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기 선생 페이스북 기록.
이정일 선생 떠난 지 3년.
송충기 선생이 친구 만나러 곡성 다녀왔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보니 다들 반갑고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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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호영 선생님 페이스북 속 이정일 선생 이야기.
정호영 선생님 페이스북 글 가운데
곡성 가는 내내 내 마음은 침착하지 못했다.아마도 두가지 마음이 교차해서 그랬을 것이다.하나는 이정일 선생에 대한 미안함이었고,
하나는 그리운 동지 박경희(Kyounghee Park)와 김용운 선생이
아직도 더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꿋꿋하게 사회사업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나라는 자책감이었다.
...
2013년은 내가 실직으로 가정에 별 도움을 못주고 빚만 쌓여가고 있을 때였다.
한 달 한 날 지날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금융권에서 융자를 해주지 않아 막막했다.
나는 지인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먹일 수가 없다고...
맘 상하는 일이었지만 우선 그게 급했다. 나는 참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때 그때 융통해줬고 나는 깊게 고마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일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그를 조문하러 가는 내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그가 죽은게 마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꽃다운 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젊은 친구가
농촌에서 뜻을 펴겠다고 의론하러 나를 찾아 포레스트에 왔을 때,
반기고 고마워하며 그가 농촌에 가지 않으면 안될 의무감을 지어준 것이다.
그가 봉조리에 정착한 이후에는 매년 한두번씩 포레스트 멤버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현실의 벽에서 힘들어하는 그를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다.
일행들은 존경과 사랑을 주고 그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일상은 현실에 타협하려는 우리의 타성을 경계하도록 했다.
이정일 선생이 하는 일은 해가 갈 수록 더 깊어졌고 현실로 드러났다.
꺼저가는 농촌의 공생 심지에 불밝히고, 철저하게 고민하는 모습에서
과거 젊은 청년 목사들이 YMCA운동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랑이었고 나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나는 그에게 부조도 못하는 아주 슬픈 존재였다.
가서 울기만하고 미안하다고만 혼잣말만 했을 뿐이었다.
첫댓글 페이스북의 정호영 선생님의 글을 보며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정호영 선생님의 어려운 사정들도 글을 통해 알 수 있었고요. 곡성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정일 선생님, 그리고 2014년에는 김영훈 선생님...선생님들의 활동을 가슴에 담아두고 저도 기회를 준비하여 뜻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 농촌사회활동가 시골사회사업가의 뜻을 두고 좇게해주셔서 본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