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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2 - 당태종 마침내 고구려를 침략해 안시성 공방전을 벌이다!
- 수 양제 침공때 요동성 성주와 당 태종에 맞선 안시성 성주, 두 사람 이름은 알수가 없습니다 -
수나라 문제는 598년에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니 요동의 대홍수에 보급이 지체되고 전염병
이 도는데다가 수군도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니 철수했으며 수양제는 611년 113만 대군으로 침공
했으나 요동성에서 이름모를 성주에게 막혀 성이 함락되지 않자 30만 별동대는 살수대첩에서 패합니다.
수양제는 멉추지 않고 613년에 40만 대군으로 3차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고 얀현감의 반란으로 철수했으며, 4차 침공시 비사성을 함락
했으나.... 고구려가 망명해온 병부시랑 곡사정을 넘기니 체면은 세운지라 철수합니다.
618년 당국공 이연이 군벌들의 난립을 진압하고 당나라를 건국하였으니, 고구려-수 전쟁을 몸소
겪은 전쟁 영웅 고건무는 이전의 확장적인 대외정책을 지양하고, 아직 통일하기 전이라
일개 군웅이었던 당에 유화책을 취했으며 전쟁의 여파를 몸소 체험한 당고조 이연 역시
이에 맞춰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가진 패권을 인정하려는등 고구려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을 무찌르고 고창국과 토욕혼을 격파하여 서쪽과 북쪽 방면의 위협이 될만한
나라들을 모두 평정하자.... 동쪽 고구려 정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니 고구려에 대해 모욕적인
행위를 통해 기선제압과 굴욕을 강요하는가 하면...... 삼국의 대외정책에 간섭하거나 첩보
활동을 벌이는등 정벌을 위한 작업에 열중했으며 이때 고구려 주변 종속국들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고구려 영류왕(건무) 역시 이러한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고구려는 수나라
포로들을 당나라에 송환하기도 했으며, 동돌궐의 힐리가한이 멸망한 직후인
629년에 당에 봉역도(封域圖, 고구려 국내 지도)를 보내어 축하를 하는가
하면 641년에 고창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득고 당에 대한 의전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631년 7월, 당 조정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때 죽은 수군의 유골
을 수습하고, 고구려가 만든 경관(京觀)을 허물라고 강요하니 전쟁기념관 전승 시설의
철거를 강요받는 것은 명백하게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고구려는 굴복
하여 경관을 허물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나라의 위협을 느껴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640년에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냈으나 641년 5월에 당에서 직방랑중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했는데.... '직방랑중' 은 태자의 답례사라고 보기에는 낮은 직급인데다가 저 지위가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 이었습니다.
진대덕은 자신이 경치 좋은 곳의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피면서 정보를 모았으며 게다가 고구려의 관리들에게 비단을 뿌리고,
고구려 백성이 되어 살고있던 옛 수나라 출신 포로들을 위로하여 인심을 사는등으로 의심을 피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최고위직인 대대로(大對盧)가 말단 관리 진대덕의 숙소를 세번이나 찾아가는
등 위압을 느끼면서도 농락당하고 있었고 8월, 진대덕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봉사고려기 (奉使高麗記) 라는 제목으로 엮어서 보고하였으니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합니다.
당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여타 귀족들과 함께 견제하려고
하였지만, 이는 역으로 막리지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
했으니 이후 연개소문이 영류왕 등 100여명을 죽이고는 보장왕을 옹립하고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면서 고구려 - 당나라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됩니다.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동방정책에 제동이 걸린 당태종은 크게 분노했으니 당태종은
바로 고구려 정벌을 논의했지만 장손무기가 반대해 이루지 못했으며, 연개소문
은 국정을 장악하는 한편 백제와 왜를 통해 신라를 압박해 신라의 북진을 막아
남방의 양면전선 문제를 해결하고는 당과의 대전에 집중할 여건 조성에 나섭니다.
644년에 당나라는 동맹국 신라로 부터 고구려에 침공을 당하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사신이 오자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듣지 않았으며, 이 해에 연개소문은 군사를 보내 당나라의 영주
(유성)를 선제 공격하였고, 당에서도 장검, 이도종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탐했습니다.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 50명이 감금되는가 하면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 장엄 역시 토굴에
감금되니 이미 실질적인 전쟁에 돌입한 상황에서 사신의 교환은 요식이었습니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이고 막리지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가서 경략하려고 한다. 아들이나 손자가
따라가는 자는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며 포백과 곡식을 주었다. 군신들이 말리니
황제가 말하기를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좋지 못하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살육했고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당시 당태종은 후계자 책봉 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였으니 후군집(侯君集) 등의 원로
들이 죽었고,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이 셋째 이치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등 위풍당당한 당 태종의 이름치고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
에 시달렸었으며 현장 법사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입니다.
고구려 정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한번 세울수 있고, 유약해 보이는 셋째 이치가 계승자
가 된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적인 발판을 깔아줄수 있는 수단도 될수 있었으며
고구려 정벌에 나서서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하더라도 고구려의 이목을 끌어
한반도의 동맹국인 신라와 약속도 지키고 영향력도 커지는 일석이조인 상황이었습니다.
1차 고구려 전쟁 : 출정에 앞서 당 태종이 총애하던 재상 위징은 고구려의 기세가 만만치 않고,
수나라 역시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꺾지 못하였다며 원정에
반대하자 당태종 역시 의견을 받아들여 잠시 원정계획을 보류하였으나.... 위징이 사망한
이후에 원정을 말리는 이가 없게 되자 마침내 645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구려와 당나라는 644년부터 교전 상황이었으니 연개소문은 요서의 당나라 거점 영주를 공격
하는가 하면 신성을 거쳐 요서로 친정을 나온다는 첩보가 당나라에 입수되기도 했으며,
7월에는 당나라에서 영주도독 장검을 파견해 요동을 먼저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요하에 접근
하지 못했고 뒤이어 이도종이 기병을 이끌고 요하에 접근하다가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644년 10월, 당태종은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니 아무래도 전대 왕조인 수나라의 폭정 중에 하나가 불과
30년 전의 고구려 원정이었고, 그 때문에 고구려 원정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니 이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11월 형부상서 장량이 평양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되고 남부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0,000명,
수도 장안과 부수도 낙양에서 모병한 3,000명, 전함 500여척을 동원해 산동반도를 떠나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병부상서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0,000명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자신은 645년 2월 12일, 낙양을 출발하여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645년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장군 상하등과 강, 회, 영, 협 (江·淮·嶺·硤)
의 군사 40,000명·전선 500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을 부총관으로
삼아서 장군 장사귀 등과 보병, 기병 60,000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나가게 했다. 양군이
합세해 태종(太宗)은 6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149
또한 백제와 신라, 거란 등 여러나라에 당을 도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이 중 신라는
30,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황해도의 수곡성을 공격하는데, 백제는 신라군이 수곡성
을 공격하며 빈틈을 보인 사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는 도움이,
백제는 방해가 된다는걸 인식하고 백제대신 신라를 동맹으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수나라와는 달리 당나라는 총병력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당나라 10만 대군은 이세적이 이끌었던
요동도행군 6만과 장량이 이끌었던 평양도행군 4만 3천 이 둘만을 더한 숫자로 가장
무난한 견해로는 선발대인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을 합친 10만~ 십수만의 병력에 당 태종
의 친정군과 영주도독 장검이 이끈 이민족 부대가 합쳐질 것을 고려해서 30만 내외라고 봅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이세적의 요동도행군 60,000명에 장량의 평양도행군 43,000명으로 고구려
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고구려 원정군의 규모가 육군 10만에
수군 7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은 당태종의 친정군과 건안성을 공격한 장검의
이민족 부대를 고려하지 않고 선봉대로 볼수 있는 요동/평양도행군의 병력 수만 적혀있습니다.
당 태종의 친정군에는 장손무기와 유홍기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선봉대인 요동도행군과 황제
의 친정군은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크므로...... 태종의 친정군의 규모는
요동도 행군의 그것보다 훨씬 큰 십수만~수십만 대의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당군의 편제나 진용은 당나라의 대외 원정을 통틀어 봐도 최고의 호화진영
이자 최대 편제였으니 황제 이세민이 직접 친정군인 6군을 이끌었으며, 당나라의
6부 상서중 4개 상서가 참전하였고, 능연각 공신 11명중 5명이 전쟁에 참전하였음이
확인되며 이들 외에도 종3품~ 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이 다수 참전한 것 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갈수록 보급로 유지를 위해 경비병력이 대량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다
는 것 역시 당나라 장수들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거기다 행군도중 합류한 잔여
부대와 돌궐, 거란, 해 등 여러 이민족들이 합세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총 병력으로
볼수 있는 30만 이상 규모의 지상군을 당이 동원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군 총 규모를 30만 이상이라 해도 주요 점령지였던 요동성이나 개모성, 그리고 당군의 군량 수송로
에도 다수의 군사들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며, 당시 주필산 전투나 안시성 전투가 벌어질
즈음에도 신성과 건안성에 대규모 당군이 투입되어 전투가 벌어졌음을 고려하면 대군이라 여겨집니다.
수나라 때 동원된 113만명 규모의 절반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
을 위해서 주변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을 통제 복속시킨 것은 그만큼의 국경 안정을
추구하여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니, 토번이나 설연타에게 경고
했을 때의 100만 대군의 이야기는 허황된게 아니라면 그 절반은 동원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고구려는 주필산 전투 때 15만명이 야전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패해 대치상태에 있었던
점이나, 그외의 수차례의 수만명 규모의 병력 차출은 야전에서 고구려도 십만 이상
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음을 의미하니 적보다 우세하거나 대등하면 공세를 취하고
적보다 열세일 경우에는 방어를 취하는건 당시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군사학 입니다.
반면에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1차 전쟁에 참전한 당군의 행군총관 수가 40명 정도
이니 여수전쟁 당시 한 명의 행군총관이 1만명을 이끌었다는 기록을 보면 50만
이상의 지상군이 동원되었다고 주장은 무리가 있으니, 일단 행군 총관이 이끄는
1군의 병력이 당의 시대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라 10,000명이라고 한정하기도 힘듭니다.
김용만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와 제나라의 예에서 군의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하지만 바로 직전인
수나라의 군제만 봐도 1개 행군이 6,000여명이었던 적도 있고, 20,000명에 달하던 때도 있으며,
거기다 《이위공전서》에서 당의 군제는 1개 군이 20,000명인데 《당육전》에서는 5,000명을
넘으면 총관 1명이 배치되니 즉 5,000명 부터 1개 군으로 셀 수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안시성 전투때 토산을 쌓은 연인원이 50만이라지만 고구려군이 수성으로만 대처하지 않았고, 요동성
전초전이나 주필산 전투, 그리고 오골성의 글필하력 요격전등 다수의 야전도 치뤘으니 10만 정예병
이라고 몇개 성에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병력은 아니고, 각 성에서 보급선을 끊고 적군을 소모시킨후
주력병력을 진출시키는게 고구려의 전략이라 기존 전략에 비해 수세적인 전략을 펼치지도 않았습니다.
당군 50만설은 지나치게 많게 잡은 것으로 추측하니 당태종 직속 병력이 10만명이거나 아니면
원수정 초, 중기의 로마 제국이 군단병과 보조병을 나눈 것처럼 로마로 한다면 레기온에
해당하는 병력만을 기술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듯 한데, 현실적으로 '한번의
정복전쟁으로 고구려를 복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니' 개전 초기에 보였던 파죽지세의
모습은 심리적 공포를 활용해서 고구려가 스스로 굴복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645년, 마침내 당군의 선봉이 요서의 영주에 다다랐으니 영주에서 요동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 갈래로, 하나는 연군성(燕郡城), 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 하류를 건너
한(漢) 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 ─ 회원진(懷遠鎭)
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이며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
을 지나 신성, 현토성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니 당군은 이 세 길 모두 진격합니다.
수나라군은 전군이 중도를 취해 요동성을 공략한 뒤 곧바로 천산 산맥을 넘어 오골성을 공격하고
압록강으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요동성 공략부터 실패하자 모든
것이 꼬여 버렸는데, 그에 비해 당군은 요동평야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한 뒤 3군이 동시
침공한다는 방침으로 요하를 건너는 작전부터 세 방향에서 전개해 요동성을 삼면에서 압박합니다.
이세적의 선봉군은 중도를 취하는듯 하다가 방향을 틀어 가장 평탄한 북도로 움직여 요하를 건넜
으며 4월 1일 당군은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해, 이세적은 현도성(玄菟城)
을 부총관 강하왕 이도종은 병력 수천명으로 신성을 공격했는데... 신성 공략이 여의치
않자 일부 군사로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盖牟城)을 공격해 열흘
공격 끝에 함락시켰으며 개모성 전투에서 당나라 좌둔위 장군 강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당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이들이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길 청하자 당 태종은 그 병사들의 집이 가시성에 있는데, 만일 지금 내 부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 처자들이 모두 살해당할테니 그럴수는 없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었으니, 당태종
으로서는 인덕을 과시함과 동시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이곳을 근거지로 일부 군사들을 보내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과 맞서게 하여
동향을 견제하게 한 뒤, 5월 들어 주력군을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으며 영주도독 장검은 요하
하류에서 도하한 뒤, 거란족과 해족 등의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국내성에서 출발해 신성 방면을 거쳐 요동성으로 진격하는 고구려
지원군 40,000명을 10분지 1에 불과한 당군 기병 4,000명으로 저지하는 큰 성과를
이루었으며, 남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은 장검이 이끈 당군이 이미 건안성 등에
선제 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무렵 당 태종의 6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으니 요택은 진흙이
200리라 사람과 말이 모두 건너갈수가 없었으므로,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 동쪽으로 건넜는데... 당태종은 늪지대
를 통과하면서 한신 처럼 사용한 다리를 치워버려 배수진격으로 군대의 마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요동성 앞에 주둔해 있는 이세적의 군대 안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싸우자는 측과
당 태종의 주력이 도착한 후 싸우자는 주장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나 강하왕 도종은 속전을
주장했는데, 교전이 벌어지자 당나라의 행군 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이 패배했지만 도종과 이세적이 역습을 하여 고구려군이 패배하고 1,000명이 전사했습니다.
당태종의 본대가 도착해 요동성의 상황은 암울해졌으니 당태종은 속전을 한 강하왕 도종을 칭찬하고
도망친 장군예를 처형했고, 용감하게 싸웠던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를 중랑장으로 임명했으며
또 태종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성 가까이 와서, 흙을 지고 나름으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당나라
군이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북을 치며 고함을 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지경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군은 상황이 좋지않자 개국 왕이자 호국신이었던 추모(주몽)에게 미녀를 단장해
바치며 무당이 굿까지 해서 사기를 돋웠으나,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군는 포거(抛車)로 큰 돌
을 3백 보까지 멀리 날리는 포격을 가해 성 안을 타격했으며 남풍이 불자 당군의 정예병력이
달려들어 성 내에 불까지 번졌고, 난장판 속에 마침내 기회를 잡은 당군이 요동성내로 진입합니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마침내 요동성은 무너졌고, 이 전투에서 죽은 자가
10,000여명이었으며 또한 포로가 된 병사가 10,000여명에 민간인 남녀가
40,000명이고, 양곡이 50만석이었으니 수양제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이토록 허망하게 불과 10일 만에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요동성을 함락시킨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연개소문이 오골성
의 군대를 내보내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나라 장군 글필하력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지만, 그러나 백암성 성주인 손대음
(孫代音)이 당나라의 군세가 거대함을 알고는 두려워하다가 결국 항복하면서 백암성은
함락당하며 또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장량도 요동 반도 남단에 있는 비사성을 함락시킵니다.
이렇듯 당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등 4개의 성을 격파하면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하루이틀 만에 전광석화처럼 전장을 옮기며
들이치던 개전 때에 비해 요동방어선을 돌파하거나 평양을 향해야하는 수군의
활약도 사라진채 32일 동안 단지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에 접근하는데 그쳤습니다.
이때 연개소문은 대군을 보내 당나라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니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 남부욕살 대형 고혜진 등이 지휘하는 말갈병이
포함된 15만 대군은 안시성 외곽에 도착해 사방 40리에 뻗친 장엄한 진용을 갖추었습니다.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황제가 되었으니 한 시대
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수 있다."《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조정의 영수 답게 노회한 인물인 대대로 고정의는 당나라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해야한다고 했으나 당태종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탓인지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 작전에 따르지 않았으니, 고연수는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외곽 40리에 진군했고
곧바로 다시 안시성 외곽 8리까지 진격해 당나라가 도발삼아 보낸 돌궐 기병
1,000명을 격파하자 고연수 및 고구려군은‘다루기 쉽다’라며 기세가 올랐다고 합니다.
이에 강하왕 이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다는 안을 제시
했으니 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000명.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수 있습니다." 라는게 도종의 주장이었는데 하지만 당 태종은 모험책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때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 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고, 당태종이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자 고연수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에 자만하였다고 하니.... 손자 병법에는 무지했던 듯 합니다.
태종이 밤에 문무백관을 불러, 몸소 지휘해 이적의 욱기(勖騎) 15,000명을 적의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예병 11,00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여 산의 북쪽
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등뒤를 치고, 태종은 스스로 기병(會騎) 4,000을 이끌며 고각(鼓角)
과 치를 숨기고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봉우리 위에서 달리기로 하였습니다. 《책부원귀》 권 116
이세적, 장사귀 등은 서쪽에 진을 쳤고, 장손무기와 우진달 등은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동쪽, 혹은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이세민 본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으니...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고자 합니다. 《자치통감》 권198, 정관 19년 6월 22일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대) 은 고구려군에게 제압 당하였고, 태종이 흑기
(이세적의 대장기) 를 살펴보라 명하였는데.... 척후병이 흑기가 포위되었다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수당가화(隋唐嘉話)上, 中華書局 10~11쪽
6월 22일, 날이 밝으면서 전투가 시작되니 고연수가 이세적을 먼저 깨트리느냐 이세민이
먼저 고연수의 후미를 쪼개느냐.......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진은 고연수군의
돌격에 밀리다가 마침내 사방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으니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말갈 기병의 칼날이 이미 당태종의 본진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태종은 갑자기 장손
무기의 군대가 나타나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하였으니 예상치 못한 당군의 출현에 고연수 등이 크게 놀라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하고 진이 어지러워졌고 번개가 쳐서 당군의 위세를 도왔습니다.《책부원귀》 권116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친위대까지 위태로우니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이세적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보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고연수군의 후미에 쐐기를
박는 것이 먼저였으며 그리고 이세민이 이끈 친위기병 역시 고연수의 군대를 갈랐습니다!
흰 옷에 화극과 화려한 화살통을 무장한 무사가 천둥 번개와 함께 무쌍을 찍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가 바로 설인귀였으며.... 이 틈을 타 모루의 역할에 성공한
이세적의 부대가 역습에 나섰고, 고연수의 군대는 셋으로 쪼개져 당나라군에 대응합니다.
이때 당군은 출구 쪽을 비워 고연수군이 퇴로를 찾아 몰리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이를 따라
36,800명 잔군을 거느리고 탈출햇으며 10,000에서 20,000에 이르는 고구려군이 전사
하였는데.... 비명과 통곡이 산골짜기를 메우고 개울이 붉게 물들었으며 뼈와 창검이
쌓였다고 하니 고연수는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당나라군은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합니다.
고연수를 비롯한 고구려군 37,000여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
지만... 당군이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으니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500여명이었고,
말갈 병사 3,300여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으며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노획한
말만 5만여필이나 되었으니 15만 고구려군이 3분지 1에 불과한 5만 당군에
완패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은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집니다.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 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위정(韋挺)은 개모성에 주둔할 것을 명 받았는데, 개모성은 신성과 인접한 곳에 있어 온종일
전투소리가 들렸고.... 이에 그는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구당서》 위정전(韋挺傳)
장손무기가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
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이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으나 삼국사기에 신성과 건안성 전투가 언급되니
위 기록을 보면 이 두 전투 역시 양측 모두 주필산 전투에 버금갈 정도로 대군을 동원한
중요 전투였음을 알수 있으니,《구당서》 위정 열전에는 신성 바로 밑에 있는 개모성에
주둔하던 위정이 신성에서 들려오는 양군의 북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입니다.
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에게 가로막혔을 때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평양을 직공
하자는 강하왕 도종의 간언을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주둔한 고구려의
10만 대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두 전투에서 고구려는 성을 잘 지켜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하 하류에 위치한 건안성 역시 영주도독 장검이 이끄는 이민족 부대의 공격과 비사성을 함락한
장량의 평양도행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평양도행군이 당나라 본군과 보조를 맞춰 고구려
영내로 진입하는것을 막아내는데... 645년 4월, 장검의 이민족 부대는 요하 하류에서
도하하여 7월에는 건안성을 공격해 고구려군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전투들의 의의는 큰데 요동 방어선 북단의 요충지 신성이 건재함에 따라 고구려는 신성-남소성
-국내성으로 이어지는 요하 상류에서 자유롭게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당군은 안시성-오골성-평양성으로 이루어지는 진군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 것입니다.
건안성 역시 장량의 평양도행군을 격퇴해 요동 방어선이 구축된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고구려의 계획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실제로 당나라 본대가 안시성 공략에 애를 먹는 8월
중순, 오골성을 공격하자는 항복한 고연수의 제안을 이세민이 수용하지 못한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위치하며 당군의 진격로를 끊임없이 위협한 10만 고구려군 때문이었음이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것은 신성의 함락 유무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한데
1, 2차 전쟁 당시 당군에게 함락되지 않았던 신성은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는 3차 전쟁때
결국 함락되게 되는데, 이것은 당나라가 3차 침입 개전 초인 667년 2월부터 신성을
함락시키는 667년 9월까지 7개월 동안 신성 하나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활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당나라가 1, 2차 침입 때와 달리 3차 침입 때는 개전직후 신성을 바로 공략한 점, 나아가
무려 7개월 동안이나 신성 공략에 매달린 점 등을 볼 때 당나라가 1, 2차 전쟁의 패배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신성 함락 실패에서 찾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다른 말로 고구려를 멸망
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성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그들 스스로가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50여일 시간이 지난후 본격적으로 안시성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백암성을 함락한
직후 당태종은 안시성과 건안성 가운데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를 의논했는데... 당태종은
연개소문도 못 넘은 성이니 치지 말고 건안성을 먼저 쳐서 자연스럽게 고립시키자는 말합니다.
당태종의 의견에 대해 이적은 안시성에서 배후 기습이 우려되니 건안성을 치기 전에 안시성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 의견대로 당태종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으니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하게되자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성주가 늙고 겁이 많다는 이유로
오골성을 칠 것을 제안했고, 당의 제장들도 오골성을 쳐서 평양으로 직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평양을 직공한다면 곧 건안성,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에서
공격하거나 보급로를 끊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안시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
으니.... 당태종이 '진왕 이세민' 으로 불리던 시절 천책상장(天策上將) 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세민이 그만큼 큰 군공을 크게 세웠다는 것이니 진왕은 이 시절 가장 즐겨썼던 전법이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우선 수비를 굳게하여 버티다가 이후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군의 보급로를 우회 타격해
와해시키는 전법이었으니, 본인이 가장 즐겨썼던 전략인 만큼 가장 경계할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는데... 당연히 격퇴되었지만 화가 난 당 태종은 "성을 함락시키면
성안의 모든 사내를 죽여버리겠다." 라는 불필요한 말을 하여 오히려 안시성의 저항
의지만 돋워 버렸다는데 이러한 일이 당군의 전황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도종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토산을 쌓을 것을 명령하여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으니.... 한때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는데 이때
안시성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이 허물어진 토산으로 진격하여 이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철군하는데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과 부복애가 허술히 관리하여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여 책임
을 묻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 태종은 이도종이 요동에서 싸울때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으므로 그럴수 없다며 이도종을 용서해 주었지만 부책임자인 부복애는 즉각 처형했습니다.
당군과 안시성 성주 간의 전투는 치열하여 당태종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허황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며... 한편 안시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삼국사기》
의 저자 김부식은 슬프게 여겼다고 전해지니 "총명하고 세상에 다시 나오기 힘든 당태종을 물리
치다니 성주는 호걸로 보통이 아닐텐데 이름이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또 그 전에 수양제의 113만 대군의 침공에 3개월이나 버텨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동성주의
이름은 누굴까요? 모릅니다! 성주 이름을 모르니 장수들의 이름도 전혀 모르며 그후 당태종
의 30만 대군을 맞아 힘들게 싸운 요동성주나 또 안시성을 사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주
의 이름은 누굴까요? 역시 장수와 성주의 이름은 모르니.... 이게 한국 역사학계의 현실 입니다?
요동성주 이름은 모르지만 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 이라구요? 그럼 梁萬春 입니까? 아니면
楊萬春 입니까? 고려 중엽인 1145년에는 멸망한 나라인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서가 전해
지지 않으니 김부식은 주로 중국 역사서에서 한국 관련 부분을 추려서 삼국사기를 쓴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고조선은 물론이고 3국시대 초기에도 글자가 없는지라
기록 자체가 있을수가 없는데... 훗날 침략국으로 우리와 원수지간인 중국에서 한자가 단편적으로
전해지니 적국의 것이라 뜨악해 쉽게 보급되지 못하다가... 중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
백제의 백제본기와 신라 후대에 국사가 편찬되었다지만 고려로 전해지지 못하고 불타 없어졌습니다.
통일신라가 고구려사나 백제사를 편찬해 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유학자 최치원이 왕에게 대책을 올리는
등 분투했으나 무시당하고 지방 군수로 쫃겨나니 실망해서 가야산으로 숨어들었듯, 유학을 천시한지라
편협했던 탓인지 그런 아량은 없었으며 자기나라 “국사” 조차도 고려로 전하지 못한 나라가 신라입니다?
안시성주 이름은 조선 중기까지도 모르다가 임진왜란때 참전한 중국 병사가 말해주어 알았
다는 얘기와 그 15년 전에 명나라에 사신을 갔던 사람이 듣고 왔다는 말도 있는데....
안시성 전투 909년 후인 1553년 명나라 웅종곡(熊鍾谷) 이 편찬한 『당서연의(唐書演義)』
라는 소설책 속에 안시성주 이름이 ‘양만춘’ 으로 나온답니다? 당시대도 아니고 천년
이나 지난 후에, 역사서도 아니고 소설가가 쓴 소설책에 나오는 지어낸 이름인 것입니다?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은 탓에 예상외로 요동에서 싸움이 장기전이 된 채로 당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가게 되는데..... 여기에 당나라의 후방 지역인 몽골 초원의 튀르크계 설연타 역시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지라 후방이 불안하니 결국 당태종과 지휘부는 철군 하기로 결정 합니다.
조금 멀지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요하 하류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을 통하여 장안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3일이면 주파할수 있는 길을 놔두고 굳이 그 몇배의 시일과 공력이
소요되는 늪지대 요택을 택했으니.... 고생은 둘째 치고 보급마저 끊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당나라 병사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살아서 돌아간 이는 소수였다고 하니
당 태종 본인도 이런 식으로 늪을 지나 돌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때 이세민이 몸소 풀을 베고 수레를 밀며 흙을 나르는등 당군의 철수 과정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
이었는지를 보여주며 심지어 본인도 도중 등창에 걸려 죽을고비를 넘겼다는데, 당 태종은 일찍이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자치통감에서는 고구려 성 10개를 공취하고, 고구려군 40,000명 정도를 전사시켰으며 민간인 포로
18만에다가 군량 62만석 이상을 노획하고, 죽은 당나라 병사는 수륙군 도합 2,000명, 말은 열에
7~ 8마리가 죽었다 라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경미한 피해만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측의 기록대로라면 당군의 피해가 2,000명 정도로 경미하고, 교환비가 20~40 배가
넘으니 이것만 본다면 중원 통일시절의 전공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으니 이후에
반전 논의가 나올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 고연수 역시
고구려를 배신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화병으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 중국에서는 황제라도 자신의 통치에 대해 쓰여진 실록을 볼 수 없었으나 당태종은 자신의 치세에
쓰여진 실록을 보려고 고집했고 실제로 봤으며 내용을 고치기도 했다는데,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서전에 당군에 비해 훨씬 더 압도적이었으나 1년 동안 병력의 30% 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저곳의 파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당나라 지휘부의 피해 역시 의외로 적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주필산 전투에서 좌무위 장군 왕군악은 참살, 개모성 전투에서 좌둔위 장군 강확은 사살, 백암성
전투에서 저격당한 우위 대장군 이사마는 당해년도에 사망, 우효위 대장군 계필하력 역시 창에
맞아서 생사의 문턱을 오갔으며 요동성 외곽 전투에서 장군예는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애매한 참언으로 엮어서 죽인 평양도행군 대총관 장량은 차치하더라도 부대총관
좌난당은 사망하고, 수군총관 장문간 역시 최소한 위장군급 인사인데 패전의
책임으로 참수당하는등 수군 역시 좋은 꼴을 보지 못했고, 평양도행군 행군총관
구효충은 아예 실종되었으니...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철수할때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연개소문에게는 의복과 활, 화살
등을 선물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무시하고 사례하지 않았으며, 후에 그가 보낸 서신은
내용이 궤탄하고 당나라를 침입할 뜻이 있어 이세민으로 하여금 분노하여 단교하게 했다고
하며 이후 이세민은 장안으로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올리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합니다.
주필산 전투후 당나라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곧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당군이 패퇴해서 철수하자 고국을 버리고 투항했던 일을 크게 후회하였으니, 결국 고연수
는 이 일로 상심하다가 화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살아서 당 태종을 따라 장안에 도착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정도 화려한 진용으로 대외원정을 나간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더군다나
대륙과 북방을 평정한 당태종 생애 이토록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는 전무했으니, 이렇게
패배해 구사일생에 가까운 귀국길로 인해 당태종은 임종 직전 후계자인 당 고종에게
고구려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옷과 활을 개소문에게 선물하였는데, 사신을 보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깎고 받지 않도록 하였다. 신당서 고려전
646년 5월 보장과 개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미녀 2명을 바쳤으나 돌려 보냈다.
646년 6월 개소문이 비록 사신을 보내 국서를 주었으나 그 내용은 모두 터무니없는 것들
이었다. 그는 당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했으며 항상 국경의 빈 틈을 노렸다. 여러
차례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는 침공하고 능욕함을 멈추지 않았다. 자치통감 당기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으나 비참함을 느낀 쪽은 언제나 이세민이었으니
연개소문은 당을 침공할 뜻을 내비치면서 고압적으로 대했고, 계속해서 신라도 공격
하였는데 당은 쉴 틈도 없이 병사들을 징발하여 설연타의 20만 기병과의 전쟁에 돌입합니다.
이세민은 이치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심신이 무너져 있었으나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은 계속
되었고 새로운 공략법을 입안하기에 이르러....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이 명을 받아 출동하는데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년 사이에 천리가
매우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이반할 것이니 압록강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략은 60여년 전에 수나라가 남쪽 진(陳)나라를 칠 때 쓴 계책이니 업성 위지형의 반란을 꾀로서
진압했으며 정벌시 행군원수장사가 되는 고경(高熲)은 수문제에게 간언하기를.... “진의 수확기에
군대를 징발해 진을 습격할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 적은 병력을 징발하느라 수확기를 놓칠것입니다. ”
“진(陳)의 대병력이 모이면 우린 철수하는 것이니 이렇게 몇차례를 반복하면 으례 그러려니
하면서 익숙해질 때 우리는 진짜로 병력을 집중하여 진에 대한 토벌에 나섭니다!
또 강남의 땅은 얕은 편이라 갈대나 대나무로 창고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니 몰래
간첩을 진(陳) 나라로 잠입시켜 바람 부는 것을 살펴 저장물에 불을 지르기를 반복합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결국 패해서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당나라로 잡혀가는 것도 그 원인은,
기원전 280년 타렌툼의 구원요청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군에 연전연승하고도 결국
철수한 에페이로스 왕국“피로스왕의 승리”처럼 수나라 문제의 1차 침략부터 무려 70년간
고구려는 수나라 또 당나라와 싸우면서 지칠대로 지쳐 국력이 모두 소진된 결과라고 봅니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병력 만명을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또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을 부총관으로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들어
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