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카메라 뒤에 있기 마련이지만, 종종 카메라 앞에 나와 관객과 직접 대면하길 원하는 감독들이 있다. 카메오나 특별출연 같은 짧은 만남도 있지만, 몇몇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에서 혹은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이기도 한다. 충무로의 '감독 겸 배우' 30인.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경우는 제외했다.
글 |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감독에서 배우로 빛나는 재능
충무로의 연기파 감독 30인
30위 김용태
[미지왕](1996)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온갖 패러디와 농담과 과장법과 말장난과 오버액션으로 뒤범벅된, '한국 컬트 영화사'에서 톡톡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로 김용태 감독의 데뷔작이다(이후 지금까지 두 번째 작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정신 없는 영화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고민했던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 주인공 왕창한(조상기)에게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로 출연한 감독은 여전히 장난기를 버리지 못했고 마지막 대사로 "컷!" 한 마디 외치고 사라진다. 가장 임팩트 있는 '감독 카메오' 중 하나. 29위 최야성
[로켓트는 발사됐다]에서 김보성(왼쪽)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
최야성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스물한 살 때 [검은 도시](1990)로 '한국영화 사상 최연소 장편 극영화 데뷔'라는 기록을 세우며 등장했던 최야성 감독은, 1990년대 말엔 자신이 직접 주연을 맡고 주변의 형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을 동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를 선보였다. 그 첫 작품이 [로켓트는 발사됐다](1997)로서 극장 개봉 당시 관람료를 안 받았던, 파격적 마케팅(?)의 영화. 두 번째 영화는 [파파라치](1998)로, 거의 시나리오가 없다고 봐야 할 이 두 영화에서, 최야성 감독은 자신의 신변잡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연기력(?) 그건 일단 논외로.. 28위 김상진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 시절부터 심심찮게 영화에 등장했던 김상진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신라의 달밤](2001)에 환자로 등장한 후 다음 작품인 [광복절 특사](2002)에선 대사 분량과 출연 시간을 대폭 늘렸다. 맨 마지막 야유회 장면, 상가 지역 상조회장으로 등장한 감독은 석(차승원)에게 노래 한 곡 하라고 청한다. DVD 코멘터리에선 이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설경구랑 대학 동창인데요, 경구 연기하는 거 보면서 난 연기 절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죠." 이후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2007)엔 시골 총각으로, [주유소 습격사건 2](2009)엔 축구부 감독으로 등장한다. 27위 박철수
[301 302](1995)부터 변신을 시도한 박철수 감독은 50세가 가까운 나이에 저예산 영화로 진로를 바꾼다. [학생부군신위](1996)는 이런 맥락 위에 있는 작품이며, 이 영화에서 그는 감독의 1인칭 시점과 영화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실험한다. 10일 동안 핸드헬드 카메라만으로 촬영을 끝냈다는 이 영화에서 그는 박 노인(최성)의 상가에 상주가 된다. 영화 맨 마지막엔 "컷! 수고했어요"라는 (배우가 아닌) '감독'의 목소리로 영화를 끝내고, 이때 그에게 전화가 온다. 그렇게 감독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26위 구성주
가장 개성적인 마스크를 지닌 '감독 겸 배우'는 누구일까? 여균동 감독을 꼽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2005)의 구성주 감독 따라갈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한 장의사](2000)에서 대사는 한 마디도 없이, 자전거 타다가 넘어지는 액션만으로도 기억될 수 있었던 비결?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그의 얼굴 때문이다. [불후의 명작](2000)에선 헌책방 주인으로 출연한다. 25위 최동훈
임상수 감독의 [눈물](2001) 조감독이었던 최동훈 감독은 [눈물]에서의 엘리베이터 커플 중 한 명으로 시작해 [바람난 가족](2003)의 경찰을 거쳐 [그때 그사람들](2004)의 군의관까지, 임상수 감독 영화에 세 편 연속 출연했다. 가장 비중이 컸던 역할은 군의관. 김재규(백윤식)의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온 대통령(송재호)의 사체를 제일 먼저 목격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자신의 영화인 [타짜](2007)에선 경찰로 잠깐 나온다. 24위 정초신
프로듀서 출신 감독인 정초신은, 자신이 제작하거나 연출한 영화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자카르타](2000)의 죄수, [몽정기](2002)의 노점상 등은 대표적인 역할. [남남북녀](2003)에선 화려한 무대의상과 선글래스 차림으로 연변의 불야성 나이트클럽 DJ로 등장, 어설프지만 과감한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연기 생활에서, 자신이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엑스트라](98)에서의 새필 역할은 정점이었는데, 영화현장 조감독 캐릭터로서 엑스트라인 봉수(임창정)와 왕기(나한일)의 '미덥지 않은 후견인'으로 등장한다. 23위 이무영
고인이 된 이훈 감독의 [마스카라](1995)로 시작한 그의 연기 생활은(이 영화엔 곽재용 박찬욱 감독도 출연한다) 주로 지인들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어졌다. 윤태용 감독의 [배니싱 트윈](2000), 박찬욱 감독의 [3인조](1997),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2001),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등이 그러한 작품. 하지만 그의 최고 연기는 자신의 영화 [휴머니스트](2001)의 마지막 장면. 마태오(안재모)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는 인터뷰어로 등장한 그는, 맨 마지막 장면에 돼지우리에서 목을 매달고 죽는다. 이 장면에서 보여준 감독의 '극도의 자기혐오'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22위 장건재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장건재 감독.
왼쪽에서 두 번째다
작년 [회오리 바람](2010)으로 잔잔한 바람을 일으켰던 장건재 감독이 관객과 가장 먼저 만난 건, 감독이 아닌 배우로서였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시절, 그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에서 상환(류승범)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패거리 중 한 명인 창준 역을 맡았던 것. 이후 [그놈 목소리](2007)에선 용의자로 등장했다. 21위 김홍준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이며 영상원 교수인 김홍준 감독. 1990년대 초 임권택 감독 연출부였던 그는, 이후 [취화선](2003)의 고관 역할과 [하류인생](2004)의 교수 역할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특히 [하류인생]의 역할이 인상적. 동방대학 김홍일 교수인 그는 어느 작가와 술김에 체제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온다(작가 송지한 역은, 오랜 기간 동안 임권택 감독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송길한 작가가 맡았다).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아는 분에게 전화를 하는 어느 교수의 모습은 당시의 힘없는 지식인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풀려나는가 싶더니 결국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넘버 3](1997)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함께 서점 손님으로 등장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선 호텔 사장 역할을 맡았다. 20위 봉만대
[핸드폰]에 출연해 매니저에게 여배우의 노출을
역설하는 영화감독 역을 맡은 봉만대 감독
한때 연극을 하기도 했던 봉만대 감독은, 에로 비디오 감독 시절부터 자신의 영화에 심심찮게 출연했던 경력의 소유자.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으로 충무로에 진입했고, 같은 제작사(기획시대)에서 만든 영화인 [신부 수업](2004)에서 결혼식 사회자로 잠깐 등장했다. 이후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에선 이 생원 역을, 김한민 감독의 [핸드폰](2009)에선 영화감독 역을 맡았다. 필모그래피엔 [영웅 후레쉬](1990) [휘파람 부는 여자](1995) [킬링 게임](1996) [언더그라운드](1996) 등에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확인할 길이 조금은 막막하다. 19위 이준익
[평양성]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연출한
단편 [농반진반]의 이준익 감독
적은 제작비로 황산벌 전투를 재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규모 군중 신이 많다 보니 엑스트라 동원은 가장 큰 난점. 웬만한 스태프들은 병사나 장군이나 화랑으로, 어떨 땐 두세 번씩 출연한 상황이었고 이젠 더 이상 '써 먹을'스태프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준익 감독은 메가폰 대신 북채를 들고, 갑옷을 입고 수염을 붙이고 안경을 벗은 채 카메라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신라군을 알리는 '북 치는 병사'가 그가 맡은 역. 대사는 단 한 마디 "또 온다"였다. 이미 자신이 제작한 [아나키스트](2000)와 [공포택시](2000)에도 단역을 출연한 바 있는 이준익 감독. [라디오 스타](2006)에선 중국집 주방장으로 출연했고, 최근엔 [부당거래](2010)에 정 사장 역으로 등장했다. [농반진반]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스마트폰으로 찍은 단편영화다. 18위 용이
연출 데뷔작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에서 배두나가 여고생 시절 짝사랑했던 야구선수(나중에 축구부로 옮기지만) 방찬호로 카메오 출연했던 용이 감독. 그의 최고 캐릭터는 [올드보이](2003)의 배달원. 과연 그 군만두는 누가 가져오는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던 관객들은 이 귀엽고도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녀석'을 목격하게 된다. [올드보이]의 예고편을 만들기도 했던 용이 감독. [썬데이 서울](2005) [다세포 소녀](2006)에서도 잠깐이나마 그를 만날 수 있다. 17위 봉준호
김홍준 오승욱 이무영 감독 등과 함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특별출연 연기 경쟁'을 벌였던 봉준호 감독. 평자들은 이들의 4파전을 본 후 봉준호 감독의 판정승을 선언했다. 택시 운전사 경선(이혜영)은 어느 저질 손님(이문식)과 시비가 붙어서 함께 경찰서에 오는데, 그때 그들을 담당하는 형사가 바로 봉준호 감독.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는 표정이 압권이다. 이후 봉준호 감독은 [미쓰 홍당무](2008)에 양미숙(공효진)이 다니는 영어 학원의 수강생으로 등장해 인상적인 카메오를 남겼고, 단편 [불 좀 주소](2009)에선 '기타 남'으로 등장한다. 16위 송일곤
최근 [오직 그대만](2011)을 내놓은 송일곤 감독은 폴란드 유학 시절, 일찍이 국제전화 CF로 얼굴을 알린 바 있다. 그의 연기 데뷔작은 박경희 감독의 [미소](2004).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작가 소정(추상미)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곁에 조용히 서 있는 남자 지석 역을 맡았다. 감독 특유의 감성적인 마스크가 잔잔한 느낌을 준다. 15위 임상수
[세 친구](1996)의 군의관, [눈물]과 [그때 그사람들]의 의사, [바람난 가족](2003)의 판사. '사'자 돌림 직업들을 주로 맡아온 임상수 감독은, 세상에 닳고 닳은 느낌을 술 냄새처럼 확 풍기며 이 분야만큼은 업계 최고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연기 인생 중 압권은 [플란다스의 개](2000)의 준표. 윤주(이성재)의 대학 선배인 그는 순진한 후배에게 화장실에서 '전임강사 따는 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데, 그 핵심은 학장에게 가서 1,500만원을 바치라는 것이다. "반성 좀 했냐?"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처세술 강의. 일단 한 번 들어보면 그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다. 14위 임필성
첫 출연작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 가방가게 주인 역할을 맡았지만 편집 과정에서 아깝게 삭제되었던 임필성 감독. 그는 [괴물]에서 다시 한 번 배우 데뷔에 도전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맡은 역할은 뚱게바라. 남일(박해일)의 선배로, 대학 시절 극렬한 운동권이었으나 지금은 이동통신 회사에 다니는 그는, 남일을 도와줄 것처럼 유인해 곤경에 빠트린다. 최근엔 단편 [지상의 밤](2010)에 심은경과 함께 출연해, 영화 내내 운전하면서 이야기한다. 13위 정진우
1995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은퇴한 정진우 감독은 1960년대 초 데뷔 시절부터 자신의 영화에 꼭 한 컷씩은 출연했다. 하지만 제대로(?) 연기를 한 건 1980년대에 들어서였고, 그 시작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였다. 여주인공 수련(정윤희)을 겁탈하는 남자 역할이었고, 이어지는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3)에선, 술집 작부 은주(나영희)가 선실로 출장을 왔을 때 그녀를 학대하는 사디스트 뱃사람 역할을 맡았다. 감독은 DVD 코멘터리에서 그 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역할에 맞지 않아 자신이 직접 했다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절대 성적 흥미를 위한 장면이 아니라 은주라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고는 말한다. 12위 황병국
최근 가장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감독 겸 배우'는 바로 황병국 감독. [부당거래](2010)에서 '하루에 30만 원 받는 국선 변호사'로 등장해 강한 임팩트를 남겼던 그는, [의뢰인](2011)에선 훨씬 더 커진 비중으로 담당 형사 역을 맡았다. 잘 모르는 관객들은 직업 배우로 착각할 만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소화하는 연기력의 소유자. 김성수 감독의 연출부 시절부터 단역 경험을 쌓았으며, 단편영화 출연 경험도 있으며, [해결사](2010)에선 형사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의뢰인]에선 가발을 소품으로 이용, 코믹한 장면을 연출한다. 데뷔작 [나의 결혼 원정기](2005)에 이은 두 번째 장편영화 [특수본]이 11월 24일에 개봉된다. 11위 김태용
[동백꽃]의 한 장면.
장작은 안고 있는 사람이 김태용 감독이다.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배우가 꿈이었다는 김태용 감독은 옴니버스 동성애 영화 [동백꽃](2004)의 세 번째 에피소드 [동백 아가씨](이송희일 감독)에서 현수 역할을 맡았다. 죽은 남편의 옛 애인이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나선 한 여자(박미현)의 이야기인 [동백 아가씨]. 동성애자 역을 맡은 김태용은 이 영화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때론 귀엽게 망가진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모두들, 괜찮아요?](2006)에선 영화 속 영화 촬영 장면에서 영화감독으로 특별출연했다. 10위 장진
[퀴즈왕](좌)과 [아는 여자](우)에 형사로 출연한 장진 감독
대학 시절, 그는 희곡을 쓰고 연출을 했지만 연기 경험도 쌓았던 장진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충무로로 들어왔고,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개같은 날의 오후](1995)에서 작은 역을 맡았다. [킬러들의 수다](2001)에선 홍경표 촬영감독과 함께 마지막 의뢰인으로 카메오 출연해 누군가를 폐암으로 죽게 해달라는 얼토당토 않는 주문을 한 장진 감독. 그는 [아는 여자](2004)의 취조실에서 연기 생활의 꽃을 피우는데, 치성(정재영)을 살인범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여기 들어오면 장님도 본 대로 말하고, 귀머거리도 들은 대로 얘기하는 거예요"라고 다그치지만, 치성은 "그럼 벙어리는요?"라며 지나치게 여유 있다. 그럴 때마다 뒷골을 잡으며 후배 형사에게 "야, (중)풍 온다"며 괴로워하는 그는, 진짜 형사 같진 않았지만 진짜 배우 같긴 했다. 이 영화로 형사 연기에 취미를 붙인 걸까? [퀴즈왕](2010)엔 마 반장 역으로 나와 도엽(김수로)을 압박한다. 9위 이장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좌)와 [무릎과 무릎 사이](우)의 이장호 감독
이장호 감독은 심심찮게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의 체육관 관장, [무릎과 무릎 사이](1984)의 정신과의사 등이 카메오 수준이었다면 [바보선언](1984)의 '자살하는 영화감독' 캐릭터는 당시 한국영화에 대한 자조적 시선임과 동시에 감독 자신의 자살 선언이었다.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던(그래서 쌍꺼풀수술도 했다고 한다) 그에겐,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가 작은 해방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확실한 캐릭터 연기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성빈(박성빈) 아버지 역할이 유일하다. 출소한 아들과 온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 그는 한국 특유 '꼰대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껏 키워놨더니 애비한테 빽빽 대들기나 하고!" 무능한 가부장의 허장성세 가득한 '밥상머리 교육'의 짜증나는 현장. 약간 어색하지만 거침없는 대사 전달이 인상적이다. 8위 장선우
자신의 영화에 슬쩍슬쩍 얼굴을 내비쳤던 장선우 감독에게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조감독이었던 김수현 감독. 그는 자신의 데뷔작 [귀여워](2004)에서, 원래는 한진희를 염두에 두었던 장수로 역할을 스승인 장선우 감독에게 제안한다. 이 영화에서 장선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스타일인데, 실제 장선우의 말투와 행동과 표정과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이 그대로 투영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배우 그 자체의 개성이 100퍼센트 여과 없이 드러나는 역할이었다. 팔도 각지에 자신의 씨를 뿌렸고, 배다른 아들 세 명과 살아가는 전직 박수무당. 현재는 순이(예지원)라는 정체불명의 여자와 '해피 투게더'중인 장수로는 이 영화에서 제일 '귀여운' 인물이다. 7위 김기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좌)과 [아리랑](우)의 김기덕 감독
원래 김기덕 감독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장년의 수도자' 역할로 생각했던 사람은 안성기 혹은 도올 김용옥이었다. 그들의 '강인한 50대' 이미지는 역할에 안성맞춤이었던 셈. 하지만 일정이나 섭외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고, 결국 김기덕 감독이 직접 하게 되면서 대사가 사라지고 고행이 강조되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맷돌을 짊어지고 산 위를 오르는, 그리고 얼음 위에서 선무도를 하는 김기덕 감독. 외골수로 오해 받기도 했던 그의 영화 인생에 대한 무언의 '상징적 항변' 같은 이미지로 느껴졌다. 영하 30도 추위에서 촬영했는데, 만만하게 봤다가 엄청 고생한 김기덕 감독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프로듀서에게 개런티를 요구했다고 한다. 200만 원 받았다는 후문. 이후 [숨](2007)에선 보안과장 역을 맡아 슬며시 등장했고, 올해 칸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아리랑]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독특한 다큐멘터리이다. 6위 장항준
[라이터를 켜라](좌)와 [참을 수 없는](우)의 장항준 감독
스물일곱 살 때 [박봉곤 가출사건](1996) 시나리오를 쓰며 충무로에 이름을 알린 그는 이 영화에서 오 노인(장인한)의 손자로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최고의 연기는 감독 데뷔작인 [라이터를 켜라](2002)에서의 봉구(김승우) 동창생인 희창. 동창회 장면은 [라이터를 켜라]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데, 원래는 시나리오에 없었지만 영화가 너무 밋밋한 것 같아서 보충촬영 때 만들어서 넣은 부분이다. 여기서 장항준 감독은 촉새처럼 수다스럽고 줏대 없는 동창생 희창 역할을 맡았는데, DVD 서플먼트에서 박정우 작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렇게 말한다. "장 감독 연출력이 연기력만큼만 됐어도 영화가 훨씬 더 잘 나왔을 텐데.." 장항준 감독은 두 번째 작품 [불어라 봄바람](2003)에선 서점 주인으로 등장, 소설가 선국(김승우)이 자신의 책을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는 동안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계속 핏대를 올린다. 원래 다른 배우가 촬영했던 부분이지만, 보충촬영을 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감독이 출연하게 되었다고. 자신이 시나리오의 아이디어를 냈던 [귀신이 산다](2004)에도 등장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2007)에선 [참을 수 없는.](2010)의 장 작가도, 약간은 불쌍해 보이면서도 삶에 지친 듯한 '장항준적 캐릭터'의 연장. 이외에도 [지붕 뚫고 하이킥](2009) 같은 지상파 시트콤이나 [전투의 매너](2008) 같은 케이블 TV 영화에도 등장했다. 5위 윤종빈
아무 사전정보 없이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본다면, '완벽한 고문관' 허지훈 역할을 맡은 배우가 누구인지 내내 궁금했을 것이다. 두 주연배우 하정우와 이장원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영화 내내 눈에 들어오는 건 허지훈이라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 배우는 바로 윤종빈.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를 직업으로 생각하진 않는다"고 단호히 밝혔지만(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부업'치곤 그가 보여준 연기는 캐릭터의 완벽한 구현이었고, 두 주연배우를 능가하는 '용서받지 못할 명연기'였다. 4위 양익준
[똥파리](좌)와 [집 나온 남자들](우)의 양익준 감독
단편영화 시절부터 연출과 연기를 병행해온 양익준 감독은 2009년 [똥파리]로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과 신인남우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자신의 영화뿐만 아니라 동료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탄탄한 연기를 선보이는데, 현재 상영중인 [돼지의 왕](2011)에선 목소리 연기를 맡았고, 작년에 개봉되었던 [집 나온 남자들](2010)에선 지진희, 이문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앙상블 연기를 보여주었다. 거칠어 보이지만 감성적인 느낌도 지닌 배우. 3위 여균동
[너에게 나를 보낸다](좌)와 [박봉곤 가출 사건](우)의 여균동 감독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감독". 문성근은 여균동을 그렇게 평가한다. 1990년대 한국영화의 일각에서 시도되었던 파격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여균동은 연극 무대 출신.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감독 데뷔작 [세상 밖으로](1994)에서 브라운관 속 앵커맨으로 등장하기도.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의 은행원 역할로 1990년대 가장 개성 있는 연기자로 떠오른다. 독특한 저음의 대사처리, 코믹하면서도 '성깔'있는 마스크, 독특한 캐릭터의 선택, 자조적 지식인의 이미지 등이 어우러진 여균동의 카리스마는 이후 [맨?](1995)의 성성이와, 김태균 감독의 데뷔작인 [박봉곤 가출사건](1996)의 야구감독으로 이어졌다. [주노명 베이커리](2000)도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 [이재수의 난](1999)엔 특별출연을 했다. 2위 류승완
[짝패](좌)와 [오아시스](우)의 류승완 감독
자신의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의 석환 역할로 강한 '액션의 인장'을 찍은 류승완의 '배우로서의 강점'은, 액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드라마 연기 또한 능수능란하다는 점. 홍종두(설경구)의 동생으로 출연한 [오아시스](2003)에서의 연기는 그런 점에서 호평 받았다. 그의 첫 역할은 '영화 사부'인 박찬욱 감독의 [3인조](1997)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짜장면을 먹던 악기점 점원 역할(당시 연출부였음). 이후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선 짜장면 배달부 역으로, [친절한 금자씨](2005)에선 지나가는 행인 역할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짝패](2006)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액션과 드라마를 결합해 어떤 허무주의적 페이소스를 자아낸, '류승완 표 연기'의 결정판. 과거 19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연기의 한 패턴을 재현하려는 욕망은 감독 스스로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평양성](2011)엔 특공대 장수로, [마마](2011)에선 뮤지컬 감독으로 등장해, 카메오이긴 하지만 캐릭터의 폭을 넓혔다. 1위 배창호
만약 배창호 감독이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억누르고 배우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면, 아마 지금쯤은 한국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성격파 조연배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 시절부터 심심찮게 화면에 얼굴을 내비쳤던 그는, 대학 시절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주무대는 연극반이었다. 그가 배우로서 본격적 시작을 알린 영화는, 자신의 조감독이었던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9). 이 영화에서 그는 1980년대 최고의 배우였던 안성기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명감독의 명연기(?)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이발소 주인 문도석 역할을 맡은 그는, 캐릭터의 컨셉트를 200퍼센트 이해했고 영화를 완전히 장악한다. 코미디라고 하기엔 심각한, 비극이라고 하기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그의 모습. "라면은 민짜가 최고죠. 괜히 맛낸다고 계란이나 파 같은 거 넣으면 라면 맛만 버려요"라며 속삭이듯 궁시렁대는 그의 말맛은, 절대로 모방 불가능한 아우라다. 자신의 작품인 [러브 스토리](1996)엔 아내 김유미와 함께 출연해 리얼 로맨스를 보여주었고(배창호의 아내 사랑은 김유미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킨 [정](2000)과 [여행](2009)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18번째 영화 [길]엔 주인공인 대장장이 태석으로 출연해 깊은 연륜의 표정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