본의 소재를 명쾌히 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오로지 군주와 신하의 의리에 대해 말한 것이지, 어머니와 아들의 친애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한 이유이다. 이 또한 당시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압도당한 하나의 증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조조는 막 연주 자사(兗州刺史)가 되어 아직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지 못하고 무평후(武平侯)에 봉해지지 못했으며 헌제도 아직 조조에 의해 허도(許都)로 옮겨지지 않았으니, 정욱이 말한 ‘충신을 거역한다.’는 ‘충(忠)’자와 서중이 말한 군신의 ‘군(君)’자는 바로 조조를 지칭한 것이지 헌제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군주와 신하의 의리는 과연 무엇이며, 그 압도당한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 이미 하나의 근본을 잃으면 그 말류는 어디를 향해 가며 또한 장차 어디에서 그치는가.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니 이것을 알지 않을 수 없다.
● 〈신망기(新莽紀)〉에서 ‘아무개 해’ 아래에다 ‘연호 몇 년’을 나누어 쓰고 그 기사(紀事)의 내용에는 바로 그 이름을 쓰고 그가 참수형을 당한 곳에서는 참수(斬首)라고 썼으니, 대개 군주를 시해한 역적에게는 필법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광(楊廣)에 대해서는 곧 아버지를 시해한 역적인데도 그 기년(紀年)에는 ‘아무개 해’ 아래에다 ‘양제(煬帝)의 연호 몇 년’을 크게 적고 그 기사의 내용은 제(帝)라고 칭하기도 하고 상(上)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출행(出行)에 대해서는 여(如)라고 말하기도 하고 행(幸)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우문화급(宇文化及)이 그를 살해한 곳에서는 ‘그 군주를 시해했다.’고 적었다. 의례(義例)로 헤아려보면 이치가 통하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다. 양광의 시역(弑逆)은 당시에 남긴 흔적이 널려져 있으니 천하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장형(張衡)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남에게 무슨 일을 했기에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하니, 형벌의 집행을 감독하던 사람도 귀를 막고 서둘러 죽이도록 명하기에 이르렀다. 천하 사람이 다 아는 것이 이처럼 분명하였지만 당시에 군사를 일으켜 죄를 성토한 사람들 또한 이것으로 죄를 성토할 줄 모르고 예사롭게 여겨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제 오랜 세대를 거쳐 이치를 익히 살핀 뒤에 비로소 천지 사이에 단지 군주와 신하의 의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압도된 지 오래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또 이른바 스승과 제자의 의리라는 것이 있어 군주와 신하의 의리와 대치하여 각각 문호(門戶)를 만들고, 부모와 자식의 친애는 점차 그믐으로 향해가는 달과 같아 어두운 형체만 있을 뿐이다.
● 당나라 고조(高祖) 무덕(武德) 3년(620)에 이세적(李世勣)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자, 두건덕(竇建德)의 여러 신하들이 이개(李蓋)를 목 베라고 청하였다. 두건덕이 말하기를 “이세적은 당나라 신하로서 우리의 포로가 되었으나 본조(本朝)를 잊지 않았으니 곧 충신이오. 그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마침내 용서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세적의 아버지가 두건덕에게 살해되지 않은 것은 또한 요행이며 이세적이 스스로 기대한 것이 아니니, 세상에 어찌 그 아버지를 사지에 두어 돌아보지 않고 충신이 될 수 있겠는가. 대개 이세적이 반드시 당나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안목이 군주를 선택하는 데 밝았을 뿐이고, 두건덕이 충신으로 인정한 것 또한 한때의 망라(網羅)할 계책에 불과하였다. 대체로 혼란할 즈음에 그 중 조금 영리한 자는 모두 이를 판별할 수 있으나,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끝내 몰아내 없애는 과정에서 어육(魚肉)이 되었다. 고종의 폐후(廢后)가 이세적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음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으나, 범씨(范氏.범조우)의 논설에 이르기를 “태종은 이세적을 충신이라 여겨 어린 아들을 부탁하였는데 그의 큰 절의는 이와 같았으니, 《서경》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자는 지혜로우니 이것은 요 임금도 어렵게 여겼느니라.’고 한 말을 믿겠다.” 하였다. 나는 이것을 속으로 의심하였는데 이세적의 큰 절의는 어찌 황후를 폐위한 사건을 기다린 뒤에 알겠는가. 당 태종이 태자에게 “‘너는 이세적과 은의(恩義)가 없으니 내가 지금 그를 내칠 것이다. 그가 즉시 떠나거든 내가 죽기를 기다려 네가 나중에 등용하여 복야(僕射)로 삼을 것이요, 배회하거나 관망하면 죽여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세적은 조칙을 받고 집에 들르지 않은 채 떠났다.” 하였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잘 맞았는데 오히려 어찌 큰 절의로 책망할 수 있겠는가.
● 당나라 신룡(神龍) 원년(705)에 태후를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기고 존호(尊號)를 올려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하였다.
호씨(胡氏.호인)가 말하기를 “군대가 이미 궁중에 들어왔으면 먼저 태자를 받들어 복위시키고, 즉시 무씨(武氏 측천무후)를 데리고 당나라 태묘(太廟)에 이르러 아홉 가지 죄를 열거해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사사(賜死)한 다음 그 종족을 멸하되 중종이 여기에 관여치 못하게 해야만 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호씨의 이 논설은 의리는 정당하지만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만일 중종을 섬기고자 했다면, 이 의리는 바로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개 그 어머니를 죽인 신하와 함께 같은 조정에서 군림한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순(舜)이 요 임금의 천하를 받으니 그 종묘와 사직의 중대함이 후세에 세습하던 나라와 어찌 같겠는가. 그런데 맹자는 오히려 “몰래 그 아버지를 업고 달아나 죽을 때까지 흔연히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람의 자식 된 자의 마음과 사람의 자식 된 자의 의리와 사람은 하나의 근본에서 생겨난다는 이치는 그 천지의 만물이 서로 바뀔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시험 삼아 중종의 당시 마음을 생각해 보면 그 어머니를 죽이고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아니면 황제의 자리를 헌신처럼 팽개치고 모자가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중종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 어머니를 죽이고 그 아들을 섬기는 것 또한 사람의 신하 된 자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그 사죄를 용서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당나라에서 끊어냈다면 아마도 그 사이에서 경중을 저울질해볼 수 있겠으나 이 또한 의리와 사세로 보아 모두 막힘이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이 의리를 펴고자 한다면 중종을 포함하여 폐위시킴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어머니에 연좌시켜 그 아들을 폐위시키는 것은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 이것은 의리의 지극한 곳이다. 종묘에 죄를 얻었다고 하여 신하들이 그 어머니를 도륙하도록 내버려두고 편안히 위에 군림하여 날마다 어머니를 도륙 낸 신하와 함께 묘당(廟堂)에서 도리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의리가 있겠는가. 또 중종이 어머니 상을 치를 때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는가. 종묘와 인연이 끊겼다고 하여 어머니 상에 임하지 않아야 하는가. 이것은 본래 부모 없는 나라가 없으니 결코 이러한 의리는 없다.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는 의리가 없으니 양암(諒陰)의 예법을 행해야 하는가. 그 신하에게 죽여서 종묘에 대의를 밝히도록 하고 내 몸에 상복을 입혀 사실(私室)에서 지극한 정을 펴게 해야 하는가. 군자의 학문은 의(義)가 정밀하고 인(仁)이 완숙한 것인데 그 의리를 지킴에 애매모호하기가 이와 같은 경우가 있겠는가. 바로 자로(子路)가 “나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 격이니 탄식할 뿐이다.
● 야곡(冶谷) 조(趙) 아무개의 문인이 질문하기를,
“《소학(小學)》에서 ‘나이가 배나 더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긴다.’고 말했는데 ‘나이가 배나 더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니, 야곡이 답하기를, “열 살이면 스무 살이 배가 되고, 스무 살이면 마흔 살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하였다. 질문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내 나이가 10세이고 저 사람의 나이가 20세 때에는 참으로 배나 더 많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섬겨야 하지만, 또 열 살이 지나 내가 20세이고 저 사람이 30세 때에는 도리어 열 살이 더 많아서 형처럼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야곡이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한 사람이 말하기를,
“고주(古註)에 ‘사람이 태어나 10년이면’의 한 구절에 ‘배가 되면 20년이 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 나이가 몇 살인지는 계산하지 않고 단지 ‘배(倍)’자는 20세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야곡이 턱을 끄덕였다.
조용히 생각건대, 열 살이면 스무 살이 배가 되고 스무 살이면 마흔 살이 배가 된다는 것은 곧 바뀔 수 없는 올바른 이치이다. 이것이 이미 바뀔 수 없는 올바른 이치라면, 이것으로 미루어 말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 만일 미루어 나가지 못해 설명해도 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는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곧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열 살이 지났을 때’가 설명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바뀔 수 없는 올바른 이치를 버리고 따로 하나의 설명을 구해 구차하게 맞추려고 하니, 바로 이른바 ‘말에서 얻지 못하거든 마음에서 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아버지처럼 섬기고 형처럼 섬긴다고 함은 성인(成人)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 살 어린애가 열 살 된 사람을 아버지처럼 섬기게 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다섯 살 어린애가 어찌 아버지처럼 섬기는 도리를 알겠으며, 열 살 된 사람에게 또 어찌 아버지의 도리가 있겠는가. 질문한 사람이 이른바 ‘내가 10세이고 저 사람이 20세 때에는 아버지처럼 섬겨야 한다.’고 한 것 또한 어찌 20세 된 사람이 10세 된 자식을 두는 이치가 있겠는가. 이로써 아버지처럼 섬기고 형처럼 섬긴다고 함은 성인(成人)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남자가 20세에 관례(冠禮)를 치루는 것은 성인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도리이다. 삼가례(三加禮)가 끝나고 관례를 치른 사람이 나가서 향선생(鄕先生)과 아버지의 집우(執友.뜻을 같이하는 벗으로 여기서는 아버지의 벗을 가리킴)를 뵈면 붕우의 윤리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내 나이가 20세이기 때문에 40세 된 사람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30세 된 사람을 형처럼 섬기는 것은 성인이 된 초기에 이처럼 정해지는 것이니 이후로는 모두 고치는 일이 없다. 훗날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뜻밖에 상봉할 때에 가령 내 나이가 50세이고 저 사람의 나이가 60세라면 곧 관례를 행할 때에 열 살이 더 많았던 것이고, 저 사람의 나이가 70세 이상이라면 곧 관례를 행할 때에 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단정한다면 통하지 않을 곳이 없을 것이다.
번역: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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