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서거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읽다보니 DJ와 겹치는 내용이 많더군요.
특히 13대 대선~14대 대선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시절이라 잘 몰라서 나무위키를 읽으며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제5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정치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자,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또 다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이미 김영삼 후보가 대선에 출마했던 상태라 김대중은 탈당후 신당을 창당하여 대권에 도전한다,[19][20] 동맹 관계였던 양김씨는 서로 척을 지게 된다.[21][22] 그러자 엉뚱하게도 두 김씨를 지지하는 지역 간[23]의 대결 구도 비슷하게 되었는데 두 동지의 대립으로 노태우가 당선되는 사태에 이른다.
[19] 게다가 김대중은 이보다 1년 전에 대통령 직선제 관철을 조건으로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적이 있었고, 출마를 시사하기 전날에도 불출마 언급을 했었기 때문에 비판이 거셌고, 김영삼으로서도 배신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후로 김대중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김대중에게 붙인 별명이 대통령병 환자
[20] 이 때 김대중에게 실망한 평생의 동지 김상현이 김영삼에게 가 버리기도 한다. 나중에 3당 합당 반대파 ,속칭 "꼬마민주당"이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면서 다시 돌아오긴 하지만.
[21] 사실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공식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 양자 간 단일화 및 경선 관련한 협상이 있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후로도 야권 단일화 협상이 있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22] 이 당시 쟁점은 대권을 누가 갖고, 당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였는데, 대체로 중재안으로 제시된 것이 대권은 김영삼, 당권은 김대중이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삼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켜온 정당에 뒤늦게 들어와서 경선하자는 김대중이 탐탁지 않았을 것인데다가, 자신의 조직을 당권 주자인 김대중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타협하는 것 역시 꺼림칙했으리라 볼 수 있다. 반면, 김대중 입장에서는 자신이 오랫동안 재야에 발 묶여 고생하고 있었으니 경선 치를 기회라도 달라고 요구할 만했고, 자신이 당권 갖고 2인자가 되는 것 역시 반드시 후일이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탐탁지 않은 타협안이었을 것이다.
[23] PK 지역은 김영삼을, 호남 지역은 김대중을 지지했다. 특히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내세워 호남을 결집시킨 뒤 자신이 강점을 보이던 수도권에서 이기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개표 결과 호남은 결집됐으나, 경기에서 노태우가 가장 많은 표를 쓸어담았고, 결국 김대중은 3위로 낙선
DJ가 분당하지 않았다면 YS+DJ의 구도로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였고, 그렇다면 결국 이번에 양보한다면 민주 세력이 최소 5년 앞당겨 승리할수 있는 기회였는데, 왜 양보하지 않은것일까요.
결국 이 사건 이후 통민당과 평민당의 갈등이 존재했고, 13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를 두려워 하던 노태우+제2야당으로 밀려버린 YS가 합치는 3당 합당이라는 병크가 터졌고..
이 분당 당시의 배경에 대한 서술이 잘 나와있지 않아서, 분당 배경이 궁금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마지막으로 나무위키의 평민당 문서에 있는 YS와 DJ에 대한 비판 한번 올려봅니다.
결국 김영삼은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뒤지지 않는 치졸한 작전으로 복수에 성공했다. 두 사건으로 한국 정치는 정책과 이념 대결보다는 지역주의를 앞세운 저열한 이전투구로 크게 의미가 퇴색된다. 평민당의 창당이 김대중이 불복의 멍에를 쓰는 데 가장 일조한 사건이라면, 김영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략으로 보답한 셈. 정확히 말하면 3당합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미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후의 일이긴 하지만, 명색 민주화와 진보를 기치로 내걸고 정치 인생을 걸어온 김영삼이 유신독재의 당사자와 제5공화국의 주인공과 손을 잡았다는 점을 볼 때 배신에 가까운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후 김대중 또한 스스로 원조 쿠데타세력이라고 하던 김종필과 DJP연합으로 대선에서승리를 위해 공동정권을 잡고 공동정권을 운영한것을볼때 비판의여지가 존재한다.
첫댓글 분당 배경은 이미 다 나와 있네요 DJ가 단독출마로도 당선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양보한다 한들 차기 대선후보가 확실한지 당선이 확실한지 개런티가 되지 않으니까 불안감도 있었지요 YS가 당선된 이후에는 정치적 보복을 피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3년 가까이(?) 은둔해 있다가 복귀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지요
혹 좀더 뒷배경이 있나 궁금했네요 ㅎㅎ, 당시의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라던지.. 13대 대선이 너무도 아쉬워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오래전 일이라 자료가 많지 않네요.
복귀하자마자 YS에 대한 강경발언을 마구 쏟아냈죠. 양김의 갈등이 극에 달한건 DJ 정부 초기에 YS가 'DJ는 독재자'라고 독설을 뱉었을 때였죠.
@NCAA_Fanatic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퇴임이후에 그렇게..ㄷㄷ..
@Duran 김현철씨를 DJ가 잡아 넣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걸로 사이가 매우 멀어진걸로 압니다.
김대중 VS 김영삼 이라는 책이 있는데, 가벼운 어조로 쓰였지만,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다 담긴 재밌는 책이죠. 추천합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회고록을 통해 교차비교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라는 책 참고해봐도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고록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만약 ys와dj의 단일화가 되고 88년에 그중 한명이 대통령이 되고, 3당 야합이 없었으면 어떻게 됬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이때가 좀 아쉬웠던것 같아요. 이 이후의 정치적 행보가 YS-DJ 모두 험난했죠. 차라리 서로 조금만 숙였더라면..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실제론 단물을 많이 빨리기도 했죠ㅎㅎ그래도 숙청됐어야 할 사람이 내각제의 총리가 될번했다는 사실은 좀 소름끼칩니다.
그래도 그 댓가로 '평생 2인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