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방폭포 전경. |
겨울이면 춥고 눈이 내리는 것이 제격이지만, 목포에서 남쪽으로 141.6㎞, 부산에서 남서쪽으로 286.5㎞, 일본 대마도에서 서쪽으로 255.1㎞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연평균기온 15.3℃로서 해발 200m 이하의 저지대에는 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버리는 따뜻한 남쪽나라다.
약 12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화산섬 제주도는 최고봉인 한라산(1950m)을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서 73km, 남북 31km로서 마치 고구마 같은 타원형인 섬인데, 면적 1,848.4㎢로서 국내에서 가장 큰 섬 제주도는 1,000m 이상의 한라산록에는 많은 눈이 내려서 이듬해 5월까지도 백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서복 공원 표지석 |
서복 동상 |
제주도란 지명은 개벽설화의 3성(高·梁·夫) 중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대 손이 신라에 입조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받아서 탐라로 불리다가 고려 희종 때(1211년) 제주로 개칭되었지만,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뒤 원나라와 고려에 번갈아 예속되면서 명칭도 수차 바뀌다가 1374년(공민왕 23) 원나라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제주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일찍부터 돌·바람·여자 3가지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으로 알려진 제주도는 1980년대 외국여행 제한이 풀릴 때까지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을 비롯하여 돌하르방 등 이국적인 남방의 풍물로 내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였으나, 여행자유화 이후에는 내국인보다 재일교포를 비롯한 일본인 관광객이 주류를 이뤘다. 최근에는 소득수준이 향상된 중국인들이 대거 방문하여 관광패턴을 크게 변모시키자, 2006년 7월 1일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자치권을 가진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시켰다.
제주도는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데 이어서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은 뒤부터 유네스코 3관왕을 달성한 ‘아시아의 진주(眞珠)’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관광지마다 ‘세계 7대 자연유산’의 하나라는 홍보 표지석과 문구가 즐비하다(2014.02.26. 제주도 성산일출봉 참조).
서복공원 정자 |
서복 기념관 |
한라산의 계곡물은 저지대로 내려와서 바다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북쪽인 제주시 일대보다 남쪽인 서귀포 일대의 해식애가 높아서 용암 분출 시에 생긴 수직절리(垂直節理) 현상으로 주상절리와 폭포가 발달되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3대 폭포인 정방폭포·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도 모두 서귀포시에 있다. 천지연 폭포와 천제연 폭포가 남성적인 웅장미를 자랑한다면, 정방폭포(正房瀑布)는 주변의 아기자기한 모습과 어우러져 여성적인 우아미를 갖고 있다. 특히 서귀포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서귀동 해안가의 정방폭포는 폭포수가 직접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로서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주차비는 무료다.
사실 바닷가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한번 쳐다보고 돌아서기에는 입장료가 약간 비싸다는 느낌이 드는데도 제주도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입장료인상을 시도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관광객을 잃는 소탐대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복공원에서 본 밤섬 |
주차장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거쳐 약 5분 정도 가면 정방폭포인데, 계단에서 오랜 구부러진 노송 사이로 보이는 정방폭포의 모습도 일품이다. 그러나 폭포에서 가까운 섭섬·문섬 등이 있는 바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폭포 주변은 잘 발달된 해식애와 암괴· 주상절리가 조화되어 절경을 이루는데, 폭포는 물이 적을 때는 두 세 줄기로 갈라져 쌍둥이 물기둥처럼 보이지만, 수량이 많을 때는 높이 23m, 폭 10m의 물줄기가 절벽 전체를 덮는 커다란 물줄기로 변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물기둥이 절벽에 붙어있는 것 같다.
정방폭포 전경. |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바다와 어우러진 까만 바위 절벽에서 쏟아지는 정방폭포의 풍광은 마치 하늘에서 하얀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제주의 옛 지명인 영주 10경(瀛州十景)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는데, 영주 10경은 제1경 성산출일(城山出日; 성산의 해돋이), 제2경 사봉낙조(紗峯落照; 사라봉의 저녁노을), 제3경 영구춘화 (瀛邱春花; 영구(속칭 들렁귀)의 봄꽃), 제4경 정방하폭(正房夏瀑; 정방폭포의 여름), 제5경 귤림추색(橘林秋色; 가을 귤밭), 제6경 녹담만설(鹿潭晩雪; 백록담의 눈), 제7경 영실기암(靈室奇巖; 영실의 기이한 바위들), 제8경 산방굴사(山房窟寺; 산방산의 굴절), 제9경 산포조어(山浦釣魚; 산지포구의 고기잡이), 제10경 고수목마(古藪牧馬; 풀밭에 노는 말) 등이다.
정방폭포 가는 길 |
폭로 옆 해안 계단 |
정방폭포가 큰 폭포가 되어 바다로 떨어지는 저변에는 폭포 위 약 50m 지점(일주도로변 서신교에서 20m 하류)에 커다란 소(沼)에 모아진 물이 배경이 되고 있다. 또 정방폭포는 중국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이라고도 한다)이 한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돌아가면서 정방폭포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폭포 절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자를 새겨 두어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 서불과차란 글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해안계단에서 본 정방 폭포 |
서복 전설은 사마천이 쓴 사기 진시황 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2200년 전 제(齊)나라 방사(方士)인 서복이 진시황제에게 ‘바다 건너에 신선이 사는 봉래(蓬萊: 금강산)·방장(方丈: 지리산)·영주(瀛洲: 한라산) 등 3개의 산이 있는데, 황제께서 허락하신다면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하여 시황제가 허락했다고 한다.
진시황의 지원을 받은 서복이 동남동녀 3000명을 배에 태우고 불로초를 구하러 산둥성 해안을 출발했는데, 사기에 따르면 제1차 출발은 B·C. 218년이고, 제2차 출발은 B·C. 210년이다. 이처럼 중국의 정사인 사기에 한 번도 아니고 두 차례나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도를 찾아왔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2015.10.28. 지리산 대원사 참조).
정면에서 바라 본 정방폭포 |
서귀포시에서는 1999년 2월 정방폭포 서쪽 끝 절벽 위에 서복기념관과 서복공원 조성에 나서서 2005년 5월 서복기념관을, 2006년 4월에는 서복공원을 각각 조성했다. 정방폭포 주차장에서 정면으로 쭉 뻗은 산책로가 서복의 서귀포 도래를 기념하는 서복공원인데, 공원 입구의 홍살문은 우리나라 전통의 붉은빛이 아닌 중국 특유의 사각형 아치형이고, 그 옆의 정자도 중국전통의 금빛 기와로 지었다.
서복공원(徐福公園)이란 붉은 글씨는 중국 산둥 성 정부가 태산(泰山)에서 채취한 암석에 2003년부터 10년 동안 서민 총리로 인기가 높았던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1942~ ) 전총리의 글씨를 새겨서 2008년에 기증한 것인데, 공원의 서쪽 끝 공터에 세워진 약 5m에 이르는 서복의 동상도 산둥 성 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서복기념관은 진시 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갱 등을 일부 모방하여 배치하는 등 매우 빈약하다.
정방폭포 상류 |
서복공원에서는 정방폭포 앞바다인 문섬·밤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믿고 이곳에 기념관과 공원을 건립한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중국인 관광객이 화장품 매장과 서복기념관을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하지만, 이것도 여행사 측의 일방적인 상술이 아닌가 싶고, 자칫 동북공정 등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하는 중국인들에게 고려 말 원이 직접 지배했던 것을 구실로 제주도까지 야심을 갖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300m쯤 가면 폭포수 뒤로 6·25 때 양민들이 반동분자로 몰려서 처형된 해식동굴 4·3 사건의 장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