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루카 14,25-33
처음부터 일부분만 버리기로 작정하며 시작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바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종’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자기 소유입니다.
며칠 전에 성령 기도회 때 수원교구 윤민재 베드로 신부님이 하신 강의 중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제 기억이 올바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떤 자매가 병자성사를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재발하면 의사가 80% 이상 사망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발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에겐 누군가를 향한 깊은 미움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만나면 상해를 입히려고 옷에 칼도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상황에선 병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며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미사도 넣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발한 암이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혈액암은 치료가 되었지만, 그분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수술을 한 번 더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성사를 다시 달라고 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약을 그냥 먹으면 되지 왜 굳이 수술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수술하려면 한 달간 무균실에 있어야 하는데 거의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아픈 게 아니니 병자성사는 줄 수 없고 안수만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분은 고집을 부리며 수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른 성당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수술하였는데, 암이 세 군데로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신부님께 와서 신부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죄송하다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병자성사를 주었고 신기하게도
그 자매는 며칠 뒤 사진을 찍었는데 암이 다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당에 다닐 것이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을까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을 없애야 합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할 수 있는 주체인 내가 죽으면 됩니다.
아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악이요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윤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흰 뱀 2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의 말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분이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은 시어머니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남편입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내의 버릇을 고치도록 두들겨 패게 시켰다고 합니다.
남편은 지게 작대기로 아내를 때렸고 아내의 허리가 다쳤습니다.
아내는 남편도 밉고 시어머니도 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분들을 용서하고 미사를 넣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잠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고 나의 판단은 항상 옳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진리이시고 우리는 거짓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려면 죄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려면, 나 자신을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만약 나에게 좋은 게 있다고 여긴다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구정물로 얼굴을 씻고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일을 시키실까요? 우리 자신의 판단은 무조건 틀린다는 믿음, 나의 스승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준이 아닌데도, 어떤 분은 저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사.시., 7기도, 성체조배 매일 1시간을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로마 13,8-10
루카 14,25-33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며칠간 연이어 봉독된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상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지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직 초대에는 크게 망설입니다.
그 이유는?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27절)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절대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들마저 모른체 했습니다.
하느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해 가족을 칼처럼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이유로 가족에 대한 모든 의무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네번 째 계명을 폐기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셈족어의 표현으로,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2차적인 자리에 둔다거나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진의(眞意)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불효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형제자매들과 등지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세상의 모든 질서 체계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세상 만사 안에 첫째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인간들과 존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그분 존재는 모든 법중에서 가장 첫째가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크심과 완전하심, 새로움 앞에, 이 세상 모든 존재나 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은 최우선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찬미하는 기도생활, 영적생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 사랑의 실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혹시라도 일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부차적인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네 삶 속에서 첫번째 자리가 아니라, 가장 가장 자리로 밀려나가 계신 것은 아닌가요?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 중독 증세, 취미활동 중독에 푹 빠져,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에는 무관심한,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1. 6. 수)(루카 14,25-33)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33).”
1) 여기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가족과 가정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족’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식구들이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또는 죄를 짓는 것을 본다면,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따라가면 안 되고,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은 허무하게 사라질 육신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헛된 집착을 버리고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2)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고, 이 가르침들에 대해서 “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려운 길만 알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 길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 가야 합니다.
27절의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과 33절의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3) ‘탑’에 관한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끝까지 전력을 다하여라.”입니다.
시작만 하고 마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은 아예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을 중간에 버린 사람은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과 같습니다.
‘임금’에 관한 말씀은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싸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려고(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항복(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전쟁으로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줄 알고 우쭐대면서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맞서서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다가 망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즉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바벨탑을 쌓으면서 무슨 큰 업적을 쌓는 것으로 착각하고 혼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