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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마르코 9,41-50
성당 다녀도 마음에 이것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육체로 살 수 있고, 마음으로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사는 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육체로 살면 동물과 같습니다.
음란물을 보는 사람이라면 육체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로 살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로 사는 이유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소금이 없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은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과 심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음식에 미치는 영향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결정짓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코 9,50)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타인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우리는 고전 『비밀의 정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메리 램지는 처음에는 냉정하고 외롭고 방치된 소녀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고모의 집으로 오게 되지만, 고모부는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그녀의 마음은
그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의해 더욱 닫히게 됩니다.
화원은 그 당시 고모의 것이었고, 그녀의 고모부가 그 화원을 잠그기까지 했습니다.
고모가 죽었고 그로 인해 고모부가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리는 그 화원을 가꾸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 마음이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화원을 가꾸는 모습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삭막한 소녀였던 그녀의 마음이 결국 얼마나 따뜻하고 변화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비밀의 화원처럼 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마음이었습니다.
메리의 변화된 마음은 곧 콜린이라는 고모부의 아들에게로 전달됩니다.
콜린은 병약하고, 몸이 쇠약해져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꾸만 자신의 질병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그의 아버지마저도 그를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메리의 마음은 콜린에게 새롭게 변화된 환경을 제공했고, 그 마음에 합당한 변화를
끌어냈습니다.
콜린이 화원을 가꾸겠다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메리는 콜린에게 새로운 마음을 심어주었고, 그 마음은 콜린의 아버지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모부는 처음에는 메리의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메리의 행동을 단순한 소녀의 취미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따뜻한 마음과 지속적인 노력은 결국 고모부의 마음도 변화시켰습니다.
아들을 방치한 것을 후회하고 콜린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메리는 화원을 가꾸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가꾸고 변화시켰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마음이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메리가 화원을 가꾸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을 넘어서, 콜린과 고모부의 마음을 변화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음이 나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많은 물리적인 환경을 주어도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메리의 마음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금’입니다.
‘선한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 에덴동산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누구나 각자의 환경으로 다른 이들을 맞아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변화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또한 소금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코 9,50)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을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설리반 선생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헬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의 사랑과 헌신은 헬렌을 변화시켰고, 헬렌은 사랑이 무엇이냐는 설리반 선생님의 질문에 “선생님이 처음 저를 보았을 때
저를 꼭 안아준 것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포옹이 곧 마음이고 그 마음 안에 상대를 초대하는 일입니다.
우리 에덴동산에 많은 이들을 품어 그들 또한 에덴동산을 마음으로 가진 구원하는 존재들이
되게 합시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은 본래 소금을 간직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어 나의 곁에 있는 이들을 좋게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7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9,41-50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십시오!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44)
너무나 강경한 예수님의 말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때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돈보스코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여기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목요일 강론>
(2025. 2. 27. 목)(마르 9,41-50)
<‘구원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1-50).”
1) ‘물 한 잔’에 관한 말씀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7-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구원받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약속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물 한 잔’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선행과 사랑이라도 다 기억하시고 상을 주신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인이 되지 못했더라도,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사람들, 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손(발, 눈)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1-33).”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오른 팔’ 같은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였지만, 그가 당신이 가시는 길을 막으려고 하자, 아주 단호하고 엄하게 그를 잘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아끼다가 구원사업을 망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를 완전히 잘라낸 것은 아니고, 그가 떨어져 나가기 전에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손, 발, 눈’은,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간에 ‘내가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또는 그 물건이 내가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 사람을, 또는 그 물건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심과 미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그 사람을, 또는 그 물건을 끊어내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끊어내는 것은,
‘그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죄 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려라.” 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잘라내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3)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온 삶으로 실천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쓸모가 없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