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소설 <할매>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황석영의 소설 <할매>는 이 낮고 평온한 문장으로 대서사의 문을 연다. 소설은 도입부의 무려 50페이지를 할애하여 한 그루의 팽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온 과정을 세밀한 다큐멘터리처럼 펼쳐 보인다. 그 지독하리만치 치밀한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나무는 어느새 단순한 식물을 넘어 마을의 '어른'이자 '신령',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서늘한 증언자로 치환된다.
파란 바다와 초원을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던 소설 표지 속 그 팽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고단하다.
전북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1238-8.
지도상으로는 지척인 듯 보이나 길은 자꾸만 어긋나고 멀리 빙빙 돌아가게 만들었다. 길의 한복판을 차지한 미군부대 비행장과 거대한 격납고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라는 명분 아래 조각나고 뒤틀린 길은 그 자체로 하제마을이 겪어온 수난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한때 이곳 하제마을은 섬이었다. 건어물상이 북적이고 사람 냄새가 파도처럼 일렁이던 서해안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00년대 초 간척사업이 평화를 흔들었고, 1938년 일본의 병참기지로 쓰이다가 해방 후 미군이 접수하며 마을의 운명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상제마을과 중제마을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활주로 시설이 확장되면서 결국 하제마을마저 주민들이 떠나고 이름만 남은 적막한 터가 되었다.
허허벌판에 홀로 남은 것은 600년 수령의 팽나무뿐이었다. 나무는 이제 사람의 온기 대신 차가운 미군 비행장의 철조망을 응시하며 서 있다. 주변을 에워싼 대나무들이 바람에 서걱거릴 때마다 그것은 나무가 토해내는 한의 소리처럼 들려온다.
소설 속 묘사처럼 나무의 밑동에 가득한 옹이들은 풍파를 견뎌온 민초들의 거친 손마디이자 굽은 등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는 억울하게 떠난 죽은 자들의 넋두리이자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내뱉는 낮은 숨소리와 닮아 있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잊힌 이름들을 하나씩 호명하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가지를 보고 있으면 600년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응어리를 매일같이 울고 있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쳐진 난간에는 '전쟁 말고 평화', '공항 말고 갯벌'이라는 표지 팻말이 걸려 있다. 그것은 어쩌면 600년 동안 이 땅을 지켜온 진짜 주인인 팽나무가 침묵으로 전하는 간절한 호소일지도 모른다.
나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사라진 것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불러내는 숭고한 기억이다.
첫댓글 이번 군산 하제 팽나무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소설로도 남아있군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당
가기 전에 못 읽고
다녀와서 읽었는데
역사를 소설로 남겨 주신 황석영 작가가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