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순례길의 종착점, 야고보가 묻혔다고 알려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빨래방 벽에 전시돼 있던 엽서 중 하나다. 카미노 길에서 가장 중요한 세 글자 BAR다.
걷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라 바르를 찾게 된다. 허기지고 목마른 상태에서 이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에 무심코 들어가면 안 된다. 우리 부부도 사나흘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는데 한국인들은 생각 없이 쑥 들어간다. 그런데 외국인들, 특히 백인들은 배낭을 벗어두고 밖의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린 뒤 가게 안에 들어가 커피나 맥주를 주문한다. 비가 내리면 우의를 벗어 정돈해 놓고, 스틱은 바르 밖의 통에 넣고 들어간다. 진흙이나 더러운 것이 신발에 묻어 있으면 털고 들어간다.
대부분의 바르는 커피나 맥주를 마시는 공간과 레스토랑이 분리돼 있다.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안 된다. 우리도 딱 한 번 결례를 범했다가 주인에게 혼구녕이 난 적이 있다.
바르의 커피값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 사진을 보자.
아메리카노와 커피 콘레체 두 잔에다 8자 모양의 도너츠 같은 것을 주문했다. 포크 옆에 놓인 것이 또르띠야다. 한국인들이 탄복해 마지 않는 간식이다. 감자를 으깨 계란과 섞어 만든 먹거리인데 맛도 빼어나고 든든하다. 커피를 시키면 공짜로 준다. 커피 두 잔에 도너츠 같은 것 합해 4.2유로(약 6320원)다.
스페인은 유제품이나 커피 맥주가 아주 싸다. 아침 6시에 문을 여는 바르도 적지 않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공공 근로자들이나 어르신들이 찾는 바르다. 이런 바르라면 커피 한 잔에 또르띠야를 내주며 1.5유로를 받아 우리 부부를 놀래켰다. 그들은 주인과 눈인사하며 의자에 앉거나 바르에 팔을 짚고 서 있으면 주인이 알아서 커피를 내준다. 오랜 단골들이다. 한 번 얘기가 시작되면 끝없이 이어진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사뭇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는 감지된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다가 이어진다. 목소리 톤도 매우 높다. 커피잔이나 스푼 같은 것을 거의 던지듯 한다. 깨진 잔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와인 잔 큰 것에 가득 생맥주를 부어주는데 마찬가지로 1.5유로 정도 받는다. 역시 또르띠야나 감자칩 같은 안주를 거저 내준다. 갈급도 해소하고 요기도 된다.
그러니 순례객들은 눈에 불을 켜고 카미노 길을 일러주는 노란색 화살표와 열린 바르를 찾기 마련이다. 바르 문이 닫혀 있으면 낙담하고 열려 있으면 환호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세 글자다.
바르 얘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이유는 순례길을 찾는 이유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다. 가성비가 뛰어난 곳이 순례길이다. 우리 부부가 만나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여행 부부가 있었다. 9개월째 해외 여행 중이었다. 그유명한 용서의 언덕을 넘으면서 처음 우리 부부를 봤다고(우리는 잘 기억해내지 못했다) 얘기한 그들과 2주 정도 길 위에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함께 묵는 마을에서 같이 식사하곤 했다. 그들에게 왜 순례길을 택했는지 묻자 "여기만큼 값싸게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답했다. 2019년 초여름에 찾았는데 두 번째로, 늦가을을 택한 것이었다. 올해 그 아름답다는 북부길과 그 삭막하다는 은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부부는 무니시팔 알베르게에서 묵는다. 코펠을 갖고 다녀 밥을 지어 먹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알베르게 주방에서 김밥을 싸서 먹다가 여러 외국인들이 두 손 모아 간절히 내밀더라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한 입만 맛보게 해달라는 애원이었다고 했다.
스페인은 유제품이 아주 싸다. 요거트 4개들이가 1유로 하는 것도 수두룩했다. 커다란 곽의 우유도 3유로 이상 하지 않았다. 신선한 오렌지를 착즙해 1리터 용기에 담아주는 기계가 대형 마트엔 있다. 1리터 담으면 3.7유로인가 했다. 맛은 기가 막혔다. 우리 부부도 전날 저녁 구입해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창 밖에 내놓았다가 아침에 마시면서 탄복하곤 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엄청 싸다. 여행 부부는 매일 저녁 고기 파티를 벌인다고 했다. 햄이나 치즈 같은 것도 맛있고 싸다. 바게트 빵도 아주 저렴하다. 새벽에 길을 떠나면 꼭 빵 가게는 문을 열어놓아 우리 부부는 바게트 빵을 사곤 했다. 노트북 컴퓨터 화면만한 바게트가 1유로라면 믿어지는가? 난 '한국 빵은 왜 그렇게 비싸고 맛이 없는가' 묻곤 했다.
사과나 감, 배, 납작복숭아(우리는 제철이 아니어서 먹어보지 못했는데 한국인 순례객들은 꼭 맛보아야 한다고 한다) 등도 싸고 맛있다. 우리는 전날 장 본 것으로 아침에 간단히 샌드위치 같은 것을 만들어 먹고 8km나 10km 걷고 난 뒤 바르에 들러 커피에 또르띠야를 먹으면 점심을 건너 뛰어도 괜찮았다. 구간 길이에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대략 2시나 3시쯤 숙소 들어가 씻고 샌들 바람으로 마을을 쏘다니다 바르에서 맥주 한 잔에 타파스로 허전한 속을 채운 뒤 순례객 메뉴(메뉴 달디아) 12~15유로(물론 대도시는 18유로까지 받는 곳도 있다)를 사먹곤 했다. 이렇게 한 끼만 챙겨 먹어도 워낙 양이 많아 든든했다. 메뉴 달디아를 시키면 와인 한 병을 그냥 테이블 위에 놓고 휭 가버려 깜짝 놀라곤 했다. 다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면 뭘 그런 걸 물어보냐고 한다.
메뉴 달디아를 먹겠다고 해서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으면 종업원이 다가온다. 이 때 비노 빈또 도스(붉은 포도주 두 잔) 하면 종업원이 약간 놀라는 기색을 한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식사부터 주문하기 때문이다. 종업원이 와인을 가져오면 천천히 마시며 스타터, 메인, 디저트로 뭘 먹을지 골라야 한다. 그러면 한참 뒤 종업원이 스타터, 메인, 디저트 식으로 물어온다. 이렇게 하면 상당히 대접 받는다. 종업원이 오지 않는다고 손짓을 하거나 큰소리로 부르면 볼썽사납다. 'xx한 아시안'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인종차별 얘기를 하곤 하는데 내가 경험한 스페인인들은 그런 것 없었다. 그저 자격지심이다.
마트에 가면 와인 한 병에 1유로대, 2유로대, 3유로대가 수두룩했다. 한국은 엄청 비싸다고 생각하며 순례길에서 엄청 마셔댔다. 아내도 어엿한 술꾼이 됐다. 그런데 13일 저녁 집 근처 마트에 갔더니 연말 특가라며 6900원, 7900원 하는 와인이 즐비했다. 참고하기 바란다.
우리는 카미노 길 위에서 숙박과 식사 비용으로 하루 100유로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산술적으로 40일을 순례길 위에 있었으므로 4000유로(약 600만원)쯤 된다. 파리 이틀과 포르투, 리스본 사흘씩은 워낙 관광 도시인 데다 딸까지 함께 보낸 터라 1.5배나 2배쯤 됐다. 2배라 해도 1600유로(240만원) 정도다. 항공권 예약을 8개월 전에 해 둘의 왕복 항공비는 240만원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아니지만 쇼핑한 것까지 합하면 아내는 1200만원쯤 쓴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많이? 할지 모르겠는데 유럽의 다른 곳을 50일 동안 여행했다면 명함도 못 내밀 금액일 것이다.
'시간 부자'가 가장 가성비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순례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순례길에서 보고 배우며 느끼는 것도 만만찮은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괜찮은 선택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