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金公行狀
明岡白奉欽
公姓金氏諱養鉉字吉重金氏爲靈光著姓高麗侍中諱台用諡文敬爲受封之祖世襲紱冕 國朝有諱王/筆文科官吏曹參判按三道長憲府 端宗癸酉遯于南荒子孫因居焉生諱塊獻納與南秋江孝溫同上復 昭陵疏生諱光遠號月峰 中廟朝司馬遊學靜菴趙先生己卯被禍合享汭陽南秋江祠 贈吏曹判書成均館祭酒是爲公十一世以上也高祖諱成昌曾祖諱夢吉祖諱尙璘考諱元相妣草溪卞氏廷埴之女 純廟庚寅五月十六日生公于岐山里第公生有美質少少嬉戱已有成人儀度見人非違輒能指言之及長知讀書獨不屑意於公車之業興慕古君子之風事父母至孝年十七當卞氏夫人疾亟嘗糞斷指而旣殞親命回甦三日及終哀痛無地盡三年之制於一朞之終而行踰月之禪所謂先王制禮不敢過者也奉養嚴君執甘旨謹溫淸唯恐不至二十奠禽于全州李載斌之女而行吉之夕哀慕慈氏號泣達夜二十七喪李氏以供養無主再娶于長興魏榮煥之女三十當親癠時天寒冰凍方欲求魚向前川適有一鱉躍出冰上抱以供之三十五丁外艱葬祭衰絰之制及飮食居處之節一遵文公家禮自初終至制畢一無所違未嘗以他事出外或有見請不興笑語常坐必對墳塋奠哭之暇循繞展省祁寒暑雨未或廢止服闋猶抱切切之哀乃於塋側種松柏二物遂遊息於斯盖平生雅常之懷也與季公三鉉友愛尤篤每誦常棣詩爲自警法有妹氏適靈光丁在賢相距四十里源源之見不越一月性不嗜酒惟以看書爲務每鷄鳴盥櫛肅然危坐俯吟仰思盖以毋自欺謹其獨爲戒每月朔望必叅先廟如四時新物雖菜果不及薦雖客地未嘗先食也四十七當丙子荒年與季公家口合産同爨爲門戶保活之計而庭無間言聚諸貧族戚量口分米一無轉壑之患盖其修齊之道睦婣之心肩於古君子無愧也訓子純深治家勤儉爲究竟法每遇山空月白輒發舒精神徜徉行吟蕭然有出塵之趣悠然有咏歸之興五十六乙酉六月九日考終于家葬于本面東溪村前子今原李氏擧一女適長興魏信權魏氏擧一男一女男漢璹克肖趾美女適靈光丁昌大嗚呼長興古百濟南徼雖僻在海堧名碩間出文章道術輝映當世照人耳目世級日降歐巴之敎喙喙爭鳴亘萬古斯文之道掃地盡矣疇能一刀兩段善變至道哉公生于此世獨以孝弟之道挺然爲己任其養送修齊之節一無所憾至今東西行過是洞者必稱金孝子所居洞指前川曰金孝子抱鱉川其不孝而若是乎漢璹氏恐其志行之湮滅撰其大要而示之奉欽卽公里閈人公在世時二十餘年行事耀然在目則知公亦莫我若也雖不文衷情所感不可囚舌故忘其固陋乃就本狀稍加橤括以寓追感之忱又擬立言之君子因此而揄揚云爾
注)衰絰 - 상복과 수질 및 요질.
常棣詩 - 《시경》〈소아(小雅)〉에 있는 시로 형제간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이다.
효자 김공 행장
공의 성은 김 씨이고 휘는 양현 자는 길중으로 저명한 김 씨 성으로 영광이니 고려시중 휘 태용 시호 문경이 봉호를 받은 시조가 되어 세습으로 높은 벼슬아치이다.
국조 휘 필은 문과급제자로 벼슬이 이조참판 삼도관찰사이고 사헌부 대사간이다.
단종 계유년에 남쪽으로 숨으니 자손이 따라서 살게 되었다.
휘 괴는 헌납으로 추강 남효온과 더불어 소릉소를 올렸고 휘 광원은 호가 월봉으로 중종 조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정암 조 선생에게 공부했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예양사에서 남 추강과 합향 한다.
증 이조판서 성균관 제주로 바로 공의 십일세 이상이 된다.
고조 휘는 성창 증조 휘는 몽길 할아버지 휘는 상린 아버지 휘는 원상 어머니는 초계 변 씨 정식의 딸이다.
순조 경인년(1830) 오월 열 여세 날(5월16일) 공은 기산리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어린아이 때 소꿉장난을 그만두고 성인이 되어서는 법도를 사람들에게 보이셨고 자주 능히 지목하는 말이 어른에 미쳐도 어긋남이 없었다.
독서를 알아서 유독 과거공부에 뜻 두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옛 군자의 풍도에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해 나이 열일곱에는 변씨 부인이 병이 자주 나 일찍이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자 이미 운명하셨는데도 어머니 목숨이 임종에 미쳐 삼일 동안이나 회생했다.
애통함이 삼년상을 마치지도 못하고 일 년이 끝나자 달을 넘겨 담제를 지내야 하는 이른바 선왕이 제정한 예법을 감히 범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봉양함에 맛 좋은 음식을 올리고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게 살펴 오직 걱정했다.
스무 살이 되지 않아 결정해 전주이씨 재빈의 딸을 맞이했다.
혼례를 치르는 저녁 모친을 사모해 슬피 목 놓아 울자 밤이 이르렀다.
스무 일곱에 이 씨 상을 당해 공양할 주인이 없자 재취는 장흥 위 씨 영환의 딸이다.
서른에 아버지가 앓아눕자 날씨가 추워 얼음이 얼어 지금 물고기를 구하고자해서 앞 냇가로 향하자 마침 자라 한 마리가 있어 얼음 위로 뛰어나오자 안아서 아버지께 공양했다.
서른다섯에 아버지 상을 당해 장제(葬祭)와 거상(居喪)은 상복차림으로 음식과 거처의 절목에 미쳐 똑같이 주문공 가례를 준수해 처음부터 끝에 이르도록 복을 마칠 때까지 한 점도 어긋남이 없었다.
다른 일로써 일찍이 밖에 나간적도 없었다.
혹 초청을 받았을 때는 더불어 웃지 않았으며 말을 해도 항상 앉아서 반드시 선영을 마주했으며 음식을 차리고 곡을 하는 겨를에도 참배를 할 경우 돌며 어루만졌다.
모진 추위와 더위 장마로 간혹 폐지하지 않았으며 복을 마쳐도 오히려 절절한 슬픔을 안고서 바로 선영 곁에 송백 두 그루를 심어 마침내 여기에서 노니고 쉬었다.
평생 형제의 우애를 그리워해 계공 삼현과 우애는 더욱 돈독해 늘 상체시를 암송하며 자경법으로 삼았다.
매씨가 영광정씨 재현에게 시집가자 서로의 거리가 사십 리이지만 자주 보며 한 달을 넘기지 않았다.
성품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독서를 일로 삼아 매양 닭이 울면 낯 씻고 머리 빗고 숙연하게 정좌하고 앉아서 지난시절 돌아보며 생각을 읊었다.
대개 이로써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며 공이 홀로 있을 때는 삼가 해서 경계로 삼았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선조사당에 참례하여 사계절 새로 나온 음식을 따랐다.
비록 채소 과일일지라도 올릴 수 없으면 객지에 있어도 먼저 음식을 맛보지 않았다.
마흔 일곱에는 병자 흉년을 당하여 동생 가구와 합산해서 한솥밥을 먹어 집안을 보전하고 살릴 수 있는 계책으로 삼았다.
모든 가난한 족척을 모아 식량을 식구 수대로 나누어 주어 한사람도 굶어죽어 골짜기에 뒹구는 근심이 없게 하자 가정에서도 비난의 말이 없었다.
공의 수신제가의 도는 구족 외척과 화목하는 마음으로 옛날 군자에 비견돼도 부끄럽지 않다.
자질들은 전일하고 깊게 가르치고 집안을 근검으로 다스리는 일을 궁극의 법으로 삼았다.
빈산 하얀 달을 만나면 문득 정신을 편히 가져 호젓하게 노닐며 시를 읊으면 속세를 벗어나는 지취가 있어 유연했다.
흥 일어 시 읊으며 돌아가니 쉰여섯으로 을유년(1885) 유월 아흐렛날(6월9일) 집에서 생을 마감해 본 면 동계마을 앞 자 좌 언덕에 장사했다.
이 씨에게 딸 하나 있는데 장흥 위 씨 신권에게 시집갔고 위 씨에게 아들 딸 하나씩 있는데 아들 한숙은 능히 훌륭해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계승했다.
딸은 영광 정씨 창대에게 시집갔다.
아! 장흥은 옛날 백제 남쪽 변방으로 비록 바닷가 빈터 후미진 곳에 있지만 명유석덕이 사이사이 나오고 문장도술은 빛을 발해 당세 사람들의 귀 눈을 비췄다.
문화수준이 날로 떨어져 서구의 가르침이 시끄럽게 울음을 다투고 만고사문의 도가 땅을 씻은 듯이 없어질 것을 요구한다.
누가 능히 일도양단으로 잘 변화하여 도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공의 생애는 이 세상에서 유독 효제의 도로써 우뚝했다.
사랑으로 자기책임을 삼아 그것을 길러 보내니 수신제가의 절목을 하나도 섭섭해 할 것이 없다.
지금 동서로 가는 도중에 이 마을 김 효자 사는 마을을 반드시 일컬으면 앞 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김 효자가 냇가에서 자라를 안았으니 어찌 불효입니까.
이와 같다면 한숙씨는 공의 뜻과 행실이 인멸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 대요를 지어 봉흠에게 보여주니 바로 공은 마을 사람으로 공이 살아 계실 적에 이십여 년 행사가 찬란하게 눈에 있는데 공도 아는 내가 따르지 않겠는가.
비록 글은 충정이 아니더라도 느낀 것은 혀를 못 놀리게 할 수는 없으므로 그 고루함을 잊고 마침내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로 나아가 조금 보태 모아 묶어 추억의 정성을 붙임으로써 또 입언군자를 헤아려 이에 따라 찬양했을 뿐이다.
첫댓글 명강선생은 역시 대단하신 문장입니다.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시었고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大文字는 번역이 더 쉽답니다.앞뒤가 조리있게 떨어지며 문장이 명쾌하지요. 어설픈 학구의 글은 애간장을 태우지요.걸치적 거리며 무엇을 말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