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고개를 넘어서 도착한 한의원은 그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한의사였다.
지금은 한의원, 한의사하지만 그때는 단순히 침을 잘 놓은 할아버지였다.
그 집을 들어서면 입구에 우물이 있고 큰 사랑채와 장독 옆에 큰 감나무가 있었다.
국민학교 친구 김진수의 아버님이기도 했다.
방으로 들어 서니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고 침이랑 쑥뜸을 뜨는 그릇이 있었다.
한의사님은 몸은 바짝 말라 있었다.
어머님이 이리저리 해서 내가 입이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누워서 대바늘 같은 침을 얼굴에 맞았다.
오른쪽으로 입이 돌아가서 왼쪽 얼굴에 집중적으로 맞았다.
한참을 아픔을 참아가면 침을 맞고 어머니와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은 침은 한냥이고 조리는 9백냥이라면서 그 초여름에 뜨거운 국을 끓여서 나를 먹이고
이불을 꺼내서 땀을 내라고 했다.
나는 3일을 학교를 가지 않고 나 혼자 침을 맞았다.
그리곤 어제 했던 것 처럼 어머님이 국을 끓여주셔서 먹고 땀을 냈다.
며칠을 집안 어른들이 차도가 있는지 물어왔다.
집안의 제일 어른이신 큰 어머님이 자주 오셔서 물어 보곤 했다.
3일 이후 부터는 학교를 마치면 집에 오는 길에 침을 맞고 왔었다.
처음에는 친한 친구 몇이서 내가 침을 맞을 동안 잔디밭이 잘 조성되어 있던 어느 가문의 종묘가 있던 곳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놀고 있었다.
차도는 서서히 좋아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루 가운데 있는 거울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고 입술을 모아 보는게 제일 처음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키가 작아서 까치발로 서서 얼굴에 있는 입술을 보았다.
12살 소녀는 눈만 뜨면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을 열었다.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할지도 몰랐었다. 그냥 어제 맞은 침으로 입이 돌아 왔는지 궁금해서였다.
엄마 아버지 보다 내가 내 자신의 얼굴의 관심을 갖고 보고 매일 거울을 보았다.
침을 한번 맞으면 돌아와야 했다. 나는 수십번을 침을 맞아도 빨리 입이 돌아 오진 않았다.
김진수 부친께 침을 맞은지 3개월이 되어 가도 입은 조금의 차도만 있을 뿐 돌아 오진 않았다.
어머님은 바다 장어를 구해서 내가 학교 가는 길에 내 손에 들려서 한의사님한테 갖다 드려라고 했다.
어머님도 속이 타셨던지 하루는 동네 사람 봉산댁도 입이 돌아가서 침을 맞고 나았는데,
웃동네 누구도 침을 맞고 나았다고 애타는 속내를 털어 놓으셨다.
힘든 농사일에 자식들도 6남매를 건사할려니 힘든데 어린 딸까지 입이 돌아 가서 빨리 완치가 안되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입이 돌아간데는 대추나무가 양밥이라고 대추 나무를 갂아서
저녁에 잘 때 입에 걸어서 자면 입이 돌아 올 수 있다 해서 그렇게도 여러날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렇게 하면 낫는 줄 알고 그 불편함이 불편함인 줄도 모르고 대추 나무를 걸고 잠을 잤다.
입 돌아간것은 낫지를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는 내가 3개월을 넘게 침을 맞고 입이 안돌아 오면 마산으로 가서 용한 한의사를 수소문해서
좀 맞쳐주지 하는 생각을 커서는 참으로 원망을 많이 했다.
4개월째도 입은 어느 정도는 차도가 있었는데 완전하게 안 돌아와서 고개 넘어 다른 할아버지가 침을 잘 놓는다고
어머님이 알아서 오셔서 나는 학교를 마치면 다른 동네에 있는 할아버지한테 가서 침을 맞았다.
그 할아버지 집은 아주 작고 마당에는 처음 보는 토란대 잎이 우산처럼 큰게 있었다.
침을 맞고 나면 늘 나랑 친하던 친구 3명이랑 바닷가에서 놀기도 했다.
할아버지 집 앞이 바다라서 초 여름 더운 날씨 탓에 어린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바다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다.
침을 맞고 예사로 바다물에 발을 담그고 놀고 하면 안되는 거였다.
침으로 몸을 혈을 돌렸는데 초 여름이라 해도 바다물에 들어 가면 몸의 온도가 차가워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을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었다. 엄마는 늘 몸을 따뜻히 해라
차가운 물에 손을 넣지 마라 해도 어린 마믐에 뭐 괜찮겠지, 친구들이 하니 자연 안할 수도 없는 인내력으로
나도 덩달아 침을 맞고 물에 손을 넣고 했다.
또 3개월을 침을 맞아도 조금 차도가 있을 뿐 돌아 오진 않았다.
침을 맞을 때 마다 침 맞는 값은 250원인가 2,500원인가 했다.
그때 돈으로도 농촌에서 매일 같이 그 돈을 침 값으로 내기가 버겨웠다.
매일 가다가 3일에 한번씩 가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가다가 침 맞으려 가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머님과 아버님, 큰어머님, 할머님, 모두 입이 완전 안돌아 오니 이정도는 괜찮겠다고 의논을 모았었다.
가만히 있으면 표가 안났는데 웃거니 말을 하면 표가 났었다.
나는 몰랐는데 상대방이 나를 보고 약간 표가 난다. 말을 안하면 입이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했다.
나는 내가 거울을 볼 때는 가만히 있거나, 정색을 해서 보니 자연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아픈 침, 나를 지치게 했던 침, 나는 참 많이도 참으면서 침을 맞았다.
그 침을 안맞아도 되는 해방감에서 침 맞으려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에 모든 근심을 내려 놓았다.
침을 맞으려 다니면서 나 혼자 나 자신과 싸우고 지내는 동안 계절은 가을로 가고 있었다.
그 뜨겁던 한여름의 퇴약볕은 뒷밭의 고추를 주렁주렁 열리게 해서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고구마는 햐햔 고구마 꽃을 피우면 알이 굵어지고 있었고, 매주를 담그는 노란 콩들도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5학년 초여름에 시작한 침 맞는 일을 늦은 가을에 그만 두었었다.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는 온 이웃동네까지 찬치였다.
내 기억으로는 나는 운동회 무용에도 참여를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후 운동회 연습으로 춤을 추곤 했었다.
운동회 연습이 한참일 때 우리반의 어떤 여자 친구는 쓰려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누워있기도 했다.
그 병이 간질병이었다. 운동회 연습을 하는 동안 그 친구는 몇번을 쓰려졌다.
아이들은 우루루 몰려서 신기해 하기도 하고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궁금증으로 구경을 했다.
정작 쓰러진 본인은 모르고 눈을 감고 입에 거품을 품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지나면 본인이 스스로 일어났다.
얼마나 챙피하고 쥐구멍이라도 들어 가고 싶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이 그 친구를 운동회 연습을 빼 줬어야 했다.
국민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까지는 나는 내가 입이 돌아 간 줄도 모르고, 완치가 다 안됐는데도
내가 우울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운동회 때 나는 달리기를 잘 해서 반에서 100M 달리기를 하면
공책과 연필을 타서 엄마한테 운동회 중간중간에 갖다 주곤 했다.
운동회는 온 동해면에 있는 사람들의 잔치라서 그 날은 모든 사람들이 찹쌀 밭에 콩을 넣고 찰밥을 하고
가을에 나는 햇밤도 삶아 오고, 햇 고구마며 여러가지 맛 있는 것을 먹을 수가 있었다.
항상 부지런하신 어머님은 음식을 많이 해서 동네 어른부터 먹는 것을 챙기시길 좋아하셨다.
그날은 장농속에 있는 고운 한복으로 멋을 내시고 학교 뜃뜰에 있는 풍경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던 미혼이었던 언니도 오랜만에 학교에 와서 사진도 찍고 했었다.
운동회가 마지막을 장식할 때는 각 동네마다 대표를 뽑아서 1천미터 릴레리를 하는데 나도 뽑혀서 선수로 나가기도
했었다. 달리기도 잘해서 고성군 대회도 나가고 했었다.
국민학교, 어린시절 5학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6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의 사모님이 아파서 나하고 금숙이란 친구하고 늘 선생님댁에 심부름을 자주 해 주었다.
교실 옆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길려다가 선생님 사택까지 물을 양동이에 길려다 주곤 했다.
반 대표로 금숙이란 친구랑 둘이서 우물물을 길려다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가면
그때 처음 본 딸기도 주고, 토마토도 주곤 그리 했었다.
선생님댁에 물을 길려다 준다고 우리 동네 말 많은 친구는 선생님이 나만 이쁘한다고 친구들한테 이간질을 하기도 했었다.
국민학교 6학년도 그렇게 보내는 동안 나는 입이 돌아가서 우울한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도 어리고 친구들도 어려서 너 입이 돌아갔네 하고 이야기를 안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를 우여곡절 속에 입학을 했다.
국민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가지 말라고 해서 안갔다.
우리 동네 59년 돼지띠들과 58년 개띠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다 중학교를 가지를 않았다.
하루는 나보다 8살 많은 언니랑 보리 밭을 메고 있었다.
새파란 보리 밭을 호미로 메고 있었는데 오늘 아버지한테 중학교 보내 달라고 해라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아 오겠다고 해라고 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큰 오빠는 고성에 있는 고성 농고를 다녔고 작은 오빠는 3년 늦게 진동 삼진 중학교를
아침마다 배를 타고 다녔었다. 언니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딸이라고 신경을 못 써주고 오빠들과 동생들의
뒷바라지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날 언니의 가르침과, 훈련으로 저녁에 아버지한테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했었다.
"아버지, 중학교 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아 올께요. 중학교 보내 주이소!!"
이렇게 아버지한테 간절하게 이야기를 해서 아버님이 그 다음날 국민학교를 가서 이 필숙 내 딸을 중학교 보낸다고
공납금을 내고 오셨다. 언니랑 보리 밭을 메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한복을 차려 있으시고 집으로 돌아 오시는 길을
언니랑 나랑 보고서 "아버지 오신다."고 했었다. 그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중학교 간다고 등록을 했다고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중학교를 가게 되었다. 국민학교 옆에 동해 중학교가 새로 생겨서 내가 입학하면 2회 졸업생이었다.
그날 언니의 훈련과 어드바이스가 없었으면 나는 영원히 상급학교를
못 나온 자격지심에 평생 시달릴 수도 있었을 일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내 친구들은 우리집 보다 잘 살아도 도시의 남의 집에 식모를 살려 가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공장에 다니면서 제대로 못 먹어서 죽은 친구도 있다.
커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때 당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아재집 외숙이는 쓰레트 지붕을 잇는 다고
아재는 딸을 중학교도 안보냈다고 했다.
그때는 다들 못 살아서 초가지붕을 해마다 볕집으로 지붕을 이엇고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노동도 엄청 큰 노동이었다.
쓰레트 지붕으로 지붕을 이엇면 큰 재산을 하나를 증식하는거였다.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던 때 였던지...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안 다니는 아이들과의 삶의 질이 많이도 달라져 가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을 다니고 2학년 올라갈 때 큰 오빠는 마산에서 농협에 다니고 있었다.
작은 오빠는 마산 상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큰 오빠는 나를 교대를 보낼려고 전학을 시켰다.
하루는 큰 오빠를 따라 전학 온 아이들끼리 모여서 뱅뱅이를 돌렸는데 나는 6번이 나왔다.
마산제일여자중학교였다. 전학을 온 나는 큰오빠 작은오빠와 방이 두개고 부엌 앞에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 가고 하는 집에 갔었다. 큰오빠가 아버지 역활을 한거였다.
학교 갖다 오면 큰 오빠의 와이샤스도 빨고 연탄불도 꺼져 있으면 나무로 불을 피워서 연탄불도 살리고
김치도 담기도 하고... 그런 세월이 마산에서 자치를 하는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수필과 소설.. 쓰는 카페에서 장편을 써보라고 하네요.
그래서 써봅니다.
아직 정서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