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의 격 / 곽흥렬
월요일 밤, 늦은 저녁을 끝내고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즐기고 있다. '가요무대' 프로에서 구수한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추억의 옛 노래 몇 곡이 끝나고, 인기 남자 가수 송 아무개의 <분위기 좋고>가 흥을 돋운다.
분위기 좋고 좋고 느낌이 와요 와요/준비는 됐어 됐어 오메 좋은 거 <중략> 아싸 이쁜 내 사랑/보고 싶어 갑니다 가요/내가 가요 당신만의 사랑이 되어/길은 멀어도 마음은 하나요/뜨거운 내 마음 받아만 준다면/분위기 좋고 좋고 느낌이 와요 와요/준비는 됐어 됐어 오메 좋은 거/분위기 좋고 좋고 폼도 좋구나 좋아/준비는 됐어 됐어 나는 행복해/사랑이 온다 와요 옵니다 옵니다 와요/느낌이 와요 와요 오메 좋은 거/그님이 온다 와요 좋구나 좋구나 좋아/준비는 됐어 됐어 나는 행복해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슬쩍 곁에 있는 아내 표정을 살핀다. '준비는 됐어'라는 소절에 이르자 아내의 얼굴 쳐다보기가 민망해진다. 글쎄 무슨 준비가 되었다는 소리인가. 좀 성급하고 독단적인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되, 이어지는 뒷말로 미루어 짐작건대 어쩐지 뜨거운 사랑을 치르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외설적인 표현으로 읽힌다. 남녀상열지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고려가요 「쌍화점」의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중략)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곳 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는 구절 저리 가라다.
그런가 하면, 이어지는 장 아무개 젊은 여자 가수의 <어머나>라는 노래는 거기다 한술 더 뜬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여자의 마음은 바람입니다/안 돼요 왜 이래요 잡지 말아요/더 이상 내게 오시면 안 돼요/오늘 처음 만난 당신이지만/내 사랑인 걸요/헤어지면 남이 돼요/모른 척하겠지만/좋아해요 사랑해요/거짓말처럼 당신을 사랑해요/소설 속에 영화 속에 멋진 주인공은 아니지만/괜찮아요 말해 봐요/당신 위해서라면 다 줄게요
즉흥적이고 경박하기가 어찌 이리도 적나라할 수 있을까 싶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초스피드 시대라고는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내 사랑'이라고 표현하며, 그런 사람한테 또 어떻게 자기의 모든 걸 다 주겠다는 말인가. 게다가 '당신 위해서라면 다 줄거'라는 그 소절 속에는 은근히 정조까지 바치겠다는 함의가 느껴진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비단 나만의 지나친 논리적 비약은 아닐 줄 믿는다. 이처럼 저속한 가사의 노래가 무비판적으로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문학자였던 조윤제 선생은 생전에 우리 한국인의 생활의 특질을 일러 '은근과 끈기'라고 설파했었다. '"잡사와 두어리마나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라고 노래한「가시리」에서 은근의 미덕을 보았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고 읊은「단심가」에서 끈기의 정서를 읽었다. 그 애국적인 주장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물론 유행가라고 해서 하나같이 다 저급하고 속된 것만은 아닐 게다. 십여 년 전, 시인 100명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대중가요 노랫말 1위에 오른 <봄날은 간다>를 가만히 입속으로 흥얼거리노라면 그 가사에서 절로 격조가 느껴지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은근한 노랫말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같이 찬연하면서도 덧없이 이우는 목련꽃처럼 처연하게 다가온다. 짧아서 더 귀하고 그래서 더 아쉬운 봄, 그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한 정서가 강물이 흘러가듯 아련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단장의 그리움을 담았으되 감정을 흩트리지 않았고 애끓는 정한을 토로하되 격을 잃지 않았다.
유행가 한 줄을 짓는 데 있어서도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비록 태생적으로 통속성에 기초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술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아름답고 격조 있는 노랫말을 만들겠다는 자세로 혼을 쏟아 작사를 하는 예술가적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리라. 이것이 유행가의 격을 높이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