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30일 금.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서 10,9-18
복음 마태오 4,18-22
◈ [서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18년 나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3개월의 제주도 연수가 끝났습니다. 신부님들은 엠마오 연수원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제의 길을 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타볼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천막 3개를 짓고 예수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타볼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엠마오 연수원에서의 생활도
좋았지만 우리들도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강의에서 신부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4장과 15장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오늘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함께 묵상한다면 11월이
뜻깊게 지나갈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12월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제자가 되려는 이는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기준을 충실하게 따랐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 앞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행복한 여인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슬픈 사건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입니다. 유다는 수석사제를 찾아갔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두 사건은 모두 돈관 관련되어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을 기꺼이 내어
놓은 여인의 모습과 은전 30닢에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배반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그 시간에
제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하느님의 뜻임을 아셨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장으로 가는 예수님을 봅니다.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넘어지셨고, 길을 가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그 십자가는 시몬 베드로가
지고 갔어야 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요한 사도가 닦아 드려야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분이 우리의 왕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왕은
화려한 궁궐에서 권력을 행사하지만 우리의 왕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왕입니다. 예수님의 옆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탐내던 자리였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옆에 있고 싶다고 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죽음을 지켜본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의 눈을 연 것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을 보고 이방인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분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갈릴래아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공생활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기쁨, 희망, 슬픔, 고통이 함께 있던 곳입니다. 그들이 꿈을 꾸고,
열정을 바쳤던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수의 첫 마음을
되찾아 주시고, 새롭게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새롭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멋진 분입니다.
죄스러운 인류를 대하실 때도, 배반의 제자들을 대하실 때도, 나약한
우리를 대하실 때도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제자들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회개하고 뉘우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두려움 없이 죽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삶으로 드러냈습니다.
신품으로 사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가는
것이고, 계속 성장, 발전해야 합니다. 사제에게 성장 발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제는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과 안드레아 세례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애정을 가로막는 사랑의
바리케이드
2018년 나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애정을 가로막는 사랑의 바리케이드>
복음: 마태오 4,18-22
오늘은 ‘엑스(X)’ 모양의 십자가에 순교한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있는 며칠 동안에도 계속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이탈리아 아말피라는 아름다운 해변 마을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그래야
누군가 그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라고 말하며 이 구원을 위한
파견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하지만 ‘파견’된다는 말 안에는 또 누군가와의 이별을 전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주님의 파견을 받는 사도들은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씀대로 자신의 꿈과 애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버림이 결국은 참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버리지 못하여 주님의 뜻을 져버리면 그 애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보좌 때에 어머니가
성당에 너무 자주 오셔서 오시지 말라고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제가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원망을 받는 것보다 그때 그렇게 한 것이 지금도 잘
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반드시 지니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도구임도 잘 압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이
방어벽이 무너질 때 하느님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맺으려고 하던
관계도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두 자녀에게 이 바리케이드를 쳐야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비장이 부풀어 방에만 누워있어야 했던
신앙인이자 의사,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그는 그의 책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에서 자녀들을 안을 수 없고, 자녀들이 그를 안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벽을 치며 살아야했던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는 의사로서 방사능을 연구하고 있었고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방사능을 많이 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업무
과중으로 백혈병에 걸려 길어야 3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다카시는 자신보다 먼저 간 아내의
검게 타 버린 뼈를 양동이로 주워 모아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방사선
연구가인 다카시는 자신이 직접 아내가 죽은 자리에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방사능이 금방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내려 했습니다.
다카시는 방사능에 노출된 곳에 살려면 적어도 75년이 걸린다는
연구결과를 뒤엎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나가사키를 재건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자녀와
함께 작은 단칸방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몸은 뼈만 남은 데다 배는 만삭인 여인처럼 불러있었습니다.
비장이 부풀어있었기 때문이고 그 비장은 작은 충격에도 터질 수 있어
아이들의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그 한 평 남짓한 방에서 아빠 냄새를 맡으며 “아...
아빠 냄새...”라고 좋아합니다. 엄마 냄새도 못 맡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다카시는 그들과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자신을 안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자신에게 넘어지지 않도록 책과 약병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불 속의 아빠 냄새만 맡고 아빠가 잠들어있을 때는
몰래 바리케이드를 넘어와 얼굴을 대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이의 촉감을 더
느끼고 싶으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심경을
다카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비장이 터진들 그게 무슨 대수랴. 이 아이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내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뻐해 준다면 ...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한 달이라도,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이 아이가 고아가 되는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1분, 1초라도
죽을 때를 늦춰서 이 아이가 견뎌야 할 외로운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어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칭찬받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렇게
애정까지도 끊을 수 있는 희생 때문입니다. 그 덕에 하느님의 눈에도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이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는 나가이 다카시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나를 찾아올 ‘죽음’ 역시 한없는 사랑이신 신이 내게
내리는 최대의 사랑의 선물이리라. 그러므로 죽음 전에 겪어야 하는
마음의 고뇌도 몸의 고통도 신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30일 사도 성 안드레아 축일
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인” 이란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려진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벳사이다의 요나의
아들이며(마태 16,17),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거기에서 사도 요한을 알았으며 그와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사도단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역할을 그리 많지 않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굶주린 군중 앞에 안드레아는 예수께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안드레아 사도는 사도들 중에 첫째 “선교사”였다. 처음 부름 받을 때
함께 있던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 갔다(요한 1,41).
우리의 성체성사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지향으로 미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모이도록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채로는 누구나
거룩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1열왕 19,20-21 참조), 그들은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약한 신앙을 굳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담 너머 옆집에 성인(聖人)이 계십니다!
2018년 나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담 너머 옆집에 성인(聖人)이 계십니다!
저희 살레시오 가족 안에서 오랜 세월 끊이지 않고 전해내려오는 좋은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해가 바뀔 때 마다 총장 신부님께서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한해를 살아갈 생활 지표를 선물로
보내주십니다. 라틴어로 ‘스트렌나’(strenna)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세뱃돈입니다. 생활 지표를 건네받을 때 마다, 세뱃돈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전례력으로 한해가 끝나가는 즈음, 총장님께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생활지표를 보내주셨는데, 제목이 ‘여러분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습니다.’입니다. 이번 생활지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와 노선이 정확히 일치됩니다.
돈보스코 시절부터 저희 살레시오회는 교황님께 대한 극진한
효심으로 유명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교황님의 부탁은 제게 있어
명령입니다.’라고 외치며,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교황님께 힘이
되어드리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 날까지 계속됩니다. 교황님의 요청이라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기쁘게 파견됩니다. 특히 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위험해서 다들 가기 꺼려하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다보니 현재 전 세계 135개국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의 편지 역시 언제나 교황님의 권고나 노선에 적극으로
호응하고 일치됩니다. 교황님의 의중을 살레시안적으로 재해석한 후,
청소년들과 서민들에게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살아 생전 돈보스코는 틈만 나면 오라토리오 안에서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청소년들을 성덕의 길로 초대했습니다.
1884년 5월 10일 돈보스코는 로마에 가셨다가, 그새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있는 청소년들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은 나머지
편지를 한통 쓰셨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1888년 1월 31일 돈보스코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청소년들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꼭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아이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있던 돈보스코였으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앞다투어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중 돈보스코의 애제자
도미니코 사비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안에서 성인(聖人)
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느낍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해서 거듭 빙점을 찍으시는 강조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성덕의 길이 어렵지 않고 쉽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은 나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덕은 가깝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담 너머 옆집
이웃들 가운데 성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 영적인 삶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소심하거나
침울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잔뜩 쓰거나 울적하지 않습니다.
거룩할수록 더 인간적입니다. 거룩할수록 더 기쁘고, 탁월한 유머
감각을 지닙니다.
물론 성덕의 여정에서 고통과 십자가는 필수요 기본 양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은 한 인간을
활짝 꽃피어나게 만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안드레아 사도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오늘 우리 모두를 성인이 되라고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오 복음 4장 19절)
뿐만 아니라 성경은 틈만 나면 우리를 성화의 길로 초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나는 주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1장 44절)
성화의 길은 사제나 수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
전체를 위한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그리고 저희 총장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어려운 길이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인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성인으로 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30일 금.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0)
우리의 순간순간이 기꺼이 버리고 따라야 할 결단의 여정입니다.
결단이 길을 새롭게 합니다.
버려야 하느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버림이 따름이고 버림이 떠남의 출발지입니다.
버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위해 익숙한 그물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와야 숲을 제대로 볼 수 있듯
버려야 되찾을 수 있는 삶의 참된 기쁨입니다.
버려아 만날 수 있고 버려야 가벼워집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기꺼이 소중한 그물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무엇을 버리며 살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따르기위해 먼저 끊고 버려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1월30일 (금) - 파멸에서 구원으로
오늘은 “파멸에서 구원으로”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18절 말씀에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육의 생각을 하지요.
이땅 자체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쫓겨난 곳 아닙니까.
이 곳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통이 가득 찬 이 땅 속에서 그 고통 속으로
우리가 빠져들어 가지 말고 묻혀서 허우적대지 말고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 입니다. 이 땅이 아무리 좋거나 힘에
겹다 해도 결코 이땅은 흙을 묻히는 어리석은 자일 뿐입니다.
하늘의 해를 바라보고 햇볕의 따스함을 체험하듯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따름으로 얻게 되리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1월30일 금. 성 안드레아사도 축일(마태4,18-22)
따름으로서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나를 믿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 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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