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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자와 사악한 자
잠 11:1-8
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5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6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잠 11:1-8 /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여호와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은 속이는 저울이라. 정직하게 무게를 달아 파는 상인을 여호와께서는 사랑하신다. 2) 우쭐대며 행동하면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긴다. 슬기로운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사람이다. 3)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은 바른 길을 따라 살므로 그 성실이 앞길을 열어 주지만, 남 속이기에 바쁜 사람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 들고야 만다. 4)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 진노하시는 날 쌓아 놓은 재산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올바름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리라. 그날이 와도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라. 5) 바르고 곧게만 살아가는 사람은 그 앞길이 평탄할 것이나, 못된 짓만 일삼아 남 짓누르고 착취하며 살아가는 것들은 스스로 뿌려 놓은 그 악의 씨를 스스로 거둬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6) 올곧은 사람은 바르게 살아온 것 때문에 구원을 받겠지만, 남을 속이고 등쳐 먹는 것들은 자신의 잘못에 사로잡히고 말리라. 7) 못되게 살다 죽으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토록 모으고 싶어하던 재산도 한낱 헛된 꿈일 뿐. 8) 바르게 살면 어려움에 빠져도 헤쳐 나올 수 있으나, 못된 짓만 일삼으면 제 덫에 스스로 걸려 들고야 만다.
정직한 자는 공의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살지만 악인은 환난 가운데 소망이 사라집니다.
속이는 저울 공평한 추(1-3)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상업 활동이 왕성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공정하지 못한 상거래였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상거래는 대인적 그리고 대사회적으로 상호 신뢰에 대한 상실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상거래를 넘어서서 종교적, 도덕적으로 사회에 불신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공평한 추는 공평한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저울추가 돌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교만은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잠 6:16-17).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는 교만한 자에게 오는 필연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놓여진 것은 수치와 치욕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으며 그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고 사악한 자는 자기를 망하게 합니다. 여기서 사악하다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하여 은밀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익한 재물과 죽음에서 건지는 공의(4-8) 인생의 마지막에 이를 때에 사람의 재물은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오로지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의로움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을 때에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가거나 그 재물로 죽음을 연기할 수 없으며, 그 재물로 죽음 이후에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재물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불의의 증거가 될 뿐입니다. 여기서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바로 죽음의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망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 인생이 가진 재물은 어떠한 변호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릴 은혜이고 바랄 수 있는 의로운 소망인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명예, 재물, 건강 이 모든 것을 예수 앞에 내려놓고, 예수 안에서의 삶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업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정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자신의 일은 후하게, 다른 사람의 일은 박하게 평가하면 순간에는 이익이 있을 수 있으나 나중에는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남을 속이는 인생이 아니라 모든 일에 정직과 신뢰를 쌓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속이는 저울과 공평한 추
잠언 11:1-15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직과 의로운 삶이 주는 유익에 대한 교훈이고, 또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교훈입니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삶의 윤리와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삶의 윤리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보증에 관한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적 능력을 초과해서 타인과 약속하는 것으로,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적인 공급을 일 순간에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드러내나 믿을 만한 사람은 그 일을 감춰둔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담’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상 '여기저기 돌아다닌다'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담하는 자’는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자를 말합니다. 70인역은 아예 ‘두 개의 혀를 가진 자'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얘기한 사적인 대화의 내용을 누설한다는 점에서 '한담하는 자'는 자기를 신뢰한 사람들을 배반하는 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슬기로운 지도자가 없으면 백성은 망하지만 조언자가 많으면 승리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지략은 밧줄을 당겨서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뜻으로, ‘방향’, ‘조언’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한 나라를 조종하고 이끌어나가는 '지도력' 내지는 '현명한 계획’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민족적인 번영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돕는 지략이 많으면 백성들은 망하지 않고 번영하기 때문입니다.
상거래를 위한 탈무드에서는 소를 팔 때 다른 색을 칠하지 못하도록 금하였고, 또한 여러 가지 도구에 색을 칠해 새것으로 보이게 해서 파는 행위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늙은 노예가 머리에 염색을 해서 자신을 젊게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과일 상점에서 신선한 과일을 오래된 다른 과일 위에 올려 놓아서 함께 파는 것도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안전에 대해서도 언급 되어있는데 차양의 길이의 제한, 건물 기둥의 굵기 등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고,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관습적인 노동시간 이상을 노동 시켜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상품을 팔 때는 그 물건과는 다른 이름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상거래 탈무드에 비유하면 한결 실감이 갈 것 같습니다. 소를 붉게 칠하거나, 오래된 도구를 색칠하여 새 것으로 보이게 하거나, 새카맣게 머리를 염색한 늙은 노예는 속이는 저울입니다. 당연히 거짓이므로 여호와께서 싫어하실 것입니다. 대신 규격대로 단단하게 세워지는 건물이나, 적절한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를 보호하며, 원래 이름의 정품은 공평한 추입니다. 당연히 진실된 것이므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상인이 해서는 안될 세가지 일이 탈무드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과대선전, 매점매석, 그리고 계량을 속이는 일 입니다. 특별히 계량을 속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유대사회에서는 계량 감독 공무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확한 계량을 위하여 여름과 겨울에 따라 토지에 면적을 재는 줄자도 각각 다른 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날씨에 따라 줄자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 탈무드는 어떻게 해야 도덕적인 사업가가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지, 어떻게 되더라도 돈만 버는 사업가가 되느냐 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과 같이 ‘정직한 사람의 성실함이 그들을 인도하며 범죄한 사람의 속임수는 그들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평한 추와 저울은 공정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직이 삶을 인도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런 거 같지 않습니다. 정직하면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유리하기 보다는 불리해 집니다. 부정과 부폐가 판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큰 악과 불의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더 악해지고 추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놀 것 안 놀고 공부를 해야 우등생이 될 수 있듯이, 자기를 희생해야 이 세상을 순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죠.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일수록 별은 빛납니다. 그렇게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희생을 감당하더라도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 역시 변별력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 무엇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잠 11:1-8
주제말씀: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 기만 말고 공평해야 합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평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공평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까? 공평한 추입니다.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절 하)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공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무엇은 미워하신다고 했습니까? 속이는 저울, 곧 속이고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1절 상) 즉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누군가를 속이는 행동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공평, 공정하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이것이 진정 잘 되는 길임을 깨닫고서 말입니다.
* 교만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또 어찌 해야 합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하) /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하) 또한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2절 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곧 겸손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5:33 하)
반면 어떤 자들은 대적하십니까? 교만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5:5 중)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들 중 하나가 곧 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끊임없이 교만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잠6:16,17) /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잠3:34 상)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원하며, 또한 누구를 대하든지 늘 겸손한 태도로 그리하기를 원합니다. 교만하거나 거만한 태도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서 말입니다.
* 패역 말고 성실해야 합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1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또 어찌 해야 합니까? 성실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성실하신 하나님은 우리 역시 성실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성실하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도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성실한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기를 말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듯이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기뻐하시되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주십니까? 인도해주십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3절 상)
반면 어떤 사람들을 미워하십니까? 패역한 사람, 곧 비뚤어지거나 굽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같은 사람은 매사에 불성실하거나 엇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런 자를 어떻게 하십니까? 망하게 하십니다. 아니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도록 내버려두신다고 할 것입니다.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3절 상)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성실하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듯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께 하듯 성실하기를 원하고요.
* 불의하지 말고 의로워야 합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잠11: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또 어찌 해야 합니까? 의로워야 합니다. 물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의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찌 해야 합니까? 공의, 곧 하나님의 의를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의 ‘완전한 자’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즉 율법적, 도덕적으로 무흠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붙드시되, 구체적으로 어찌 해주십니까? 그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4절 하) /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6절 상) 또한 환난에서 건지시며,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8절 상) 그들의 길을 곧게 해주십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5절 상)
반면 불의한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고,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4절 상) 자기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게 하며,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5절 하) /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6절 하) 그들의 소망을 끊어버리며,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7절) 자기의 길, 곧 멸망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8절 하)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불의하지 말고 의로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잠언 11:1-8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사건이 최근 있었습니다.
출소 후 두 건의 살인을 저질렀고
그의 신원은 공개되었습니다.
56살의 강윤성 씨입니다.
그가 출소할 무렵에 손편지에 적은 내용을 보면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으며 살아갈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한 목사님은 탄원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출소를 2달 정도 앞당길 수 있었다는 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출소 후 3개월 만에
두 건의 살인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도대체 그의 고백은 무엇인가요?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했던 건가요?
아니면 그것도 거짓인가요?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 태도와 말이 바뀌고,
누가봐도 은혜받은 사람처럼 된 것을 본 적 있을 겁니다.
아멘도 잘하고, 신비한 체험도 하고,
그런데 그 은혜가 교회 밖을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이 참 변화인지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대로 죄를 짓고 살면서
교회 안에서만 은혜 충만하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에 집중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여김을 받으며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을 통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9)
세례는 죄를 씻는 의식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 앞에 나아가 죄의 고백을 드릴 때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런 자들은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단지 감정의 변화로 기뻐 뛰거나
눈물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 뜻을 향한 간절함이
우리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열매가 맺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 나무를 베어버리실 것입니다.(눅13:6-9)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미워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이 마음을 가진 자는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
그 마음을 멀리한 자는 악인으로 칭함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그 둘의 차이가 확연히 보입니다.
1)속이는 저울과 공평한 추
타인에게 물건 팔 때 속이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된 행동을 하나님은 죄로 여기시며
다소 미련하게 정직한 삶을 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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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낮추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 보다는
<박사>라는 이름을 듣고 싶어합니다.
더 많은 공부를 한 유식한 목사이고 싶어서겠죠
그런데 박사는 사람이 인정한 것이요,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직책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학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로 충성한 일들은 하나님께 기억됩니다.
사람이 주는 인정으로 만족 삼지 말고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들을 섬길 때
주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3)사특한 자의 패역과 정직한 자의 성실
사특하다는 말은 “속이다”라는 뜻이고,
패역은 “넘어드리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왜곡시켜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악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거짓을 말해도 된다는
신천지의 말은 성경을 심히 왜곡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위해 거짓을 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이 거짓을 수단 삼아 복음을 전한 적도 없습니다.
만일 그러했다면 더 손쉽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목숨도 지켰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심은 씨앗은 거짓된 신앙을 낳습니다.
그래서 6절에는
“정직한 자는 구원에 이르지만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라고 말합니다.
4)재물을 쌓는 자와 의리를 쌓는 자
성경본문은 주가 진노하시는 날,
즉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물질은 위기 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코로나 때 일본에선 사재기가 일어났습니다.
위기 때마다 금값은 오릅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위기를 쉽게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물질로 우리의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의리”는 죽음을 면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의리”는 개역개정에서는 “공의”로 번역됩니다.
‘정직’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을 쌓기 위해 거짓을 행하고,
욕심으로 사람들과 충돌하는 삶보다
정직하고, 타인을 위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5)이제 7-8절에서 악인과 의인에 대한
최종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인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저울을 속이는 자이며,
교만한 자이고,
사특한 자- 남을 넘어뜨리려 속이는 자이며,
현재를 위해 세상에 재물을 쌓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죽을 때 소망이 끊어집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공평한 추로 사람들에게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겸손한 자이며,
정직하며.
의리-공의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환난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에는 악한 자가 대신 빠집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19)
우리는 강윤성 씨 같이 변화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본질상 살인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선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으로 빛나고,
주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으로 세상을 비춰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 상황에서 주님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실지 물으며 산다면
반드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우리를 통해 교회로부터 상처받고 떠났던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정직한 자의 선물
잠 11:1-15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복)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잠언 11 장11절)"
1988년에 손에 들어왔던 작은 책은 내 삶을 진동시켰다. <이성에서의 도피>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을 재정립하게 하였다. 그렇게 만났던 프란시스 쉐퍼는 끈질기게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답>을 요구하였다. 정직한 자는 자신도 살고, 교회도 살리고, 이웃도 살린다는 확신이었다.
솔로몬은 지혜자의 특징으로 정직함을 강조한다. 정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정직한 자의 공의와 성실은 자신을 온전하게 만든다. 정직은 사는 길이고 거짓은 죽는 길이다(1-7).
정직한 자의 또 다른 모습은 의인이다. 의인은 환난가운데 구원에 이른자이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자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이다(엡 2:8-9).
의인이 형통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공동체가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정직한 작, 의인들이 형통하여 복을 나눠줄 때이다.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자신의 영광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의인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불의한 자, 욕망에 사로잡힌 자, 신앙을 도구로 삼는 자가 세우는 교회는 세워지는 것 같아도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8-11).
정직한 의인은 지혜자다. 지혜를 주신 것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고, 평안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약백성으로 부르셨다. 언약백성들의 샬롬을 위하여 지혜자로 삼으셨다. 이것이 택함받은 자의 정체성이다 (12-15).
완전한 자, 정직한 자. 의로운 자,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누구도 정직한 의인으로 살수 없다.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인과 지혜자와 정직한 자를 무시하고 없앤다. 타락한 옛 사람은 언제나 불의를 즐거워한다. 거짓을 양식으로 삼는다. 그래서 절망한다.
완전한 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없다. 그리스도만이 완전하고 정직한 의인이고 완전한 지혜자이시다. 정직한 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에 연합되어야만 가능하다. 그 길은 성령의 임재재이다. 성령의 임재는 예수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이다.
예수 믿음으로 정직한 의인의 정체성을 가지면 공동체를 살리는 일을 한다. 선한 말을 통하여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세우는 일을 한다. 정직한 자의 선물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 일을 지속하려면 날마다 복음의 고백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 장29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공동체를 즐겁게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난 많은 교회들
잠 11:1-15
이어지는 본문도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면서 그들의 다른 결말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의인과 악인이 이웃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합니다.
1절 속임수를 미워하시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매매를 기뻐하십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 또 어떤 거래를 하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남을 속지지 말고 양심을 팔지 맙시다. 모든 것이 하나니 눈 앞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2절 교만해서 자기 잘못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충고도 귓등으로 듣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의 부족함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받을 것입니다.
3절 앞길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정직과 성실입니다. 잔꾀를 부리는 사람이 앞서가고 성공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밝은 앞날을 맞이할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4-6절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은 심판 날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곧고 안전한 길로 인도합니다. 반면 악하게 산 사람은 많은 재물로도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물보다 공의를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7, 8절 악인은 죽음과 함께 소망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받으며, 죽음도 그의 소망을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의롭게 살아온 이에겐 부활과 영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9-11, 14절 의와 악은 이웃과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위기를 겪지만,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이로움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내가 정의롭고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12, 13절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일입니다. 걱정한다는 구실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고 허물을 들추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침묵이 지혜일 때가 많습니다.
15절 빚 보증을 서는 것은 큰 사랑 같지만, 사실 지나친 자만입니다. 내가 보증할 수 없는 것을 보증하지 말고, 겸손하게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 주십시오. (매일성경, 2021.05/06, p.70-71, 하나님을 기쁘시게, 공동체를 즐겁게, 잠언 11:1-15에서 인용).
① 이어지는 본문도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면서 그들의 다른 결말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의인과 악인이 이웃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합니다. 속임수를 미워하시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매매를 기뻐하십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 또 어떤 거래를 하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남을 속지지 말고 양심을 팔지 맙시다. 모든 것이 하나니 눈 앞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② 교만해서 자기 잘못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충고도 귓등으로 듣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의 부족함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받을 것입니다.
③ 앞길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정직과 성실입니다. 잔꾀를 부리는 사람이 앞서가고 성공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밝은 앞날을 맞이할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④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은 심판 날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곧고 안전한 길로 인도합니다. 반면 악하게 산 사람은 많은 재물로도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물보다 공의를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⑤ 악인은 죽음과 함께 소망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받으며, 죽음도 그의 소망을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의롭게 살아온 이에겐 부활과 영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⑥ 의와 악은 이웃과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위기를 겪지만,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이로움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내가 정의롭고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⑦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일입니다. 걱정한다는 구실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고 허물을 들추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침묵이 지혜일 때가 많습니다.
⑧ 빚보증을 서는 것은 큰 사랑 같지만, 사실 지나친 자만입니다. 내가 보증할 수 없는 것을 보증하지 말고, 겸손하게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잠 11:1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의 행복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 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에게 가장 귀한 것들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란 결코 하나님의 이기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의 잘됨을 부모가 기뻐하듯 우리의 행복을 위한 요구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1.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셨습니다.
왜 믿음을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큰일을 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은혜이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믿어 복을 받기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을 때 칭찬하셨고 믿음이 없을 때는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도마에게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사람보기에도 믿음이 없으면 보기 싫은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2.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대상29:17에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는 줄 내가 아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곧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이 모든 땅을 다 주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신앙 인격으로 바로만 되어 되어 보세요. 시84:11에 약속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셨습니다.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작은 마을에 농자재를 파는 하메닝씨는 목장 일 때문에 오후에는 가게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정직하든지 오후에 오는 사람은 문에 걸린 장부에 가져간 물품을 적고 가져갑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한 번도 물건을 도난당한 일이 없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해야 합니다.
왜 남녀 목욕탕이 예우에 차별이 있을까? 저는 남자로서 여자 목욕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니까 우리 남자들의 이야기만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남자들은 목욕탕 비품을 가져가지 않고 빨래하지 않으며 한 시간도 많다고 하면서 일찍 나오고 물도 아껴서 씁니다. 그러니까 예우가 따라옵니다. 사람들도 정직을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3. 하나님은 의와 공평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 잠21:3에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했습니다.
저울눈 속이는 것은 하나님과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에 정직한 문화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내야 하겠습니다. 잘사는 것보다 의롭게 사는 것이 더 귀해요. 이제는 축복보다 의롭게 사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안심할 수 있게 될 때 이 나라의 상권은 누구에게로 돌아가겠습니까?
4. 하나님은 온전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
잠11:20에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믿어 칭의의 옷은 입었지만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한 성화의 흰옷을 입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서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 받았지만 새 예루살렘의 영광 속에 들어가려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즉 이제 풍성한 은혜를 누리려면 행위까지 씻음 받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요8:21에 “너희가 나를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겠고” 하신 말씀을 보았지만 죄 가운데서 아무리 예수님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2-14)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요셉과 같이 자기 신앙 지키고 온전해야 합니다.
5.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겔 33:11에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셨고, 눅15:7에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이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셨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처럼 죄인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돌아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올 해는 꼭 한 명씩 작심하시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6. 우리 몸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기뻐하십니다.
롬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약하고 피곤해도 늘 몸을 드려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편히 섬기려면 상이 없습니다. 멀어서 힘들어도 불평하지 말고 힘쓸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상주십니다. 날씨 추워 움직이기 싫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십니다.
7. 하나님은 선행과 서로 나누어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히13:16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잠14:31에도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하였습니다. 또 잠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선행할 때 갚을 길이 없는 사람에게 해야 상이 있어요. 엊그제 전주에 헌 물건을 기증 받아 사랑의 세일을 하여 남은 돈으로 구제하는 것을 가보았는데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는 없어서 굶고 누구는 남아서 썩어서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어차피 달란트도 다르고 능력의 차이가 있어요. 그러므로 서로 나누어야 해요. 강제적인 공산주의는 비성경적이지만 사랑의 나눔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교역자만이라도 모범을 보여 생활비를 평준화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 교역자의 십일조는 노회에 바치고 노회에서는 그것을 미자립 교회 생활비로 지급해야 합니다. 구약에 12지파가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치고 레위지파 역시 자기 십일조를 아론의 계열에 바친 것도 평균화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그 정신은 이어 받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일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8. 하나님께서는 찬송과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시 69:30-31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사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찬양대원으로 지으셨습니다.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고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갑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시편기자처럼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시기를 바랍니다.(시146:2)
9.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삼 1:4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했습니다.
갈 5장을 보면 마귀가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원수 맺고 분쟁하고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을 싫어하시지만 마귀는 이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등 성령의 아홉 가지를 가장 기뻐하시지만 마귀는 이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벌은 꽃을 좋아하고 똥파리는 똥을 좋아하는 이치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십니까? 오직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만 좋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 받아 이상의 말씀대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은혜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은혜 받지 않고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 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저울질 하고 있는가?
잠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A false balance is abomination to the LORD: but a just weight is His delight (Proverbs 11:1)
야고보서 1:4-8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저울'은 무게를 재는 것이며, '추'는 무게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저울과 추를 속여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할까요? 그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심과 욕망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탐욕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십계명 중에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 관계에서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계시는 계명들입니다. 특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5계명을 제외한 모든 계명은 인간의 욕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간음, 살인, 도적질, 탐심, 거짓증거 등 그 모든 것은 다른 이의 어떠한 것을 탐하기 때문에 나오는 죄의 열매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1계명과 2계명에서 반복해서 우상숭배를 경고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3분의 2가 우상숭배 즉 탐심에 대해 우리에게경계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탐심(우상숭배)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29절을 보면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정직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자신의 욕삼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꾀'를 내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하면 다른 이들과 하나님까지 속이고 내 욕심을 채울까를 노심초사하느라 밤에 잠도 잘 자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는 순종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면 나도 무엇을 하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목숨까지 주셨는데, 나는 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의 작은 부분만 드리면서 목숨까지 주신 분에게 무엇을 더 달라고 하는지......
정말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런데 우린 너무 잘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그러니까 자꾸만 세상과 하나님을 저울질 합니다. 어느 쪽이 더 나에게 유익할까? 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과 주님을 저울질한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모두 내려 놓읍시다.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저울을 가져다가 사람들과 거래하기도 합니다. 아주 조금만 속이면 모를 줄 알고......
그런데...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속이는 것을 미워하시지만, 반면에 공평하고 정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다음의 말씀들이 나에게 전혀 걸리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마음이 불편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즉시 고백합시다.
나는 하나님께 미움받을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과거에? 아니면 지금도?
생각나는대로 빨리 회개하자.
무엇을 한다고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돈을 받아서는 얼마는 나 자신을 위해 몰래 떼지 않았는가?
돈을 받고 서류를 거짓으로 작성해주지 않았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돈을 받고 허위로 영주권 등을 작성해주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해주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그 교회와 목사를 헐뜯는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을 교회에서 해주지 않았다고 교회와 목회자를 욕하지는 않았는가?
일관성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물건을 사서 상표를 떼지 않고, 한두번 쓰고는 가게에 가서 다시 바꾸지 않았는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사기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 돈을 쓰지않고 좋은 옷과 신발을 신고 파티에 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며 사기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사람 사이에 편견을 갖고 누구에게 더 잘해주면서 차별대우를 하지 않았는가?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더욱 잘 해주고, 나에게 유익이 없는 사람은 모르는 척 하지 않았는가?
가난하고 별볼일 없어보이는 사람은 외면하고, 잘 살고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과 가까이 하려고하지 않았는가?
조금이라도 무엇을 하면서 나의 이익을 챙기지는 않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행동을 잘 하고 있는가? 그래서 사랑과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사랑받을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억울하게 할지라도 나의 저울에 그를 재어보면서 그와의 관계를 갖지 말자. 내 저울에 그가 많이 모자랄지라도 하나님의 저울에 나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겸손히 이웃을 사랑하자.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에 세밀하게 조심을 하며 살아가자.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과 공의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아침에 저의 불성실함과 이기주의적인 조건적인 사랑과 주님의 성실함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생각하며 고맙기도 하면서 너무나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저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는데, 저는 지금도 계속해서 무엇만 해주시면 믿음생활을 잘 하겠다고 어린 아이처럼 보채고만 있으니 주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저에게 유익이 될만하면 그와 가까이 하고, 그렇지 않고 저에게 여러 면에서 유익하지 않으면 멀리하려고 하는 저를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제 삶 속에서 그동안 공평치 못한 저울 추를 쓴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다 생각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제 입을 열어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항상 주께서 기뻐하시는 공평하고 정직한 말과 행동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성령 충만케 하셔서 저처럼 부족하고 공평하지 못한 이웃을 주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서 주께 영광돌리는 제가 되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