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장손>
2024년 추석을 맞아 개봉된 <장손>은 전통적인 한국적 유교문화의 쓸쓸한 퇴락을 조명한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오랫동안 대가족의 전통 속에서 가족들의 위계적 질서를 통해서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명절이나 제사를 통해 그나마 이어졌던 관습적 질서는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누군가에게 가해졌던 강압적인 요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불합리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서 분명 기인했다. 단지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진행되었던 관습적 틀에 대한 반발과 반성은 새로운 현대적 가치에 의해 개인적이고 자유적인 형태로 급격하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개된다. 대가족이 모이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여자들은 음식준비에 바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관습에 어긋난 일에 대해 수용하기 쉽지 않다. 손자와 손녀에 대한 대우가 다르고 으레 그렇듯 만나게 되면 형식적인 인사 후에는 깊이 내재하고 있는 갈등이 터져 나온다. 제사의 지속, 가업의 계승, 누군가에 대한 불만이 자연스럽게 폭발하는 것이다. 갈등은 할머니의 급서로 인하여 더욱 강화된다. 숨겨놓은 진실이 드러나고 말로 꺼내지 못한 억울함이 폭발한 것이다. 그 사이에 한쪽 구석으로 떠밀려진 할아버지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한 대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일상적인 자연스러움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대가족의 소멸을 묘사하는 담담한 시선에 가깝다.
가족들의 갈등은 할머니에게 맡겨놨다고 하는 할머니 친구들과 딸의 돈이 행방불명되면서 더욱 확산된다. 알 수 없는 진실은 서로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서로를 증오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특별한 것은 장손의 변화하는 태도이다. 영화 초반 가족들과 어울리기 꺼려했고 집안일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던 장손은 점차 가족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서먹했던 할아버지의 과거의 기억을 듣고, 고통받고 살아가는 고모의 이야기에 귀을 기울인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누군가의 권유처럼, 장손은 집안을 위하여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책임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소소한 변화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와 조금씩 연결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질서의 쇠퇴와 함께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보여주는 서사이다. 낡고 힘겨운 상황이지만, 이제 장손에게는 새로운 가족과 새로운 관계에 대한 분명한 책임과 희망이 담겨있다.
영화 마지막 사라졌던 돈의 행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손에 대한 통장송금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그들이 보여준 절대적인 사랑의 행위를 확인시켜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장손에 대한 사랑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통장을 건넨 할아버지는 손자를 송별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발길은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롱쇼트로 보여주는 엔딩 장면은 최근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애상의 정서를 담은 모습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점, 손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달한 할아버지의 고독하면서도 당당한 발걸음은 인생의 끝을 걸어가는 유교적 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자존감이었다. 그것은 비록 끝을 향해 가겠지만 지난 시간을 결코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고집스러운 마지막 유교 세대의 형상이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붕괴될 수밖에 없는 대가족의 모습을 그려나가면서도 장손의 모습을 통해 변모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계를 기대한다. 비록 장손의 삶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랑을 베풀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따뜻함과 영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로부터 얻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위로를 체험한 것이다. 영화는 위계적인 유교적 질서와 대가족에서 나타날 수 없는 부정적 모습에 대해 결코 변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힘이 때론 힘든 역사적 고통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살아가게 해주었던 힘이었다는 점을 은연중에 확인시켜준다. 고십스러움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유교적 문화는 사라지고 있지만 그것의 뒷모습은 꽃상여의 처연한 아름다움처럼 온통 부정할 대상만은 아니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 마지막 엔딩과 상여소리는 잊지 못할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될 것같다.
첫댓글 -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에 대한 생각과 그러리라는 추측일테지만, 우리 중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문화요 전통이겠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지긋지긋한 시간의 연속 뿐이었음을...... 이제 어른이 계신 문화는 사라져가고(질서도 사라져가는....) 개인적인 삶의 취향만이(철저히 합리화된 이기적인 사회만이...) 남은 건조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