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 만든 독일-덴마크 화가 Emil Nolde의 캔버스에 유화. 그것은 일련의 해바라기 그림 중 첫 번째였으며 Nolde의 작품에서 같은 주제에 대한 72 개가 넘는 유화 중 첫 번째 작품이었다. 해바라기는 그의 꽃 그림 중 두드러진 모티브다.
Nolde는 해바라기로 명명된 된 여러 점의 유화를 그렸으며 특히 해바라기를 표현한 일련의 작품을 지었다. 이 주제에 대한 첫 번째 그림으로 Nolde는 단순히 해바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른 해바라기 그림에는 키 큰 해바라기 또는 달리아와 해바라기와 같은 보다 차별화 된 제목이 주어졌다. 그 역시 해바라기를 바라보고 초점을 맞춘 빈센트 반 고흐에 동병상련을 느낀 것일까?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치열한 삶의 사투와 영향도 이 작품들에서 발견한다.
Nolde에게서 동물, 식물 및 기타 자연 현상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인격체처럼 개인적인 특성 살려 의인화 한 점이 독특하다. 꽃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감정과 기분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나타났다. 이 그림에서 해바라기는 절반 길이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얼굴은 관객을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꽃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지는 그림에서 잘 익은 해바라기와는 달리, 여기서 해바라기는 보는 관객을 똑바로 바라 보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그림은 세 개의 해바라기 꽃을 강한 노란색 톤으로 묘사하고 잎과 줄기를 정면으로 묘사하여 식물의 상반부만 보여준다. 노란색과 빨간색 음영의 플록스 Phlox umbels and leaves 과 나뭇잎은 이미지의 왼쪽 1/3에서 볼 수 있다. 높은 수평선 아래에는 미분화 된 짙은 갈색 흙색이 배경을 형성하고 수평선 위에는 구름과 하늘색이 보인다. 페인팅 영역의 많은 부분을 묘사하는 비교적 침울한 색상이 인상적이다.
에밀놀데는 1909년 그의 종교화 《성령강림제》가 인상파적인 베를린 분리파 미술전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공개적인 질문을 제출하여 이에 반론을 펴고 분리파와 인연을 끊었다. 이보다 먼저 드레스덴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에 찬사를 보낸 브뤼케파 화가나, 분리파 가운데서도 혁신적인 신세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놀데를 표현주의의 맹장(猛將)으로 추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놀데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양을 여행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원시예술을 접하였다. 그는 원시예술의 단순 소박한 형식 가운데에 화려하고 기괴한 생명력의 표현을 흡수하여, 그것을 그의 주요한 모티프인 가면과 인형에 관한 제작의 영양분으로 삼았다. 1937년 놀데의 작품은 나치스에 의하여 퇴폐예술이란 낙인이 찍힌다. 그는 북독일의 제뷔르에 은신하여 1956년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기 작품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종교화와 불길한 분위기를 담은 풍경화로 유명하다. 파리에서 표현주의 화풍과 유사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6년 브뤼케파에 가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드레스덴에 근거지를 둔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모임인 이 단체는 놀데의 '색채의 폭풍'(Storm of Colour)을 극찬했지만 직관적인 외톨이 화가 놀데는 1년 반 뒤 결속이 강했던 이 단체를 탈퇴했다.
종교에 열광하고 죄의식에 괴로워한 그는 〈황금 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en Calf〉(1910,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국립회화미술관)·〈알렉산드리아 항구 In the Port of Alexandria〉와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 In the Port of Alexandria〉는 연작 〈이집트인 성모 마리아의 전설 The Legend of St. Maria Aegyptica〉(1912, 함부르크 미술관) 중의 하나인데, 이 연작은 등장인물들의 에로틱한 광란, 그리고 악마 같고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들을 거친 도안과 조화되지 않는 색조로 그렸다.
9폭의 폴립티크(polyptych:성단의 배후 등에 4패 이상의 패널을 이어 맞춘 화상)인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Christ〉(1911~12, 제뷜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중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에는 예수의 상처를 보고 도마가 느끼는 경건한 두려움을 통해 종교적 회의에서 벗어나려는 그 자신의 고민이 표현되어 있다. 1913~14년 그는 민족학 탐험대의 일원으로 동인도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소박한 신앙에 감명을 받고, 그 느낌을 석판화 〈무희 Dancer〉(1913)에 표현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놀데는 독일의 발트 해 연안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안개 자욱한 그 지방에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껴 〈습지 정경 Marsh Landscape〉(1916, 스위스 바젤 미술관) 같은 작품을 그렸는데,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낮은 수평선이 장엄한 느낌을 준다. 1916년 이후에 그린 풍경화는 초기 작품보다 전반적으로 더 차가운 색조를 띤다. 그러나 능숙하게 그린 꽃 그림들은 초기 작품의 화려한 채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판화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특히 거칠게 새긴 목판화의 강한 흑백 효과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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