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오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믿는 자가 성령을 받습니다.(갈3:2)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아브라함이 그렇게 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하십니다.(갈3:9) 아브라함처럼, 잘 듣고 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원수됨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면, 가족과 원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10:35~37)
지연과 혈연에 매이지 않는 결정을 하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심은, 육적인 어떤 관계에도 매이지 말고, 영적인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하시기 전에, 바벨론에서 ‘도시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계획을 깨뜨리시고,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창11:8~9) 아브라함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 사람들을 ‘흩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온 세상 사람들을 ‘흩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다는 걸,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듣고 믿음으로 성령과 동행했습니다.(갈3:6)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브뤼겔, '바벨탑', 1563년
지연‧혈연과 관련된 모든 관계를 떠나 새 시대를 향해 몸을 던져 성령과 동행한 아브라함이 도착한 곳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창12:5)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아브라함은 보았습니다.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 같은, 파리의 에펠탑 같은 복을 상징할만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떠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12:6)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상수리나무’를 보았습니다. 하늘에 닿을 것 같던 지구라트(바벨탑)를 보며 자랐던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 아래에 섰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지구라트가 우뚝한 우르를 떠나 상수리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마른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닿은 가나안 땅의 랜드마크가 ‘상수리나무’였던 겁니다.(창12:6) ‘거대한 탑’을 랜드마크로 삼던 땅을 떠나, ‘상수리나무’가 랜드마크인 땅으로 왔습니다. 지구라트도 별점을 보던 곳이요, 상수리나무 역시 무속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여하튼, 거대한 탑이 신성을 상징하던 도시에서 고작 나무 한 그루가 신성을 상징하는 흙길로 아브라함이 나선 것입니다. 지구라트는 무너질 것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아브라함이 닿은 땅은 무너질 것도 없는, 문자대로 공허의 땅입니다.
상수리 나무 한 그루가 랜드마크가 되는 땅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가족이 살았던 도시 ‘우르’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나가는 하구에 위치’한 도시여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착하기에 맞춤한 땅이었지만, 이제 아브라함이 새로은 삶을 경영해야할 땅은 누구라도 일가를 이룰만한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대도시에서 ‘상록수나무’가 랜드마크인 산골짜기로 이주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성령께서는 아브라함을 기근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아브라함에겐 아들이 겨우 하나 있었고,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야 사라를 장사 지낼 수 있는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창23:9) 이것이 ‘아브라함의복’이었습니다.(갈3:14)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땅에서 ‘기근’이 들었습니다.(창12:10) 상수리나무를 랜드마크로 삼는 땅에서 기근은 일상이었을 겁니다.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땅이라, 농사 짓기에 썩 좋은 땅은 아니니까요.(신11:11)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는 길은 위험한 여정입니다. 좋게 말하면 모험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을 따르는 것은 안전한 여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라 표현하는데,(갈3:24,25) 초등교사로 번역된 ‘파이다고고스’는 본디 집과 학교를 오갈 때 안전 도우미 역할을 하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학교에 가는 길과 집으로 오는 길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노예가 율법입니다. 율법을 따라 가는 길은 안전하겠지만, 장성한 사람의 길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안전한 길에 서 있다면 노예의 보호를 받는 것이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이 불안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참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보이고,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은 체계 잡힌 문자요, 성령은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 정리되지 않은 문장입니다. 율법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 속에서 통용되고, 성령은 없던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운입니다.
여기 ‘상수리나무’ 아래에 도토리처럼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길에 서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인상을 주진 못할 것입니다. 대낮의 태양이 밤을 이기지 못하고 져버리듯, 타오르다가 스러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빛으로 기억되고 새벽이 오면 부활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