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은 누가 풀어 놓았을까 외 2편
김성신
예감은 때로 정지신호,
가늘어진 말들이 마른 기침소리를 낸다
침묵은 세상 밖의 노선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두리번거릴 때,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나를 잠글 때,
벼린 시간이 나뭇등걸에 매달려 있다
부랑자가 뱉은 마른기침을 먹고
공원의 편백은 무심히 자라 반백이 되고 다닥다닥 붙어 가계를 꾸리겠지
음률을 고스란히 옮긴 떨리는 손의 음표들
슬픔 위에서도 가볍게 내려앉아 기꺼이 날아오르려는 눈빛
내딛던 발을 걷은 껍질처럼 공손한 자세로 공벌레들이 웅크려있다
그늘이 거느리는 길을 묵묵히 따르는 당신
나방을 뒤따르는 한 무리의 침묵
어둠이 흩어지고 남긴 서늘한 빛무리 속으로
울고 남은 몇 개의 말들이 저녁으로 이운다
내가 버린 칼날의곡哭들은 어디에 기대어 있을까
흰 뼈들이 공중을 떠돌고
입술 달그락거리던 석양이 홰를 친다
어느 쪽을 돌아봐도 낯설게 웃고 있는 얼굴들
어떤 생각은 날개가 꺾인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묻고
핏기 없는 바람이 난간 끝에서 발끝을 모은다
진눈깨비처럼 쌓여가는 내 어깨의 석회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노랫가락을 붙잡고
눈 속의 혀는 오랫동안 습기를 핥고 있다
비로소 인적이 사라진 고행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들
그 뒤를 맹목으로 따르는 어슴푸레한 것들이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바깥이 자꾸만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미그레이션
낮은 짧고 밤은 길지요
그 반대여도 상관은 없지만요
엄마는 늘 빈 젖만 물렸지요
빈 것들은 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인지,
나는 예멘에서 왔어요
아멘이 아니고 예멘 말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플래시가 팡팡 터지고
텔리비전에선 우리가 살던 집과
외양간의 늙은 소들을 비췄지요
화면 속의 사람들은 다 떠나고
이름 모를 작은 나무 한 그루
포탄처럼 온통 붉었죠, 눈물은 아닐 거예요,
함께 온 예멘의 어른 몇은
이제는 이곳이 우리가 살 땅이라고 말했지요
아니, 살고 싶은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했지요
인형도 과자도 나무도 구름도
숭숭 구멍 뚫린 돌처럼
집을 잃은 바람들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곳,
매일같이 시끄럽지만 그래서 평화로운 이곳,
발 동동 구르다 보면 하루해가 저만치 멀어지죠
제주는 태초부터 새콤한 감귤나무가 자라났나요?
새별오름에는 날마다 새 별이 떠오르나요?
질문할 때마다 엄마는 눈감고 젖이나 빨라고 했지만
그럴 때면, 나는 알아도 모르는 사람이 되죠
매일 아침 밀빵을 구우면
어떤 생각들은 이스트 없이 부풀다 이내 가라앉지요
엄마의 봉긋한 젖무덤이 저기 위, 한라봉 같아요
언제 터질지 몰라요, 엄마도 나도 저 구름도 말이죠
활활, 이글이글, 용암처럼 흘러
뜨겁게 이 섬을 덮으면 우리는 모두 즐거워질 수 있을는지,
앞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뒤가 잠잠해진 뒤에야 다시 제 몸을 일으키죠
이것은 아는 사람만 모르는 비밀 이야기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만 아는 매우 흔한 이야기
쉿,
말
두부 같은 집이었지, 바위처럼 단단한 집이었지
당신의 젖은 귀와 부르튼 입술을 생각해요
오체투지, 바닥에 낮게 엎디는 참례의 시간
맹금처럼 날 선 발톱이 풍경을 수습하고
비로소 내려앉은 마음들은 먼 곳을 바라보네
어제와 오늘 사이의 음소가 분절될 때
울적의 리듬은 박장대소와 굿거리장단에도 후렴을 맞추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한 묵음이 벽을 뚫고 울려 퍼지지
허공을 가로질러 바라보면 이 세상은 때로 질문들의 증명
먼 곳에 있는 것이, 가장 가까운 곳으로 숨 쉴 때
가로지르는 것이, 내 옆에 있었음으로
누군가 되물어도 입술을 깨물 뿐
말의 섬모는 부드럽지만 함부로 내뱉을수록 공허해져
끝은 뼈처럼 하얗구나
함부로 내뱉은 말들이 부유하는 소란의 세계
돌아나가던 命이 여기서 저기로 숨어들면
혀를 내밀어 숨겨진 말맛을 핥는다
음, 그늘진 속이 보일 땐 아늑하기까지 하군
오랫동안 놓지 못한 헛꿈이 측면으로 사라진다
굽이치는 강물에 작은 손바닥을 휘저으며
고립에 빠진 낯이 쉬웠다는 일기장
쓴다, 지난한 것들이 번져가는 달그림자를
무수한 별들
당신이 흘린 말에 박혀
차마, 혀를 빼내지 못한
그 사이의 사이
― 김성신 시집,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 (포지션 / 2022)
김성신
전남 장흥 출생. 201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졸업.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