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원제:THIS IS IT : The Nature of Oneness )
얀 케르쇼트 Jan Kersschot
에필로그
'해방을 꿈꾸는 자여,
좋은 얘기 하나와 나쁜 얘기 하나를 해주마.
나쁜 얘기라 함은 네가 너라고 생각하는 그 자가
영원히 '해방'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고,
좋은 얘기라 함은 너의 진정한 본질이
이미 깨달음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 마음속에 담긴 희망을 찾아서
영성과 깨달음에 관한 책에는 대개 개인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르러야 할 더 높은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현인들은 이르렀지만 나 자신은(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
이런 이야기는 자신이 남들로부터 구분된 존재라는 느낌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준다. 대부분의 책은 독자 '여러분'을 들먹이며,
그 여러분이 자신의 향상을 위해 어떤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사람들의 믿음에 영합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기 위해서는 영성을 더 높여야겠다는 독자들의 믿음은 이런 가르침을 통해 더욱 굳어진다.
이런 가르침이 사람의 마음을 잘 끄는 것은 희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빛을 언뜻 본 것 같은데 그 빛을 줄곧 쏘이며 살고 싶은 사람들...
숭배하는 영적 지도자의 흉내를 내거나 그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그 지도자와 비슷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
마음은 그 반대쪽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자신이 그분들처럼 완벽한 존재가 결코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은 영원히 그것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이나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나,
양쪽 다 자신을 구분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물이
마음속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인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믿음이다. 앉아서든 서서든 누워서든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는 그 인물...
이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기 몸과 마음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위해 대단히 유용한 관점이다. 그러나 '해탈'解脫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뜻밖에도 각자의 존재라는 것이 하나의 유령, 마음에 나타나는 하나의 관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독자께서 이 말씀을
선뜻 믿어주기를 바라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제시하는 관점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그로부터 어떤 경치가 펼쳐지는지 살펴봐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해탈'이란 아직도 널리 통용되고 있는 영적 깨달음에 대한 오래된 관념과 다른 것이다.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 또는
오랜 세월(수십년 내지 온 평생)의 정진을 통해 자격을 얻은 사람들에게 마침내 주어지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높은 경지라는 것이 이 통념이다. 이 깨달음의 경지는 완전한 것, 평화로운 것, 선한 것, 그리고 환희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이란 전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왕좌에 올라서는 것 같은 일이 아니다. 얀이라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 녀석이 자기 독자들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다. '얀'이라는 인간의 존재 역시 의식의 화면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영상일 뿐이다.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인데, 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진정한 본색은 삶의 체현體現이요, 어느것도 제외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내 본색이요, 경계境界라는 것은 없는 것이요, 다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경계의 관념이 있을 뿐이요."
이 책이 나 자신, 그리고 대담을 위해 만난 사람들(제3장 참조)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물론 하나의 패러독스다.
나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인 측면이나
현상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고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만 관심을 집중할 경우,
그 단어가 무엇을 가리키기 위해 쓴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말이란 원래 이분법二分法의 속성을 가진 것이므로
비분법非分法을 설명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자가당착과 모순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다. 비분법이란 것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리키려 하는 것이 이 책이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당신","나","우리" 따위의 말을 이 책에서 쓰지 않을 수 없는데,
마음속의 관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한 것들이다. 독자 당신은 내가 언어를 통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언어를 읽고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물은 마음속의 관념일 뿐이다. 그 인물이 항구적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기억의 게임일 뿐이다. 하나의 유령인 셈이다.
별개의 존재로서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나의 유령이 또 하나의 유령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의 처지가 절망적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에서
무슨 전략이나 숨겨진 길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혹시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 어떤 특정한 책을
읽을 것, 어떤 특정한 스승을 찾아볼 것, 또는 버려야겠다고 생각되는 것을 버릴 것을 내가 당신께 권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면, 그 느낌을 묵살해 버려라.
이곳을 떠나서 가야 할 다른 곳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이미 존재하는 그 장소로 내가 어떻게 당신을 데려갈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미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색本色을 내가 어떻게 새로
줄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깨달음이란 영적 유물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이 일을 놓고는 자신의 욕심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당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란 말인가?
하나의 관념을 더 거룩한 또 하나의 관념으로 바꿔놓는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연방임"이니, "자아탐구"니, "현실순응"이니, "무위"니 하는 말들조차 조금 고상하기는 하지만 역시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인물이라는 것이 마음속의 관념일 뿐이라면 그 영적 차원을 높여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더 훌륭한 유령이 되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한낱 허상虛像이 깨달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독자의 영적 욕심을 없애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욕심을
꼭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없앰으로써 더욱 높은 경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욕심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Where Are You Going?
해탈을 얻는데는 정해진 단계도 없고 규칙도 없다.
당신이 좋아하는 곳, 그곳이 바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있음'
Beingness
이 페이지에 찍혀있는 단어들을 읽으면서 그 단어들이 당신의
현재 의식속에 나타나고 있음을 당신은 느끼고 있다.
아마 당신 몸의 몇몇 부위에 대해서도 당신은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느낌과 의식이 당신이 '존재'함을 확인해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아." 하는 말을 당신은 할 수 없다. 이렇게 존재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 새상의 어떤 인식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다. 그저 여기에 있다는 것, 그저 있다는 것. 어느 장소로 옮겨가도
이 존재의 감각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더라도 이 "존재감"은 당신에게 주어지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이 존재라는 것, "있음"이라는 것을 더 차분히 들여다보면 뭔가
불편한 느낌을 일으킬 수 있다. '있음'을 당신의 마음이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있음'에
소유권을 확보하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당신과 상관있는 물건이 아니다. 특정한 의식상태에 들어가는 것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이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이것은 사라져 버린다.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속에서 비누조각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심히 애쓸수록 더 힘만 든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기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있음'은 도망가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하는지는 연습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방도가 없는 까닭은 당신이 그것을 이미
제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감각이 멀리 떠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속속들이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존재란 당신에게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것인데도 당신의 마음은 이것을 붙잡아내지 못한다. 모순이다. 당신과 늘 함께 있는 이것을 어째서 당신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있음이라는 것이 형체를 가진 물건이 아니라 경계가 없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존재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아무도 당신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만약 경계가 없는 것이라면 무한한 것일 테니, 두개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것을 '전일'全一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하나만이 있고 쪼개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자를 붙인 것은 이것의 무한한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존재하는 만물, 만사가 그 안에 포괄된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름은 어떻게도 붙일 수 있다. '의식', '있음', 인식',' 미지'未知, '근원', '빛', '존재'등
아드바이타Advaita 학파에서 '목격자'Witness라고 하는 것,
일본 선종에서 '진면목'眞面目등이라 하는 것, 기독교에서 '아버지'라 하는 것, 중국 불교에서 '불심'佛心이라 하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쉬바', '브라만', '열반', '신'神, '성령'聖靈도 모두 이것을 가리키는 데 쓰인 이름들이다. 이 책에서는 종교적 편향성을 느끼지
않게 하는 '있음'이란 말을 쓴다.
사실에 있어서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몇몇 이름들, 특히 종교와 관련된 이름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마음이 '이것'을 특정한 틀에 끼워 넣어 포착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으로 쓰인
단어의 뜻을 알기 때문에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두뇌와 감각기관에서는 이 '의식'을 관찰할
능력이 없다. 차라리 '의식'이 '의식'을 바라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빛'이 '빛'을 인식한다. 그리고 '있음'은 모든 것이다. '있음' 밖에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
당신 자신이 근원적으로 이 무한한 '있음' 자체라는 사실, 이 경계없는 '우주'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있음'을 찾아내려는,
또는 느껴보려는 노력은 저절로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모든 곳에 채워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따로 어디에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깨달음을 얻으면 지금의 당신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필요성도 사라져 버린다. 죄책과 회한의 감정도 누그러질 것이며, 희망과 목적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 것이다. 주체 - 객체의 관계가 소멸될 것이다. 당신 자신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하는
구도자求道者라는 믿음도 없어질 것이다.
조건과 믿음을 벗어나면 생生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된다.
개인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해체된다. 그래도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 그렇게 보인다. 산골의 시냇물을 보라. 그저 흘러갈 뿐이다. 바위가 가로막고 있으면 그 옆으로 비켜가며 제 갈길을 간다. 계속해서 가도 된다는 명시적인 허락이 없지만 어떤 일의 진행도 가로막는 것이 없다. 영적靈的차원에서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구도자 자신이 한낱 환영幻影일 뿐인데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무관심이나 포기의 분위기는 아니다.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아무런 영적 작업이나 종교적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
동시에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뿐이다.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있는 그대로 인정된다. 무한한 자유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자유를 누릴 개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 기대감이나 종교적 도덕률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하나'를 꿰뚫어 본 사람의 눈에는 구도하는 마음의 온갖 게임들이 시시한 것으로 보인다. 만사가 저절로 풀려가게 되어있는 것이며, 이것이 변함없이 행해져 온 도리임을 깨닫게 된다. 만사는 저절로 형통亨通인 것이다.
'하나'를 찾는 일은 여러가지 모양의 조각들을 맞춰서 그림을 만들어내는 퍼즐게임과 다른 것이다. 그 반대방향으로 하는 일이다.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그 일을 해낸다고 나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의 환영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차지하고 있던 중앙의
자리를 비켜 서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生생에 나타나는 일들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 '있음'임을, 그리고 '하나'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임을 알아본다면, 당신은 유연한 적응력을 가지게 된다.
개인의 목표를 위한 노력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있음'의 의미가 분명해질수록 그냥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 당신은 더 확실히 깨닫게 된다. 당신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으로서 당신의 성취가 아니다. 힘들여 나아가는 점진적 과정도 아니다. '있음'이 '있음'을 그냥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늘 여기는 "나"에게는 이런 인식을 할
능력이 없다. 사물이 생겨먹은 대로의 지금 모습과는 다른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체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더할 수 없이 간단한 사실이다.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도 없다. 마음의 가라앉음 그 자체도
당신이니까. 마음이 일으키는 온갖 소음이 이 가라앉음을 배경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마치 모든 물체가 공간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있음'을 향한 창문
Windows to Beingness
'있음'이 표현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한 사람의 모든 생각과 느낌, 그리고 행동은 그 사람의 유전정보와 그 사람 개인의 생겨먹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다양성은 백일몽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과정속에도 나타난다.
초월적 경험을 진술하는 구도자求道者는 통상 이것을 개인의
경험으로 내세운다. 당신이 실제로 깨달음의 경험을 겪었다고 믿을 경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마음을 쉽게
흥분시킨다. 그러나 개별적 '해탈'의 모든 진술은 백일몽의 또 하나의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있음' 그 자체는 묘사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있음'을 향한 창문일 수는 있다. 책 속에 활자가 없는 페이지 하나, 또는 영화 중간에 스크린이 하얗게 비워지는 한 순간처럼... '빛'이 '빛'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음이 끼어들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따지기 시작한다.
자아自我는 이해하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구도자는 "이것"을 자신의 개인적 성취로 내세우고 싶어한다. 마음은 새하얀 화면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 개인이 '빛'의 순수한 투사投射가 되고 싶어한다. 마음은 이 모든 재간을 통해 영적 탐구를 영속화할 뿐이다.
자기 본성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명인名人(유명한 스승)들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묘사한 책도 많이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개인의 성취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자기네 개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인식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깨우침이 겉으로 드러나는 데는 수많은 길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통해 이 깨우침이 드러나는가 하는데 전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길이 없는 것이다.
불만과 고통 속에 수십년 세월을 지내는 구도자들도 있다. 그들이 빛을 한번 보게 되면 아주 큰 충격을 받기 때문에 굉장한 깨달음의 경험으로 여기게 된다. 매우 행복하고 평화로운 경험일 것이다.
수십년 동안 지하실에서 빛이라곤 보지 못하고 지내던 사람 앞에 촛불 하나를 켰을 때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나타날 때 그렇게 충격을 주던 촛불이 늘 켜져
있다 보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빛을 찾았다가
다시 잃어버린 것이라고 믿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순간의 행복과 평화를 되찾는데 여생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런 인생도 '있음'의 한 표현이니까.
다만 당신은 경주競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또 한차례 덧붙여 말한다. 경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도 하나의 환영幻影이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믿는 당신도 하나의 환영이다. 따라서 결국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당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배聖杯찾는 일에 수십년의 세월을 바치는 구도자들도 있다.
맹렬한 탐구의 부담에서 마침내 벗어났을 때, 그 도약의 느낌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굉장한 사건으로 느껴질 수 있고, 대단한 안도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은 매우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당신이 겪은 방식의 경험이 표준적인 것이라고 여김으로써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잘못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다른 구도자들이 자기 깨달음의 경험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읽어보면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당신 자신의 경험한 것, 또는 아무 경험이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표현해 놓은 경험과 비교해 볼 때 당신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쉽게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깨달음의 현상을 개인의 것으로 만들 때, 당신의 마음은 이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깨달음이란 구도자가 어느 시점에 개인적 노력에 의한 보상으로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얼마동안 머물러 있어 주면 그 구도자는 자신이 진정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초월적 경험이 사람을 '있음'에
더 가까이 데려다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도 초월적 경험은 참으로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일이다.
개인의 이야기라는 믿음을 벗겨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이 구도자라는 또는 경험자라는 믿음이 '하나'의 인식을 가로막는 장막이 되기 쉽다. 이 믿음을 어느 순간 치워 버릴 때, 매사가
달라야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無라느니,
완전完全이라느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이다. 무한이 무한을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명상 중의, 또는 성애性愛 중의 어느 절정의 순간에 이 완전성을 느낄 때가 있다. 확연한 공허空虛가 갑자기 느껴지는데, 그 공허를 바라보는 주인공이 없는 것이다.
자기의 영적 스승을 모시고 있는 자리에서 완전성으로 열려가는 경험을 했다는 사람도 있다. 구도자란 개념이 신비로운 경험을
전혀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란 인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깨달음을 얻을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은근한 속삭임이 당신 마음의 한 구석에서 들려오고 있다면,
당신이 얻을 것은 실망뿐이다. 추구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흉내 낼 영웅(성자)이란 아무도 없으며, 가야 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추구와 흉내의 주체가 될 "개인으로서의 당신"이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리는 재주의 하나가 "개인으로서의 당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당신이 깨달음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안 깨달음을 정말 얻을 수도 있다고 귀띔해 준다. 도처에 널리 있는 함정의 하나다. 개인의 '해탈'에 대한
믿음은 이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접근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비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며,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초월적 경험도, 본능적 통찰력의 번뜩이는 섬광도, 구도자의 마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유혹이다. '있음'을 향한 "창문" 역할을 해 줄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나 섬광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도, 사람들이 이런 인식을 더 심화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그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단계에서 마음이 끼어들고, 이것을 또 하나의 과정過程으로 바꿔놓으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 사람들은 영적으로 자라나기에 바빠 성스러운 의식儀式도, 현명한 행동도 모두 잊어버려야만 하게 된다.
'해탈'을 얻는데는 정해진 단계도 없고 규칙도 없다.
당신이 지금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지금 당장 당신이 행복이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숨가쁜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라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상태에 생각을 모으려 들면, 당신과 '있음' 사이에, 그리고 당신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와 남이라고 생각하는 존재 사이에 거리만 늘어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이분법二分法의 또 한가지 형태다. 현인賢人의 영적 단계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 자신과 현인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려 든다. 그러나 '있음'에는 계급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승자로 여기느냐 패자로 여기느냐는 여기서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노이로제나 우울증 때문에 '있음'이 손상되는 일도 없다. 심지어 평화로운 마음,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라 해서 사람을 '있음'에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다.
"영적 경험"이라는 것 또한 나타나는 하나의 형상일 뿐,
빛 그 자체는 아니다.
이 형상들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관념조차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물 역시 지나쳐가는 형상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어 본 최고의 행복한 경험이라는 것도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영혼이 가장 심한 괴로움을 겪은 밤도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고통, "당신의" 기쁨, "당신의" 행복, 모두 마찬가지다.
( 자아에 대해서는 "개인적" 경험이란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구별의 느낌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푸치니나 베르디의 오페라를 보라. 삶의 개인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모든 개인적 감정과 경험의 극적 요소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는가.)
그것들은 경험이 아니라 사건일 뿐이다. "당신의" 초월적 경험이란 것도 지나쳐가는 형상의 하나일 뿐이다.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들도 있지만, 결국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당신이 연기하는
하나의 역할일 뿐이고, 진정한 당신이란 그 안에서 그 모든 경험이 (당신의 성격까지 포함해서) 일어나는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상태가 아니다. 당신이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저 당신의 존재일 뿐이다.
당신이 출연하고 있다고 믿는 그 영화의 형상들을 이루는 빛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를 경험할 수 없다.
'하나'는 하나 뿐인 존재다. 당신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빛'일 뿐이다. 버스를 타는 일에서 부터 최고의 의식상태에 이르기 까지, 모든 "당신의" 경험은 '의식'의 내용일 뿐이지
'의식' 그 자체가 아니다.
'있음'의 인식은 당신의 관념과 신념체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인식이 바닷물위에 일어나는 물결의 주름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를 알아본 사람에게서는 영적 목표를 추구할 필요도
사라지고, 영적 영웅을 모방하려는 욕망도 없어진다.
비교한다는 것이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에게는 자신을 남과 비교해 본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그 결과, 당신의 영적 좌절감, 그리고 당신의 모든 종교적 자부심과 집착이 사라지게 된다. 이전의 모든 사고방식은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파악된다.
영적 지도자들 중에 당신이 무엇인지 더 많은 관념을 가르쳐 주고 당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더 많은 관념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관념과 신념체계에 매혹된 당신은 영적 성취를 쌓아나가는 작업을 소중히 여기고 노력을 쏟았다. 더 높은 목표에 장차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고무된 당신은 더욱 거룩한, 더욱 빛나는, 더욱 평화로운, 더욱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나쁜 습관과 나쁜 업보業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어느날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자기중심의 유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모든 노력은
당신의 "나"를 더 좋은, 더 높은 차원으로 옮겨놓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한갓 유령일 뿐이다.
영화안에서 연기를 맡은 한갓 배우일 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란 영화 속의 배우로서, "당신의" 인생을 그럴싸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연기를 맡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 이야기에는 당신의
이력에서 뽑아낸 장면들이 자료로 곁들어져 있고, 당신의 업적과 당신의 미래 계획을 설명하는 변사辯士의 목소리가 함께 나올 것이다.) 이렇게 "나"의 가면이 벗겨지고 나면 이제 당신은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
당신이 당신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독립된 인간이라는,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독립된 인간들이라는 통념이 바로
백일몽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개인이라는 존재를 발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독립된 당신이란 것이 마음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나면 영적 탐구는 의미를 잃고, 종교적 성장에 두었던 중요성도 모두 저절로 사라진다. "정상적인" 일상의 습관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관념의 유희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형식종교의 의례儀禮와 서열의 도그마는 모두 힘을 잃게 된다.
당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물질주의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헌신과 박애, 기도와 극기, 또는 이해력을 추구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물질주의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종교조직들을 비판하러 나설 필요도 없고,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틀리고 당신이 옳다는 설교를 하러 나설 필요도 없다. 그런 행위 또한 있는 그대로에 맞서는 것이다.
하나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는, 영적 지도자를 따라간다는 익숙해진 믿음을 버릴 때, 마술에서 깨어난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잃은 것은 마음이 만든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일체의 영적 권위와 전통에서 벗어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아무런 계획도 공식公式도 해답도 가지지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
비분법非分法의 스승들
Teachers of Non-Dualism
당신이 어느 스승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당신이 추구하는 바가
그 스승에게 투영投影된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스승을 모시고 있는 동안 당신이 중요한 초월적 경험을 겪는다면, 당신은 그 스승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경험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그 스승으로부터 더 이상 만족을 얻지 못하는 때가 온다면
더 강하고 공감이 가는 스승을 찾게 될 것이다. 행복이든 평화든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 있는 이상, 그것을 당신이 이루도록 해주겠다고 주장하는 스승이나 선배는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그것"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환희의 경험이 '이것' 속에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 모든 특별한 경험이 당신을 '이것'
가까이 데려다 주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까운 곳까지 데려다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영적 탐구의 지적知的 측면에 비중을 두는 평범하게 보이는 스승들은 당신의 신념체계에 얼마간의 의혹을 일으켜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아무것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정해진 영적 행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아무런
규범도 정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영적 구도자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탐구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 주장을
타협 없이 꾸준히 내세우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더 이상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사실에 구도자의 마음은 실망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특별한 경험(황홀경, 합일체험, 쿤달리니 등)조차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가장 뛰어난 영적 성취조차 격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일상의 가장 평범한
감각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스승과 비교하는 일조차 의미가 없다.
이런 스승은 당신의 인격을 유지하기 위한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만을 남겨 놓는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노력도, 마음을 평화롭게 열어 놓으려는 노력도, 당신이 언제나 처해 있는 그 자연스러운 상태에 더 가까이 데려다 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로 좌우되는 일도 아니다.
'있음'이란 당신이 개인적 노력의 결과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화면 속의 연기자가 극장 뒤쪽의 영사기로 걸어갈 재주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당신을 '빛'으로 더 가까이 데려다 줄 수도
없고, '빛'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빛'이란 당신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있음'이란 당신의 존재
자체다. 이 '있음'이란 일체의 가치 감각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모든 믿음과 기대를 버리고 나면,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더 높은 의식 수준을 성취하기 위한 일상적 노력은 사라져 버린다. 영적 탐구가 중요성을 잃고 나면, 있는 그대로의 상황이 주는 밀착감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비범한(영적인,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동안 당신은 일상생활의 평범함이 뿌리는 광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바로 이곳에 지금 주어져 있는 열린 비밀의 단순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것은 당신이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며,
당신을 군계일학처럼 두드러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반대다. 깨달음을 얻은 당신은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의식意識
Ordinary Awareness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평범한 현재 의식意識'이다.
(남전 보원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바로 지금 이 글자들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의식, 바로 그것이다.
가장 놀라운 신비적 경험 속에서 언뜻언뜻 비쳐 보이는 의식도
그와 똑같은 것이다.
성인과 현자들이 "가졌다"고 하는 의식도 그와 똑같은 것이다.
따로 입증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이 의식은 한계가 없고 경계가 없는 것이므로 단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의식이 보편적 "의식"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더 따져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단 하나만이 존재하고 경계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 어느것도 누구도 거기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있음'이란 개인적인 물건이 아니며, 예외적인 몇몇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만 가졌고 당신은 가지지 못한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저기 있는 저것"일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여러가지 환상과 "깨달은 분들"에 대한 동경심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영적 탐구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리는데
이 책이 도움되기 바란다.
'해탈'이란 있는 그대로에 녹아 들어가는 일일 뿐이며,
깨달음에 관한 온갖 통상적인 이야기와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라,
영적 차원을 높일 필요가 있는 별개의 인간이기를 그저 그만두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바로 '빛'이며, 우리가 자신이라고 인식해 온 개인은 '빛'이 보여주는 하나의 역활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이 걸치는 온갖
의상이 일시적인 역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어떤 옷을 걸치는가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다. 당신이 연기하는 역할을
전혀 바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빛'이 무엇을 상관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해탈'이란 내가 획득한 것도 아니고 구경해 본 것조차 아니다. 얀의 삶에 관한 관념들이 나타나는 '공간'이다.
이 무한한 '공간' 안에서 "깨닫는 자들"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 모두 나타난다. 개인으로 여겨지는 독립된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하나'의 존재가 밝고 뚜렷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도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그 경험이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해탈'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얀에게 밝혀진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게 밝혀진 것이다. "내가 부재不在한" 상황에서 그것이 밝혀진 것으로(처럼) 보인다는 데 모순이 있다. 그것으로 영적 탐구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함께 밝혀진 것은 "나"라는 것이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자신이라 생각해 온 개인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나 하나의 관념일 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개인이라는 관념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관념은 매우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 매우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그 관념도 삶의 일부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페라의 한 요소인 것이다. 개인의 인식과 부정否定 양쪽 다 나타날 수 있는 태도다. 내가 자신이라고 생각해 온 얀이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화면 위에 나타나는 영상일 뿐이다.
이 영상이 화면 위에 아직도 나타나고 있는지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빛'은 얀에 대해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빛'이 바로 진정한 나의 존재다.
이 영화에는 단 하나의 연기자만이 출연하고, 그가 모든 연기를
다 맡고 있다. 우리 모두가 별개의 행위자이며 창조자라는 느낌을 일상생활 속에서 받는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있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로 지금 당신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
보더라도, 더할 수 없이 당당한 모습의 '존재'가 그곳에 있다.
빠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열려 있다는, 제한이 없다는 느낌을 여기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마음에게 혼란을 일으켜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평화와 개방의 느낌을 깨달음에 등치等値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여기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당신이 새삼스럽게 어찌할 일이 없는 대상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있음'을 향상向上시킨다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도와줄 수도 해칠 수도 없는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이것'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것이다. 영상 위의 배우가 '빛'을 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일 아닌가?
'빛'이란 모든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것이다. '있음'은 확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인 만큼, 얼마나 당신에게 가까운 것인지 마음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것'은 비쳐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이 "열린 비밀" 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인생사는 계속 펼쳐져 나가고 당신의 연기는
중단되지 않지만, 그 인생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무너지고 난 뒤에는 그 특정한 역할에 대한 개인적 집착이 줄어들게 된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영화는 계속해서 돌아가지만, 당신은 자신이
배우가 아니라 '빛'이라는 사실, '빛'에는 경계가 없고, 따라서 모든 곳에 비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곳" 이라 하는 것은 빠지는 곳 없이 모든 곳이라는 말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분명해지면 이제 참으로 가야 할 어느 곳도 없고, 누구에게 승인받을 일도 없고, 따로 성취할 것도 없고, "더 높은" 경지를 향한 희망도 없게 된다. '해탈'이 "당신의" 과업이라는 믿음도 이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의 게임을 꿰뚫어본 지금, 눈을 다시 가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오직 이것, '존재'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신이 사회적 의무감이나 타인에 대한 존경심과 연민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딱딱한 규칙이 없다 하더라도 이 책의 뜻을 알아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타인에 대해 자연스러운 존경심과 연민을 가지게 될 것이다. 타인을 보살펴주라고 종교적 계율이 정해주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단 하나만의 '의식'이 존재하며 우리 모두 거기에 함께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묻기
Nobody is Excluded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밝히는 방법으로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이 누구인가?
'자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자아'는 우리와 구분되어 있는 것인가?
우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이 아닐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음'은 우리에게서 떨어진 곳에 있은 적이 없는데,
우리가 그것을 지나쳐본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면서도,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통상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주어진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엇인가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 쉽다.
우리는 통상적인 자아 인식을 넘어서기 위해 각자의 성장 과정을 세밀히 살피기도 하고 진행 중인 영적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나 종교를 통한 접근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많은 구도자들이 실망을 겪는다.
실제에 있어서 수십년간 영적 탐구에 매진해 온 구도자들이 깨닫는 것은, 이런 신념체계나 영적 탐구 작업이 자기 마음을 위한 양식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너나 나, 보통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조장하는 경향을 구도의 조직들이 가지고 있어서,
영적 영웅을 그려내는 게임이 구도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게 된다. 만약 '있음'이 이런 식으로 개인화된다면, 많은 노력, 또는 뛰어난 행운에 대한 (개인적) 보상으로 미래에 주어질 무엇인가로 상상될 것이다. 바로 지금 충분히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구도자들 중에는 수십년의 명상을 필요로 하는 목표에 관심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지금 바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만족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접근법을 흔히 비분법非分法이라고 한다.
쪼개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접근법에서는 '하나'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 하지 않고,
'인식(견성)'을 미래에 성취할 목표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접근법(접근법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물론 아니다.)에서는 우리 존재의 본색이 이미 저절로 구현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이 '해탈'이 개인의 상품賞品이 아니며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이 점에 있어서 투철한 자세를 견지하는 스승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손이 물건을 쥐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은 관념을 파악하기 좋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파악하고 어쩌고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더 이상 영적
탐구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만물에 투영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있음'을 찾기는 커녕 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방식을 바꾸거나, 마음을 열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심지어 주어진 조건을 바꾸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탐구자가 지금의 상태에서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구분(분리) 감각을 뒷받침해(증폭시켜) 주고, 그럼으로써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에 영합하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구도를 무한히 계속하고자 하는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이런 개인 위주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함께 일시적 만족을 주기 때문에 얼마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 마음은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 보려고 거듭거듭 노력한다. 마음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게끔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심지어 '있음'의 인식을 하나의 과정으로 풀어내고 '전일全一'을 여러 토막으로 쪼개
놓은 다음, 그 토막들을 다시 모아놓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라고 내세우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구도자는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우리 마음은 또한 마음속에서 현자 한 사람을 만들어내서, 우리가 산을 오를 때의 길잡이로 내세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있음'이 '하나'로 판명된 이상, 더 이상 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뭔가를 하도록 권하는 어떤 가르침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어떤 책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있음'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요령(수행법,기법)도, 사실은 '있음'을 즉각 누리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있음'의 통찰은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통찰을 효과적으로 가로막는 길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경계선이 마음의 게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때 이 모든 것의 원천인 명징성이 스스로 드러난다.
보통의 경우 삶의 흐름에 대한 저항과 반대가 줄어들게 된다.
우리가 더 유연해지고 더 투명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변화를 관찰하고 이야기할 사람(개인)이 누가 있겠는가?
있는 것이란 오직 이것, 삶의 체현뿐이다. 그저 일상적인 삶뿐이다. 눈을 떠 보니 낯선 마술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다.
백일몽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평범한 생활이 계속된다.
평범하다고 해서 재미없거나 지루하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판단력이 그 힘을 잃으면, 있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나면, 평범한 순간들이 숭고한 것으로 되어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선한 자와 악한 자, 몸과 마음과 영혼, 과거, 현재와 미래로 쪼개려 든다. 이 모든 구분이 게임을 성립시키는 조건이다. 영화가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얼마동안이라도 영화의 사실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매혹적인 이론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짜내는데 이 구분들이 필요한
구분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더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해주는 멋진 책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온 세상의 교회와 사원, 성당에 가면 "중요한" 이야기들을 실제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전일'이란 본질적으로 구획이 되지 않는 존재다.
나로 나타나든 남으로 나타나든 우리 모두는 '전일'의 표현이며,
각자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졌을 뿐이다. 그 이야기는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좋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사실적으로 느끼는 것과 같이) '하나'가 여럿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놀이일 뿐이다.
각 인물이 자기 이야기에 매달려 있고, 개인에 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개인적 드라마에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생은 하나의 영화일 뿐이라고, 우리의 모든 개인적 노력이 연기演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면 싫어한다. 삶을 하나의
연기로 알아볼 만한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통상 그런 관점을 거부하고 백일몽을 계속해서 열심히 꾸는 쪽을 택한다.
우리의 자아는 겨냥할 표적을 필요로 하고, 노력할 목적을 필요로 하며, 선택할 특별한 경로를 필요로 한다. '있음'을 찾기 위해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특별한 경로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깨달음을 얻는데는 밟아야 할 경로가 있으며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탈'은 희망이나 노력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있는 그대로에 경탄하는 자세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 "경탄하는 자세"와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깨달음에 이르는
새로운 기준이나 도구(의식적 기법)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나 직업적 구도자는 경로와 목표를 설정하고 싶어한다.
더 천진해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유연해지려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구도 영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제의 하나가 "지금 여기" 에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새로운 과업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된다. "지금 여기 속에 사는 것"을 하나의 개인적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로 향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 "여기"가 아닐 수 있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시점이 "지금"이 아닐 수 있는가?
작년 여름 프랑스에 휴가 갔던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다. "지금 여기"라는 말은 저절로 "과거의 그곳"이라는 개념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선형적인) 과정을 생성시키는 길이다. 이 모든 관념들은 마음의 장난감일 뿐이다. "빛"은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또 하나 인기 있는 과제는 우리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다. 생각을 인간의 마음에 일어난 병으로 보고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아 역시 하나의 문제로, 또는 적어도
벗어나야 할 하나의 잘못된 관념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그 과제를 누가 수행한다는 것인가?
우리 자신을 들어 올릴(영적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한
우리는 영적 탐구를 계속할 것이다. 궁극적 목표를 향한 모든 노력이 실패를 피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공중에 뛰어오를 수는 있지만, 아주 짧은 시간밖에 머무를 수 없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내가 들어 올려질(영적 상승Ascended)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절정의 경험(합일체험)을 필요로 하는 구도자라는 믿음, 우리가 "더 차원 높은 힘"을 계발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더 훌륭한 인간, 더 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고행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원 제한 없음
Nobody is Excluded
동전 하나가 던져졌을 때(주: 영미권에서 '깨닫는다'는 표현을 'penny drop' 즉 '페니 동전이 떨어졌다' 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아무도 개인으로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개인도 '하나'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면 위의 배우가 '빛'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빛'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우리 모두가 똑같은 '하나'라는 사실도 저절로 분명해진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있음'이 구분된 존재들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있음' 하나뿐이라면 우리는 왜 따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가? 어디엔가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는 것인가,
저 깊은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개인적 문제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인가? 저명한 현자賢子로서 명성을 누리고 싶은 것인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것인가? 조화와 풍요를 바라는 것인가?
20년 동안 매일 두 차례씩 명상을 했다는 긍지를 느끼려는 것인가, 우리의 영적 영웅들과 같게 되고 싶은 것인가?
'있음'이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인가?
'하나'란 것이 더 높은 의식 상태로 올라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인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제외하는 것이 이 '있음'이란 것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전일全一'이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 '빛'은 심판도 하지 않고 비교도 하지 않는다. 누구도 아무것도
'이것'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이 '이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이것'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선조차 하나의 관념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관념들에게 더 이상 짓눌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믿음의 기둥(포스트 하단 참고)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모든 법칙과 규율의 압박을 벗어난 세상은 대체로
더 편안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낮은 곳 없이 높은 곳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하나만의 극을 가진 건전지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악에 대항해 싸울 필요도 그 의미가 줄어든다.
남들을 바꿔 놓겠다는 의지도 약해지게 된다. 지금의 상태로부터 바뀌어야 겠다는 필요도 벗어나게 된다. 하나하나의 순간이 새로운 것이 되고, 하나하나의 순간이 계획 없이 받아들여진다.
개인의 계획 없이 일상생활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반응도 명분과 기대감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된다. 개인의 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응은 자발적인 것이 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또한 아무도 여기 앉아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이 역할이 존재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 또한 흘러가는 하나의 영상일 뿐이다.
우리가 (누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뿐이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고 모순으로 들리겠지만, 진정한 본색을 발견하는 작업은 결국 무無로 귀착되는 것이다.
영적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의 자아도 완전히 해체되고 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도의 작업은 저절로 중지되고 만다.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주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알아본 뒤에 우리에게는 갈 곳이 없다. 영적 작업의 종점이다.
더 이상 "나"라고 내세울 존재가 없는 것이니, 명상을 행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성과를 거둘 주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믿음의 세가지 기둥
첫 번째 믿음 : 나와 남의 구분
두 번째 믿음 : 과거와 미래의 구분
세 번째 믿음 : 세상의 높은 곳과 낮은 곳 사이의 구분
그 길을 걷는 자, 누구인가?
Who is Walking That Path?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필요는 매우 강력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싶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겠다는 느낌도 있고, 우리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믿음이 있다. 자아가 자신의 영적 모습을 다듬기 위해 쓰는 한 가지 도구가 명상이다. 명상은 '하나'를 향한 문의 하나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구도자들은 통상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기술로
이것을 본다.
명상 자체에는 문제 없지만, 탐구의 작업을 계속하게 만드는 명상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문제다. 명상을 통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구도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장애가
되는 일이 많다.
행위자에 대한 이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저 무無가 있을 뿐이다. 이런 "명상"은 영적 자살행위라 할 수 있다.
고요히 앉아 있는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로부터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모든 방법에는 행위자가 필요하다. 모든 영적 염원은 "나" 관념의 표현이다.
기도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명상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화두를 스스로 던지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비파사나Vipassana를 행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해탈'이 구도자의 마음의 강압 아래 추구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탈"이 가능할 것인가?
한편, 구도자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사라져 버리기만 하면 '해탈'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도자로서의 이 잘못된 자기 인식을 꿰뚫어보기만 하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지금에서 장래로 향하는 영적 행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어느길이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방향일 뿐인데, 우리는 집으로 부터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곳이 다 내 집이므로,
길을 믿는 마음 또한 "이것"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분법 또한 "이것"이나 다름 아니다.
집이란 시간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이다. 그러니 집을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는 모습 역시 "하나"의 또 한 가지 표현인 것이다.
영적 행로가 존재한다는 믿음 역시 '전일'의 투영일 뿐이다.
결국 여기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모두가 하나다.
환희와 평화와 선善에 머무르는 상태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일반적 믿음은 대개 동양 신비주의에 관한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에서는 깨달음을 흔히 누군가가 성취하고 획득한 경지로 설명한다.
그 사람들은 성인과 현인으로 불리고,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보다 높은 영적 차원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중에는 특별한 능력과 거룩한 품성을 가진, 초인超人으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다. (영적 영웅들을 소개하는 책은 얼마든지 있다. Paramahansa Yogananda, Autobiography of a Yogi, 1946 참조.)
경계가 없다
No Borders
갓난아기에게는 구분이란 것이 없다. 아기가 그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에게는 '전일全一Oneness'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갓난아기때의 우리에게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모래이며,(스스로 그런 줄은 모르지만) 하나의 특정한 몸(모래성 하나)에 자신을 국한시키지 않는다. 자라남에 따라 나와 남, 선과 악, 높은 곳과 낮은 곳, 과거와 미래, 원인과 결과 등에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전일'을 잃어버렸다.(그렇게 보인다.)
성인成人의 세계관은 자기 몸과 마음에 제한되어 있다는 우리
느낌에 맞춰진 것이다. 성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구분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진다. 하나의 모래성이 다른 모래성으로부터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모래성이나 같은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하나하나의 모래성은 다른 모래성과 별개의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갓난아기의 개방성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아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개인을 벗어난 이 세계관이 구분 안된 '있음'의 열려 있는 주의력이다. 바닷가 모래의 한계없는 성질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모래밭도 우리의 모래성도 모두 같은 모래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다 같은 모래"라 할 것이다.
이 모래가 우리 '있음'의 바탕이며, 우리 인생의 불빛이며, 우리를 구성하는 근본 재료다. (모래밭, "우리"의 모래성, "남들"의 모래성, 모두 같은 모래알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들의 모래성도 마찬가지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의 본색이다. "나"와 "남"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관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있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런데도 자기 본성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들 중에는 자기 모래성을 키우는 데만 계속해서 노력을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각자의 행로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어느 날에건 금메달을 손에 넣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언젠가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깨달음을 바라는 것이지만, 진정한 영성靈性은 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을 오르는 데는 특정한 길이 없다. "장차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겠다"는 믿음의 문제점은 개인적 사고, 판단적 사고, 시간종속적 사고에 근거를 둔다는 데 있다. 세 가지 사고방식 모두 사회의 조직에는 실용적 가치를 가진 것이지만, '해탈'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비생산적 특성을 가진 것이다.
경계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사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탐구와 이해로도 이런 사실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화면 영상의 화질을
개선하는 데 달린 일이 아니라 영상 속의 '빛'을 알아보는 것이다. 어떤 영상이 떠오르고 있는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죽음, 누구의 죽음인가?
Who Dies?
우리 몸 안에 산다고 여겨지는 인물로 자신을 규정할 경우,
우리는 도저히 피할 길 없는 법칙 아래 놓이게 된다.
우리 모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라는 상식적인 법칙이다.
언제 죽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죽는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죽음이 비록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종말인가 하는 것이다. 불이 그냥 꺼져 버린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의 인격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로부터 내생來生과 환생還生에 관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가 파생된다. 자신의 진정한 본색을 모를 때일수록 우리는 그런 마음의 게임으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덮어버리려 들기 쉽다.
죽을 때의 느낌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의 형상이 '있음' 속으로
환원되어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 지금 주어져 있는 '있음'이나 우리가
죽을 때 기다리고 있을 '있음'이 똑같은 것이리라는 사실은 짐작이 간다.
우리가 죽을 때, 필름은 다 돌아갔지만, '빛'은 그냥 켜져 있는 것이다. '있음'이란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필름이 다 돌아갔다고 해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불멸이라는 점도 그 무한성의 한 측면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각자는 정말 자기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자기만의 모습을 가진 자기만의 신체를
이 세상(으로 보이는 곳)안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들, 특히 촉감과 시각의 결합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확인해 준다.
우리는 모두 별개의 존재로서 자기만의 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라고.
우리가 모래성이기 이전에 모래 자체임을 이해하는 순간, 구분이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면 이 신체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도 역시 관념이 된다. 우리의 본색, '있음'은 한계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영화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죽으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연기가 없다. 모래성이 무너지면 모래밭만이 남고, 모래성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진정한 본색, 모래에게는 죽음이 없다. 몸과 마음의 결합이 '있음'의 바다 위에서 파도 하나가 꺼지는 것처럼 풀려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죽음이란 바로 완전한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색, '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돌아가고 어쩌고도 없다. '빛'이 '빛'을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인물이 사실은 없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개인을 벗어난 '해탈'인 것이다.
'하나' 뿐
There Is Only One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전일全一Oneness'은 두개 이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뻔한 얘기 같지만, '전일'이 분리처럼,
'유일'이 여럿처럼 보이게 하도록 생겨먹은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 정신적 경로는 불가역성不可逆性을 가졌다. 반대쪽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로 다시 합쳐질 수는 없다.
마음이란 가위와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종이를 자를 수는 있지만 다시 붙일 수는 없다. "하나로 자른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이분법을 '하나'로 돌려놓을 수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이분법을 비분법으로 돌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분법이란 겉보기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분리도 없었고 잘라진 종이도 없었던 것이다. 가위도 분리하는 마음도 허구일 뿐이며, 분리와
절단이 겉보기뿐이었으므로 합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각을 도로 합쳐놓겠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환상속의) 분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일 뿐이다.)
(깨달음 이란) 무엇이 "되는 것이다" 라는 모든 생각은 똑같은
무지에 기인한 것이다. 누군가가 있어서 어디론가 ('높은 차원',
'깨달음의 세계' 등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인데, 그 어디론가는 통상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보다 더 특별하고 더 거룩한 곳이다. '해탈'이란 무無로 부터 바라보는 것이다. 중립의 위치로부터 바라보는 것이라 해도 좋다. 특별함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형편없이 평범하면서 동시에 기막히게 멋진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들 중에는 자기 영웅(영적 우상)을 모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영적 복권의 당첨을 바라는 사람들, 흥정을 벌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궁극적 절정을 맛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아무 문제도 없는 인생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영적 이기주의라 할 것이다.
구도자들이 그렇게 얻기를 바래 마지않는 대상이 실제로는 그토로 단순하고 당장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우리 자신과 모든 세상의 본성인 '하나Oneness',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관념과 신념도 또한 이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은 어디에?
Where Is God?
종교들이 조직의 길을 걷기 이전, 그 뿌리는 '있음'의 비분법적
본성의 직관적 통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의 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념적 지식과 경직된 신념의 체계로 변질되서, 방향을 찾는 사람들에게 궁극적 진리가 있는 것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행태에 빠졌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도 하나의 허상이다. 결국 "궁극적 진리"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멋진 책들이 많이 나온다.)
선과 악의 구분, 과거와 미래의 구분, 윤회와 열반의 구분, 현상과 실재(절대)의 구분,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모두 '하나'를 둘로 쪼개는 이분법이다. 모든 문화와 종교에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다.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구도자들이 각자 진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려 하기보다 자기 이야기만을 따라오게 만들려고(추종자로 만들어서 거느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말을 들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가 같은 바다 위에 일어난 물결 하나하나임을 알고
있다. 물결은 조각조각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하나의 같은 바다의 일부이고 모두 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물기가 없다고 하며,
자기네를 따라야 물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결이 물기를 잃은 적이 애초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의 계율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것이다.
물결 보고 어떻게 더 축축해지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물결을 따라다니면 된단 말인가?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자기네 관점이 유일한 진리라 내세우며,
다른 종교의 영적 탐구 기술은 잘못되었거나, 틀렸거나, 심지어
위험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신념체계들이 무가치하거나 거짓된 것, 심지어 해로운것이라고 까지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다. 똑같은 창조주에게서 출발한 것을 내세우면서도 그 신에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데서 종교간 갈등을 배양하기에 좋은 대단히 비옥한 토양이 조성되는 것이다.
지난 2천년간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서로간의 오해가 거듭거듭
투쟁으로 이어진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자기네 종교가 (세력이) 자라나기를, 자기네 신념체계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종교 지도자들도 많다. 자기네 종교체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암흑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자기네 종교의 출발점이 된 핵심
메시지보다도 종교의 영향력 자체가 그런 자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영화속의 배우인 우리는 우리 이야기 배후에는 누군가
연출가가, 모든 이야기를 지어내고 모든 우주와 자연법칙을 만들어내는 자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흔히 가진다. 그러나 연기도 연출도 모두 '빛'이 하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이론이 이 문제와 관련해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한다. 개인의 이야기에 믿음을 가지고 싶어하는
구도자들의 마음에는 그 이론이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 이론에서는 개인이 각자의 성취에 따라 보상을 받는 주체로서 각광받는다. 우리 각자를 창조주로 보는 것이다.
이 우주를 창조한 무언가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우리가 아는 바 우주의 모든 경이를 빚어내는 에너지와 정보를 조직하는 누군가
차원높은 지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자동차 만드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것일지 그로부터 유추해서 상상할 것이다. 바다 속과 열대우림의 생태계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신체가 얼마나 정교한 것인지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인간 두뇌의 용량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차원높은 존재가 있을 것을 상상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초월적 존재...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있음'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있음'을 자신과 다른 차원에 있는 지성적 존재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 초월적 지성은 부모가 아이를 살펴보듯 우라를 살펴보고, 우리 행실에 따라 상과 벌을 주기까지도 한다. 이런 믿음은 우리가 '있음'과 거리를 두고 있는, "불초不肖"한(어리석은) 존재라는 인식을 굳혀 준다.
"신神"이란 말은 흔히 완전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신'께서는 착하시고 사랑하실 뿐인데, 반면 우리 인간의 행동에는 죄악이 많은 것이다. 인생에 일어나는 나쁜 일들을 해명하기 위해 악마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의 모든 악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설명한다.
종교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각자의 기준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선도 악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가 아니라면 어떤 실체도 가지지 않은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말은 사회안에서 일상생활을 맞춰 나가는데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있음'의 차원에서는 이런 구분이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있음'은 모든 이분법을 초월한 존재다. 이것을 종교의 화법으로
바꿔 말한다면, '신'이란('있음' 또는 '빛'으로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존재라고 해야 할 텐데,
마음이 썩 끌릴 만한 표현이 못 된다.
구분된 존재로서 '신'의 존재를 믿고, 또 이 자상하신 '신'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음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고 한쪽에 '창조주', 한쪽에
피조물을 놓고 갈라서 보는 것이 순전히 인위적 시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전능하신 '신'께서 어찌하여 이 세상에 악이라는 것을 존재하도록 놓아두시는지 물으면 종교 지도자들은 할 말이 없다. 이 '신'은 피조물을 보살펴주는 입장이 아닌가?
만약 '신'께서 악을 없게 할 뜻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를 "전능"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능력은 있는데 악의 발생을 막을 뜻이 없는 것이라면 그가 일부러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인간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면, 이 우주 전체를 '신'이 만든 것이라 한다면, 그 안의 어두운 구석 역시 그가 만든 것이 아닌가? 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도 그가 만든 것이 아닌가?
우주를 '신'이 만든 것이라고 한 번 가정해 보자.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하신 분에게 우리는 마땅히 경의를 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감히 그가 만든 창조물을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악마 역시 신의 창조물 중 일부가 아닌가?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 중 이 세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무엄하게 지적하는 자들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것이 '창조주'에게 경의를 품는 태도라 할 수 있는가?
피조물로부터 구분된 실체로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신'과 그 피조물 사이의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인가?
'있음'이나 '빛'은 '신'보다 중립적인 말이어서 '하나'와 다른 것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이 '하나'와 똑같은 것이 아니면 안된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구분된 존재가 아님을 인식한다고 할 때,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신'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경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은 여기서 아무 관계 없는 것이고, 우리의 진정한 본색, 즉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있음'이 '신'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빛이 화면 위의 모든 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사기 속에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런 구분짓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설명이나 위안을 찾아 헤매는 일도 그만둘 것이고, 우주의 창조주를 상상하는 일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빠진 곳 없이 모든 곳에 투영되어 있다. 이 우주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것 처럼 돌아가는 데는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마음이 창조주를 창조하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구도자들이
초월적 지성을 상상하는 데 끌리는 까닭은 개인의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로부터 '무한'을 연장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초월적 존재의 관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풀리지 않던 몇 가지 문제가 해명이 되고(적어도 해명되는 것처럼 보이고), 일시적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개인의 게임을 이어나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피조물의 '전일'성을 분명히 알아본다면 더 이상 '전일'을
초월적 존재에 투영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가 얼핏 눈에 띄기만 하더라도 예전의 모든 신념과 관념을 날려 버리기에 족할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 초월적 존재(초인)의 모습을 원하던 욕구는 바로
사라져 버린다.
궁극적 창조자에 대한 믿음은 다름 아니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있음'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자아의 발버둥이다. 영사기에서 비추며 화면 위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펼쳐내는 흰 빛에게 화면위의 배우가 거룩한 이름을 붙여주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빛'임을 인식하고 나면 예전의 우리 신념체계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 자신이 명징한 '의식'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린아이의 경이감을 아주 미묘한 형태로 재발견하게 된다. 주변 상황에 의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감이다. 우리가 조율되어 있는
조건에 따라 슬픔을 싫어하고 행복을 좋아하는 성질은 그래로일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체를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진다.
화면은 자기 위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집착도 개입도 없으니 '빛'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도 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개인적 인격은 여전히 개입된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그 개입의 느낌 또한 화면위에 나타나는 또 하나 영상이다.
인생의 굴곡이 저절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리막 없이는 오르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인생의 흐름은 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와 이 세상을 시간을 벗어난 하나의 영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립적 투명성이 있을 뿐이다.
이 '하나'의 인식이 모든 비분법적 사고의 핵심 요소다. 이 '하나'는 시간을 벗어나 있는 것이므로 초시간超時間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인생사를 뛰어넘는 것이므로 초인간超人間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을 가지지 않는 것이므로 초인과超因果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디로도 움직여가지 않는 것이므로 부동不動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을 쫓아갈 필요도 없다. 쫓아가는 행위 또한 이것 안에 있는 것이니까. 이것에 등을 돌릴 수도 없다. 등 돌리는 행위 또한 이것 안에 있는 것이니까. 이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기다리는
행위 또한 이것 안에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남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 그 모든 행동이 '있음'의 표현이다.
수천년 영적 전통이 이뤄 온 틀에 맞춰 시각을 잡기만 하면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있음'을 재발견 할 수 있다. 거룩한 문자도 필요 없고 촛불도 향불도 필요 없다. 수백년 동안 성직자들이 가르쳐 온 것을 모두 잊어도 좋다.
인간을 죄인이라고, 실패작이라고 이름 붙여 왔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가르쳐 왔다.
사실이 그러한가? 무슨 기준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이다. 게임의 원리를 알아내고 나면 심판과 죄악의 굴레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특정한 시각(관점) 안에서만 움직이는 영적 스승들이 많은 것 같다. 달리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여전히 "나"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스승에게 몰려드는 구도자들은
자기네 "나"를 위해 뭔가를 얻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런 스승들은 우리가 노력할 경우 자기네가 도달해 있다고 주장하는 경지에 따라갈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그마를 답습하고, 그들의 신에게 경배하고, 그들의 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명상하고,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규칙에 따라 식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고, 더러는 복장도 바꿔 입고, 그들이 주는 이름을 쓰고, 도덕을 잘 지키고, 등등을
해야 한다고 한다. 꼭대기를 향해 다섯 계단을 올라간 뒤에 받을
보상을 목표로 정해주기도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어떠한
경로나 성숙과정을 거쳐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거룩해지거나 신경질을 덜 내거나 더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 따위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라나는 동안 우리가 배워 온 신념체계의 장막을 걷는 데 요점이 있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이 깨달음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깨달음'의 요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깨달음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이 힘을 잃게 된다. "깨달은 자"란 운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거나 여러가지 고된 영적 수행을 통해 비로소 깨달음을 얻게 된 사람이라는 미신적 관념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개인의 성취가 아니며, "진리"를
자기 추종자들에게 주장하거나 전파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영적 영웅(영적 성취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고, 기적이나 종교적 경험에 관한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본색인 '있음'에 관한 것이다.
많은 신비주의 서적은 이른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 (영적) 절정의 경험에 대한 기대감을 구도자들 마음에 심어준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정말로 높은 의식 상태에 접어든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의식의 경지를 높은 곳과 낮은 곳으로 나누는 데서부터 (분리의) 이분법 냄새가 나지 않는가?
현인과 평범한 구도자 사이의 경계선 또한 구분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현인과 평범한 구도자 사이의 경계선 또한 구분의 또 하나 형태가 아닌가?
관념세계의 위계질서에 '있음'이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게임 내용에 '하나'가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윤회계의 '빛'과 열반계의 '빛'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경지를 따지는 것이 구도 작업의 내용이 될 수 있을까? (이분법과 비분법의 구분 역시 하나의 환상이다. 이분법은 비분법에 포괄되는 것이며, 그 사이의 경계선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라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비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경계선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누구와 누가 구분된다는 것인가?
누가 누구의 뒤를 따르는가?
Who Is Following Who?
종교 지도자와 깨달음을 얻은 현인들 이야기는 물론 인기가 높다.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구도자들은 그와 같은 환희와 완성의 경지에 들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간절하기 때문에 일련의 기대감을 일으키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완성에서 거리가 멀다고 하는 사실 앞에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의 문제점과
열망은 알아차리면서,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은 일체의 문제에서
해탈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이든 아쉬운 문제를 느꼈을 때, 우리는 해결방법을 찾아 나선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 문제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조직에 가입하기도 한다.
학생의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안내해 줄 스승을 만들어낸다. 그런 입장을 취할 때 우리는 의심없이 믿어야 하는 취약한 입장에 빠지기 쉽다. 지도자에게 암묵적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키는 짓은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가정하고, 자기는 안다고 주장하는 영적 지도자로 하여금 우리의 의문에 대답을 맡기고
우리를 구원으로 데려다 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취향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추종자에게든 꼭 맞는 스승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승이 영적 능력을 가진 중요한 인물이라고 믿는 것이다.
스승이 특별한 분이라는 사실이 스스로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와
부합하는 경우도 있다. 법회의 익숙한 분위기에 끌리는 사람들도 있다.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스승,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눈, 초월적 경험, 현자들의 초상(사진), 꽃, 감정의 발산, 향불 ... 마음이 몹시 끌리는 것들이다.
구도자는 자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스승으로부터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해법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스승들이 많이 있다. 제자들의 정서적 문제를 돌봐 주려는 스승들도 있고 가장 깊은 곳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스승들도 있다. 또 어떤 스승들은 깨달음을 바라는 제자들의 희망을 이용해 자기가 시키고 싶은 일을 시키기도 한다.
제자와 스승은 함께 하나의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스승은 완전하며 그가 제자를 완성으로 이끌어간다는 믿음이 이 게임의 전제다. 어떤 형태의 비판도 용납되지 않으며, 스승은 깨달은 사람이지만 자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제자의 믿음은 양자 사이의 거리를 지켜준다. 또 하나 구분의 게임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게임을 "완전한 구원으로 가는 길". "거룩한 사랑의 나눔", 또는 "유일무이한 지고의 길"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하나'를 높은 곳과 낮은 곳으로 갈라서 보는 것은 매력적인 관점이다. 고차원 에너지와 저차원 에너지, 영적 인간과 보통 인간, 거룩한 책과 사악한 책, 좋은 지도자와 나쁜 지도자...
이런 위계질서는 스승 하나를 둘러싼 영적 집단에서도 흔히 보이는 것이다. 구분의 게임을 이어나가기 위해 '해탈'의 본질인 비분법을 외면하는 것이다. 스승이 특별한 분이고 제자가 보통사람인 것으로 보는 이상 자기네 진정한 본성을 부정하는 이 게임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구도자는 구도자의 위치에 머물고 싶어한다.
자기의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기 보다 스승의 발밑에 제자로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을 볼 때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미묘한 구분의 게임에 빠져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높은 영적 경지와 낮은 경지,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등등을 구분하는 게임이다. 향상하려는 욕구, 위계질서에 대한 믿음, 과정에 대한 믿음,
경로를 밟아가는 게임의 재미, 영적 목표를 추구하는 마음 따위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런 영적 교육의 대부분은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무지無知, 이기주의, 그리고 채산성採算性이다.
- '하나'를 둘 이상으로 쪼갠다는 점에서 무지이다. 선과 악, 과거와 미래 등으로 구분하면서 '있음'의 비분법적 본성은 묵살되는 것이다.
- 개인의 성취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이기주의다. "나"를 어떻게 영적수준을 높이고 좋아지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다.
- 스승과 제자 사이에 거래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채산성이다.
이 거래에 따라 제자들은 주어진 규칙에 순종해야 하고, 영적 보상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스승을 위해 충직한 개처럼 무슨 짓이라도 하려 든다.
스승 중에는 이와 다른 사람들도 있다. 자기를 좌대座臺 위에
올려놓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제자들이 우상숭배에 빠져들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자기자신이 불완전하고 결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도 개의치 않는다. 전하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고 청한다. 그런 스승들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보이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의 투철한 단순성을
우리로 하여금 맛보게 한다.
허구한 날 자기 스승 이야기로 지새는 일도 없고,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험을 가졌다고 떠벌리지도 않는다.
자신의 자아를 극복했다고 우기지도 않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준다고 나팔도 불지 않는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우리에게 심어 주지도 않는다.
그런 스승이 하는 일이란 오직 온갖 게임의 장막을 걷어 정체를
밝혀주는 것이다. 우리는 생긴 그대로 있을 뿐이지, 종교 지도자들이나 거룩한 문자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 우리의 "영적" 이야기를 자기나 다른 사람들의 영적 경험 이야기와 비교해 보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더 큰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깨닫게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사람들을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탐구가 완성되면 만물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그런 스승들은 말한다. 삶의 모든 색깔이 '빛'속에 드러난다. 어두운 색깔도 밝은 색깔도 똑같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 사이에는 아무런 위계도 없다. 악한 자들도 거룩한 존재인 것이다. 영적 게임의 장막을 걷어내면 성인聖人 아닌 사람이 없는 것이다. 거짓말쟁이도, 살인자도, '빛' 안에서는 어떤 성자나 현자보다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삶의 그늘진 측면 역시 거룩한 것이다.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 역시 '하나'의 표출인 것이다.
모든 것이 '있음'이며 모든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심사원려深思遠慮도 필요없게 되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게 되고, (마음의) 거울을 닦는 데 힘을 쓸 필요도 없게 되고, 명인클럽에 가입하려고 안달할 필요도 없게 된다. 자기가 "진리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는 스승, 당신이 자기처럼 끊임없이 평화의 향기를 맡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스승, 당신에게 적극적 사고만 하라고 가르쳐 주는 스승, 자기 가르침은 성숙한 영혼에게만 들린다고 하는 스승, "신의 집", 또는 "절대자의 거소"라 불리는 곳에서 사는 스승, "나의 가슴은 진실의 바다로 온통 열려 있다"고 주장하는 스승, 우리의 탐구하는 가슴과 마음에는 힘 있게 와 닿는 스승들이다. ( Paula Marvelley, The Teachers of One, Watkins, 2002 참조.)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때 특히 더 힘있게 와 닿는다. 그런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가 정말로 그런 개방과 평화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더욱 더 오도되기 쉽다. 그런 만남에 따르는 감각에 우리가 중독되어, 언제나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있음'이란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승의 발밑에서 환희와 평화를 체험하는 것은 '있음'과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런 스승들 중에는 정말로 우리 가슴을 열어주고, 마음을 깨끗이 해주고, 이 명징한 존재를 제대로 느끼도록 이끌어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 경이롭고 환희로운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중에는 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주는 것도 있다.
그런 경험이 개인을 초월한 개방성을 향한 창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제자와 스승, 절정의 경험과 일상생활 사이를 구분하는
게임을 부추기가가 더 쉽다. 그런 특별한 경험에 오도의 위험이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 "오도"誤導라 하는 것은 무엇이 꼭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오도하는 스승이라도 "있음"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믿는 것도 모두 '빛'의 표출이다.)
순수한 '있음'을 자기가 성취하고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 제자는 '그것'을 스승이라는 개인 위에 투영시키려 들기 쉽다. 스승이 지성이나 아름다움이나 권위를 갖춘 인물일 때
그 가르침은 마음을 특히 강하게 끌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주제 자체를 개인화하는 미묘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한계없는 의식은 스승 한 사람에게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를 특정한 장소에 묶어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거룩한 책 하나에 한정될 수도 없는 것이고, 이스라엘이나 남부 인도의
어느 성스러운 산(라마나 마하리쉬 아쉬람이 있는 '아루나찰라'),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불교 사원, 티베트의 어느 거룩한 장소, 텍사스에 있는 어느 시바Shiva 사원에도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곳에 똑같이 비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무한을 체현하고 싶은 사람에게 가지 거처가 도움이
되는 분위기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스승들도 있다. 특정한 인물,
또는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를 더 가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있음'의 무한한 본성을 가려놓고 구분의 게임을 계속하자는
유혹이다.
신성한 강, 향불, 성스러운 산, 제단과 촛불, 거룩한 책, 불상,
시바 신상, 신성한 주문, 온갖 의식儀式, 모두 잊어버리자.
'하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끄는 것들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높은 곳과 낮은 곳, 영적인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구분을 가리키는 것들이다. 위계질서를 확인해주고 쪼개기 좋아하는 우리마음에 영합하는 것들일 뿐이다.
위계는 없다
No Hierarchies
'있음(깨달음)'은 현자, 유명인, 보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것(깨달음)'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우리가 바로 '그것'이니까.)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 또한 오페라의 한
부분이다. 영화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 영화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의 일부다.
심지어 '그것'을 알아보았을 때조차도, '그것'이 그렇게 단순명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구도자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드라마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이것이 '그것'이다." 하는 인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광대함 속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깨달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 존재의 편안함에 감각의 단순한 전환을 통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가 이 무한한 공허속에 우리의 주의력이 휴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스승들이 있다. (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감각을 전환하는 주체는 대체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 이 공허 속에
동시에 어떤 온전함이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무한성의 표현인 것이다. 이 무한한 '공간'은 영적 유토피아나 낙원같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곳이다. (지금 여기다)
이 '무한성'을 우리는 바다 위의 일몰日沒에서만 아니라, 고통,
실패, 죄악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있음'이 개인을 넘어선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현자에게서만이 아니라 옆집 사람에게서도 이것을 찾을 수 있다. '하나'를 제대로 알아본다면 성스러운 문서에서만이 아니라 신문지에도 이것이 나타난다. 성聖과 속俗의 어떤 구분도 작위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윤회와 열반의 구분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는 것은 빈 그릇같은 것이다. 우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지만 특정한 위치를 가지지 않은 것이다. 형태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며, 쪼개질 수도 없는 것이면서 모든 것이 그 안에 나타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물체는 기준점으로부터 정해진 위치를 가지고 있고 이 '공간'속에 함께 들어 있지만, '공간' 자체에는 위치라는 것이 없다.
화면 위에 나타나는 영상이 화면 자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 '공간'이다. 소설의 내용이 시냇물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서 소설책의 종이가 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있음'은 그 내용물에 의해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또한 그 내용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다.
화면과 그 위에 나타나는 영상을 구분하는 것 또한 관념이다.
마찬가지로, '공간'과 그 안에 나타나는 내용물을 구별하는 것도
또하나의 관념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거듭거듭 이것을 쪼개려 드는가? 왜 '그것'을 성스러운 부분과 속된 부분으로 나누려 드는가? 그 모든 경로들을 왜 만들려고 드는가?
무한성을 어떤 영적 영웅에게 투사하려고 우리가 애쓰는 까닭은
무엇인가?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으면 죄업을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신비적 경험을 가지고 싶어하는가?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이야기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교性交를 통해 신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의 책이 나오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아드바이타 학파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텍사스의 자기 거처에서는 내면의 무한성을 체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리한 환경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왜 우리는 초월적 현상에
관심을 가지는가? 실제적 일상생활에는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삶이라는 것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의 해석을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대로의 이 세상은 이미 온전한 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초월적 경험을 가질 때 종종 이 사실을 인식하지만, 경험이 지나간 뒤에 마음이 예전의 프로그램과 신념체계를 대동하고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데 위험이 있다. 마음은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한순간 그것을 얻었지만 이제 도로 잃어버렸다. 그 공덕을 회복하기 위해 너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현자들이 얼마나 환희에 차 있는지 보라. 너는 아직 멀었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꾀에 속아 탐구의 과정으로 되돌아가게 되기 쉽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을 바꾸겠다는 노력은 본색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일 뿐이다. 비교의 게임이란 어떤 것이든 선수의 이해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해탈'이 자기향상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개인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과도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 우리가 수리를 필요로 하는 불량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해탈'은 개인의 사업이 아니다. 그런데 '있음'이 이미 백퍼센트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탐구하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있음'을 우리로부터 감추는 것이다.
인생은 계속된다
Life Goes On
"나" 없이는 탐구 작업도 있을 수 없고, 영적 목표도 있을 수 없으며, 신성하고 거룩한 것을 찾는 일도, 명상의 기술도, 더 이상의
질문과 응답도 있을 수 없다.
영적 탐구의 모순은 그 찾는 목표가 '있음'이라는 사실에 있다.
'있음'에게 우리 자신을 더 열어놓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러면 자신을 '있음'으로부터 닫아놓을 수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나"와 "있음" 사이에 무슨 벽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있음'이며, 그로부터 도망칠 길도
없고 더 가까이 할 길도 없다.
개인적 노력의 과정은 아무리 영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있음'에 더 가까이 데려다 주거나 열어 줄 수 없다. '있음'이 '그것' 그대로 인식될 때, 모든 신성한 문서(경전)는 그 힘을 잃는다. 그런 문서가 '하나'를 가리키는 지표일 수는 있지만, '하나'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이제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있음'의 완벽한 표현이다.
"있음"은 그럴듯한 멋진것도 아니고, 환호작약하는 (만세를 부를만큼 기쁜)것도 아니고, 사족을 못쓰게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겪을 것이다. 착하거나 거룩한 특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완전히 중립적인 것이다. '해탈'은 선에도 악에도 연결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알아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으면서도 포함하는 것이다.
'해탈'은 사람을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정반대다. 모든 경계, 모든 위계가 사라진다. 개인 이야기의 영상들은
'의식' 속에 계속해서 나타나지만, 이제 그 본색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행중으로 보이는 활동사진(영화)...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 세상 안에서 움직이는 개인으로서 우리 모습은 계속해서 움직여갈 것이고 사회의 규칙도 그대로 적용되겠지만, 이제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로 나타난다. 하나뿐인 연기자가 60억 이상의 모습으로 출연하는 신곡神曲... 이것을 신곡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무조건적 사랑의 발현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의 존재가 거울에 비쳐지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라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느껴질 감정이 느껴지도록 하고, 떠오를 생각이 떠오르도록 하고, 만들어질 관념은 만들어지게 하고, 게으를 사람은 게으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할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는 신비로운 비결도, 마술의 열쇠도, 놀라운 재주도,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