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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었던 사람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최하급 계층이었으며 대개의 경우 현대에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시대 이후 다른 뜻으로 바뀐 후에도 백정이라고 전부 도축업자인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직업도 포함되어 약간씩 달랐다.
본래 어원은 중국 수(隨)나라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말하였을 뿐이다. 국가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가 아니라, '00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 고려시대의 백정
고려시대에 백정이란 자기 조상 대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 짓는 농민 즉 자영농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고려시대에 백정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고려시대의 사회제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시대 양인이라는 계층은 생각보다 많은 계층이 포함되어 있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 이유가 고려는 신분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까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세습귀족들은 고려초 광종의 개혁에 따라 많은 귀족들은 물론 왕족들까지 정치에 배제되었다.
상류층으로는 정부의 고관들과 그래도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대지주에 속하던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류층으로는 하급관리와 초기에는 지방의 향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층간의 결혼까지 엄격하게 제한되던 천민 계층을 제외한다면 이 이외의 계층은 모두가 양인으로 분류되던게 고려사회였다.
그러나 지방의 향리들은 전까지 중앙관리였던 귀족들이 중앙에서 실권을 잃고 대거 낙향하고 중앙에서 지방관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자 지방에서 영향력을 잃고 점차 양민으로 격하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어 천민취급을 받던 향,소 부곡민들이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위치가 점점더 올라가 양인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양인에 속해있었지만 지방의 향리층과 군,현민들 그리고 향,소,부곡민들 사이에는 확실한 격차가 있었던걸로 보여진다. 특히 향,소,부곡민들은 외거노비 만큼은 아니지만 서양의 농노와 비교될정도로 일반적인 군,현 민보다는 훨씬더 강도높은 세금과 역등을 부과받았다. 그러나 백정이라 불리는 자영농들은 양인들 중에서는 그리고 고려신분제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산층이라고 부를만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고려를 떠 받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당시 우리가 흔히 아는 백정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 라고도 불렀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천업에 종사하던 천민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에는 도부, 또는 도한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최하급 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천민으로 국가에 대한 조세부담을 지지 않았고 같은 계급이었던 노비와는 달리 어디 한 군데에 매여살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냥, 축산, 도축/고기판매업(화척), 무두질/가죽제품 제작(양수척 = 조선시대엔 갖바치로 불림), 고리, 예악/배우, 망나니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고려사에 보면 후백제 정벌시 굴복하지 않아 압록강 밖으로 쫒아보낸 자들이 시초라고 나온다. 이 외에 국가의 부역과 호적에도 제외된 방랑인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기녀들의 시초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북방 민족 출신으로 포로로 잡힌 거란인의 후손이나 동북면에서 흘러들어온 여진인 등, 귀화했으나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집시 유목민인 거란인이나 수렵민인 여진인들이 고려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지킨 것. 버드나무 고리를 잘 만든 것도 가재도구가 이동에 편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판매업도 유목민 출신인 이들이 이것을 농경민들보다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 사회적으로 고려와 반체제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반농반목의 생활형태였으며 고구려의 경우 다수의 말갈족, 거란족을 지배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구려와 이민족들 사이는 계급상의 차별이 있었지만 그들을 생활방식으로 차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간의 차별은 존재했지만 짐승을 잡아 도축하는 걸로 차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뭐 당연한 게 고구려는 초기 국내성에서 출발해 부여,옥저,동예,숙신,거란,선비(연)과 겨루며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한 제국이다. 고구려의 영역 아래 다수의 이민족이 있었으며 그주에는 유목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거란은 고구려민들과의 접점은 거의 없었고 말갈은 이미 이 당시에도 농업과 유목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구려의 전쟁에 많이 동원되어서 고구려에서는 일부 지위를 인정받는 측면이 있었다. 그 중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올린 자들은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고구려의 풍습대로 고구려 지배계층에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말갈이라는 말이 여진, 만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고구려 지방민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연구도 나와 있다. 각설하고 수렵과 목축의 전통이 남아있던 고구려는 무덤에 수렵도가 말하듯 양인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사냥과 도축등은 당연히 할 줄 알아야 되는 일이었다. 즉 고구려에서 짐승을 사냥해서 해체하는 일이 성인 남성이라면 당연히 할줄 알아야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 모두 왕권강화를 목표로 불교를 도입하고 농업을 장려하게 되고 소고기는 먹기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게 되고, 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활약으로 불교의 사상이 민간으로 깊숙히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고려에 자리잡았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중 핵심인 자비와 불살생의 사상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자 자연히 도축관련 업종을 천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6] 근데 도축작업이 천시되 수척들이 전담하게 된건지 아니면 천한 계층이었던 수척들이 도축업을 도맡게 되자 천시된건지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몽골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육식이 권장되고 목축이 장려되던 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희석되었다.
여튼 통일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한국으로 유입된 외국인들이 이런 직업을 전담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전쟁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동안 우리와 관계를 맺었던 여진, 거란족들, 고려시대에 벽란도를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들어왔던 중동인들(아랍계, 이란계 등), 몽골과 항전을 벌이면서 몽골 밑에서 용병으로 뛰었던 타타르족이라 추측되는 색목인들까지 여러 민족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다.이와는 별개로 애시당초 고기를 늘상 먹을수 있었던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고기를 먹을수 있는건 귀족이거나 부자거나 해야지 먹을수 있었다.
이런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지고 고려에 유입되지 못하고 겉돌던 이들은 왜구를 가장해 노략질을 하거나 거란의 침입시에는 길잡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백정이 조선시대에 천민으로 취급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
한국에 유난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백정 대다수가 이민족 후예였고 한국 문화에 융합되지 않은채 틈만나면 민족의 전통을 시도했던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기소비량이 적아서 그런건가?
■ 조선 시대의 백정
암묵적인 차별과 기피현상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이 그렇게 큰 존재감을 가지고 살았던건 아니다. 이들이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기피대상으로 천대받게 원인은 세종대왕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잘못이라는게 아니라 순수한 인과관계상 그렇다는 것, 의도는 좋았다.
세종대왕은 양수척 등을 양민화시켜서 국력을 증진시키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꽤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직업적으로 여자까지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니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짓의 유혹에 빠지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이로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호원 사이에서 욕설로 '백정의 자손' 패드립이 시전된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세종이 양민화를 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9] 상인(常人), 혹은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세종 전만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나, 세종 때는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
그래도 세종의 이러한 양인화 정책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는 유럽의 집시처럼 유랑민의 성격이 존재했던 백정들은 이 때부터 정착생활이 완전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다만 결국 양민화는 실패했는데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포기해버리고 차별 등도 더해져서 완전히 폭도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버린다. 그 정도는 심각하여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과 재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과 재인 무리(....)
문제는 이게 단순히 조선 조정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문제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처음엔 조정에서도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고 애썼다. 유랑생활을 하면서 수렵까지 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는 일가견이 있었고 말도 잘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겉돌며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을 털어버린 일도 있었고 심지어는 관가까지 털었다. 당시 조선 백정집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마을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정말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검거도 쉽지가 않은게, 관리가 몇번이나 우마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마을 앞이었으나 백정마을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처리를 못한 정도였다.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중종기가 거의 마지막이지만 명종때 임꺽정이 난리 한번 터트리면서 끝이 났다. 이후의 백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며, 임진왜란기에는 기존의 서술과 달리 활도 못쏴서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하였으나, 세종이후 100여년간 트러블은 백정과 양민 사이에 뿌리깊은 불신을 야기시켰다. 즉 간단히 말하면 유럽의 집시와 같은 성격이었던 것이 조선전기의 백정이었다는 말이다.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기까지는 양인들도 도축업을 하였으나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양에서 도축업을 금지시키면서 양민 도축업자들은 몰락했다. 허나 그 때에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법외의 존재들(....)이며 고기먹고 싶다고 수시로 소와 말을 훔치던 존재(....) 강력범죄를 일으켜도 관군이 출동할 급이 되어야 처리하던 이들이라 마치 금주법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임꺽정이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
이들은 어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이런 마을엔 양민이나 포졸들조차 가까이 하길 꺼려했다. 심지어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던지.
하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특수집단인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제사용 및 식용으로 육류를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축 일을 함께 해야 했는데 이들은 공자님이 드실 고기를 바치는 몸이라고 오히려 세력과시를 했다고 한다. 양반집 자제들, 궁에서 일하는 별감들과 함께 한양의 유흥가를 주름잡던 물주들 중 하나. 이들이 살던 반촌(泮村)은 이러한 세력+성균관 출신 고위층의 비호로 인해 사실상 치외법권 유흥가 지역이었다.
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납세의 의무가 적었으므로 생활이 곤란해지면 양민이 일부러 백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원래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특히 소는 예나 지금이나 허가된 소 외에는 잡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잡는 경우 더욱 이익이 많았고[10], 이들은 주로 양반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수익이 많았다. 이처럼 수익이 많은 반면에 옷차림이나 집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이 나갈 구멍이 없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백정 부자들이 등장했고 이후 신분제 폐지 등으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예전에 KBS에서 저연령층 대상으로 방영하던 모 역사프로에서 나온 역사적 일화 중에는 조선시대 한 늙은 백정의 장례에 백정들이 관에서 꽃상여를 빌려 쓰려 할 때 양민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자, 백정들이 남아도는 돈으로 더 좋은 꽃상여를 만들어 양민들을 기죽이는 일화도 있었다. 물론 양인들이 들이닥쳐 꽃상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난장판이 일어나는 내용이 후술된다. 당시 백정은 따로 떨어져 살아야했고, 옷차림만으로도 구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창옷(?衣)이라 불리던 중치막이나 비단옷은 입지 못했고, 머리에는 갓이 아닌 패랭이를 써야 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백정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7종 천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라는 말과 함께 백정들이 쓰는 패랭이, 또는 평량갓를 벗겨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여기에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를 못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천민 취급이므로 평민의 아이들에게 존대해야 하고, 서당은 당연히 못 간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시대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11]
여담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청으로 끌려간 백성들을 환향시킬때 일부 환향을 거부한 조선백성들이 있었는데 그들중에는 백정도 있었다. 농경사회로 백정을 천시여기는 조선과 달리 유목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청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백정은 고급기술자라 우대받았고 이는 청에 끌려간 백정들도 마찬가지로 우대받았기에 조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돌아가기 거부한 사기장이들을 예와 같다.
■ 구한말~일제시대의 백정
구한말~일제시대에는 형평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그들의 권리를 더 받으려 했었다. 이때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게 형평사 운동이었다.
일제시대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내가 백정이라니!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13]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진학이나 직업도 도축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보다 여성 백정들에게 더욱 가혹하였다. 여자들은 여전히 "'백정각시타기"'라는 사회적 악습에 시달려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정 여자는 저고리 끝에 검은 표시를 해야 했고 사람들은 그걸로 누가 백정인지 구분했다. 백정의 아내나 딸이 마을 행사등에 구경나와 있는게 보이면 끌어내어 재갈을 물리고 치마를 벗긴 뒤 개처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양민 남자들이 올라타고 끌고다니며 성희롱을 일삼았으며 고기를 내어줘야 풀어주곤 했는데 이걸 백정각시놀음이라 했다. 이것을 당한 여성은 당연히 심각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일제초의 실화로 딸의 소학교 운동회를 보러갔던 어머니가 딸앞에서 백정각시놀음을 당한다. 딸이 보는 앞에서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남자들이 올라타 온갖 능욕을 줬던거다. 결국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자살을 하고 만다.
실제로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백정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14] 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상태가 되기도 했었다.[15]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편집]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50년 6월까지 이어졌으나[16]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족보가 소실되거나 백정마을이고 뭐고 다 해체되고 사라졌으며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비 출신을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당 부분 희석되게 된다.
현대에는 도축업자 등을 직접적으로 백정이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뿐더러 그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표현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무엇보다 이 분들의 노고가 없이는 아무도 고기를 먹지 못한다.
비칭이 되다시피한 '백정' 대신 '육가공 기술자', '정형 기술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아직까진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 등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고 한다. 외부인에 의한 작업장의 오염과 열악한 작업환경 문제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치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던 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듯.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조금 오래되긴 했으나 허영만의 만화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편의 13화 대분할 정형 에피소드와 15권 돼지고기 열전 편의 두당 에피소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해당 편의 취재일기, 후일담에서 작가의 탄식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문서에 소개된 일화들을 참고.
예비 사돈댁또라이 - "네 아버지의 직업을 옛날엔 뭐라 했는지 아니? 백정! 백정들은 마을에서 같이 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살 정도로 천대받던 천민 중의 천민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명되었다 해도 어렵게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통과한 기범이 색시로는 적합지 않아!"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205
성찬 - "정형 기술자가 칼을 잡지 않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조경기 - "정형 기술자? 아니야! 우린 백정이야!암. 백정이고말고!"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198
김학도 - "사장님께 따님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표정… 아직도 눈에 선해. 마치 나를 개돼지 보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내뱉는 말. 『주제도 모르는 백정놈!』 칼을 잡고 짐승의 배를 가르는 내가 백정이라면 고기를 파는 사장님은 뭐가 다르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 식객 15권 돼지고기 열전, 「두당」, p. 97
식객 3권의 해당 에피소드를 일례로 들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예비 사돈댁이 문자 그대로 지랄육갑을 하며조선 시대의 법률가는 무슨 양반인 줄 아나?[17] 혼삿길을 파토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름난 육가공 기술자였던 '무사' 조경기는 칼을 놓고 대형 음식점에서 화부 업무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후 조경기는 자신을 찾아와 정형 기술자로 대하는 성찬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은 백정이라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습[18] 더불어 15권의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최고의 도축 기술을 선보이며 두당으로 일하던 김학도가 어느 고깃집 사장의 딸과 서로 사랑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아이까지 임신해서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사장의 멸시와 분노 등으로 일이 그르쳐져 딸은 자살하고 '돈아(豚兒)'라 이름붙였던 복중의 아이 역시 죽어버리는 등의 비극을 맞이했고, 이에 독기와 한을 품게 되었다.[19]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 EBS 극한직업편에서 육가공공장에서 정형사와 발골사들이 실명과 얼굴을 보이며 떳떳하게 그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방송되는 모습을 보면 그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물론 여전히 기피하기는 하나 이는 백정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 3D직종으로서의 문제이다. 육가공사가 왜 극한직업으로 다뤄지는 건지 한번 생각해보자. 축산물단지 육가공사 초임 월급이나 임금 수준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일이 힘든건 덤이다. 3D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이나 환경 등의 개선이 매우 더디고, 초과나 연장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장수당에 대한 것이나 철저한 근로시간 준수따위도 잘 안 지켜진다. 사회의 인식조차도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공부해서 공무원되거나 회사들어가"라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멸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개선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블루칼라는 무식해서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는 인식을 바꿀 차례다 지금은 베테랑 도축업자들은 자기 건물이나 점포를 가져 엄연히 사장님 대접을 받는다. 오히려 도축업자 집안에 시집장가가면 사장님 집안으로 시집장가간다고 좋아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밖에 일부 비하적인 말로 쓰이는데 한 네티즌은 부모가 보신탕집을 한다고 적었더니만 개빠들이 개백정이라고 하여 어이없어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론도 많았고 개빠들을 가리켜 '개빠답다.', '그러는 놈들이 정작 정육점이나 일반 식당에 가서 돼지백정, 소백정,닭백정이라고 이렇게 말하지도 못하지, 지들이 처먹고 그 개에게 먹일테니까' 라고 신나게 욕하며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역관광 이런 놈에게는 고기를 팔지 말자
비유적인 표현
흔히 악독한 독재자나 살인마에게 인간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인간인 백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백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에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평가를 통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사용하는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숙청되었을 테니까. 돼지 보고 '돼지야' 하면 그 돼지 기분이 어떻겠는가?
서구에서도 비슷한 뜻인 듯 하다. 백정과 뜻이 비슷한 영어 단어인 butcher(도살업자, 정육업자 란 뜻)엔 "잔인한 살인자"란 뜻도 있다. "Ah~ Fresh~ Meat!" 그러나, 이 butcher는 사람 성으로도 쓰인다. 이 쪽은 smith(대장장이) 등과 같이 조상의 직업이 성으로 붙은 경우.
라틴어로는 Carnifex. 어원이 참 깔끔하다. Carn(고기) - i(발음을 위해 첨가된 음운) - fex(만드는 자). 아울러 Lanius라는 말 또한 백정이라는 뜻이며, 폴아웃2의 등장 노예상인 메츠거Meztger또한 독일어로 백정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