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와 명분은 흔히 함께 쓰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들일 것이다. 대의란 정의다.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침범당하지 않는 오롯한 옳음과 밝음 그 자체인 것이다. 명분은 곧 관계이고 역할이다. 아버지로써, 아들로써,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나아가 왕으로써, 신하로써,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는 도리를 다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의는 명분과 함께 쓰인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보편의 가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역시 인간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당연한 본능인 것이다. 부부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왕과 신하가 서로 화합하여 나라일에 최선을 다한다. 나라는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은 나라를 위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써 인간에 대한 존중과 경애를 잊지 않는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덧붙일 말이 없다.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아질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각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지러워질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신고한다면 법에 의해 처벌받게 될 것이다.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살인은 죄고 살인의 죄를 저질렀다면 마땅히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라가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렇더라도 국민이기에 그러한 경우에도 지지를 보내고 동참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보편적인 가치로서의 정의가 충돌한다. 물론 국민으로서 나라가 옳지 못한 길을 간다면 그것을 비판하고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이 문제다.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세상을 바르게 바꿔보겠다는 마음은 같다. 보다 백성들이 마음편히 잘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도 같다. 정몽주(임호 분)와 정도전(조재현 분)이 이인임(박영규 분)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에 반발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반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려를 망치고 있다. 고려의 백성들을 죽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더라도 고려에서 나고 벼슬까지 하는 고려의 신하이기에 고려라고 하는 틀 안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대의도 중요하지만 명분도 중요하다. 반면 세상을 보다 좋게 바꾸려 한다면 고려왕조 역시 그 과정에서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천하는 왕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천하의 것이다. 단지 필요에 의해 잠시 지금의 왕에게 맡겨두고 있을 뿐이다.
충성 충(忠)과 역사 사(史). 충성이란 군주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한결같은 것이다. 역사란 다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밝혀 적는 것이다. 왕조가 바뀌어도 기록은 남는다. 역사의 기록을 통해 인간은 영원에 닿을 수 있다. 영원이란 무한이다. 두려운 것은 알지 못하는 후세 사람들의 평가이지 당대의 영화나 고통이 아니다. 역사에 기록될 한 줄 이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고 자신의 일족과 가문마저 저버렸다. 역사는 변화를 기록하지만 그러나 변하지 않는다. 충성이란 결국 시대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게 된다. 충성과 역사,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 아니 충(忠)과 사(史)라는 두 글자를 통해 명분과 대의라는 고려말 사대부들의 서로 엇갈린 입장을 대변한다.
고려의 신하이기에 고려를 저버릴 수 없다. 고려에서 나고 자랐다. 고려의 은혜를 입었다. 고려의 사대부로써 고려조정에서 벼슬까지 살았다. 녹봉도 받았다. 남은의 말처럼 고려에서 지배계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려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조를 바꾼다는 것은 고려에 대한 배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심지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낙향한 사대부에 의해 성장한 사림들은 조정의 관료들에 대해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은 간신의 대명사가 되고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사대부들이 먹고 있고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났는가. 먹는 것은 땅에서 나왔고, 그 땅에서 농사짓는 것은 다름아닌 백성들이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백성이었다. 여염의 아낙들이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입을 옷을 지었다. 물론 모두가 그같은 이상에 불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방원(안재모 분)에게 계책을 주어 정도전을 죽이게 한 하륜(이광기 분)부터가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의 처조카였다. 일찍부터 개경에서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과 어울려다니던 이방원에게 새로운 나라 조선이란 정도전의 이상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고려말의 지배계급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지배계급으로 그 지위를 유지한다. 다만 그렇더라도 고려라고 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답답한 현실을 바꿔보고자 했던 의기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야말로 명쾌한 일갈이라 할 것이다.
"개혁을 믿는 자가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판도라의 상자 안에 온갖 불행들과 함께 희망이 들어 있던 이유였다. 차라리 희망조차 없다면 체념이라도 한다. 포기할 수 있다면 억지로 붙들고 있을 이유도 없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변화의 기회마저 빼앗아가 버린다. 끊임없이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섣부른 희망만을 부여잡고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치료할 수 없다면 받아들인다. 살아날 수 없다면 죽는 방법을 고민한다. 언젠가 쥐고 있던 그것을 손에서 놓아야 할 때가 온다.
희망을 말하는 정몽주를 바라보는 정도전의 표정이 묘하다.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희망을 보았다 했다. 자신이 돌아온 것으로 더이상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 말하고 있었다. 필사적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절망했으며 지옥의 끝에서 희망에 기대지 않는 계획을 홀로 세웠었다. 그리고 스스로 수라가 되고 야차가 되어 악귀와도 같은 그 길을 가려 하고 있다. 죽음의 저편에서 아직 산 사람을 보는 질투일까? 부러움일까? 아니면 비웃음이었을까? 그가 두고 온 것이며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미묘한 순간에 두 사람이 갈라선다.
확실히 이성계(유동근 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기까지 역성혁명에 뜻이 없었다. 이인임을 제거하며 최영과 함께 권력을 나눠가졌고, 최영의 실정이 기회가 되어 고려의 최고권력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우왕을 제거한 것은 우왕에게 반기를 든 이상 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우왕과 우왕의 자식인 창왕이 살아있는 한 이성계는 왕에게 창을 겨눈 반역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성계의 권력이 커짐에따라 그를 통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같은 꿈을 보다가 결국 갈라서고 만 이유였다. 서로의 꿈이 가리키는 그곳이 달랐던 때문이었다.
굳이 이인임의 몰락을 정도전이 주도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정도전이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주역이 된다. 그것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처음부터 역성혁명의 뜻을 품고 이성계에게 접근한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받아들인 것 또한 그같은 정도전의 의도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고자 했었다. 이성계의 야심이 아닌 시대가 그를 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몽주와 정도전을 이용한다.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모순된 이중적 심리를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보여준다.
고려의 신하로써 수문하시중까지 되었으니 고려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기왕에 고려의 최고권력자까지 되었으니 고려를 위해 마음껏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 보겠다. 정몽주가 그를 돕겠다 한다. 하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바로 정도전이 말한 고려라고 하는 괴물이다. 최영(서인석 분) 이후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하고 정적으로 맞서게 되는 조민수(김주영 분)이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고려의 구질서를 옹호하며 이인임의 복권을 꾀했다. 조민수와 함께 창왕마저 폐위시키고 새로이 왕위에 올린 공양왕 또한 그의 적으로 등장한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시점일 것이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죽이려 한다.
과연 권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한때 고려최고의 권력자였던 이로써 최소한의 체면조차 지키려 하지 않는다.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으며, 갖은 수모와 굴욕에도 비루하게 사정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권력을 놓게 되었을 때 그를 지금껏 지탱해오던 냉철한 판단력과 자제심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심지어 자신이 궁지로 몰았던 정도전에게까지 청탁을 넣으려 한다. 비로소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이인임은 원래의 자신을 되찾는다. 희망은 이인임을 자신을 놓아버리도록 만들었지만, 절망이 이인임을 다시 이인임이게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 독을 풀고 자객을 보내겠다. 조민수에 의해 이인임의 복권이 추진되고 이인임이 공교롭게 그 직전에 죽어버린 것에 대한 복선일 것이다. 대하드라마 '이인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성계 또한 고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벗어던질 것이다.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효웅의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악귀가 되어 고려를 물어뜯으려 하는 정도전의 눈가에 그늘이 짙다.
드라마의 백미일 것이다. 이성계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따르는 사대부들이 이성계의 집에서 술자리를 갖는다. 정도전과 정몽주가 각기 이성계에게 한 글자씩을 바친다. 백성이 먹고 살도록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니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중심을 바로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고려에 충성을 다하라. 고려말의 역사 그 자체일 것이다. 고려말의 사대부들과 이성계의 행보가 그 안에 다 담겨 있을 것이다. 작가에 감탄한다. 역사드라마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 역사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드디어 요동정벌이다. 최영으로서는 그리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0년을 이어오던 무신정권을 끝낸 것이 바로 몽골이었다. 몽골의 입장에서 왕이든 무신이든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하나면 충분했다. 무신들의 입장에서는 몽골의 압력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약화시키면 결국 자신들의 힘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도 그렇게 흘러갔다.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명은 우왕을 앞세워 무신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내려 할 것이다. 아무리 최영이라고 고작 5만의 병력으로 명으로부터 요동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손쉬운 강경론과 심사숙고하자는 신중론이 부딪힌다. 감정적으로는 전자가 더 통쾌하다. 지금도 그래서 요동정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후자는 답답하다. 비겁해보이고 한심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 전쟁은 항상 최후의 최후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할 수 없을 때 결정하는 것이다. 그 최후가 너무 짧다. 최영의 한계다. 무신의 한계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