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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퇴락 / 성철스님수행일화 4
영주는 불교를 더 알고 싶었다. 문자가 없는 경의 세계를 체험하고 싶었다.
아예 절집에 머물며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었다. 영주는 대원사를 자주 찾았다.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들렀던 절이었다.
영주가 요양이 아닌 정신적 수양을 목적으로 대원사를 드나들자 묵곡리 집 식구들은 불안했다.
아버지 이상언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영주가 대원사에서 한 철을 나겠다고 하자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족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남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가장의 마른기침 소리만 들어도 가솔은 화들짝 놀라곤 했다.
1934년 가을, 영주는 집을 나섰다.
대원사가 가장 가까운 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70리 길이었다.
이른 아침 이슬을 밟으며 떠나갔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영주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아내 이덕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끝내 내다보지 않았다.
경호강변은 어느새 삭풍이 불고 있었다. 영주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스물세 살 청년은 대원사의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대원사는 지리산 동쪽 기슭 대원사계곡(유평계곡) 옆에 파묻혀 있었다. 계곡은 깊고 길었다.
선녀탕, 옥녀탕, 세심대(洗心臺), 세신대 등이 있음으로 미루어 불교적 설화가 깃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설화는 세월에 떠밀려 멀리 바다로 흘러갔을 것이다.
대원사계곡과 그 주변은 약자들이 숨어든 피난처였다.
임진왜란, 동학혁명, 항일투쟁, 한국전쟁 등의 난민들이 숨어들어 화전 등을 일구며 생을 이어갔다.
지금의 대원사는 유명한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스스로 동국제일 선원이라는 9층 석탑 앞의 선원이 그윽하다.
경내는 정갈하고 비구니의 맑은 미소가 밝게 부서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법일 스님의 원력이 이루어낸 불사라며 그 공덕을 중창사적비문에 새겨서 기리고 있다.
하지만 천년고찰 대원사도 부침을 거듭했다.
신라 진흥왕(548년)때 창건한 후 여러 차례 불에 탔다.
그러다 1890년 혜흔선사가 전각을 중건한 후에는 고승의 강경(講經) 소리가 그득했고, 선객과 학인이 몰려와 탑전에서 좌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어찌 보면 잠시, 1914년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다시 주지 영태(永泰) 등 50여 명이 1917년 전각과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중건했다고 한다.
영주가 들락거릴 때의 대원사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다.
1936년 영주보다 2년 늦게 대원사로 출가한 법일 스님은 당시 대원사에 대처승이 100여명 정도 기거하고 있어 비구니로서 토굴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니까 영주가 대원사에 머물 때에도 많은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훗날 여순사건(1948년)때 국군의 박격포사격으로 대원사 전체가 불탔는데, 그 직전까지도 수는 많지 않지만 대처승이 기거하고 있었다.
아무튼 대원사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의 절이었다.
작정하고 공부하러 들어간 그해 가을의 대원사 광경을 성철은 훗날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마당에는 속가의 옷들이 빨랫줄에 늘어져 있었고, 바람이 풍경을 울릴 때면 기저귀나 여자 속옷이 나부꼈다.
영주는 가자마자 단풍놀이 나온 경찰서장 일행과 대처승들이 벌인 질펀한 술자리를 목격했다.
승려들이 왜경에게 술을 따르고 함께 고기를 뜯었다.
중들의 얼굴이 대원사계곡에 떨어진 단풍보다 붉었다.
성철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생을 금하는 게 불교의 근본인데 경찰서장이 온다니까 중들이 법석을 떨며 큰 돼지를 잡고 술을 몇 통씩 메고 개천에 나가고 난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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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술 마시고 돼지 잡는 사찰은 대원사만이 아니었다.
영주가 증도가와 불교를 처음 읽었던 1930년대 초반, 조선불교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세속화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억불정책보다 무서웠다.
일제는 대처식육(帶妻食肉)을 허용했고 대처승들은 버젓이 절에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았다.
승려들은 살이 올라 뒤뚱거렸다.
승려의 결혼은 차치하고 축첩이 문제가 되는 무엄한 시대였다.
이 땅의 선지(禪旨)를 붙들고 있던 선승들은 제 가슴만 치다가 마침내 더 이상 불법을 능멸하지 말라며 입을 열었다.
백용성 스님도 1926년 두 차례나 건백서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비판했다.
"석가모니 이래로 비구의 대처식육의 설이 없는데 근래에 무치(無恥)한 무리들이 대처식육을 강행하여 청정한 사원을 마굴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참선, 염불, 간경(看經) 등 까지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용성 스님은 대처식육을 행하는 무리를 대적(大賊)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대처승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까지 합세하여 불교계는 대처식육논쟁에 휩싸였다.
고기 맛을 보고 쾌락에 젖은 무리들은 소리쳤다.
"인간의 본능은 원시시대 이래 변치 않았다. 육체는 활동과 가치의 원천이다. 인간을 위한 불교가 돼야한다."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은 본능에 따름이고, 왕성한 종교활동을 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들의 항변이 가소로웠다.
용성 스님은 다시 1932년 잡지 '불교'에 일제 강점기의 사원경제를 개탄하는 글을 실었다.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 독과 다름없다 하니 나는 조석(朝夕)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불교계를 혁신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찰은 용성 스님의 표현대로 '음탕한 소굴'이 되어갔다.
오죽하면 일본인들이 조선불교의 타락을 걱정했겠는가.
승려들이 타락하니 백성들이 불교에서 멀어져갔다.
중이 나타나면 노려봤고, 아이들은 돌을 던졌으며 덩달아 개들이 짖었다.
조선불교는 억불정책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하더니 결국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정체성을 잃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급기야 일본의 승복을 입겠다고 먼저 날뛰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는 참으로 비루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타락상과 똑같은 궤적의 삶을 살아간 승려가 있었다.
바로 이회광(李晦光)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이라 불렸다.
동사열전(東師列傳)은 전국의 학인들이 이회광의 강론을 듣기 위해 풀덤불을 헤치며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을사늑약 체결 후 20년 남짓 조선불교를 팔아먹었다.
승권을 쥐고 친일 행각을 벌여 불교계의 이완용이 되었다.
불교연구회 회장직을 맡아 불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이회광은 원종(圓宗)을 설립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합병하려 했다.
하지만 박한영, 한용운, 진진응 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원종을 부정하고 이회광 등 친일파를 규탄했다.
이회광의 야심이 일단 깨졌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에도 이회광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청암사 주지 김대운, 실상사 주지 진창수, 대원사 주지 조영태 등을 대동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조일(朝日)불교 연합책동을 벌였다.
그러나 승려들과 신도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친일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비리에 연루되어 해인사 주지에서 쫓겨나자 '조선불교총본산을 설립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실천하자'고 떠벌렸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도 결국 그를 외면했다.
이회광의 말년은 쓸쓸했다.
몇 년 동안 잠적해 있다가 1933년 한강변의 조그만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
왜색에 물들어 살았던 그 많은 승려들도 이회광과 비슷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이회광의 삶 속에 일제강점기의 조선불교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지옥도였다.
하지만 어둠은 그 저편에 빛을 품고 있었다.
조선불교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영주도 스무 살을 지나서 '불교'를 구독했으니 불교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만해와 용성 스님이 설파한 불교개혁론을 접했을 것이다.
이미 조선불교의 어두운 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영주는 대원사에 들를 때마다 탑전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안에 들면 편안했다.
그 옛날 선승들이 대원사 탑전 안에서 깨달음을 구했으니, 그 기운이 영주에게 흘러들었는지도 모른다.
참선을 해보겠다며 탑전에 드니 주지가 펄쩍 뛰었다.
유발 속인이 어찌 탑전에 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지가 이회광을 따라 일본에 간 조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영주는 주지를 향해 일갈했다.
"당신들은 처자식 거느리고, 소 잡아먹고, 술장사 떡 장사까지 하면서 누구를 나무랍니까. 절에서는 공부를 해야지 어찌 살림을 하고 있단 말이요. 당신들이 그러고도 중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웬 말이 그리 많으시오."
그것은 조선불교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주지는 얼굴을 붉혔다.
#법보신문 #백련불교문화재단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