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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6 이왕이면 가난을 즐기자
이번에는, 이 연재 칼럼에 항상 온화한 일러스트를 그려주고 있는 나의 "전화친구" 가토 유카리(加藤ゆかり)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카리 씨의 매력은 의외성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청바지에 짧은 머리, 조금 작은 체구에 웃는 얼굴이 귀여운 귀염성 있는 여자이다. 20대 초반인 줄 알았는데 "서른세 살이거든요"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두번 째 만남은 9월에 개최된 그녀의 개인전을 보았을 때였다. 전시된 그림은 평소 그녀의 일러스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색채와 구도의 유화. 예를 들어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이 듬뿍 칠해진 사자가 캔버스 가득 크게 입을 벌리고 있기도 하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작가는 남성이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화랑 아르바이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일러스트는 어디까지나 일이고, 회화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실제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미대 유화과 출신으로 학교를 졸업하자 그녀는 시코쿠의 고향에서 취직했다. 타올 디자인을 하고 있었는데 불황으로 해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놀러가겠다며 상경해 구인잡지에서 바로 일자리를 구했다. 고향에서 평범하게 중매결혼을 하기를 원했던 부모는 격노했다고 한다.
의류업계에서 디자이너를 3년, 이어서 디자인회사에서 2년 일했지만 경영난으로 인력 정리의 쓰라림을 겪는다. 정말이지, 직장인은 힘들다. 여기서 큰맘 먹고 그녀는 줄곧 동경하던 프리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이 없는 상태가 잠시 이어졌다. 먹고 살 수 있게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동안 연을 꾾고 있던 부모에게 돈을 빌니거나 실업보험으로 그럭저럭 버텼다고 한다.
현재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프리의 세계. 일이 있었다 없었다의 반복이다. 올해 일이 뚝 끊긴 시기가 있었다. 어쩔수없이 그녀는 고향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그림 그리는 거 포기할래요" 라고 처음으로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고향으로돌아오라"고만 하던 부모에게서 뜻하지 않게 따끔한 말이 돌아왔다. "돌아오지 마라. 지금 돌아오면 평생을 망친다. 이왕 시작한 거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마라."
장사로 고생해 온 부모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일을 쫓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40대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하다 보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될거니까 그때까지 힘내라!"라고.
프리가 되었을 때,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입이 없다면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왕이면 즐겁게 가난을 즐기자, 꿈을 망치지 않도록 그럭저럭 해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다. 유카리 씨, 고향을 멀리 떠나 온 도쿄잖아. 언젠가 꼭 꽃도 필 거야. 서로 힘냅시다. (1993 12 0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7. 하고채 만들기에 평생을 바치다
12월이라는 말을 들으면 뒤를 쫓기는 것 같아 마음이 어수선하다. 설날이 오는 것이 기뻤던 것은 어린 시절뿐이다. 그 때는 바쁜 어른들을 곁눈질하며 "까치 까치 설날은♪♪" 하며 천진난만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지금은 별로 볼 수 없지만 설날에는 하고놀이(羽根つき)를 자주 했다. 색채 화려한 깃털이 달린 하고가 하고채(나무로 만든 판)에 맞고는 딱, 딱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빙글빙글 날아올랐다. 먹물 머금은 붓으로 얼굴에 동그라미나 X표를 서로 그려 넣으며 배꼽을 쥐며 웃기도 했다. (*羽子-はご: 깃털달린 추. 羽子板-はごいた: 하고를 치는 주걱 모양의 나무채)
목재뿐만 아니라 압화(押絵)를 붙인 하고채도 가지고 있었다. 근처 장난감 가게에서 부모님을 졸라 산 것이다. 후지히메(藤娘: 등꽃 든 아가씨)의 그림이었을까, 그 압화는 하얀 얼굴의 연분홍색 뺨에 살며시 손을 얹고 부드러운 천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 하고채로 하고를 쳐보았지만 무거워서 도저히 휘두를 수가 없었다. 역시 장식을 위주로 하여 보기만을 위한 것일 것이다.
몇 년 전 에도 정서를 간직한 도쿄의 변두리 무코지마(黒田区向島)를 찾았다. 옛날 그대로의 좁은 골목 일각에 압화 하고채 장인의 니시야마(西山) 씨의 집이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희귀한 하고채가 전시되어 있고 작은 "하고채 자료관"으로도 되어 있다.
하고채 만들기 외길로 50여 년이라는 하고채 장인 니시야마 코시로(西山幸四郎) 씨(72세)와 장남 가즈히로 씨(31세)가 일하고 있는 일터를 보여줬다. 많은 도구에 둘러싸여 코시로 씨는 완성된 하고채에 붓으로 인형 같은 얼굴에 눈과 코와 입 등을 그려넣고 있었다. 차분한 손놀림으로 우아한 인형의 얼굴이 생겨난다.
어린 시절 소중히 여겼던 압화 하고채가 되살아나는 것 같아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후계자 가즈히로 씨도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는 전통 공예. 코시로 씨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모양만 만들려면 십년이면 할 수 있지만, 거기에 마음을 담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감성을 불이 넣는 일로 자신이 만든 것에 어디까지나 책임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라고 스승인 아버지 코시로 씨가 해준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하고채를 보러 온 어르신이 그러더라고요. '23년 전에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여기서 하고채를 샀는데 그 아이가 올 봄에, 시집갈 때 그 하고채를 가지고 갔어요' 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손님, 그 하고채는 별 이상은 없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멀쩡했어요'라고 했어요. 나는 이때만큼 하고채에 평생을 걸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더 일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로부터 12년, 그 따님에게 여자가 태어난다면 그 하고채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아들 가즈히로 씨는 하고채 만들기의 전통과 아버지의 장인으로서의 뜻을 이어가며 나름대로의 하고채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포부를 들려주었다. 아사쿠사의 하고채 판매 장터 개장도 임박해 있다. 분주한 섣달이지만 니시야마 씨 부자의 하고채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잠깐 들려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1993 12 1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8. 아이들이 그린 전화(戦火)의 비참함
냉전(冷戦)이 도대체 뭐였을까?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함께 동서의 냉전은 끝났고, 대립이 사라지면서 어쩌면 세계는 평화로 향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냉전이 끝나자 이번엔 곳곳에서 민족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때까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억눌렸던 민족 간의 원한이 일제히 폭발한 듯하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절실히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종교, 민족성의 차이로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싸움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훨씬 좋을 텐데 왜 그럴까.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옥과 삶의 티전을 파괴한다.
그리고 많은 슬픔과 불행을 낳는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질리지도 않고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할까. 인간의 지혜를 모아 어떻게든 전쟁을 없앨 수 없는 것일까? 물음표가 끝없이 솟아나고 있다.
어리석은 어른들에게는 이제 멋대로 하라고 내팽개치고 싶어지지만, 어느 경우든 비참함은 약한 처지에 있는 아이나 여성에게 더 많이 다가온다.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전화(戦火) 속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봤다. 일본에 사는 유고슬라비아 여성 밀카 씨가 전국에서 모은 문방구를 모국의 난민캠프에 보냈더니 고마움의 답례로 전달된 그림들이었다.
평화로운 정경은 한 장도 없다. 어느 그림에서나 아이들의 눈과 마음에 박힌 전쟁의 끔찍함이 묻어난다. 집 창문에서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엄마 같은 여성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그것을 가리키며 남자아이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그림도 있다.
다른 한 장은 역시 집이 부서지고 그 앞에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엄마와 여자아이가 서 있고, 두 사람의 양쪽 눈과 발밑 개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알갱이가 점점이 그려져 있다. 가로수 줄기는 두 동강이 나고 그 옆에서 총을 쏘는 사람, 총알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남자, 돌담 사이로 보이는 기관총의 총구 등등이 한 장의 도화지에 빽빽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차, 총, 헬리콥터, 불꽃, 피, 눈물... 이것들이 아이들의 그림 소재(마음의 풍경)가 되어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넘어 어른 중 한 명인 자신의 무력함이 안타까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장의 그림에는 왼쪽 절반은 잔혹한 장면인데 오른쪽 절반에는 올리브 잎을 문 비둘기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평화롭고 즐거운 날들에 대한 강한 희망의 마음과 기도가 담겨 있는 것 같아 한동안 그 비둘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어른)이 일으키는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정말 더 이상 슬픈 그림을 그리게 해서는 안 된다. 내년에는 어떻게든 좋은 그림이 그려지길 바랄 뿐이다! (1993 12 1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9. 동경하는 기모노
처음으로 입은 기모노는 연한 하늘색과 금갈색 스야리가스미(일본고유의 표현기법)의 기모노이다. 어깨에는 벚꽃, 옷자락에는 큰소나무가 있는 경사스러운 장면을 나타내는 그림이 새겨진 나들이용 예복이다. 머리도 묶어 올리고 조리(일본신발)를 신고 사뿐사뿐 걸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이 긴장 상태이다. 평소에는 대담히게 성큼성큼 걷는 내가 언뜻 보기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것이다.
(*すやりがすみ: 大和絵特有の, ある種の表現手法の通称, 槍霞:やりがすみともいう)
일본 전통 의상, 기모노가 가진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어렸을 때 기모노 몇 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입고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유아의 귀여운 기모노 차림에는 눈여겨 보던 아버지도 다 큰 딸이 기모노를 입는 것에는 큰 거부감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재일교포 1세로서의 아버지의 감정에 끌려다니듯 내 마음속에도 희미한 망설임이 있었다. 비싼 것이라 선뜻 걸칠 수도 없고 민족의상인 한복 쪽으로 관심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에 대한 애착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국의 문화를 소중히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된 마음의 여유 때문일까, 언제부터인가 기모노를 동경하고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커져갔다.
일본 풍토에 녹아드는 차분한 색감, 직선의 깔끔한 형태의 아름다움. 기모노는 멋지다. 예쁜 것을 입고 꾸미고 싶다는 여성으로서의 심플한 열망이 사실은 제일 컸는지도 모른다.
소망이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법. 졸저(拙著)가 계기가 되어 친해진 한 부인에게 "기모노 입어 보는 게 꿈입니다" 라고 무심코 말했더니 "그럼 제 기모노를 입으세요. 나는 오래 전부터 한복을 입어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겹친 두 가지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좋은 미룰 필요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분이 골라준, 앞서 언급한 예복용 기모노를 입을 수 있었다.
한편, 제가 준비한 한복은 빨강과 분홍 꽃들이 자수로 박혀 있는 선명한 노란색 치마 저고리였다. 예순여섯 살이라는 나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에게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말 기쁜 표정이 빛을 더해 눈부실 정도다.
큰 송이의 꽃이 핀 듯한 긴 치마를 손으로 치켜 올리며, 그의 입에서 오랫동안 가슴속에 소중히 품어왔을 감회가 흘러나왔다. "이 차마 저고리 모습을 당신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었어요. 30년이 걸려서 저는 드디어 이렇게 당신 나라의 의상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 선생님, 보이세요?" 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살아 있다면 그녀와 같은 66세. 30년 전 암으로 급서한 한국인 의대생 최중보(崔中甫) 씨. 그와의 만남이 그녀의 삶의 방식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 최중보 씨와 관련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일본 기모노를 입으면서 듣게 되었다. 다음 번에는 꼭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1994 01 0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0. 기모노와 게타에 얽힌 원한을 넘어서
저에게 기모노를 입혀준 66세 부인의 성함은 유키오카 스미코(行岡澄子) 씨이다. 그런 스미코 씨가 노란 한복 차림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최중보(崔中甫) 씨와 그녀의 만남은 삼십여 년 전의 일로 그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 스미코 씨의 남편은 오사카시립대 의학부에 근무하는 의사였다. 남편의 방탕에 시달리다 우울증에 걸려 있던 그녀는 사촌으로부터 서른두 살 의대생 최 씨를 소개받았다.
"스미코 씨, 제가 당신 나라를 사랑하도록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세요. 우는 모습은 아이에게 보여주지 말고 울고 싶을 때는 내 앞에서 우세요 "라며 항상 상냥하게 위로해 주는 최 씨였다.
최 씨는 한반도 북쪽 땅에서 태어났다. 최 씨 마음 속에 못박혀 떠나지 않는 열 살 때의 광경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하 목사였던 아버지는 독립운동의 리더였기 때문에 석 달간 투옥되고 만다. 아버지를 걱정해 경찰서를 찾은 소년에게도 사정없이 일본인 경찰의 곤봉이 내려쳐졌다.
고문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까지 미쳤다. 돌 위에 머리를 쳐받히게 하고 게타(일본 나막신)으로 짓밟히는 바람에 입이 귀까지 찢어질 정도의 중상을 입는다(출혈을 막으려고 최소년은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 데도 치료해 주지 않는다. 겨우 상처를 꿰메 준 의사는 연행되었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를 짓밟는 게타를 최소년은 눈앞에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출옥해 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맞서지 말고 마음으로 이겨라." 이 말이 어린 마음에 와닿아 최소년의 삶을 결정했다. 폭력으로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없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싸라는 것이 무저항주의자 아버지의 좌우명이었다.
해방 5년 만에 일어난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족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남쪽 땅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하던 최 씨는 쫓기듯 모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의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반쯤 망명자인 그를 한국은 받아주지 않는다.
그를 맞아준 곳이 오사카시립대 의대였다. 최 씨는 일본으로 옮겨 의대생이 된 것이다. 최 씨의 인생역정을 알았을 때 스미코 씨는 감전된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자신을 받아들여 의사로 만들어 주었으니, 빨리 한국에 돌아가 그 은혜를 우리 민족에게 갚고 싶다고 말했던 최 씨를 병마가 덮쳤다. 갑상선 암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석 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최 씨는, 일본 기모노를 입고 게타를 신고 싶다고 스미코 씨에게 부탁했다. 여름 오후 유카타를 입은 최 씨와 스미코 씨는 신사이바시(心斎橋)를 걸었다.
그때 절절히 최 씨는 말했다. "나는 게타 소리가 무서웠다. 어머니의 머리를 짓밟은 게타입니다. 소년 시절부터 계속 기모노와 게타를 원망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겨우 이겨낸 것 같아요. 제 마음속에서 두 민족이 단단히 맺어졌습니다."라고.
수술 후 이틀째 숨을 거둔 최 씨는 "뜻을 못 이루고 죽음을 앞두고 나는 목소리를 잃었지만, 눈과 귀는 건재합니다. 의사가 돼 모국으로 돌아가 아픈 사람을 돕고 싶었다"며 그 직전까지 필담으로 마음을 적었다고 한다. 스미코 씨는 나에게 "당신 나라의 이런 훌륭한 사람이 나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조상이 유린한 나라 사람에게서 돌려받은 것은 원한이 아니라 사랑이었어요"라고 말했다.
게타와 기모노에 얽힌 최 씨의 이야기를 듣고 기모노 차림이 된 자신에게 또 다른 감회가 생겼다. (1994 01 1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1. 꿈은 "책 학교"입니다.
"지방 활성화를 위한 정책"이라는 슬로건 아래 각 시정촌(市町村: 일본 지방행정단위)에 1억엔이 배부된 적이 있었다. 돈만 주면 된다는 발상과 위로부터의 구호라는 것에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느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 고향 돗토리의 서점 경영자 나가이 노부카즈 씨(51세)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 있었다.
우선 지방활성화와 관련한 마을 살리기 이야기다. 디자이너들과 모임을 하던 중 "디자인 공양"이란 아이디어가 나왔다. 산인(山陰)지역에 신들이 모이는 신유월(神有月) 11월(음력 10월)에 처분하지 못하고 쌓아둔 그림을 모아 공양하자는 이야기가 정리되어 실행에 옮겨졌다. 장소는 돗토리현 서부, 요나고시에 가까운 요도쵸(淀江町)이다. (*神有月: 全国的に "神無月(かんなづき)"と呼ばれているが,この地方でのみ"神在月(かみありづき)"と呼ばれ,全国の神さまが出雲に集う旧暦の10月. 出雲大社では,全国から集う八百万の神へと奉げるさまざまな神事が執り行われます. 地元では“お忌みさん” とも呼ばれる神在祭があります)
눈 아래는 바다가, 뒤로는 다이센(大山) 산과 고려산(高麗山)이 우뚝 솟은 웅장한 경치를 배경으로 아담하고 야트막한 산 정상에서 이루어졌다. 얼마 전 불교벽화 유적도 발견된 곳이다. 바다 저편에서 사람이 건너온 고대의 역사가 시공(時空)을 초월해 되살아난다. 현지 시인이 지은 "디자인 찬가"가 낭독됐고, 종이로 만든 의상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동요를 합창했다.
이후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전국에서 모인 디자이너들이 "채택되지 않아 아쉬웠다." "다음번엔 좋은 작품을 출품해야겠다." 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하며 빛을 보지 못했던 디자인화를 차례차례 불 속으로 던져넣는다. 공양이라는 것은 새로운 생명(물건)을 만들어내는 것. 불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결의와 파이팅이 샘솟는다고 한다.
제2회인 지난해 11월에는 요도에쵸(淀江町)의 전통산업인 일본 우산을 사용해 디자인 대회도 열었다. 체육관에서 각자가 자기의 우산에 색깔과 무늬를 붙여 가는 것이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200명 가까운 사람이 참가해 형형색색의 우산이 전문 디자이너의 우산과 경쟁하듯 행사장 가득 꽃을 피웠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광경이다.
이런 "놀이 감정"도 멋지지만, 나가이씨의 본업인 책에 대한 애정과 자세에는 그야말로 탄복하게 된다.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마치 따끈따끈한 감자 같은 나가이 씨가 동안(실례)에 웃음지으면서 생생하게 ‘꿈’을 이야기할 때 몸집이 훨씬 커 보인다.
서점 안에 놀랍게도 ‘어린이 도서실’을 만들거나, 아동문고 활동을 넓히거나, 지방 출판 활동을 응원하는 책의 ‘국체(国体)’를 열거도 하면서 지역에 뿌리를 둔 문화 활동을 계속 이어왔다. 그런 나가이 씨는 지금 할아버지의 꿈을 이어 돗토리 땅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나가이 씨가 사장으로 있는 '이마이 서점'은 창업 121년을 맞은 아주 오래된 서점이지만, 3대째의 할아버지의 꿈은 다름아닌 '책 학교'를 일본에 만드는 것이었다.
책 만들기 전문가 양성뿐만 아니라 책이 저자로부터 독자에게 건너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음지의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자리로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1995년 1월에 첫 단계로 오픈. 2000년에는 완전히 개교 예정).
앞으로 20년, 30년으로 꿈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눈동자를 빛내는 나가이 씨는 자신시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초부터 쌓아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깊이 끄덕이고 말았다. (1994 01 2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2. 아, 또 저질러버렸다.
"아, 또 저질러버렀다." 비명 섞인 한숨이 쏟아진다. 질리지도 않고 매일 같이 실수를 반복한다. 아무리 큰 아픔을 당해도, 반성해도 개선도되지 않는다(정말 구제불능이다).
그날도 황급히 역으로 자전거로 달려갔다. 요코하마의 도쓰카(戸塚)에 있는 메이지 가쿠인 대학(明治学院大学)에서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업은 2시간짜리로, 오후 한시 시작이다. 오늘이야말로 여유 있게 가려고 했는데 서두르지 않으면 조금 늦을 것 같았다. 역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르려는데 웬일인지 발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설마 하고 걱정하며 발밑으로 눈을 돌리자 서워 둔 자전거 바퀴에서 낫토(納豆:일본빌효음식)처럼 긴 실이 뻗어나와 내 발목에 엉켜 있다. 그리고 그 실 끝은 무려 내 플레어 스커트 아래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완전히 축 늘어져 버린 옷자락. 하지만 옷을 갈아입으러 돌아갈 시간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기차표를 사러 돌진했다. 그런데 엎친데 겹친 꼴로 가방 안에 지갑이 없다! 순간 난망한 생각이 들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틈은 없다. 바로 역 근처에 있는 단골 가게인 캄보디아 레스토랑까지 질주하였다.
가게에 뛰어들자 "천엔 빌려줘!" 라고 외치며 부랴부랴 건네받은 천엔짜리 지폐를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하고 왔던 길을 다시 달렸다. 자서전을 택배로 대학에 보냈지만 부족하지 않을까하여 어깨에는 30권을 담은 커다란 가방을 매고 있다. 무겁다는 감각조차 조급함으로 사라져버렸다.
오후 1시 10분, 겨우 도착한 도쓰카 역에는 기다리고 있어야 할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머리가 하얘지지만 침착하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며 대학 사무실로 전화를 건다. 선생님은 일단 대학에 돌아와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택시로 서둘러 오라는 사무실 여성의 말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어떻게 하지. 찻표값을 지불한 후의 잔금은 3,330엔밖에 없다. 사정을 말하자 대학 교문에서 그 여직원이 돈을 들고 기다려 주겠다고 하였다.
택시를 내려 그녀와 함께 목표로 하는 교실까지 달렸다. 가방을 안고 머리를 흔들고 옷자락이 풀린 플레어 스커트를 물결치게 하고, 달리고, 또 달린다. 넓은 구내를 회오리바람처럼 뚫고 달려 숨을 몰아쉬며 겨우 도착했다. 헐레벌떡하며 교단으로 향한다.
앞 강의를 맡아주던 선생님의 얼굴이 편안해진다. 25분 지각이다. 기다리게 한 학생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커다란 마이너스다, 이걸 어떻게든 플러스로 해야 한다. 스커트 자락을 설명한 뒤 “그래도 이거 입으면 괜찮아요”라며 준비해온 한복을 꺼냈다.
"어, 도대체 뭐가 시작되는 거야?" 학생들의 웅성거림과 놀라운 표정이 퍼져 나간다. 마술처럼 입은 옷 위에 2, 3분 만에 한복을 겹쳐 입고는 강의를 시작해 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크게 돌아온다. 강연 후에도 남은 학생들을 위해 덤ㅇ로 미니 강연까지 했다.
며칠 뒤부터 많은 편지가 도착했고 학생들의 방문까지 받았다. 훌륭하고 재미있는 강의였다는 소감을 접하고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올해야말로...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허당을 한 후가 더결실이 많다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1994 01 3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3. 歌いつづけ28年、走りつづけ23年
43. 노래 부르기 28년, 달리기 23년
작년 12월, 다카이시 토모야(*高石とも1941~2024, 포크송 가수)씨의 '송년 콘서트'를 들으러 갔다. 뉴뮤직도 록도 클래식도 엔카도 각각 좋지만 포크송의 장점은 또 남다르다. 목욕 후 차려입은 솜옷의 촉감 같은 편안함과 소박한 안정감이 있다.
무대 위에는 햇볕에 탄 얼굴을 살짝 수줍은 미소로 가득 채우고 기타를 안은 다카이시 토모야 씨가 서 있다. 포크송을 직접 들은 건 꽤 오랜만이다. 학창시절에는 스스로도 흥얼거리곤 했다. 곧고 한결같았던 그 시절이, 토모야 씨의 늠름하고 맑은 목소리에 휩싸여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빰에 느끼고 있었다. 앞자리의 남성도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은, 노래를 통하여 토모야 씨 자신의 무언가가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도대체 뭘까 하는 또 다른 관심도 생겼다.
51세의 토모야 씨는 지난 여름 무려 아메리카 대륙 4,700km를 달려 횡단했다. 하루 10시간, 70km를 64일 동안 계속 달린 것이다. 대단하다! 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수수께끼(매력)를 풀기 위한 '만남'의 요청을 다카이시 토모야 씨는 허락해주었다. 다음은 그 이야기이다.
포크송이 붐을 이루던 시대, 20대의 그는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하지만 점점 더 인기가 오를 거로 생각했지만 주위환경의 빠른 변화속도도 따라갈 수 없게 됐다.
3년 후, 노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 갔다. 시간과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페이스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마라톤이다. 어렸을 때는 잘 달리지 못한다고 야구게임에도 끼이지 못했다고 한다.
좋아해도 능력이 없다고 체념했던 운동을 즐기면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5세에 호놀룰루 마라톤에 첫 참가(그 이후 매년 출전), 40세에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해 45세에 호주에서 천 km를 목표로 달렸다.
백km를 남겨두고 중도 포기했지만 백km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9백km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받고 감동했다. 일본에서는 승패에 집착해 남과 비교한 행운과 불운을 논한다.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나 혼자의 만족감이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체험했다.
노래하면서 28년, 달리면서 23년, 노래하는 것도 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즐겁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 마흔 살, 쉰 살, 육십 살부터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설득력을 느끼게 된다.
"오늘 하루를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루, 이 생명을 있게 하는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하자. 그런 생각이 스며나오는 겁니다.”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만든 한 고등학교 교가의 한 구절. "환한 밝음이 있으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겨내어 아름다워질 수 있다."
어려움을 참고서가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 포인트다. 참는다는 말은 뭔가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카이시 토모야 씨의 노래를 듣고 왜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는지 잘 알 것 같았다.
(1994 02 0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4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4. 꿈에 도전하는 임군(林君)
"소년들아, 큰 뜻을 품으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한결같이 "꿈"을 좇고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젊은이를 만났다. 24세의 임장일(林壮一)군이다. 자신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을 찾고 그곳에서의 충실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싶다며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은 나태하고 긴장감이 부족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는 눈부시고 자극적이다.
공부를 잘 못하는 임군은 고등학교도 재수해서 입학했고, 대학도 삼류 이하라는 꼬리표를 달고 별볼일없는 놈이라는 시선속에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뭔가 비참한 생각에 짓눌릴 것 같은 임군을 지탱해 준 것은 하나의 큰 꿈이이 있었기때문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TV에서 본 월드컵 우승국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부모와 선생님, 주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걸어온 임군이었지만 대학 2학년이 됐을 때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이니 마음껏 후회하지 않게 살자!" 라고 결심했다.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모은 후 바로 그해 여름방학에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축구팀에서 공을 쫓아 다녔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팀의 홍백전(紅白戦: 두팀으로 나누어 하는 경기)에서 훌륭하게 골을 넣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군의 마음에 새겨진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있다. 절친이었던 아르헨티나 동료들의 발을 보면 좌우 제각각의 축구화를 신고 찢어진 축구화 사이로 발이 삐져나와 있다.
가난 속에서 필사적으로 벗으나려는 마음에 명품옷을 입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도 기가 죽을 것 같으면 생각나는 것이 절친우 헝그리 정신이다. 두 달 뒤 대학으로 돌아왔지만 꿈을 다 이룬 뒤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축구선수로서의 힘의 한계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임 군이 우연히 품게된 다음 꿈이 복싱이었다. 연습생이 되어 권투선수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서투르다는 말만 듣고. 억울해서 그만둘 수가 없어 남들보다 몇 배나 강도 높은 훈련에 힘썼다. 그것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염원하던 프로테스트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해냈다!" 기쁨과 주위의 응원에 힘입어 데뷔전을 향한 맹렬한 훈련이 시작됐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그를 덮친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해 왼쪽 팔꿈치 인대를 다쳐 나을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권투선수로서의 꿈을 접고 졸업 후 TV 외주제작사에 들어갔다.
처음 맡은 기획은 복싱에 청춘을 건 젊은이를 취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일을 하면서 취재하는 쪽에 있는 자신이 점차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링에 오르고 싶다, 벨트를 목표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곳까지 싸우고 싶다.
꿈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권투선수로 가는 길을 걸을 결심을 한 임군은 현재 열심히 재활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축구, 지금은 복싱, 그리고 한참 후의 목표는 스포츠 라이터. 한순간을 연소하며 꿈에 계속 도전해 가는 청춘은 정말 보기 좋다. (1994 02 1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5. 동경하는 쵸에이(長英)씨와
JR의 사쿠라기초(桜木町)역. 미나토미라이(みなと未来)의 화려한 경관과 마주하여 요코하마·노게의 거리가 있다. 아케이드를 따라 잡다한 음식점이 줄지어 있는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길치인 나 같은 경우는 금세 방향감각을 잃는다.
내가 처음 배우 다카하시 쵸에이(高橋長英1942~배우)씨를 만난 것은 이 거리의 일각이었다. 친구의 축하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더니 좌석을 사이에 두고 구석 쪽에 조용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쵸에이 씨의 모습이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매료되는 존재감에 은근히 "멋지다"며 동경하던 남자 배우다. 인생은 일생에 한번뿐인 기회. 말없이 지나가 버리면 "만남"은 생기지 않는다. 큰맘 먹고 말을 걸었다. 고요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준다. 쵸에이 씨의 성실하고 친숙한 응대에 한층 '멋진 사람'의 감이 깊어졌다.
다카하시 쵸에이 씨는 순수한 요코하마토박이이다. 대학생 때 친구의 권유로 배우 양성소에 들어갔다. 이후 영화, TV에서의 활약은 물론 연극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년 한 해는 거의 무대에서 지새웠다고 한다.
그런 작년 가을, 초대를 받아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1934~2010 극작가) 씨 원작의 연극 '상하이의 달(上海MOON)'을 보러 갔다. 루쉰(魯迅)과 그를 둘러싼 일본인 친구들과의 우정이 당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코믹하고 따뜻하게 그려져 있어 세 시간여 동안 전혀 질리지 않고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인공 루쉰을 연기했던 분이 쵸에이 씨이다. 긴 중국식 의복에 수염을 기르고 고개를 약간 들고 지그시 멀리 바라보는 눈빛이 조국을 걱정하는 루쉰의 모습 그 자체인 듯, '역시 배우님'이었다. 동시에 연기한다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설마 그게 '후일'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줄이야...
그런데, 그 문제의 '후일'이다. 이 코너에 등장하기를 바라며 쵸에이 씨와 노게의 바(BAR)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운터 앞의 높은 의자에 앉아 가까이서 보는 쵸에이 씨는 역시 가끔 멀리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옆에 앉은 나는 옆모습에 멍하니 넋을 잃고 가슴을 설레게 한다.
우연히 거기에 동석한 사람이, 노게의 중국집 "만리(萬里)"의 가게 주인, 후쿠다 유타카(福田豊) 씨이다. 벌써 8년 째를 맞는 노게의 거리 공연 이야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올해는 연극도 하고 싶다는 후쿠다 씨의 말에 쵸에이 씨는 "그거 재미있겠다" 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까지 덩달아 고개를 끄득였다.
상연물은 "건달패 씨름판에 오르다(一本刀土俵入り"였다. 등장인물은 고마가타 모헤에(駒形茂兵衛)와 오츠타(お蔦)의 두 사람이다. 쵸에이 씨의 '좋아, 해보자' 는 목소리에 '그래요, 해봅시다!' 하고 기세 좋게 내 목소리가 합쳐졌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말해버리는 것이 나의 어쩔 수 없는 결점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멈출 수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쵸에이 씨가 오츠타, 내가 모헤에(!)를 연기하기로 정해져 있었다(처음에는 오츠타역이었는데, 덩렁이인 내가 무심코 '도스코이, 도스코이'라고 스모할 때 내는 기합소리를 내며 스모꾼 처럼 배를 두드려 버렸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모헤에 역으로 결정되어 버린 것 같다).
유치원 때 단역으로 학예회에 나간 것밖에 연극과는 인연이 없는 내가 4월 15, 16일 이틀간 노게 길가에서 '도스코이 도스코이!' 하며 건달패 씨름판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졸도할 것 같지만, 동경하는 쵸에이 씨와의 협연(?)이니까 좋다. 라고는 역시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이제부터가 걱정이 태산이다. (1994 02 20)
[*一本刀土俵入り(いっぽんがたなどひょういり): 長谷川伸の戯曲。長谷川の作品では最も多く上演されている作品の一つであり、歌舞伎・新国劇・大衆演劇等で上演されている。映画・ドラマ化も度々行われており、浪曲や歌謡曲作品も作られている.]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6. 뭐니뭐니해도 사랑이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마음을 털어놓으면 좋을까요" "친구 관계에서 연인이 되려면..." 등등 학생들로부터 상담을 자주 받는다. 남녀(동성의 경우도 있음)의 사랑은 동서고금, 영원한 주제라고 해도 좋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령 몸짓, 말투에서부터 선물에 이르기까지 그 노하우를 담은 잡지가 항간에는 넘쳐난다. 확실히 그런 면에서의 어푸로치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야"로 역시 끝난다고 생각한다.
조건이나 직함을 뺀 "그 사람 자신"에 왠지 끌리고 둘도 없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사랑의 신기함이자 훌륭한 점이기도 하다. 본래 사랑은 소박하고 상징적인 것일 것이다. 망설임 없는 곧은 사랑을 관철하며 지금도 격려하고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플을 소개하고 싶다.
도쿄대 의대생 고이케 쥰 씨가 필리핀 여성 애나벨 씨를 만난 것은 그의 친구 집에서 열린 생일파티였다. 다음으로 만난 것은 그녀가 일하는 펍에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두 사람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일본 남자들은 다 야하고 거짓말쟁이라 너무 싫다"는 애나벨에게 그런 남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쥰은 알리고 싶었다. 그녀의 일이 끝나는 늦은 밤, 만나 아파트까지 바래다줬다. 그 15분의 여정과 복도에 선 채 이야기를 나누는 한 시간이, 두 사람의 귀중한 데이트 시간이었다.
아르바이트 일을 격려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돈이 아까우니 선물은 필요 없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만큼은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던 쥰은 바빠서 가게에 들릴 시간이 없어 집 안을 뒤져 있는 물건을 찾아냈다.
그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희귀한 거야" 라고 건네준 작은 상자에 들어 있던 것은 뜻밖에도 그의 탯줄이었다. 깜짝 놀랐지만 애나벨은 “더 그를 좋아하게 됐어요”라며 그때의 기쁨을 웃으며 말한다.
도쿄대 의대생으로 초미남인 쥰은 누구에게나인기가 있었다. 알고 지내는 여성들은 곧 결혼을 화제로 삼았다. 수입이나 지위가 목적인 것은 뻔했다. 그녀만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를 받아 주었다고 한다.
만난 지 반년 뒤 비자가 만료돼 귀국해야 했던 그녀가 "이제 더는 못 만나게 되었네" 라고 중얼거렸다.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고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프러포즈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모은 오만 페소(오십만 엔)를 가지고 쥰은 애나벨을 데리러 갔다. 마닐라에서의 결혼식에서, 그는 타갈로그어와 영어로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필리핀의 바다는 깊고 짙은 녹색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깊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1년 뒤에는 큰딸 조안나 양(깜짝 놀랄 정도로 귀엽다)이 태어났다.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휴학하고 일하던 그였지만 현재는 복학하고 이번 봄에는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둘째 아이도 태어날 예정이다.
동거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고이케 씨 일가를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봄 같은 따뜻함에 휩싸이고 만다. 남녀 사랑의 참 모습을 이 두 사람은 그들의 행복한 모습으로 나에게 보여 주고 있다. (1994 02 2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7. "여성을 수입한다면"이란...
얼마 전 가와사키시에서 전국의 시정촌(市町村) 심포지엄이 열려 그 분과회의 하나인 "외국인 시민과의 공생의 마을 만들기"의 사회자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패널리스트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게 되었는데, 배움이 옅은 나는 꽤 공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히토쓰바시 대학의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선생님의 이야기가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외국인 노동자가 마음대로 와서 일한다고 생각하는 건 크게 잘못된 판단입니다. 자동차 산업에는 일본계 브라질인, 페루인이 18만 명 정도가 일하고 있어 생산이 가능하고, 그 외의 산업에서도 일본인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외국인입니다. 그만큼의 필요가 있기때문인 셈이죠. 출생아의 수도 적어지고 있는 일본에서, 장래에도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사회 형성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면서 올드커머(나는 이 안에 들어간다)와 뉴커머(*1980년대 이후의 장기 체류 외국인) 외국인 주민과 함께 산다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실현해 나가야 할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 등이 논의됐는데 그러던 중 문득 한 통의 편지가 생각났다. 절친한 친구인 재일 캄보디아 여성 팬-세탈린에게 그녀를 소개한 신문 기사를 본 간사이 거주 일본인 남성이 보낸 편지다.
캄보디아의 평화를 바란다는 말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지고 있었다. 폴포트군의 학살로 남성이 많이 죽어 어려움을 겪는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난을 겪는 일본인 남성과의 결혼을 주선하면 어떨까. 다만 캄보디아 여성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다.
첫째, 일본은 고학력 사회이기 때문에 최소한 고졸 이상으로 일반적으로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 둘째, 솔직하고 귀여운 사람. 셋째,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넷째,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 다섯째, 일본어 또는 최소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일본인에게는 캄보디아어는 절대 무리니까). 여섯째, 피부가 하얀 사람(검은 피부는 안 됩니다). 이상 여섯가지 조건을 채우면 괜찮다. 하지만 상대 남성(*일본)의 경우는 대부분 육체노동자이다.
아니, 그런 조건에 맞는 여자가 어디 있어! 하고 편지를 향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연락처까지 잘 적어 두었기 때문에 본인은 극히 진심이고 선의로 생각한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늘어놓았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특히 여섯 가지 조건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듣는 쪽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하는 배려심(상상력)이 모자라는 것일까. 문장의 매듭에는 "실제로 서로 어려우니까, 여성을 수입(이 표현이 대단하다)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수입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서로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편지에 대한 세탈린의 답장(그런 것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내가 무심코 말해 버렸지만)은 "여성을 수입하는 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모두 언젠가 캄보디아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비록 여성만의 나라가 되더라도 나라를 건설해 나가고 싶습니다." 였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각자의 입장에서 (존중하고) 대할 수 있는지가 공생의 키포인트라고 절실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1994 03 0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8. 섬뜩하고 무서운 무언 전화
인간이 발명한 물건 중 베스트 3에 넣어도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전화다. 소박한 실(糸)전화로 시작해 이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이는 대단한 문명의 이기이자 일상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한 만큼 문제점도 많다. 먼저 전화를 받는 상대의 형편, 상황을 알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하고 있던 일에서 손을 뗄 수 없거나 급한 용무 중의 '따르릉・・・'에는 당황한다. 상대방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갑작스런(당연하지만) 전화를 탓할 수는 없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곤란한 것이 있다.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기기 때문에 말투에 신경이 쓰인다. 별일 아닌 일로 전화 속에서는 불안감을 낳을 수도 있다. 음성만으로 소통하는 것의 어려움,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더 곤란한 것은 장난전화, 무언전화 같은 것이다. 상대방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만큼 섬뜩하고 무섭다. 전화가 흉기로 쉽게 변해버린다. 이 칼럼의 일러스트를 그려주고 있는 유카리 씨를 지금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이 무언전화이다.
무언 전화가 걸려 오게 된 지 벌써 4개월이 됐다고 한다. 낮에도 싫지만 자정부터 새벽 4시, 5시까지 벨이 계속 울린다고 한다. 이래서는 숙면을 취할 수 없다(전화하는 쪽도 마찬가지겠지만). 자동응답기로 하여 음성을 작게 하고 있어도 15분 간격으로 딸깍, 딸깍하고 기계음이 울린다.
요즘은 반응이 없자 질렸는지 음악이나 테이프 소리를 내거나 한다고 한다. 한밤중에, 그런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거나 하면 기분 나쁜 일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만다.
경찰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하고, 그것을 통신회사에 제출하여 OK가 없으면 발신자 탐지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비록 호소카와 총리라도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TV의 형사 드라마처럼은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장난전화로 더 힘든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아 보세요."
유카리 씨의 호소는 허무하게 각하되고 말았다. 일때문에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도 어렵다. 이렇게 되면 그녀도 지구전으로 버틸 수밖에 없다.
"무언전화를 한 사람이 외로웠나 보죠"라고 경찰관이 무심결에 말했다는데, 수화기 너머로 악의라기보다 외로운 그림자를 느낀 적이 나에게도 있다. 꼬박 하루 종일 무언 전화가 걸려왔다. 몇 번째쯤부터 나도 대담해져서 일방적으로 친구처럼 밝게 말을 걸어 보았다.
"미안해, 지금 나가려는 참이야. 전화해도 집에 없으면 재미없겠지. 저녁에 돌아올 테니까 그때 다시 걸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거 이상한 놈이다. 전화 않는 게 좋을것 같다." 라고 조심하였는지 다행히 그 후 무언전화는 오지 않았다.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나이지만 이런 만남만은 사절이다. 세상사에 불만이 있든, 사람이 그립든 제대로 정정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야 사람과 사람은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수화기를 놓았을 때, 서로 좋은 여운이 남는 전화를 서로 주고받고 싶다.
(1994 03 1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4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49. 멋진 매장보물 찾기
"♪ 집뒤 밭을 팠더니 금은 보화가 나오고 또 나오네♪." 야에노 미쓰히로(*八重野充弘 1947~작가)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꽃을 피우는 할아버지"의 동요 구절이 떠올랐다.
"보물"과의 빛나는 만남, 이렇게 설레는 고마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복권은 남에 의해 자신의 운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땅속에 숨겨진 보물을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지혜, 감각, 지식, 끈기, 체력 등 구사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도전한다.
그것이 보물찾기의 매력이라고 야에노 씨는 말한다. 건네받은 명함에는 작가 직함과 함께 일본 트레저 헌팅(보물사냥)클럽 대표라고 적혀 있었다. 매장보물 탐색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그 끝없이 가슴 뛰는 탐색의 첫걸음을 야에노 씨가 내디딘 것은 20년 전의 일이었다. 이 분야의 1인자 하타케야마 기요츠라(*畠山清行
1906~1991)의 저서에 자극받아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 ?~1638)의 보물을 찾아내는 낭만에 사로잡혔다.
"학연(学研)"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휴가를 내고 3년간 아마쿠사(天草)를 다녔다. 고문서에 있는 삼각지(三角池)를 발견하고 허리까지 늪지에 파묻히며 계속 찾았지만 끝내 보물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야에노 씨의 그 전말기를 담은 여행잡지를 본 하타케야마 씨는 그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빠져들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지만, 취미삼아 하는 것 같아 안심했다. 그런 생각으로 한다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라는 내용이었다. 빠져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하타케야마 씨 자신은 반세기 이상 하면서, 보물을 발견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서를 매개로 하여 연결된 사람으로부터 추석에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는 사제 관계를 맺은 하타케야마 씨의 협조로 도쿠가와(徳川)의 보물을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2년간의 노고 끝에 군마현(群馬県)의 국도 아래에서 드디어 목표로 하는 터널을 발견했다! 그러나 2주라는 도로공단과의 약속 기한이 만료되면서 보물을 찾지 못한 채 구멍은 막혀 눈물을 삼켰다. 재작년 15년 만에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있어야말 할 횡혈(横穴)을 찾지 못해 그야말로 후회막급이었다.
장신에 턱수염을 기르고 부드러운 눈매가 인상적인 야에노 씨가 가장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그것은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로 보물을 숨긴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리고 옛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면서 삼백 수십 년 간격으로 그 당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즐겁다.
돈 들이지 않고, 기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찾고 싶다. 옛사람들은 손으로 파서 숨겼으니 그 흔적을 충실히 따르고 싶기 때문이다. 기계를 사용하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해버린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발굴현장에 따라온 직장 동료가 부인이다.
17세와 14세의 자녀들도 이제 슬슬 보물찾기에 나설 수 있을까 하고 기대를 건다. 만약 큰돈을 손에 넣게 된다면 하는 나의 질문에 매장보물찾기 정보센터를 만드는 것과 인디 존즈의 일본판 모험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답이 야에노 씨로부터 돌아왔다. 실현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1994 03 2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0. "나에게 딱 맞는 세상"
덜렁대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 몸 하나만건재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몸이 고장나면 속수무책이다. 금세 몸이 축날 것이 틀림없다. 병이나 부상은 언제 마주칠지 모른다. 그것이 운 나쁘게 먼 땅에서라면 불안도 배가되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건강보험이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료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더더욱 심각하다.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뜻있는 의사들에 의해 3년여 전에 '미나토마치 건강상조회'라는 조직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요코하마의 진료소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가입자는 한 달에 2천엔의 회비를 내면 30%의 의료 부담으로 끝난다. 그러다 보니 운영적자는 크지기만 하지만 눈앞의 환자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마음가짐의 의사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지난해 11월 가와사키시 사이와이구(川崎市幸区)에서 ‘이마이 클리닉’을 개업한 이마이 구미오(今井久美雄 1952~)씨도 이 진료소에서 일했던 선생님이다.
상조회 회원들을 돌보고 있는 병원인 만큼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일본인과 섞여 여러 나라의 환자들이 찾아온다. 몇 개 국의 언어로 적힌 설명서, 신문 등도 놓여 있고 문 너머로는 쉴 새 없이 진료를 하고 있는 이마이 선생님의 영어, 한국어가 새어 나온다. 그야말로 인터내셔널한 분위기이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마이 선생님의 유창한 한국어가 큰 안정감을 준다. 3만 부가 팔렸다는 ‘한국인을 위한 일본 유학생활 가이드’ ‘일본 의료 가이드’의 집필자(물론 전부 한글)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한국어를 잘할까 하는 의문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풀렸다.
의대를 졸업한 뒤 수련의, 조수를 거쳐 34세에 한국 대학원으로 유학, 공중위생, 예방의학을 배웠다. 한국에는 학생 때부터 통산 100회(!)는 다녀왔다. "왜 한국?" 이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동기는 연수차 온 한국인 의사와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학을 이용해서는 한국의 산과 농촌, 섬 등을 둘러 보았다. 친구도 많이 생겼다. 음식을 필두로 '우와, 이거다' 하고 자신에게 딱 맞는 세계가 그곳에는 펼쳐져 있었다. 4년간의 유학에서 귀국해 일반 병원에서 잠시 근무했지만 부탁을 받고 한국인 환자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병원에서, 복통을 호소해도 진찰조차 받지 못한 한국인 남성이 이마이 선생에게 왔다. 급성 맹장염에 걸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외국인 환자가 비용이나 언어 면에서 안심하고 찾을 수 있는 병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마이 선생이 절감한 사건 중 하나였다.
현재 "마이클리닉"의 2, 3층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됐다. 7개의 독실 외에 책을 비치한 담화실, 식당, 냉장고는 김치용이 따로 있는 등 세심한 배려가 잘 되어 있다.
힘든 진료를 마친 후에도 시간 외의 환자가 찾아온다. 지친 내색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응대하고 있는 이마이 선생님의 든든한 뒷모습이 더욱 커 보였다.
(1994 03 2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1. 지금 고마가타 모헤에 대특훈(駒形茂兵衛大特訓) 중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이끌려 모두들 야외로 나간다. 그런데 농담이 진담이 된 고마가타 모헤에의 그 야외 연극 공연이 드디어 다가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의 재미(무서움)일 것이다. 동경하는 배우 다카하시 쵸에이(高橋長英1942~ 배우) 씨를 취재하기 위해 요코하마의 노게(野毛)에 서둘러 가느라 길을 헤멜 때만 하더리도 설마 자신에게 그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연히 만난 근처의 중국집 주인 후쿠다 유타카(福田豊) 씨의 "길거리에서 연극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에 쵸에이 씨가 맞장구를 치고, 덜렁대기 좋아하는 나까지 "그래요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어느새 "건달패 씨름판에 오르다(一本刀土俵入り=いっぽんがたなどひょういり)"의 연극을 하기로 결정되어 버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배역은 오츠타언니(お蔦姉さん) 역이 남자인 쵸에이 씨가, 남성인 모헤에(茂兵衛)역은 여자인 저가 하는 걸로 정해졌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신에게 어이가 없지만, 친한 여자 친구로부터 "당신의 그런 모습은 보고 싶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역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황급히 역할 변경을 제의해 보았지만, "이제 와서 안 돼!" 라고 한 마디로 일축되며, 대배우 "시마다 쇼고(*島田正吾1905~2004) 씨가 맡아 성공했던 배역을 맡다니 대단한 행운아라는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한번 뱉은 말, 그렇다면 열심히 해야지 하고 지금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학예회에서 딱 한 번한 해본 우라시마 타로(浦島太郎*용궁이 나오는 옛날이야기)에서 바다를 상징하는 미역 역이었다. 손을 좌우로 흔들흔들하는 것 뿐 대사는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발탁이 아닌가.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 "남이 인정하는 잘 통하는 목소리"를 살릴 수도 있으니까.
독자로부터 "가보고 싶다"는 사연을 받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일시는 4월 15, 16일 이틀간이다. 저녁 7시와 8시 반 각각 두 번 공연으로 16일 낮에는 노게 거리 공연으로 흥을 돋우고, 연극 쪽은 밤의 장기자랑과 함께 진행된다.
신나이의 샤미센(新内の三味線)이 흐르는 가운데, 노게 중앙 거리에 있는 장어 가게 '이치요
(一千代)'의 2층의 정서 넘치는 창문과 그 바로 아래 길가에서 "건달패 씨름판에 오르다(一本刀土俵入り)"의 명연극이 펼쳐질 예정이다. 길 대각선 앞쪽에 '동백꽃(椿)'이라는 바(BAR)가 있다. 이 가게 2층의 세련된 구조의 창문도 공연에 사용된다.
사실 동시에 또 한 편의 연극이 진행되는 것다. 이 창문에서는 그 유명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공연된다! 마리아 역이 샹송 가수인 겐지로(元次郎) 씨, 토니 역에는 작가 오기노 안나(荻野アンナ1956~) 씨 (지역의 젊은이 아즈마 다이스케 군과 더블 캐스트)라는 것 또한 깜짝 놀랄 일이다.
일본과 서양의 두 연극을 어떻게 결합할지, 연출, 구성, 변사를 도맡아 준 것이 나의 친구인 TBS 라디오의 세키야 히로시(関谷浩至) 씨로,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해, 한 명의 프로(쵸에이씨)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툴기 짝이 없는 초보집단을 멋지게 묶어주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친숙한 군무(群舞) 장면에는 현지의 삼바 팀에 섞여 안무가 럭키 이케다(*ラッキ一池田1959~) 씨도 등장한다.
대단히 시끌벅적하게 될 것 같다. 다소의 실패가 있더라도 연기하는 쪽이나 보는 쪽이나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호쾌하게 웃어넘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가까이에 계시는 분들은 봄밤의 한 때의 흥을 함께할 수 있도록 와 주시기 바랍니다. 멀리 계시는 분들도 혹시 이 연극이 큰 호평을 받는다면 마을에서 마을로 순회 여행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축의금 들고 꼭 보러 오세요. 진짜 봄이네요.
(1994 04 0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2. 육아의 비결은 '사랑'
도쿄대 의대생과 필리핀 여성의 멋진 러브 로맨스를 소개한 2월 7일자를 읽은 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두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심경이 되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엄마로서의 마음의 갈등, 아들을 생각하는 심정이 펀지의 행간에 넘쳐 이 부인의 아드님이라면 분명 성실하고 상냥한 남자겠구나 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앞서 언급한 의대생 고이케 쥰 군을 만났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매우 흥미를 느꼈다. 두뇌, 외모뿐만 아니라 사물을 보는 시각, 사고방식, 감성, 성격... 모든 것에 균형이 잡힌 쥰 군의 배경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쥰 군의 어머니 고이케 하루코 씨(56세)는 은행원으로 있던 스무 살 때 맞선을 봤다. 상대는 경제력과 외모가 뛰어나 일반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주위의 권유에 약혼은 했지만, 하루코씨는 "이 사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약혼자로부터 친구를 소개받았다. 만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다!"라고 번뜩이는 것이 있어, 그를 선택했다.
하루코 씨의 이상(理想)은, 결혼하면 머리가 좋은, 남자아이만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 그 아이를 느긋하게 시골에서 키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라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도 않는다"라는 말과 같이, 하루코씨의 본능과 직관력의 확실함은 훌륭하게 결실을 맺었다.
장남인 쥰 군을 비롯하여 세 남자아이가 태어나 원하는 환경에서 키워 낼 수 있었다. 품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고 씩씩함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한다. 셋째 아들이 세 살이 되자 일을 재개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림책, 동화책 읽어주기뿐만 아니라 캐치볼, 스모 등 몸을 사용하여 놀아 주는 것까지, 일때문에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하루코 씨가 도맡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는 아버지가 나서 주었다. 그럴 때 아버지의 말과 태도를 가족들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실천했다.
쥰 군과 아버지에 관해 이런 일화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쥰 군은 병약하고 천식 발작이 있어 학교에서 "해골(骸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왕따를 당했다. 아버지는 쥰 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뚱뚱하다 거나, 말랐다는 것을 포함해 몸을 흉보는 거야. 친구가 그렇게 말해도 쥰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라고.
쥰 군이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급서하고 말았다. 도쿄대에 들어가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쥰 군은 이루었다. 쥰 군뿐만 아니라 두 동생들도 모두 도쿄대 이과를 졸업했다. 무려 셋 다 초, 중, 고와 학원을 다닌 적이 전혀 없다고 하니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다.
쥰 군의 결혼에는 "신뢰하는 아들이 선택한 사람이니 멋진 여자임에 틀림없다. 국적 따위는 상관없어요"라고 말한다. 육아 비결은 "사랑. 엄마로서의 애정뿐”이라고 단언하는 훌륭한 엄마 하루코 씨였다. (1994 04 1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3. 나쁜 건 군대, 전쟁...
한국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궁중만찬회 석상에서 일왕 폐하와 김 대통령은 각각 "과거사에 대한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라며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양국의 선린 우호관계를 보다 높여가려는 시대의 새로운 물결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것과 마침 때를 같이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아간 한 남자가 있다.
내가 그 사람 이타쿠라 히로미 (板倉弘実63세) 싸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나가노 시에 있는 마쓰시로 대본영(松代大本営) 지하벙커의 동굴 앞이었다. 작업복상하의, 긴 머리에 콧수수염, 우뚝 서 있는 장신 이타쿠라 씨는 마치 선인 같아 강렬한 인상을 받게 했다.
현지 마쓰시로 고등학교에서 사회과 선생님으로 있던 이타쿠라 씨는 2년 후 정년을 기다리지 않고 퇴직해 지하호의 역사를 알아달라며 견학 오는 사람들의 안내 일을 맡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군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지하벙커는 전체 길이 13km나 되며, 대본영뿐만 아니라 정부, 식방 주거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힘든 돌관공사로 만들어진 것이다.
공사에는 1일 약 1만여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는데, 그중 7천 명 이상은 식민지하의 조선인 노동자였다.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진 위험한 공사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타쿠라 씨를 이 지하벙커에 깊이 관여시키는 계기가 된 사람이 최소암(崔小岩) 씨이다.
최소암 씨와의 만남, 거기서 생긴 우정이 그의 이후 인생을 바꿨다고도 할 수 있다. 열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최소암 씨는 지하벙커 공사에 종사하며 재일 조선인으로서 당시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귀중한 존재였다.
工事中に監督から受けたリンチの後遺症に苦しみながらも、話を聞きたいと訪ねてくる地元の中学生、高校生たちには、いつもこう優しく答えていたそうである。「悪いのは日本人じゃなくて、軍隊、戦争。だから君たちは平和を大事にするんだよ」
공사 중 감독에게 받은 구타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찾아오는 현지 중학생, 고등학생들에게는 늘 이렇게 다정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쁜 건 일본인이 아니라 군대, 전쟁. 그래서 너희는 평화를 소중히 여겨야 히는 거야."
그런 최소암 씨는 1991년 3월 마쓰시로에서 일흔두 살의 생애를 마감했다. 함께 고향을 떠난 친구들은 사고로 죽었는데, 자신 한 사람만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미안하다고 계속 말하던 최 씨가 이타쿠라 씨와 함께 오십여 년 만에 고국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던 참의 죽음이었다.
어떻게든 최 씨의 소식을 알려주고 싶다며 이타쿠라 씨는 죽은 친구의 고향 찾기를 시작한다. 인근에 사는 재일교포 2세 김달남(金達男) 씨의 도움으로 사방팔방 수소문 끝에 겨우 찾은 경상남도의 시골 마을로 이타쿠라 씨는 최소암 씨의 유품을 들고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라 당황하면서도, 형인 최암이(崔岩伊) 씨는 실종됐던 동생의 영정과 유품 젓가락을 조용히 쓰다듬었다고 한다. 마쓰시로와 최 씨의 고향은 이후 고등학생들을 비롯해 교류의 고리가 맺어지면서 크게 퍼져 나갔다. 최 씨의 뜻이 열매가 돼 꽃이 된 것 같다.
"... 나도 따를 거야. 최소암 씨와 함께, 나도 따라갈 거야." 이타쿠라 씨는 최소암 씨의 세 번째 기일에 그렇게 시를 썼고, 이번에는 말을 배우기 위해 친구의 모국으로 떠났다.
(1994 04 1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4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4. 나와의 만남을 바란다.
"나와의 만남을 바란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남 씨와 이야기하다' 라는 코너를 담당했을 때의 캐치프레이즈이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코너였지만 많은 젊은이들과 값진 좋은 만남을 만들 수 있었다.
"경남 씨는 언제 일본에 왔어요?" "왜 그렇게 일본어를 잘해요?" 라는 질문의 엽서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모두들 모르는군요. 지금 일본에는 재일교포·조선인이 약 70만명이나 있어요. 나도 그중에 한 명이고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일본에 살고 있냐면,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일본에 끌려 오거나, 생활이 어려워 건너온 사람이 많이 일본에 있었어요. 일본이 전쟁에 져서 조선이 독립한 후에도 우리 부모님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라고.
어느 날 오픈 스튜디오에 낯선 젊은 남자가 앉아 있어서 방송이 끝난 후에 말을 걸어봤다. 가나자와에서 온 대학생으로 학교 세미나에서 조선문제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는 재일교포가 한 명도 없다"고 하는 그에게 곧바로 되물었다.
"친구가 있잖아" 라고 말하자, "어, 어디에?" 라는 그 사람. "이봐, 여기에. 이제 우리는 친구야!" 라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내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훗날 받은 그의 편지에 따르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된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청취자들에게는 내가 처음 만나는 재일교포인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대등한 입장의 그대로의 인간끼리 만나, 거기에서 여러가지를 알고, 서로 느끼는 것이 가장 좋다. "
나와의 만남을 바란다."는 거기서 시작됐다.
나에게는 많은 청취자들이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와 일대일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받은 편지에는 답장을 쓰기로 결정했다(늦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 버릇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 칼럼의 독자로부터 받은 사연에도 간략하지만 답장을 보내고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전화번호도 적는 경우가 있는데, 얼마 전 그런 한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 좀 바꾸어 주시겠니까?" 세상에, 그 부인은 나를 남자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요, 박경남은 저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이해가 되지 앟는다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연처에서도 찾아주신 독자분께서 "어, 여자예요!?" 하고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선은 여기서 목소리를 높여 "나는 여자입니다"라고 여성 선언을 해두기로 한다.
매번 저의 여러 만남을 소개해 드리고 있지만, 사실 이 칼럼을 통해 독자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 분들과의 인연을 맺고자 연필을 쥐고 있다(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면서). 모처럼의 인연이자 만남이니 언제든 자신을 공개하여 두고 싶다. 아래는 강연처에서도 부담 없이 연락처를 알려주는 나에게 어제 도착한 편지이다.
"... 그렇게 말하고 주소가 들어간 명함을 얼른 저와 친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저도 친구도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이 벌어졌어요'. 나름대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생면부지의, 만나는 것도 그뿐일지 모르는 사람에게 주소, 성명, 전화번호까지 공개하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생기는 만남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1994 04 2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5. 오늘도 달리고 또 달린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한다더니,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아, 또 지각이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자저(自著)가 든 무거운 큰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또다시 한달음에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반가운 강연 의뢰였다. 작년 11월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면서(지갑을 잊고 지각을 해 버려서,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다고 혼신의 힘을 담은 강의), 들어 준 학생들이 기획해, 꼭 신입생에게도 해달라고 요청인 것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늦지 않게 가겠다며 지갑을 꼭 움켜쥐고 요코하마 도쓰카역 개찰구에 약속 시간에 딱 도착했다. 약속대로라면 학생이 마중 오기로 되어 있있다. 그런데 분위기는 썰렁하다. 누구도 달려와 주지 않는다. 아, 큰일 났다.
어쩌면 고마가타 모헤에(駒形茂兵衛;こまがたもへえ)의 길거리 연극 역할 분장에 열심인 나머지, 내 관상이 바뀌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학생풍의 남자아이에게 "저기요~"라고 묻고 걷지만, 돌아오는 것은 수상한 상품권유원과 마주친 것 같은 눈빛뿐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위에 개찰구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뭐야, 거기였어." 라며, 가방을 다시 추켜메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불안한 얼굴의 학생이 "오셨군요" 하고 달려와 주는 줄 알았더니, 그 개찰구 앞도 무정하게도 썰렁하다.
지난 번에도 개찰구에서 만나기로 한 선생님과 끝내 만날 수 없었지만(그때는 나의 지각 때문에), 정말로 도쓰카 역의 개찰구와 나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서성거리는 사이에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눈앞에 마침 메이지 학원행이라고 적힌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택시 승강장에 사람이 많아, 오히려 시간이 걸리던 지난 번 체험이 머리를 스쳐 그 버스에 뛰어올랐다. 그런데 좀처럼 출발하지 않는다.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 창문으로 택시 승강장을 보니, 아니 빈 차가 즐비하고 손님은 한 명도 없다. 뭔가 일이 꼬이네,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달리는 버스 속에서 울상이 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종점인 대학 앞.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모두(冒頭)에서 말한 그 장면이 되풀이 되었다. 머리를 흩날리며 치마를 움켜쥐고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경남 선생님!'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지 않고 얼굴만 돌아보니, 맨얼굴에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 쫓아온다. 치이(나중에 이름을 들었다) 양이라는 그 여학생은 지난 강연을 두 번 연달아 들었고, 오늘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일부러 와줬다고 한다.
앞서가는 여성의 "또 지각..." 이라는 고함소리를 듣자마자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강연 의뢰서에는 "도즈카 캠퍼스에 다시 폭풍을 일으키세요" 라고 쓰여 있었지만, 오늘도 나는 폭풍처럼 달리고 또 달린다.
그 전에도 사무실 여직원과 함께 달리고 달렸던 넓은 구내를 또다시 젊은 여성과 두 사람이 나란히, 숨을 헐떡이며 질주하였다. 폭풍이라기보다는 토네이도처럼, 나에게 있어서는 이 캠퍼스는 잘 달리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달리다 보면 기운이 나게 되는지, 이번 강연도 마음껏 파워풀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크게 고조되었다. 어쩌면 마중 나온다던 그 남학생은 그것을 계산해 개찰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와는 만나지 못하고 대학을 떠나 바로 이 원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진상은 아직 알 수 없긴 하지만... (1994 05 0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6. 꿈의 정령과 현실의 화신(化身)
돗토리에서 자란 어린 시절 시골 마을의 살풍경한 일상 속에서 소녀 잡지는 화려함을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신간(新刊)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 그곳은 현실과 동떨어진 멀고 먼 꿈의 세계이다.
그 상징이 마쓰시마 도모코(*松島トモ子 1945~ 여배우)의 큰 눈동자였고, 도쿄의 가키노키자카(*柿ノ木坂: 東京都目黒区의 町명)라는 세련된 그녀의 주소이기도 했다. 그 동경의 대상인 대스타 도모코 씨와 세월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되었다. 타임머신으로 돌아가 당시의 나였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마쓰시마 도모코 씨가 "나의 무희(舞姫)" 라는 리사이틀을 연다. 전쟁 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조선의 무희 최승희(崔承喜)를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 전설적인 무희를 흠모했다는 도모코 씨의 공연에 임하는 각오는 대단하다.
원어로 부르는 아리랑 발음을 내가 가르치게 되면서 대면하게 된 셈이다. 장소는 호텔 뉴 오타니의 우아한 가든 라운지에서 였다. 실물 도모코 씨는 어릴 때 품었던 이미지대로 유리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공주였다. 화보에서 바라보던 그 도모코와 눈앞의 도모코 씨가 서로 겹친다.
긴장으로 멍해져 있던 내 귀에, 그때 갑자기 큰 아우성이 날아들었다. 고급스러운 라운지 분위기를 한순간에 날려버릴 정도의 큰 소리였다. 우리 테이블 바로 앞에서, 한 여자가 고함을 지르고 날뛰고 있지 않은가.
호텔 종업원 같은 남성 네 명이 달래며 필사적으로 제지하지만,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는다. 그들에게 발차기(!)를 두 번 날리리고, 독설을 한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이 자식들아, 까불지 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혹시 TV나 영화 촬영? 그렇다 치더라도 얼마나 박력있고 처절한 연기력인가, 하고 우리 일동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융단이 깔린 넓은 후로아에서 대화를 즐기던 많은 손님들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다.
큰 대자로 뒹굴던 그녀는 "이봐, 돈 여기 있어" 라며 돈다발을 꺼내 들고 여전히 술에 혀가 돌지 않는 입으로 욕지거리를 계속하고 있다. 나이는 50대 초반쯤일까. 머리를 위로 묶고 블라우스에 바지 차림이다. 가름한 얼굴에 보통의 체격에 중간 키의 그녀가 어디에 그런 강력함이 있을까 감탄할 정도의 힘이다.
15분은 정도의 활극 끝에 마침내 남성 네 명에 의해 끌려가듯 그녀는 떠났다.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상적이고 강렬한 체험이었다. 도모코 씨는 그 큰 눈동자를 한층 크게 뜨고 "이런 일은 처음이야" 라며 놀라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만남의 자리가 끝난 후에도 왠지 나는 끌려간 그녀가 신경 쓰여 호텔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운 좋게 또 그녀와 딱 마주칠 수 있었다. 남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막말을 하며 택시에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는 저렇게까지 거칠었을까. 어떤 실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까. 함께 타서, 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 모습을 배웅한 나는, 꿈의 대상 그 자체인 도모코 씨와 현실의 화신(化身)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와의 대비의 생생함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1994 05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